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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유대-로마 전쟁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파일:투명.png로마의 대외전쟁파일:투명.png파일:라바룸.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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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포에니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png 카르타고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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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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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셀레우코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마그네시아 전투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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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타니아 전쟁 파일:external/a352ddf511b96cba04fbaa172c0df140c9cb8c8ae188ad8ddda8a5c3a3eae004.png 루시타니 부족연합
누만티아 전쟁 파일:external/b66a81d7e3c5440cfef450e3309a2b4b425f1dcd788e510bd84b747e2e2573be.png 아레바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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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8.png 폰토스 왕국 · 파일:SoundCloud82837371853.jpg 아르메니아 왕국
갈리아 전쟁 파일:attachment/mon_256_11.png 갈리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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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메나헴 벤 유다†
파일:external/www.monuments.com/menorah.png 엘르아살 벤 야르†
병력 최대 5개 군단 60,000~80,000명[1]최대 25,000명[2]
피해 최소 10,000명 전사35,000~ 50,000명 전사[3]
민간인 수십만 명 피살[4]
결과 로마 제국의 승리. 예루살렘의 파괴.

1. 개요2. 배경3. 경과
3.1. 확산되는 반란3.2.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3.3. 예루살렘 공방전
4. 결과

[clearfix]

1. 개요


AD 66~73년,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하려는 유대인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은 여러번 있지만 흔히 '유대 반란'이라고 하면 바로 이 1차 유대-로마 전쟁을 의미한다.[5] 그만큼 규모도 크고 당대에 끼친 영향력도 컸기 때문에 '유대 대반란'이라고도 일컬어진다.

2. 배경

기원전 63년 폰토스 왕국미트리다테스 6세를 무너뜨린(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쇠락해진 셀레우코스 제국을 합병하는 등 지중해 동부 일대의 질서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때 하스몬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던 유대 왕국안식일을 지키느라 경계가 해이해진 틈을 타 예루살렘을 무혈 점거한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으로 유대 왕국이 일시적으로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봉신이 되었지만,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의 활약으로 파르티아군이 격파당하면서 로마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이 전쟁의 여파로 하스몬 왕조의 대가 끊기자, 로마는 헤로데 대왕을 유대의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헤로데는 다윗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야곱)의 후손도 아닌 유대교로 개종한 에돔인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정통성이 매우 떨어졌고[6] 정적이 즐비했다. 그는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하스몬 왕조의 공주였던 마리암과 결혼하고, 정적들을 가혹하게 숙청하는 동시에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해 유대를 잘 다스렸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이 증축되었고, 수도 시설과 헤로데 왕궁이 예루살렘에 건설되었으며 마사다 요새를 정비하고 카이사레아와 세바티아(옛 사마리아)를 건설했다. 그의 치세때 유대는 번영을 구가했지만 그 혜택은 온전히 고위 성직자와 귀족, 엘리트 계층만 누렸고 평민 및 하층민들은 무거운 과세에 신음했다. 또한 유대교 원리주의자들은 헬레니즘에 흠뻑 빠진 세태에 반감을 품고, 메시아가 도래하여 세상을 정화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해주길 갈망했다.

그러던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사망했다. 그가 왕비로 삼았던 마리암과 두 아들 알렉산드로스 및 아리스토불로스 4세는 왕위를 넘본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후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안티파트로스 2세가 왕위계승권자가 되었으나 그 역시도 찬탈을 의심한 헤로데 대왕에 의해 처형되었다. 결국 남은 이는 네 번째 부인에게서 난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그리고 다섯 번째 부인에게서 난 헤로데 필리포스 2세 뿐이었다. 왕위는 아르켈라오스가 물려받았고, 안티파스가 갈릴래아와 페레아[7]를, 필리포스가 골란 고원과 베타니아,[8] 트라코니티스[9]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몰래 로마로 사절단을 보내 헤로데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받아들여 헤로데의 세 아들들에게 '왕'이라는 칭호 대신 '통치자'라는 칭호만 내렸다.

이에 격분한 아르켈라오스가 로마에 사절로 파견된 유대인과 그 일가족 3,000여 명을 대량 학살하자 로마는 이를 빌미로 그를 폐위시키고 유대 및 사마리아를 '유다이아 속주'로 삼아 행정장관들이 황제를 대리하여 다스리도록 했다. 대신 나머지 지역은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이 계속 맡도록 했다.

그러나 유다이아 속주에 부임한 행정장관들은 대체로 사익을 챙기려 들었고, 유대인들은 이로 인해 막중한 과세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그리스인과 유대인간의 해묵은 종교 갈등에 대해
"야훼만이 진정한 신이고 나머지 신은 가짜"
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고깝게 여겨 그리스인 편을 자주 들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에 점차 반감을 품게 되었고 유다이아 속주의 정세는 갈수록 불안해졌다. 각지에서 폭동이 종종 일어났고, 수많은 예언자가 출현하여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자칭 메시아가 나타나 민중을 선동했다.[10] 여기에 열심당원들은 로마에 영합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암살과 테러를 자행했다. 이들은 단검을 숨긴 채 살인을 저지르고 종적을 감추곤 했기에, '단검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시카리'(Sicarii)로 불렸다.

그러던 66년, 마음속에 로마에 대한 불만을 간직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폭발하는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유다이아 행정장관이었던 케시우스 플로루스는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카이사레아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리스인들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고무된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을 때 죽은 새 몇 마리를 회당 입구에 있는 작은 화분 위에 던졌다. 이에 유대인들은 플로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회당을 부정하게 만든 그리스인들을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절단은 8달란트를 뇌물로 줬지만 플로루스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유대인 사절단을 감옥에 가두었다.

플로루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네로 황제로부터 돈을 더 보내라는 요구를 받은 그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17달란트를 빼냈다. 이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분노하며 성전에 모여들어
"카이사르"
를 연호하고, 플로루스의 학정에서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아우성쳤다. 일부 과격한 사람들은 플로루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 한편,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서 거렁뱅이가 된 사람을 위하여 구걸하듯이 플루루스를 위해 구걸했다. 그러자 플로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해 3,600명을 죽이고 유대인이었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을 채찍으로 때린 뒤 잔혹한 십자가형에 처했다. 로마 시민권자들은 십자가형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학살 사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를 놓고 대립했다. 사두가이파를 비롯한 온건파는 로마 황제에게 플로루스의 만행을 보고하여 처벌받게 하고, 좀더 부드러운 행정장관을 보내달라며 요청하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열심당원 등 강경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전쟁도 불사하자고 주장했다. 급기야 66년 7월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났고, 예루살렘의 로마군 수비대가 포위당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년 로마 황제와 로마 백성을 위해 황소와 어린 양 2마리를 바치는 것을 중단하고 안토니아 망대와 연결되는 회랑을 끊어버리자, 갈릴리 북쪽 지역의 왕인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들어와 질서를 바로잡고 주민들에게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여러분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댔지만 그 중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대는 첫 번째 이유는 총독들의 행패가 너무 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권세를 잡은 자들을 격동케 하지 말고 그 앞에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적은 일로 이들을 크게 비난한다면, 그들이 여러분의 적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그들은 은밀하게 여러분을 해하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노골적으로 여러분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행동은 부질없는 역효과만을 낼 뿐입니다. 핍박을 인내로 참아내는 것만큼 핍박의 강한 힘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결은 없습니다. 박해를 당하면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면 박해를 가하던 자들도 싱거워져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게 마련입니다.

로마 총독들이 여러분들에게 말도 못할 정도로 잔인했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로마인 전부가 여러분을 해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더구나 이제 여러분이 싸움을 걸려고 하는 카이사르가 여러분을 괴롭힌 것은 더욱 아니잖습니까?[11] 그렇다고 일부러 악한 총독을 보낸 것도 아니잖습니까? 서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동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소식을 듣는 일조차 그렇게 용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인 한 명 때문에 수많은 로마인과 싸움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작은 문제 하나로 그토록 막강한 민족과 대결을 벌이려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모한 일입니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여러분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선전포고한다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평을 늘어놓는 그런 비리들은 조만간 고쳐질 겁니다. 한 총독이 영원히 우리를 지배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후임 총독엔 온유한 사람이 올 겁니다. 그러나 한 번 전쟁을 시작하면 쉽사리 그만 둘 수 없으며, 피해를 보지 않고서는 끝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온 세계가 굴복하는 로마 제국을 섬기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는 민족은 오직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여러분이 신뢰하는 군대는 어떤 군대입니까?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무기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로마의 영해를 장악할 수 있는 선단은 어디 있습니까? 전쟁을 끌고 나갈 비용은 어디에 비축되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집트인이나 아라비아인들과 전쟁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로마 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여러분은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지 한번 따져본 적은 있습니까? 여러분의 군대가 인근 국가의 군대에게 별로 진적이 없는 걸 믿는 것입니까? 그러나 로마군은 상황이 다릅니다. 로마 제국은 전세계의 어느 군대도 당해낼 수 없는 천하 무적의 군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은 지금도 현재의 변경을 넘어 새로운 영토를 찾고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 유프라테스 강, 북쪽으로 도나우 강, 남쪽으로 리비아, 서쪽으로 카디스[12]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영토를 찾아나섰으며, 마침내는 이전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브리타니아에까지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상황이 이와 같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여러분은 갈리아인보다 부유하며, 게르만인보다 강합니까? 아니면 헬라인(그리스인)들보다 지혜롭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모든 사람보다 많은 백성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로마 제국에 대항하려는 겁니까? 누군가가 노예 생활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해 아래에서 가장 고귀한 민족이라는 헬라인보다 더 견디기가 힘든 것은 아니잖습니까? 헬라인들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살면서도 로마인들의 여섯 묶음의 매 앞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보다 자유를 요구할 정당한 이유가 더 많은 마케도니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아시아의 500여 개 도시들의 경우는 또 어떻습니까? 그들도 한 총독의 말에 복종하며 집정관의 매질 앞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중략)
여러분은 혹시 원군이라도 얻어 놓았습니까?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어떤 지역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이라도 한 것입니까?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 내의 모든 민족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니 이들에게서 원군이 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혹시 유프라테스 강 건너 아디아베네[13]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여러분을 도우러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이 정당한 이유도 없는 전쟁에 끼어들어 고생을 자초할 리도 없지만, 설사 그렇게 하려고 마음 먹는다 하더라도 파르티아인들이 가만 놔둘 리가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파르티아인들은 로마인과의 평화 조약을 지키는 것을 최대의 현안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통제 밑에 있는 자들이 로마 정부에 대항하려고 진격하는 것을 방치해 두고서 로마와 맺은 언약을 지켰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최종적으로 남은 하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로마 제국의 편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야 어찌 로마가 그토록 광대한 제국을 건설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로마와 전쟁을 하게 되면 여러분이 그토록 지키려고 힘쓰는 종교적 풍습을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자들과 전쟁을 하더라도 종교적 풍습을 제대로 지키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리게 만들어 놓고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가정해 봅시다. 안식일을 지키느라고 그 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폼페이우스에 의해 여러분의 선조가 당했듯이 손쉽게 로마군의 손에 함락당하고 말 것입니다. 폼페이우스가 여러분의 선조들이 안식일만 골라서 맹공을 퍼부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율법을 범하게 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러분이 전쟁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중략)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처자들을 직접 죽이고 이 찬란한 영광의 도시를 불사르지 않고 망설이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그 누구에게도 패배당하는 치욕은 당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폭풍이 몰아닥칠 것이 예상되면 태풍 속으로 항해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었기 때문에 불행을 당한 사람은 마땅히 동정을 받을 수 있으나, 파멸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속으로 뛰어든 사람은 욕만 얻어먹게 될 것입니다. 마치 협약을 맺듯이 전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십시오.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로마군에게 진압당하게 되면 그들이 온유한 태도로 대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다시는 그 어떤 나라도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표본으로 여러분의 거룩한 도시를 불사르고 전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중 일부가 전쟁에서 살아남더라도 숨을 곳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사람이 로마군에 굴복하여 그들의 말에 복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거주하는 여러분 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도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나 여러분과 운명을 같이하는 유대인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때문에 적들이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에서는 여러분 소수 때문에 엄청난 살육이 자행될 것이며, 유대인을 살해한 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설령 유대인들이 적에 의해 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자들을 향해 무기를 든다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의 처자식이 불쌍하지 않다면 여러분의 이 거룩한 예루살렘과 그 거룩한 성벽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 성전과 성소와 그 거룩한 기구들을 소중히 하십시오. 만일의 경우 예루살렘 시가 다시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들은 성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절제하고 참아온 것에 대한 보답이 반역으로 나타난 것에 분노를 품고 성전에 손을 댈 것입니다. 나는 이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의 천사들과 이 나라에 맹세코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나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여러분과 내가 모두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나, 만일의 경우 여러분이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내 충고를 뿌리친다면, 여러분 스스로 화를 재촉하는 것이며, 더 이상 나에게 책임이 없습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유대인들은 아그리파스 2세의 간절한 호소에 마음을 달리 먹고 회랑을 재건하면서 로마 제국에 바칠 세금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카이사르(황제)가 후임 총독을 보낼 때까지 플로루스 총독의 명령을 들으라고 아그리파스 2세가 충고하자, 유대인들은 격분하여 아그리파스 2세에게 돌을 던지며 예루살렘 밖으로 추방했다. 결국 아그리파스 2세는 설득을 포기하고 갈릴리로 돌아온 뒤 무력으로 반란을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이에 열심당원들이 마사다 요새를 급습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로마군 병사들을 모조리 살해했고, 대제사장이었던 하나니아 벤 네데바이의 아들인 엘르아살 벤 하나니아가 제사장들을 설득해 외국인을 위한 희생 제물이나 예물은 받지 않도록 했다. 이리하여 제1차 유대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3.1. 확산되는 반란

66년 9월, 갈릴리에 돌아온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는 2,000명의 기병을 파견해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7일 동안 양자간의 피비린내나는 접전이 벌어진 끝에, 마사다 요새에서 무기를 확보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열심당원들이 가세하면서 아그리파스 2세의 기병대가 패퇴했다. 폭도들은 대제사장의 집과 아그리파스 2세 및 베레니케의 궁전을 불태웠다. 한편 예루살렘에 주둔한 로마군 수비대의 지휘관이었던 메틸리우스는 도시를 자유롭게 통과하는 조건으로 항복했지만, 엘르아살은 약속을 무시하고 유대교로 개종한 메틸리우스를 제외한 모든 로마군 병사를 학살했다.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을 장악한 반란군은 곧 엘르아살과 열심당원들의 지도자였던 메나헴 벤 유다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얼마 후 메나헴이 살해당했고 열심당원들은 예루살렘에서 축출되었지만, 두 파벌 사이의 내전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 무렵,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유대 반란 소식을 듣고 18,000명의 군대를 이끌며 시리아의 수도인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카이사레아와 야파를 공략하고 8,400명을 학살했으며, 다른 도시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내고 예루살렘으로 남하했다. 그러다가 게바 전투에서 아디아베네에서 온 유대 병사 500명에 의해 강화된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끄는 유대 반란군과 교전해 500명의 병사를 잃었다. 66년 10월 초 예루살렘에 도착한 갈루스는 몇년 전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예루살렘의 북쪽 절반 주위에 쌓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제3 성벽을 통해 도시에 들어갔다. 반란군이 성전으로 후퇴하자, 갈루스의 로마 군단병들은 성전 벽을 무너뜨리고 성전 문을 불태우려고 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갈루스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후퇴하는 로마군을 추격했고, 베트 호론에서 기습해 6,000명의 로마군을 죽였다. 갈루스는 짐과 공성 무기를 전부 내팽개치고 안티오키아로 달아났으며, 제12 풀미나타 군단은 군단기를 잃어버렸다. 이후 저명한 많은 유대 지도자들이 로마 제국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그곳에 남기로 한 자들은 자체적으로 정부를 결성하고[14] 전 대제사장 아나누스 벤 아나누스를 지도자로 선출했으며, 요세푸스 벤 구리온과 여호수아 벤 감라는 군대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이들은 세 번째 성벽을 완성하고 각지에 여러 인사를 보내 반란군을 조직하도록 했다. 반란군은 아스클론을 공격하면서 여러 마을을 약탈했지만, 아스클론 시 공략엔 끝내 실패했다. 아스클론 시내의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집단 학살했다.

아스클론 공략에 실패한 뒤, 유대 반란군은 자신들이 확보한 지역을 요새화하여 버티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요셉 벤 맛다디아는 갈릴리와 골란 계곡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요셉 빈 시몬은 여리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엘르아살 아나니아는 예수 벤 사파스와 함께 에돔의 공동 지휘관을 맡았으며, 므낫세는 페레아 방면을 맡았고, 요하난 벤 하나니아는 고프나와 아카베타 방비를 맡았다. 이중 갈릴리로 간 요셉 벤 맛다디아는 훗날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로 알려지게 된다. 요세푸스는 병사들을 로마식으로 훈련시키고 여러 도시 주변에 성벽을 쌓는 등 준비를 착실하게 했지만, 기스칼라의 요한과 허구헌날 대립해야 했고, 끝내는 암살 위협까지 받았다.

3.2.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

한편, 그리스에서 열린 올림피아 제전에 참석했던 네로 황제는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접하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30번의 전투를 벌이고 20개 이상의 도시를 공략하는 등 탁월한 군략을 선보인 베스파시아누스를 유대 반란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장남 티투스를 참모로 삼고 진압에 나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프톨레마이스에 5개 군단 60,000명 내지 80,000명을 집결시켰으며[15], 파르티아 제국의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는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동생인 티리다테스가 선임되는 걸 받아들인 네로에게 보답하고자 40,000명에 달하는 궁기병을 파견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67년 봄, 갈릴리로 진군하여 요세푸스가 이끄는 반란군을 여러 번 격파했고, 요세푸스는 잔여 병력을 이끌며 갈릴리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도시였던 요타파타로 피신했다. 이후 47일간의 공성전에서 로마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베스파시아누스 본인도 발에 화살을 맞기도 했다.[16] 그러다가 유대인 탈영병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보초가 자고 있는 때를 알리게 되었고, 로마군이 그때를 맞춰 급습하면서, 요타파타 요새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요세푸스와 40명의 동포들은 동굴로 피신한 뒤 제비를 뽑고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다. 요세푸스는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술수를 부렸는지 최후까지 살아남은 두 사람 중 한 명이 되었고, 남은 한 명을 설득하여 로마군에 항복하게 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앞에서
"당신은 로마 황제가 될 것이다."
라고 예언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는 일단 그를 포로로 잡아둘 뿐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후 로마군은 서기 67년 말까지 원정을 지속하여 요파, 티베리아스, 타리케아이, 그리고 가말라를 공략했다. 갈릴리 호수에서도 로마군과 반란군이 수상전을 벌여 반란군이 대패했다. 갈릴리 정복이 완료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이사랴와 스키토폴리스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한편 요세푸스와 함께 로마군을 대적했다가 패퇴한 기스칼라의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도주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열심당원들은 이미 성전을 점령하고 파니아스라는 경쟁적인 대제사장을 선출했다. 기스칼라의 요한은 열심당원들에게 다른 대제사장인 아나누스와 친구들이 예루살렘을 로마인들에게 넘겨주려 한다고 거짓으로 밝혔다. 이에 열심당원들은 분노하여 예루살렘의 남쪽 구역인 이두마에아에서 봉기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전역에서 유혈극이 벌어졌고, 아나누스는 죽임을 당했으며 그 시체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하지만 기스칼라의 요한은 곧바로 열심당원과 결별한 후, 자신만의 정당을 결성해 대립했다.

예루살렘에서 유혈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저들이 자기들끼리 죽이도록 내버려둬라"
라고 하며 예루살렘 공격을 최대한 늦췄다. 그는 예루살렘 주변의 지역들을 천천히 공략하며 유대 반란군을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그러던 68년 6월 9일, 네로 황제가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자 자살했다. 황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스파시아누스는 군사 활동을 중단하고 후임 황제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후 로마 정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노령의 갈바와 젊은 오토가 잇따라 제위에 올랐다가 피살당했다. 뒤이어 제위에 오른 비텔리우스는 지극히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행보를 보였고, 그에게 반감을 품은 도나우 강 전선의 로마군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에 베스파시아누스는 비텔리우스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로마로 향했고, 장남인 티투스가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네 황제의 해).

3.3. 예루살렘 공방전

"이제야 고향의 재난에 두 손을 들었느냐? 너희들은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리고 너희들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가늠해보지도 않은 채 오로지 광기에 사로잡혀 동족과 예루살렘성전을 멸망으로 몰아넣었으니, 이제 너희들도 죽임당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일찍이 폼페이우스에게 정복되고 지금까지 너희는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해왔고, 마침내 아주 노골적으로 로마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토록 자신만만해 했던 이유가 과연 너희들의 많은 인원수 때문이었느냐? 허나, 실상은 로마군의 극소수 병력만으로도 너희를 상대하기엔 충분했다. 아니면, 너희가 믿었던 것은 동맹국들이었느냐? 허나, 우리 제국 밖에 있는 어떤 종족이 로마 편이 아닌 유대인의 편에 섰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너희들의 신체가 강인하다고 믿었던 것인가? 하지만, 저 게르만인들조차 우리 로마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강력한 성벽을 믿었는가? 그렇다면, 저 거대한 대양(大洋)보다도 큰 장벽이 있을련지 생각해보라. 대양에 둘러싸인 브리타니아인들도 로마군에게 정복되었다. 뛰어난 전략과 영리한 지도자를 믿었는가?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지략이 뛰어난 카르타고인마저 우리에게 굴복했다. 그렇다면, 결국 너희들은 우리 로마의 관용을 빌미삼아 감히 전쟁을 시작했다고밖엔 볼 수 없다.

우리는 너희가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배려했고, 동족 가운데 왕을 뽑아 세워주었다. 그리고, 너희 조상들이 율법을 준수할 수 있도록 존중했으며, 너희 동족만이 아닌 이방인과 함께 살면서도 너희가 바라는대로 율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했다. 너희들한테 베푼 가장 커다란 관용은 너희들의 신(神)에게 제물을 바치고, 예물을 수집하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이다. 덕분에 너희들은 부유해졌고, 그 돈으로 우리와 전쟁을 벌일 군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특권을 누리던 너희가 그것을 허락한 우리에게 오만방자하게 등을 돌리고, 친절을 베푼 우리에게 마치 독사처럼 독을 뿜어댄 것이다. 너희는 아마 네로를 무능하다며 경멸했을 것이다. 마치 몸 속에 잠복해있다가 병이 악화된 후에나 뚜렷이 드러나는 금이 가고, 찢어진 상처처럼 여태껏 잠잠히 지내다가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야 본성을 드러내어, 감히 어림도 없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욕심을 부렸다.

나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너희를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나의 아버지가 너희 유대인들을 모조리 파멸시킬 계획이었다면, 즉시 이곳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기부터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는 갈릴리와 근방 지역부터 먼저 공략하며 너희에게 다시금 숙고할 여유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너희는 우리가 약해서 호의를 베푼 것이라 착각하고, 우리들의 관대함을 핑계삼아 무모한 짓을 계속 벌였을 뿐이다. 네로가 죽자, 너희는 가장 비열한 악당이나 할 만한 짓을 저질렀다. 우리 제국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나와 내 아버지가 이집트로 떠난 상황을 이용해서, 너희들은 전쟁 준비를 했다.

우리 부자(父子)가 전쟁 지휘관이었을 때, 너희들에게 큰 아량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제 (로마 제국의) 통치자의 반열에 오른 우리에게 염치없게도 반역을 꾀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나와 내 아버지가 제국을 위기로부터 구해내고, 안정을 회복하자 다른 종족들은 축하 사절을 보내왔건만, 너희 유대인들은 또다시 우리를 적대시하였다. 너희는 유프라테스 건너편에 있는 자[17]에게 반역을 선동하고, 요새 성벽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소요를 조장시키고, 명예욕에 사로잡힌 폭도들끼리 서로 내란을 일삼고는 마침내 모든 유대 땅에서 전쟁을 도발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극악한 자들이나 저지를 법한 일이다. 나는 내 아버지가 마지못해 내리신 막중한 명령을 수행하고자, 몸소 이 도시로 왔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이 평화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선, 나는 매우 기뻤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너희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설득했다. 또한, 너희가 전쟁을 시작하자 일부러 장기전을 계획하며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도망쳐나온 자들에겐 자비를, 나한테 피신해온 자들에겐 내 이름으로 안전을 보장했다.

우리는 사로잡힌 포로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포로를 학대하는 로마 병사에겐 엄한 조치와 벌을 내렸다. 너희들의 성벽을 부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성무기를 사용했지만, 너희들을 학살하려는 살기(殺氣)로 가득찬 내 부하들을 자제시켰고, 승리를 거둘 때마다 내가 패배했는 것 마냥 먼저 너희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성전 가까이 접근한 후에도 전쟁 법칙을 무시하면서까지 나는 너희 성소(聖所)와 성전을 보존해야 한다며, 거듭 너희에게 호소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자유로이 성지(聖地)를 떠날 기회를 주며 목숨을 보장했고, 너희가 원한다면 다른 곳에서 전투를 하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 모든 제안을 무시한 채, 너희 손으로 직접 성전에 불을 질렀다.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른 너희가 이제와서 나와 협상을 하겠다? 이미, 무너져버린 것 이외에 구할 만한 건덕지가 과연 남아있단 말인가? 성전은 벌써 무너져버렸거늘, 너희들 스스로를 위해 지킬 것이 무엇이 남아있다는 것인가? 그래, 불행을 자초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지금도 여전히 무기를 움켜쥐고, 극한 상황속에서도 전혀 뉘우침 없이 선처를 바라고 있구나! 대체, 무엇을 믿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너희 동족은 살해당했고, 너희 성전은 무너졌으며, 너희 도시는 나한테 정복당했고, 너희 목숨은 내 손에 달려있지 않은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영웅적인 행동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그런 너희들의 광기에 맞장구쳐줄 생각이 전혀 없다!"[18]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티투스는 요세푸스의 예언이 옳았다고 믿으며, 그를 석방시킨 뒤 귀한 대접을 해줬다. 이후 예루살렘으로 진군한 그는 4개 군단 중 3개 군단을 도시 서쪽에 배치했고, 제4 군단은 도시 동쪽의 올리브 산에 배치했다. 이 무렵 예루살렘 내부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시몬 바르 기오라, 기스칼라의 요한, 엘르아살이 각각 세력을 갖추고 내전을 벌였다. 그러다가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그들은 비로소 공동 전선을 결성하여 로마군에 대항하기로 했다.

시몬은 10,000명의 신봉자들을 이끌고 상 도시와 하 도시의 일부를 통제했다. 요한의 추종자 6,000명은 성전과 안토니아 요새를 담당했으며, 엘르아살과 그의 열심당원 2,400명은 요한에게 협력했다. 반란군은 올리브 산에 단독으로 주둔하여 주둔지를 건설 중이던 제4 군단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 광경을 목격한 티투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달려와 반란군의 측면을 요격했고, 반란군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방비가 굳건한 걸 보고 공격을 감행했다간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을 예상했다. 이에 요세푸스를 보내 수비대에게 항복을 권하게 했으나, 수비대는 단호히 거부했다. 다음날, 많은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나와 로마 제국을 따르겠으니 자신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길을 안내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로마 군단병들이 그들을 따라 성문 쪽으로 이동했지만, 유대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자신들을 공격하자 겁에 질려 도망쳤다. 이 일로 예루살렘 수비대는 사기가 올랐고, 티투스는 이에 격노하여 군단병들을 집단 처형하려고 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티투스는 몇몇 측근과 함께 성벽을 조사하고 포위 공격을 계획하고자 예루살렘 주변을 돌았다. 그들이 평화 제안을 논의하기 위해 성벽에 다가갔을 때, 화살이 한 장교의 어깨에 박혔다. 이에 화가 난 티투스는 공성무기를 제작할 목재를 대량으로 모으게 하고, 공성병들에게 제3의 성벽 서쪽 부분에 언덕을 쌓도록 했다. 또한 군단병들은 공성추를 가지고 성벽을 들이쳤으며, 75피트 높이의 두 탑을 쌓고 탑 꼭대기에서 성벽 위의 적군을 향해 돌, 다트, 화살을 발사했다. 특히 로마군 포병대의 포격이 성벽 돌파에 크게 기여했다. 로마군 포병은 거리를 정확하게 재어 노포와 투석기로 포격했고, 예루살렘 수비대는 그 살인적인 화력 때문에 성벽 위에 서 있을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19] 15일 동안 이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제3의 성벽이 허물어지자, 수비대는 두 번째 성벽으로 후퇴했다. 로마군은 외곽 성벽을 모조리 허물고 예루살렘 북쪽에 진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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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공성하는 로마군

하지만 에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성전과 안토니아 요새를 둘러싸고 있었다. 안토니아 요새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고, 자체 성벽도 있었다. 로마군은 두 번째 성벽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고, 4일만에 무너뜨렸다. 하지만 티투스는 가능한 한 많은 도시 구역을 보존하고 싶었기에 성벽을 그대로 두도록 했다. 반란군 지도자들은 이를 틈타 좁고 낯선 거리에 있는 로마군을 기습 공격하여 두 번째 성벽을 탈환하고, 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많은 군단병이 부상을 입었지만, 티투스가 급파한 궁수대가 화살비를 퍼붓자 물러났다. 군단병들은 그 틈에 후퇴할 수 있었고, 며칠 후에 두 번째 성벽을 재 공략한 뒤 완전히 허물었다.

티투스는 반란군에게 자신들이 처한 곤경을 생각할 기회를 주고자 며칠간 포위를 완화했다. 그러면서 로마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군대 전체를 이끌고 예루살렘 주위를 행진하도록 했다. 요세푸스는 성벽 근처를 돌아다니며 이제 그만 싸우고 항복해야 성전을 지킬 수 있다고 호소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반역자로 경멸하며 그의 간청을 또다시 무시했다. 이에 로마군은 공성전을 이어가기로 하고, 17일 동안 4개의 언덕을 쌓았다. 그 중 2개는 안토니아 요새 근처에 있었는데, 기스칼라의 요한과 부하들은 지하 터널을 뚫어서 두 언덕 아래까지 파고든 뒤, 언덕을 지탱하고 있는 목재 기둥에 불을 붙였다. 이로 인해 두 언덕이 무너졌고, 그 위에 있었던 공성 무기들이 모조리 파괴되었다. 2일이 지난 후, 횃불과 칼을 든 3명의 유대인이 다른 두 언덕의 공성 기계를 공격했다. 그들이 화살 세례를 피해 붙을 붙이는 데 성공하자, 이에 용기를 얻은 다른 반란군이 합류했고, 공성무기와 언덕은 결국 불길에 휩싸였다.

졸지에 4개의 언덕이 전부 파괴되자, 티투스는 충격을 받고 전쟁회의를 소집했다. 일부 장교는 전군을 총동원해 공격할 것을 권고했고, 일부는 언덕을 재건하자고 제안했으며, 다른 장교들은 그대로 포위한 채 반란군이 굶어죽게 만들자고 주장했다. 티투스는 고심 끝에 세 번째 안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예루살렘 주변에 성벽을 건설하여 적의 출입을 방지하게 했다. 로마군은 단 3일만에 4.5마일에 달하는 성벽과 13개의 요새를 완성했으며, 안토니아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4개의 언덕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몇몇 유대인은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이때 어떤 이들은 금화를 삼켰다가 예루살렘 밖으로 나온 뒤 배설물에서 금화를 주웠다. 이걸 본 시리아인 보조병들이 탈출한 사람들을 붙잡아 배를 갈라서 동전을 찾았다. 티투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시리아인 보조병들을 교수형에 처해 누구도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얼마 후 언덕 공사가 완료되자, 로마군은 공성용 숫양을 앞세워 공성전을 벌였다. 오랫동안 이어진 혈전 끝에 성벽이 무너지자, 수비대는 또다른 성벽을 세워 대항했다. 그러나 2일 후 로마군이 야밤을 틈타 성벽을 조용히 올라 잠자고 있었던 보초병들을 베어 죽인 뒤 안토니아 요새를 공략하고 성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격노해 로마군을 상대로 미친듯이 달려들었고, 로마군은 안토니아 요새를 사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티투스는 요세푸스를 다시 보내 기스칼라의 요한에게 성전을 보존하기 위해 전장을 예루살렘 밖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기스칼라의 요한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투는 곧 재개되었다.

로마군은 안토니아 요새를 경유하여 성전을 공격했지만, 6일 동안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성벽을 기초부터 허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사다리를 올려서 성벽 위로 올라가려는 시도 역시 격퇴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성전은 서서히 불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안토니아 요새에 인접한 바깥 뜰의 북쪽 경계에 있는 주랑을 불태웠고, 로마인들은 또 다른 주랑을 불태웠다. 그러다가 몇몇 로마 군인들이 불타고 있는 물건을 주워서 성전의 문과 창문으로 던졌다. 결국 성전은 화염에 휩싸였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티투스는 성전을 지키고 싶었기에 불을 끄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전투의 소음과 혼란 속에서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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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파괴된 뒤 희망을 잃은 유대 반란군들은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했고, 살아남은 예루살렘 시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성전의 보물들은 로마로 이송되었는데, 황금으로 된 메노라(일곱 가지 촛대), 진설병의 황금상 등이 이에 속했다. 이리하여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공략을 완료하고 로마로 귀환한 티투스는 황제가 된 부친 베스파시아누스의 주관하에 열린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을 위해 티투스 개선문을 세웠으며, 열심당원 지도자 시몬과 요한을 비롯한 700명의 유대인 포로들이 전리품 취급을 받은 후 포로 로마노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다만 기스칼라의 요한은 처형당하는 대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엘르아살 벤 야르가 이끄는 967명의 유대인들은 마사다 요새로 대피한 후, 게릴라전을 벌였다. 처음엔 로마군이 이들을 무시했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주변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하자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게 되었고,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가 이끄는 제10군단을 파견해 진압하도록 했다. 로마군은 3년 동안 힘겨운 공성전을 벌인 끝에 기어이 함락시켰고, 마사다 요새에 남아있었던 유대인들은 집단 자살했다. 이리하여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종결되었다.

4. 결과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 전쟁에서 비전투원까지 합산하여 1,100,0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죽었고 97,000명이 노예 신세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도망쳤다. 이 사망자 중 상당수는 로마인들이 가지고 온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요세푸스의 추산은 극히 과장되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마겐 브로시(Magen Broshi)에 따르면 고대 팔레스타인(여기서는 요르단 강 서안 전역을 가리킴)의 인구는 1,000,000명을 넘지 않았다. 매튜 화이트(Matthew White)에 따르면 1차, 2차, 3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총합 350,000명이었다. 다만 3차에 걸친 전쟁으로 로마 제국 동부는 물론이고, 심지어 고대 팔레스타인 인구 구성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정도로 유대인이 학살당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성직자들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에 유대인들은 문화와 종교를 지키고자 랍비와 유대 학교에 의존했고, 랍비가 전하는 교훈을 모은 《탈무드》는 유대교의 기둥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후에도 로마에 대한 저항을 이어나갔다. 115년 로마 제국이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혈안이 된 틈을 타 제2차 유대-로마 전쟁(키토스 전쟁)을 일으켰으며, 132년엔 바르 코크바가 주동한 제3차 유대-로마 전쟁(바르 코크바의 난)이 발발했다. 로마 제국은 이에 대응해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고,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꿨으며 그 지역에서 유대교를 믿는 걸 금지했다. 이에 많은 유대인이 지중해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디아스포라가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대 반란군이 참패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사건을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들의 죄의 대가이자 처벌로 보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평가였다.

그러한 시각을 보여주는 기록 중 하나로 시리아스토아 철학자인 마라 바르 세라피온(Mara bar Serapion)이 서기 73년 로마의 감옥에서 아들에게 보낸 권고와 경고들로 가득찬 편지글이 있고, 그 중 유대인 집단의 붕괴에 대해서 기록한 항목이 그 예인데,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여서 무슨 이익을 보았느냐?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길래 기아와 역병으로 대갚음을 당했느냐? 사모스 섬 사람들이 피타고라스를 불태워 온 나라가 한 순간에 모래로 뒤덮이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무슨 득이 있겠느냐? 유대인들이 현명한 왕(예수)을 처형하고 그때부터 그 나라를 빼앗겼으니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신께서는 그 세 현자들을 위하여 똑같이 복수를 행하셨다. 아테네 사람들은 굶주려 죽었고, 사모스 섬은 바닷물로 뒤덮혔으며, 유대인들은 살육당하고 자기네 나라에서 쫓겨나 여기저기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았다-플라톤 때문에, 피타고라스도 아직 살아 있다-헤라스타누에 때문에, 현명한 왕도 살아 있다-그가 준 새로운 율법 때문에".
라는 식으로 역사적으로도 반복되어 온 필연적인 수순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또한 유대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던 원시 기독교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대교와 결별하고, 다른 역사를 갖게 되었다. 애초에 예수를 메시아로 섬기는 것과 이방인에 대한 포교, 할례 대신에 물로 세례를 주는 등 여러가지 차이를 보이고 갈등하기 시작했으나,[21] 기독교인들이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방관한 것을 계기로 아예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1] 67~70년.[2] 66년. 유대 임시정부의 병력만 추산한 것이며, 농민 봉기군과 에돔인, 열심당의 병력은 제외함.[3] 전투원 합산[4] 자세한 논의는 '결과' 문단 참조.[5] 솔로몬 시대 때 완공된 후,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벽 한쪽만 남게 되는 것이 바로 이 1차 유대-로마 전쟁 때문이다.[6] 이런 이유로 많은 수의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헤로데를 유대인이 아니라, 외국인이 가짜 유대인 흉내를 낸다고 여겨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7] 현재 요르단의 요단 강 동쪽 계곡[8] 현재의 이스라엘 알에이자리아(al-Eizariya)[9] 현재의 시리아 라자트.[10] 신성성 여부와는 별개로, 훗날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아라 일컬어지는 나자렛 출신의 랍비 또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활동했다.[11]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에 죽었으므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일어난 시점에서는 이미 죽은 지 100년이 넘은 사람이었다. 여기서는 황제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12] 오늘날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항구도시. 로마 제국에서는 가데스(Gades)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지중해의 서단부를 일컫는 의미로 쓰였다.[13] 당시 파르티아 제국의 속국이었다.[14] 이 정부를 가리켜 보통 유대 임시정부(Judean provisional government)라고 한다. 단, 이것은 후대의 역사학자가 붙인 이름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정부를 일컫는 통일된 명칭은 없다.[15] 당시 로마군의 1/4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들 중에는 최정예인 제10군단도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전설적인 전공을 쌓았던 그 군단이 맞다.[16] 이때 로마군은 요타파타 요새의 유대인 수비대를 상대로 160문의 노포를 배치하고, 투석기도 동원하여 포격했다. 이 공격이 인상깊었는지 요세푸스는 저서에서 "불덩어리와 화살이 얼마나 우박처럼 쏟아지던지, 유대 병사들은 방벽 위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고 적었다. 요세푸스는 예루살렘 수비대를 대상으로 한 로마군의 포격도 기록했다.[17] 상술한 아디아베네의 유대인들.[18] 하지만 요세푸스가 쓴 《유대 전쟁사》를 보면, 로마군이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온갖 잔인한 학살들이 자세히 언급된다. 반란과 전혀 관련이 없는 유대인 1,200명을 로마군이 경기장에 모아놓고 모조리 죽이는 내용과 심지어 어린 아이들까지 로마군이 성벽 아래로 내던져 죽이는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다(...)# 굳이 아귀를 맞춰 설명하자면 이게 예루살렘 성전까지 군사 기지로 삼아 항전하다 예루살렘 도시는 물론 성전까지 모조리 파괴되어 버린 상황에서 잔당들이 항복하며 자신들은 사막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티투스가 "가긴 어딜 가? 니들이 우리한테 도전한 대가는 치르고 가셔야지?"라고 일축하면서 한 말이라서, 티투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항복하면 목숨 보장해 줄 것이고 정 원하면 예루살렘 외의 다른 데에서 전투하자고 했을 때에도 모두 무시해 버린 유대인들이 "항복하라고 할 때는 안 하고 끝까지 개기다 다 망해놓고는 이제와서 우리한테 목숨 구걸하냐?"라고 냉소할 수밖에 없다.[19] 처음에는 유대 지방의 돌을 깎아 투석기로 날렸는데, 이 돌의 색깔이 희어서 멀리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수비대 관측병들은 포탄을 보고 다른 동료들에게 경고할 수 있었다. 그러자 로마군은 포탄에 아예 역청을 칠해서 멀리서 포탄을 볼 수 없게 했다고 한다. 수비대는 반란 초기에 로마군 군단으로부터 노획한 중장비로 대 포병전을 시도했으나 수비대 포병의 기량이 로마군 포병보다 훨씬 떨어졌으므로 전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20]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휘통제체계가 무너질 정도의 난전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상황 자체가 로마군이 유대인들을 압도적으로 몰아붙이던 상황이라 그 정도로 로마군이 수세에 몰린 상황은 아니었다. 또한 소화 명령을 수행할 예비대가 없어야 성립되는 말인데 앞서도 말했듯이 예비대가 전부 소모되었을 정도로 불리하지도 않았고, 또한 전투 지역이 성전 일대라는 좁은 지역으로 한정된 상황에서 전 병력을 투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리고 전투의 소음과 혼란 속에서 아무도 티투스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요세푸스는 어떻게 그런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겠는가? 전투 이후에 티투스가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들은 소화에 최선을 다했다' 라는 발표를 했고, 티투스의 입장을 옹호해야 했던 요세푸스가 이를 비판 없이 기록했거나 혹은 이와 유사한 목적에서 요세푸스가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21] 대표적으로 바울로가 회심하기 전에는 유대교인으로서 기독교인 탄압에 앞장선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