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코트니차 전투 영어: Battle of Klokotnitsa | ||
시기 | 1230년 3월 9일 | |
장소 | 불가리아 제2제국 클로코트니차(현재 불가리아 남부 하스코보주) | |
원인 | 불가리아 제2제국을 제압하여 후방의 안전을 도모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는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불가리아 원정.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 [[틀:깃발| ]][[틀:깃발|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 | ]][[틀:깃발|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 ]][[틀:깃발| | ]][[틀:깃발| ]][[이반 아센 2세| ]]
병력 | 1만 5천~8만명[1] | 1만~2만 5천명[2] |
피해 | 전사자 불명 포로 2만명 | 미미함. |
결과 | 불가리아 제2제국의 승리. | |
영향 | 테살로니카 제국의 몰락과 불가리아 제2제국의 발칸 반도 패권 확보. |
[clearfix]
1. 개요
1230년 3월 9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이자 테살로니카 제국의 초대 황제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와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맞붙은 전투. 불가리아 제2제국이 이반 아센 2세의 치하에서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전투이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부흥 세력 중 가장 강성했던 테살로니카 제국은 이 전투 한번에 최전성기에서 몰락으로 직행했다.
2. 배경
1204년 동로마 제국이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무너지고 라틴 제국과 테살로니카 왕국,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 등 라틴계 국가들이 발칸 반도 각지에 수립된 이래, 발칸 반도의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처음에는 라틴 제국이 발칸 반도의 패자로 군림하는 듯했으나, 1205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의 군주 칼로얀에게 참패하고 초대 국왕 보두앵 1세가 잡혀 죽으면서 기세가 꺾여버렸다. 칼로얀은 기세를 이어가 라틴인들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쳐들어가 많은 도시와 마을을 공략했다.그러나 칼로얀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민을 무참히 학살했고, 이에 반감을 품은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은 라틴 제국에 충성을 바쳤다. 칼로얀은 1207년 7월 테살로니카 왕국의 보니파초를 기습해 죽여버린 뒤 테살로니카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던 중 그해 10월 돌연 사망했다. 그 후 보릴이 칼로얀의 미망인 데시슬라바와 결혼하여 차르가 되었다. 하지만 보릴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으며, 특히 이반 아센 1세의 작은 아들인 이반 아센 2세를 차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었다.
이에 보릴은 이반 아센 2세를 죽이려 했고, 이반 아센 2세는 쿠만족의 땅으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키에프나 할리치로 도피했다. 보릴의 친동생 스테즈는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보릴은 세르비아 왕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스테즈를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스테판은 거부하고 스테즈에게 프로세크 요새 수비를 맡겼다. 여기에 보릴의 또다른 친척인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로도프 산맥의 체피나 성에서 독립했다. 1208년 5월, 보릴은 위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트라키아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자 라틴 제국 황제 앙리가 요격에 나섰고, 그해 7월 8일 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했다. 보릴은 타르노보로 철군했고,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앙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사이, 세르비아 왕 스테판 네마니치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서 스트루마와 바르다르 강 사이의 땅을 점령했다. 스테판은 스테즈에게 점령지를 다스릴 권한을 넘겨주면서도, 세르비아군은 그곳에 남겨뒀다.
1209년 초, 테살로니키 왕국의 지배를 받던 세레스의 그리스 시민들은 멜니크의 보릴 휘하 사령관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앙리 황제가 먼저 움직여서 추종자를 그곳의 통치자로 삼았다. 보릴은 이에 대응해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동맹을 맺어서 라틴 제국에 대항했으며, 스테판 네마니치에게 등을 돌린 스테츠와도 화해했다. 1211년 4월, 보릴은 테살로니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던 앙리 황제를 잡기 위해 산악로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그러나 앙리가 이를 간파하고 인근 라틴 요새에서 군대를 모아 역습을 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스테즈가 테살로니키 왕국을 침략했다가 이피로스가 라틴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그의 영지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위기에 처하자, 그는 동생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1211년 초여름, 보릴과 스테즈 형제는 비톨라 근처에서 테살로니키-이피로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그해 10월 테살로니키를 포위공격했으나, 알렉시오스 슬라브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철수했다.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불가리아군을 추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뒤이어 멜니크를 공략했다.
보릴이 이렇듯 패전을 거듭하자, 보야르들은 1211년과 1214년 사이에 비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외부의 도움 없이는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언드라시 2세는 페체네그로 구성된 부대를 앞세워 구원군을 파견해 비딘을 공략하고 그에게 넘겼다. 이렇듯 내우외환이 심해지자, 그는 라틴 제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마침 앙리 황제도 불가리아와 평화를 맺고 니케아 제국과 전쟁을 재개하고 싶었던 터라 협상이 진행되었고 앙리는 칼로얀의 딸 마리아를 후처로 들이는 조건으로 종전을 하는데 합의를 봤다. 이로서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한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건국자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1214년 후반 또는 1215년에 암살당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이복동생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에게 직위를 넘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테오도로스는 니케아 제국의 건국자 테오도로스 1세 휘하에서 많은 군공을 세우고 중요한 직위에 올라 있었다. 테오도로스 1세는 그가 이피로스로 떠나는 걸 허락했지만,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피로스에 도착한 그는 자기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먼저 세르비아의 제타를 공략하려던 선임 군주 미하일 1세의 계획을 취소하고,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어 북쪽 경계의 안전을 확보하기로 했다. 동생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가 1216년 세르비아 군주 스테판 네마니치의 자매 중 한 명과 결혼했고, 1219년에서 1220년 겨울 그의 맏딸 안나가 세르비아 왕자 스테판 라도슬라프와 결혼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매우 가까워졌다.
이리하여 북쪽 국경지대가 안전해지자, 그는 본격적으로 영역 확장을 개시했다. 1217년까지 오흐리드, 프릴레프, 그리고 스트리몬 강 연안의 펠라고니아 평원 지대 대부분을 장악했다. 또한 데메트리오스 코마티아노스를 오흐리드 대주교로 선출했다. 코마티아노스는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니케아 제국이 아닌 이피로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다만 세르비아 군주 스테판 2세가 오흐리드 대주교가 전통적으로 관할하던 세르비아 교회를 독립시키는 걸 허용해서, 그와 대주교간의 마찰이 빛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여 마케도니아 북부까지 이르자, 멜니크의 통치자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자기까지 공격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의 아내의 조카와 결혼하기로 했다.
1217년 초, 라틴 제국의 새 황제 피에르가 프랑스에서 기사 160명과 기병 5500명을 이끌고 출발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도착한 뒤 베네치아가 본래 가졌어야 할 영토였지만 이피로스 초대 군주 미하일 1세에게 빼았겼던 디라키움을 탈환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4월 브린디시에서 출항한 피에르는 디라키움에 상륙하여 공성전을 벌였다. 그는 디라키움을 함락한 뒤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테살로니키로 진격하여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를 탈취하려 했다. 그러나 디라키움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고 사상자가 늘어나자, 피에르는 포위망을 풀고 테살로니키로 진군했다. 그러나 지형이 무척 험난하고 지역 주민들이 적대해서, 피에르의 군대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테오도로스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피에르와 맞서기 전, 교황 특사인 조반니 콜론나와 협의해 가톨릭 교회의 우월성과 라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제5차 십자군 원정에 피에르가 참여하는 걸 돕는 대가로 지지를 약속받았다. 그는 이 사실을 피에르에게 알리며, 음식을 제공하고 안내인을 보내주었다. 피에르는 이 뜻밖의 도움에 크게 기뻐했고,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라틴군이 경계를 풀고 있던 날 밤, 그는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피에르, 콜론나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귀족이 포로로 잡혔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이 소식에 격분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테오도로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으며, 그에게 별도로 서신을 보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1217년 말 십자군 원정을 위한 첫번째 파견대가 안코나에 집결했고, 베네치아 역시 이에 가담할 기미를 보였다. 이에 그는 1218년 3월 교황에게 사과하고 콜론나를 풀어줬다. 그러나 피에르와 여러 귀족은 감옥에 계속 갇혀 있다가 옥사했다.
테오도로스는 뒤이어 동생 콘스탄티노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아이톨리아와 아카르나니아의 총독으로 임명해 남쪽 국경지대를 지키게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테네 공국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네오파트라스와 라미아를 탈환했다. 이리하여 안전을 완전히 확보한 뒤, 테오도로스는 본격적으로 테살로니키를 향한 공세를 개시해, 1218년 플라타몬 요새를 공략하여 해상 보급을 차단한 것을 시작으로, 테살로니키 주변의 요새를 하나씩 공략했다. 1221년 말 세레스를 공략하면서,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사이의 육로 보급망을 끊었다. 호노리오 3세는 이에 대응해 테오도로스를 파문하고 십자군 단행을 명했지만, 십자군은 테살로니카로 진군하던 중 전염병 창궐로 인해 쇠진해지다가 테오도로스의 급습으로 궤멸되었다. 결국 테살로니카 수비대는 1224년 12월 테오도로스에게 항복했다.
이로서 동로마 제국의 제2의 도시로 손꼽히는 테살로니카를 공략한 테오도로스는 즉위식을 거행한 뒤 테살로니카 제국의 황제를 칭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부활시키겠다는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는 테살로니카를 수도로 삼고 궁전을 건설했으며, 형제 마누일과 콘스탄티노스를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또한 이피로스로 피난한 옛 동로마 귀족 가문 후손들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니케아 제국의 요안니스 3세는 그를 이피로스와 테살로니키의 통치자로 인정해줄 테니 황제 즉위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로마인의 바실리오스"라고 자칭했다. 이후 양자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1225년 봄, 그는 크리스토폴리스, 크산티, 그라티아노폴리스, 모시노폴리스, 그리고 디디모티콘 등을 공략하면서 마케도니아 동부와 트라키아 서부 일대를 확보했다. 니케아 제국은 이에 맞서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민들의 구원 요청에 응해 군대를 파견하여 라틴 제국군을 축출하고 도시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는 즉각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고, 주민들은 결국 테살로니카 제국에게 투항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육지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된 테오도로스는 장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한편, 불가리아에서는 1218년 이반 아센 2세가 신망을 잃은 보릴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축출한 후 새 차르로 즉위했다. 아센은 먼저 적을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1218년 말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가 제5차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귀환길에 올랐다. 언드라시 2세는 보릴을 후원했기 때문에, 보릴을 축출한 그와 갈등을 벌일 소지가 있었다. 그는 우선 군대를 이끌고 언드라시 2세의 앞을 가로막고, 그의 딸 마리아를 자신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헝가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1221년 헝가리가 점령하고 있던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불가리아에게 돌려줬다. 이후 1221년 새로 선출된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가 프랑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자, 그는 불가리아 영토를 지나가게 해줬고, 극진한 대우를 해줬다. 그 덕분에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의 관계는 로베르의 통치 기간 동안 화목했다.
아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동생 마누일 두카스와 자신의 딸 마리아를 결혼시켰다. 1228년 로베르가 죽고 11살 된 동생 보두앵 2세가 즉위했다. 아센은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고 싶었기에 딸 엘레나를 보두앵 2세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으며, 이피로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그가 라틴 제국을 흡수해버릴 것을 경계해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센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시일을 끌다가 장 드 브리엔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자마자 섭정으로 내세웠다. 아센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교를 가톨릭에서 정교회로 바꾸고 테살로니카 제국과 연합해 라틴 제국을 공동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불가리아와 손을 잡으면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한 테오도로스는 1229년 말 테살로니키에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한 뒤 1230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런데 그는 돌연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기록상으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데, 아마도 아센이 지난날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어서 자신을 견제하려 했던 전력이 있었으니,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치르는 동안 아센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으니 먼저 손보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여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전진했다. 이에 아센은 20,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격을 개시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반 아센 2세는 창끝에 테오도로스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호방위조약서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발칸 반도의 패권을 건 양자의 대결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1230년 3월 9일, 불가리아군과 테살로니카 제국군은 콜르코트니차 마을 인근에서 마주쳤다. 테오도로스는 아센이 이렇게 빨리 대응할 줄은 예상 못했기에 깜짝 놀랐지만, 적의 숫자가 수천 명 밖에 안 된 걸 보고 즉시 전투를 벌이기로 했다. 그는 가족과 친지들을 진영에 남겨둬서 전투를 구경하게 한 뒤, 친히 대군을 인솔하여 강을 도하해 건너편의 적을 쳐부수게 했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많은 병사가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죽거나 익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고, 강을 건넌 후에도 진형을 정비할 틈도 없이 적의 맹공을 받아 전투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이 때, 사전에 숲속에 숨어있던 쿠만 기병 1,000명이 전투가 무르익을 때 튀어나왔다. 그들은 강 건너편의 적 진영으로 돌진하여 순식간에 제압하고 불을 지른 후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 광경을 목도한 테살로니카 제국군은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강을 도로 건너 도망치려 했으나 적군의 추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그 과정에서 테오도로스와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비롯한 수뇌부와 대다수 병력이 사로잡혔고, 테오도로스의 형제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와 소수의 군대만이 전장에서 탈출했다. 이리하여 클로코트니차 전투는 불가리아군의 압승으로 종결되었다.
4. 이후
이반 아센 2세는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둔 뒤 평화 협약을 어기고 침략한 죄를 물어 테오도로스를 실명시키고 타르노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한편 포로로 잡은 약 2만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아무 조건없이 즉시 석방하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민심을 확보했다. 이후 그의 군대가 이피로스 영토를 침공하여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프릴리프, 세레스, 아드리아노폴리스, 데모티카, 플로브디프 등지가 불가리아에 넘어갔고, 테살리아의 대 블라키아도 함락했으며, 과거 보릴에게 반기를 든 뒤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시오스 슬라브의 체피나 성도 공략했다. 테오도로스의 뒤를 이어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가 된 마누일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불가리아의 봉신이 되었다.아센은 정복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수비대를 중요한 요새에 배치하고 부하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과거 칼로얀이 정복지 주민들을 학살하다가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샀던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방 관료들이 계속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고 백성들을 가급적 해치지 않았다. 포로 석방 및 기존 체제 유지 정책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그를 공정하고 자비로운 군주로 여겨서, 크게 저항하지 않고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그는 타르노보로 귀환한 뒤 승리를 기념하는 금화를 주조하였고, 성 순교자 성당을 세우고 성당의 기둥 중 하나에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및 다른 종족의 차르"라고 알리는 글귀를 새기게 하였다. 또한 동로마 황제를 모방하여 황제의 휘장을 갖추는 등 장차 발칸 반도 전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 후 이반 아센 2세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3세를 상대로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맞서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손아귀에 넣고자 노력했다.
한편, 불가리아군에게 사로잡힌 뒤 실명한 채 7년간 타르노보 감옥에 갇혀있던 테오도로스는 1237년 이반 아센 2세가 자신의 딸 이리니와 결혼하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거지로 위장하여 테살로니키로 들어온 그는 옛 지지자들과 접촉하여 마누일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그는 실명된 상태였기에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황제로 앉히기로 했다. 음모는 성공했고, 마누일은 퇴위된 뒤 소아시아의 아탈리아로 유배되었다. 아들 요안니스는 예정대로 테살로니키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테오도로스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마누일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아탈리아에서 탈출한 뒤 니케아 제국에 망명했고, 1239년 초 6척의 니케아 함대를 이끌고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 인근에 상륙했다. 이리하여 내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르렀지만, 양자는 곧 테살로니키 일대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마누일은 니케아 제국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테살리아를 받았고, 요안니스와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를 지켰다.
1241년 마누일이 죽자,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본토를 다스리고 있던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테살리아를 공략하려 했다. 이에 테오도로스는 1241년 니케아를 방문해 구원을 청했다. 요안니스 3세는 그를 삼촌으로서 후한 대접을 해줬다. 그러나 니케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고, 그 사이에 테살로니키를 향한 원정군을 준비했다. 1242년 봄,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를 대동한 채 원정군을 이끌고 테살로니키로 진격했다. 니케아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그러나 몽골군이 소아시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요안니스 황제는 철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비밀로 하고, 협상을 위해 테오도로스를 도시로 보냈다. 40일간의 협상 끝에, 테오도로스의 아들 요안니스는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인정받았지만,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니케아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또한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에서 아들 곁에 머물 수 있었다.
그 후 보데나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244년 아들 요안니스가 죽자 작은 아들 데메트리오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테살로니키 데스포티스로 선임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유부녀를 유혹하는 걸 즐기는 방탕한 청년이었고, 시민들은 니케아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원하기 시작했다. 1246년 가을, 요안니스 3세는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트라키아의 대부분과 마케도니아 동부 및 북부 전역을 장악했다. 그 후 멜니크에 주둔한 요안니스 3세는 테살로니키 주민들로부터 데메트리오스를 축출하고 도시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황제는 데메트리오스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데메트리오스는 낌새를 눈치채고 거부했다. 황제는 소환령에 불응한 신하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테살로니키로 진군했고, 며칠 후 음모자들이 성문 중 하나를 열면서 도시가 손쉽게 공략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체포된 뒤 비티니아의 렌티아나로 유배되었다. 이때 테오도로스는 보데나에 은거하는 조건으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테오도로스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미하일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요안니스 3세에 대항하라고 촉구했다. 미하일 2세는 삼촌의 권유를 받아들여 1251년 봄 테살로니키를 급습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테오도로스는 미하일 2세와 합류한 뒤 1252년 봄 프릴레프와 벨레스를 공략했지만, 요안니스 3세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피로스로 철수했다.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의 거점이던 보데나를 공략했지만, 카스토리아에서 이피로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피로스군의 요안니스 글라바스와 테오도로스 페트랄리파스 장군이 니케아 제국에 귀순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고, 미하일 2세는 요안니스 3세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이피로스군이 장악한 요새와 마케도니아의 나머지 영토를 양도하였고, 미하일 2세의 장남 니키포로스와 요안니스 3세의 손녀 마리아의 결혼이 이뤄졌다.
요안니스 3세는 미하일 2세에게 테오도로스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미하일 2세는 처음엔 망설였지만, 곧 압력에 굴복하여 테오도로스를 넘겨줬다. 테오도로스는 소아시아로 끌려갔고, 1253년경 그곳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