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2 17:15:18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

파일:라바룸.svg 동로마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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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교전국
<colbgcolor=#B13C3B> 다라 전투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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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535 ~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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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아바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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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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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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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
,756 ~ 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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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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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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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 ~ 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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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6 ~ 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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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 ~ 967,
함단 왕조
한닥스 공방전
,960 ~ 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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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뱌토슬라프 전쟁
,968 ~ 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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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
,976 ~ 1018,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986,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클레이디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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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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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8 ~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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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7 ~ 1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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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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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부니온 전투
,1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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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 ~ 1099,
파일:룸 술탄국 국기.svg 룸 술탄국 파일:Seljuk Turks Flag.jpg 셀주크 제국
필로밀리온 전투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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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이아 전투
,1122,
페체네그
하람 전투
,1128,
파일:Flag_of_Hungary_(13th_century).svg.png 헝가리 왕국
샤이자르 공방전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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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5 ~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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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미온 전투
,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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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동로마 무역 전쟁
,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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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오케팔론 전투
,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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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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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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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 ~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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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
영어: Basil II's Bulgarian wars
시기 976년 ~ 1018년
장소 발칸 반도
원인 불가리아 제1제국의 부활을 꾀하는 사무일 형제와 동로마 제국의 발칸 반도 패권 확보를 꾀하는 바실리오스 2세의 충돌
교전 세력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동로마 제국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불가리아 제1제국
지휘관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바실리오스 2세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니키포로스 오우라노스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그리고리오스 타로니티스†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 요안니스 살두스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사무일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다비드†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모세†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아론‡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로만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가브릴 라도미르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이반 블라디슬라프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크라크라
파일:First_bulgarian_empire_flag.png 이바츠
병력 불명불명
피해 불명불명
결과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 정복.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사무일 형제의 맹공과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3.2. 사무일과 바실리오스 2세의 소모전3.3. 클레이디온 전투와 사무일의 죽음3.4. 이후의 전쟁
4. 결과

[clearfix]

1. 개요

976~1018년,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정복 전쟁. 동로마 제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수백 년간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던 불가리아 제1제국을 정복하고 발칸 반도의 패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2. 배경

971년, 요안니스 1세스뱌토슬라프 전쟁에서 스뱌토슬라프 1세가 지휘하는 키예프 루스군을 격파한 뒤 키예프 루스에 복종했던 불가리아 동부 일대를 장악하고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2세를 체포했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요안니스 1세는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보리스 2세를 폐위시키고 마기스테르라는 명예 칭호를 하사했으며, 보리스의 동생 로만을 거세하고 수도자로 삼았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를 해쳬하고 다뉴브 강 전선을 복원하려는 동로마 제국의 염원이 300여 년만에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서부 불가리아는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소피아 백작 니콜라의 네 아들 다비드, 모세, 아론, 사무일이 세력을 일으켜 동로마 제국에 대항했다. 이들은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다비드는 테살로니키와 테살리아 주변의 국경 지대를 지켰고, 모세는 에게 해 연안과 세레스에 대한 공격의 전초기지가 될 스트로비차를 지켰으며, 아론은 스레데츠를 통치하며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베오그라드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켰고, 사무일은 비딘의 강력한 요새에서부터 불가리아 북서부를 통치했다. 이들은 장차 옛 수도 프리슬라프를 포함한 동부 불가리아 영토를 해방시킬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시리아 원정을 마친 뒤 귀환하던 중 사망했다. 즉위 이래 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에게 밀려나 명목상의 지위만 유지하고 있던 바실리오스 2세는 비로소 선임 군주가 되었지만, 나이가 여전히 어렸기에 환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가 실권을 잡았다. 그러나 바르다스 스클리로스 등 각지의 군벌들이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황제가 되고자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사무일 형제가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하면서, 장장 42년간 이어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3.1. 사무일 형제의 맹공과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976년, 사무일 형제는 동로마 제국이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불가리아 동부 일대로 쳐들어갔다. 그 중 다비드는 테살로니카를 공격하다가 전사했고, 모세는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하지만 사무일과 아론은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어갔다. 동로마 제국군은 패배를 거듭해 트라키아로 패주하였고, 동로마의 정복에 반대하지 않았던 불가리아 귀족과 관리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당시 어린 바실리오스 2세를 대신해 실권을 쥐고 있던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의 반란에 대처하느라 이들을 저지할 여력이 없기에 음모를 통해 사무일을 실각시키기로 했다. 그는 사무일의 형 아론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고 트라키아의 지배자로 세워줄 테니, 사무일을 배신하라고 권유했다. 아론은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양자는 긴밀한 교류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무일은 아론을 공격했고, 976년 6월 14일 뒤프니차 인근에서 아론과 그의 부하들을 모조리 처단했다. 다만 아론의 아들인 이반 블라디슬라프만은 사무일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간청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론을 이용한 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는 전 차르인 보리스 2세로만을 불가리아로 돌려보내서 내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보리스 2세는 국경 근처의 숲을 지나가던 중 동로마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 오해한 불가리아 경비대에게 살해되었다. 조금 뒤쳐져서 걷던 로만은 경비대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로만은 비딘으로 끌려갔는데, 사무일은 의외로 그를 차르로 추대하고 자신은 장군을 자처했다. 당시 로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갔을 때 요안니스 1세의 명령에 따라 거세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식을 둘 수 없으니 사무일이 결국 그의 뒤를 이을 게 확실했다. 로만은 사무일에게 국정을 맡겼고, 자신은 신앙 생활에 전념했다.

사무일은 동로마군이 바르디스 스클리로스의 반란군에 집중된 틈을 타 트라키아와 테살로니키, 테살리아, 헬라스, 펠로폰네소스 일대를 휩쓸었고, 많은 동로마 요새들을 공략했다. 977년 테살리아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라리사를 포위하여 983년까지 공성전을 벌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구원군을 파견했으나 중도에 격파당했다. 결국 라리사 주민들은 항복하였고, 남자들은 불가리아 군에 강제 입대하고 여자와 노약자는 불가리아 내륙으로 끌려갔다.

985년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를 숙청하고 실권을 잡은 바실리오스 2세는 이대로 밀리기만 하면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98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출정하여 이흐티만 주변의 산맥지대를 지나 소피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20일 동안 공성전을 벌이고도 별 소득을 겪지 못하자 트라키아로 철수했다. 사무일은 트라야누스 관문 주변 계곡에 매복해 있다가 986년 8월 17일 그곳을 지나던 동로마군을 습격했다.(트라야누스 관문 전투) 바실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 근위대의 활약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군대는 와해되었고 그가 소유한 보물들은 모조리 사무일에게 빼앗겼다.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불가리아가 자신에게 항거했던 날을 뼈저리게 후회할 만큼 철저한 복수를 해주겠다고 맹세했다.

3.2. 사무일과 바실리오스 2세의 소모전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의 패배로 바실리오스 2세의 위신이 떨어지자, 아나톨리아의 군벌 바르다스 포카스는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며 바실리오스 2세를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겨우 포섭한 블라디미르 1세키예프 루스군의 공격으로 패퇴했고, 이어진 바실리오스 2세의 반격으로 바르다스 포카스가 전사하면서 와해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에 휘말리느라 정신이 없자, 사무일은 이 때를 틈타 공세를 이어갔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리고리오스 타로니티스에게 군대를 맡겨서 테살로니키를 지키게 했지만, 그리고리오스는 989년까지 연전연패했다. 불가리아군은 동로마 제국 영역 깊숙이 침투하여 베로이아 등 여러 중요한 요새들을 점령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이피로스를 장악했고, 서쪽에서는 아드리아 해의 디라키움을 공략했다.

991년 바르다스 포카스와 스클리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 바실리오스 2세는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황제는 테살로니키로 진군하여 그곳의 방어망을 강화한 뒤, 도시의 수호 성인인 성 데메테리오스의 제단 앞에 기도를 올렸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사무일은 패배를 면치 못했고 로만은 포로로 잡혔다. 동로마 제국군은 베로이아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수복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후에도 불가리아를 꾸준히 공격했지만, 995년 아랍인들이 소아시아를 침략하자 많은 군대를 동방으로 보내야 했다. 사무일은 이 틈을 타 남진하였고, 996년 테살로니키 전투에서 적군을 섬멸해 그리고리오스 타로니티스를 죽이고 그리고리오스의 아들 아쇼트를 사로잡았다. 이후 테살리아를 약탈하고 테르모필레 관문을 넘어 헬라스 테마로 진입해 코린트까지 유린하고 약탈했다. 니키포로스 오우라노스 휘하의 동로마군이 그들을 추격했고, 사무일은 군대의 방향을 돌려 이를 맞이했다.

양군은 스페르케이오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봤는데, 마침 강이 범람해서 건너기 힘들었다. 그래서 불가리아군은 방심하고 있었으나, 오우라노스는 996년 7월 19일 밤 극비리에 상류 쪽으로 강을 건너서 불가리아군을 급습했다. 사무일은 팔에 화살이 꽂힌 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는 아드리아 해의 주요 항구인 디라키움을 점령한 후 달마티아의 오지를 횡단하여 보스니아까지 행진해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9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로만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무일은 정식으로 차르에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5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불가리아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싶어했던 교황은 긍정적인 답변을 해줬다. 998년, 세르비아의 두클랴 공국이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 하자, 그는 군대를 일으켜 두클랴를 침공했다. 요반 블라디미르 대공을 비롯한 적군이 두클랴 산성에 들어가자, 그는 일부 병력을 산기슭에 남겨두고 울치니의 해안 요새를 포위했다. 요반 블라디미르 대공은 항복을 거부했지만, 세르비아 귀족들이 불가리아군에 계속 투항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투항했다. 요반은 프레스파에 있는 사무일의 궁전으로 끌려갔다.

그 후 불가리아군은 달마티아를 통과하여 코토르를 공략하고, 뒤이어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해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주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또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여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까지 공략한 뒤 보스니아와 라슈카를 거쳐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딸 테오도라 코사라를 요반 블라디미르와 결혼시킨 뒤 두클랴로 돌려보냈고, 또다른 딸 미로슬라바 공주를 아쇼트와 결혼시킨 뒤 디라키움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장남이자 후계자인 가브릴 라도미르와 헝가리 대공 게저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와의 결혼동맹을 성사시켰다.

바실리오스 2세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제국 영토를 지키기 위해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와 협의한 끝에 1000년경 그를 달마치야 대공에 임명하여 달마치야 해안 지대 전체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로써 해안의 그리스어권 도시들의 안전을 확보한 뒤, 황제는 불가리아를 확실히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1001년 여름, 그는 베로이아 요새를 공략했고, 테살리아에서 불가리아 수비대를 격파했다. 또한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휘하의 군대를 발칸 산맥의 북쪽으로 파견하여 프레슬라프와 플리스카를 탈환했다. 이로써 불가리아 북동부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들어갔다. 사무일은 적의 수가 워낙 많아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매복이나 기습 공격으로 일관했지만,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의 전훈을 뼈저리게 익힌 바실리오스 2세가 워낙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003년 불가리아와 헝가리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당시 헝가리 대공 게저가 사망하자, 사무일은 게저의 아들 이슈트반 1세 대신 줄러와 코파니를 헝가리 왕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1세가 내전에서 승리했고, 자신의 정적들을 도운 것에 보복하고자 불가리아 제국의 북쪽 영역인 다뉴브 강 북서쪽을 침략했다.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전력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불가리아 북서부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비딘을 포위 공격해 8개월만에 함락시켰다. 사무일은 보복으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격해 그 일대를 약탈했다. 1004년, 바실리오스 2세는 스코페로 이동한 뒤 바르다르 강 반대편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적을 야습해 큰 타격을 입혔다. 그 후 동쪽으로 계속 진군하여 페르니크 요새를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트라키아로 철수했다. 사무일은 보복 차원에서 테살로니키를 공격하여 테살로니키 총독 요안니스 샬두스를 생포했다.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불가리아는 내분을 겪기 시작했다. 디라키움 총독 아쇼트는 사무일의 장인인 요안니스 크리셀리오스, 아내이자 사무일의 딸 미로슬라바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아쇼트와 미로슬라바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였고, 크리셀리오스는 동로마 제국 사령관 유스타시오스 다프노멜리스에게 디라키움을 내주었다. 1006~1007년,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영역 깊숙히 침투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009년 테살로니카 근방의 크레타에서 사무일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황제는 이후에도 불가리아의 영토에 매년 침공하여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3.3. 클레이디온 전투와 사무일의 죽음



1014년,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로 또다시 쳐들어왔다. 사무일은 이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한다면, 동로마 제국에 비해 국력이 현저히 약한 불가리아는 패망하고 말 것이었다. 매복 공격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바실리오스 2세가 깊숙이 들어오기 전에 길목을 차단하기로 했다. 그는 클레이디온 협곡을 점거하여 두꺼운 나무 벽을 세우고, 적이 길고 위험한 우회로로 가도록 유도했다. 그해 여름 클레이디온 협곡에 도착한 황제는 나무벽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기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사무일은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네스토리차 장군에게 테살로니키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차 장군은 클류치 인근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나무벽을 어떻게 뚫을 지를 놓고 고심했다. 이때 니키포로스 시피아스가 일부 병력을 몰래 숲이 우거진 언덕 사면으로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능선을 따라 불가리아군의 뒤까지 가서 협곡으로 내려간 다음 후방을 기습하자는 것이었다. 황제가 승낙하자, 시피아스는 엄선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본진을 빠져나간 뒤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협곡의 반대편 끝, 즉 불가리아군의 후위까지 간 뒤 숲에서 나왔다. 7월 29일, 그는 공격을 개시했고 황제도 동시에 나무벽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불가리아군은 협공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이때 사로잡힌 병사는 14,000~15,000명에 달했다.

사무일 역시 한때 사로잡혔지만,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대단한 무용을 선보여 적병을 모조리 몰아내고 포박당한 아버지를 말에 태운 뒤 포위망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르 계곡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스트루미차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에게 스트루미차 주변의 요새와 성곽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자신은 직접 스트루미차를 공격하기로 했다. 테오필락토스는 요새들을 손에 넣었지만 곧이어 가브릴 라도미르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테오필락토스 본인도 전사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가브릴 라도미르가 직접 창으로 테오필락토스를 찔러 살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적지 않았는지 바실리오스 2세도 스트루미차의 포위를 풀고 철군했다.

에드워드 기번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1만 5천 명의 포로를 100명씩 150개조로 나눠서 99명은 두 눈을 모두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나머지 1명은 한 눈만 뽑은 뒤 애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인솔해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것은 과장되어 전해진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불가리아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건 사실이다. 사무일은 패전에 깊이 상심한 나머지 쇠약해졌고, 1014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3.4. 이후의 전쟁

사무일 사후 차르에 선임된 가브릴 라도미르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10월 24일 사무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바실리오스 2세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군의 방향을 돌려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크르나 계곡을 거쳐 가브릴이 있는 비톨라로 향했다. 비록 비톨라 요새를 공략하진 못했지만, 차르의 궁전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1015년 초, 가브릴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 앞으로 황제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이를 의심하여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장군을 모글레나로 파견해 적군을 섬멸하고 모시노폴리스에서 트리아디차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하고 보아나 요새를 점거하도록 하였다.

동로마군이 뒤이어 모글레나 요새를 포위하자, 가브릴은 구원군을 이끌고 요새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포위망이 워낙 견고하여 구원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가 압박을 가함으로써 적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지만, 동로마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수일 간 테오도시오스 성벽 주위를 맴돌다가 별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모글레나 요새는 함락되었고, 가브릴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차르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앞으로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넘어간 블라디슬라프는 1015년 8월 페트리스크 마을 근처의 숲에서 사냥하던 가브릴을 습격해 살해하였다. 그는 가브릴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차르가 되었다. 1016년에는 차르 사무일의 가신이자 사위였던 두클랴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차르에 오른 뒤 바실리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평화 협약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그를 믿지 않고 암살자를 보냈으며, 암살이 실패하자 1015년 말 군대를 이끌고 오스토보와 소스크로 진격해, 펠라고니아 평원을 황폐화하고 수많은 불가리아인을 포로로 잡았다. 블라디슬라프는 오흐리드를 버리고 프레스파 요새에서 버텼다. 바실리오스 2세는 오흐리드를 점거한 뒤 좀더 공세를 이어가려 했지만, 불가리아군이 배후를 습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모시노폴리스로 귀환하였다.

블라디슬라프는 비톨라를 새 수도로 선택하고 요새화한 뒤, 1016년 비톨라로 쳐들어온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페르니크를 88일간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017년 바실리오스 2세의 요청을 받아들인 키예프 루스군이 불가리아 북동부를 침공하여 프레슬라프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 사이에 남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토리아를 포위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사절을 파견하여 루스군을 아군으로 끌여들이려고 애쓰는 한편, 페체네그와 연합하여 테살로니키를 공략하려 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페체네그가 다뉴브 강을 건너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스토리아 포위를 풀고 오스트로보 호수 근처로 이동하여 페체네그와 대치했다. 페체네그는 곧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남쪽으로 돌아가서 사무일의 궁전이 있던 세티나를 점령하고 그곳에 보관된 식량을 다수 확보하였다. 그해 가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의 별동대를 기습 공격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1018년 2월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디라키움 요새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이던 중 전사했다. 장남 프레시안 2세가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지만, 사무일, 가브릴 라도미르, 이반 블라디슬라프 휘하에서 활약했던 크라크라를 비롯한 불가리아 귀족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제국에 대거 귀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세레스에서 개인적으로 크라크라를 접견하고, 그에게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수여했다. 프레시안 2세는 어떻게든 항전을 이어가기로 하고, 두 남동생인 알루시안과 아론, 이바츠 장군과 함께 알바니아 남동부의 토모르 산에 있는 토모르니차 요새에서 농성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요새를 4개월간 포위 공격하면서 식량이 바닥나자, 결국 프레시안 2세는 1018년 8월 항복했다. 이리하여 42년간 이어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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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오스 2세 시대의 영토.

바실리오스 2세는 이바츠를 실명시키는 등 위험인물로 간주된 자들을 철저히 숙청했지만, 프레시안 2세와 알루시안, 아론 형제, 마리아 황후, 불가리아 총대주교 다비트 등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한 뒤 귀하게 대접했다. 마리아 황후는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해졌고, 프레시안 등 아들들은 주요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또한 불가리아 귀족들의 자제들은 동로마 여인들과 결혼하였고, 딸들은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어 제국 귀족층에 편입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바실리오스 2세의 이같은 조치 덕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 사후 후임 황제들이 외적과의 전쟁과 내정 관리를 명목삼아 불가리아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징병, 징용을 반복하면서, 제국에 대한 불가리아인들의 반감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그들은 페테르 데얀콘스탄틴 보딘을 앞세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그러다 1185년 페터르 4세이반 아센 1세, 칼로얀 형제가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목표로 삼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100여 년간 발칸 반도의 패권을 유지하던 제국의 입지는 급격히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