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니키포로스 시피아스 (영어: Nikephoros Xiphias, 그리스어: Νικηφόρος Ξιφία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수석호위관 |
반란 대상 | 바실리오스 2세 |
[clearfix]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원정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으나, 황제에게 후계자가 없는 틈을 타 반란을 꾀했다가 발각당했다.2. 생애
시피아스 가문의 기원은 불분명하나, 당시 동로마의 여러 귀족들이 소아시아 출신인 것을 고려했을 때 그 역시 소아시아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006~1008년 이탈리아 총독을 지낸 알렉시오스 시피아스의 아들로 여겨진다. 그는 바실리오스 2세의 수석호위관(Protospatharios)이었으며, 999년, 1000년, 또는 1002년에 파트리키오스 직책을 맡은 테오도로카노스 장군과 함께 불가리아 제1제국의 수도 플리스카와 플레슬라프를 점령하고 도브루자를 약탈했다.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 참가한 그는 황제에게 불가리아군의 주둔지를 우회하여 후방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받아냈다. 그는 보병 분대를 몸소 이끌고 벨라스카 산을 넘어서 불가리아군의 후방을 공격해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015년 초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장군과 함께 모글레나 일대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모시노폴리스에서 트리아디차로 진군하며 일대를 평정하고, 보야나 요새를 점거했다. 이후 1018년까지 군사 작전을 이끌며 세르비아 지역에 남아있던 불가리아 요새들을 모두 점령했다.1021년 또는 1022년, 바실리오스 2세에게 후계자가 없는 것을 노려 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포카스 바리트라첼로스(Nikephoros Phokas Barytrachelos)와 함께 반란을 꾀했다. 그들은 황제가 조지아 왕국과의 전쟁에 착수하여 수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 추종자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조지아 왕국과도 내통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원정을 지속하는 한편 두 반란 지도자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양자가 서로를 불신하도록 조장했다. 이 작전은 보기좋게 들어맞았다. 1022년 8월 15일, 시피아스는 니키포로스를 암살했고 니키포로스의 지지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시피아스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조지아 원정을 마치고 귀환한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온 시피아스를 삭발시키고 안티고네 섬으로 추방했다. 또한 공모자 대부분을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모반에 가담하여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가 발각된 2명의 왕실 인사 역시 처형했다. 안티오키아의 역사가 아야(Yahya)에 따르면, 1025년 바실리오스 2세가 죽은 후 콘스탄티노스 8세는 공모자 대부분을 풀어줬지만, 시피아스만은 사면하지 않았다고 한다. 1028년 로마노스 3세 황제로부터 사면 통보를 받았고, 스투디오스 수도원에 은거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