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바르다스 포카스 (영어: Bardas Phokas, 그리스어: Βάρδας Φωκᾶς) |
출생 | 940년경 |
사망 | 989년 4월 13일 |
직위 | 동방군 스콜라리오스 |
반란 대상 | 요안니스 1세, 바실리오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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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삼촌인 니키포로스 2세를 잔혹하게 죽인 요안니스 1세에 맞서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키오스로 유배되었다. 7년 후 유배지에서 풀려나 바실리오스 2세에 반기를 든 바르다스 스클리로스 토벌에 기여했다. 그러나 제위에 야심을 품고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켜 한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위협했으나 989년 4월 13일 바실리오스 2세가 친히 이끄는 제국군과 맞서다 전사했다.2. 행적
10세기 동로마 제국의 저명한 군사 귀족가문인 포카스 가문의 일원으로, 부친 레온 포카스는 형 니키포로스 2세와 함께 아랍 세력을 상대로 승승장구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바르다스는 부친과 삼촌처럼 군대에 일찍이 입대하여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그는 모든 종류의 전투에 능숙했고, 매우 활기차고 용맹해서, 그의 주먹에 한 번 맞으면 살아남기 어려웠고, 그가 고함을 지르면 전군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 니키포로스 2세가 즉위한 뒤 빠르게 출세하여 동방군의 핵심 장성으로서 활약했다.그러던 969년 12월 11일, 요안니스 1세가 니키포로스 2세를 참혹하게 죽였다. 이에 니키포로스 2세의 동생 레온 포카스는 큰아들 니키포로스, 작은 아들 바르다스와 함께 반란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레온 포카스와 니키포로스는 재산을 모두 잃고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바르다스는 흑해 연안의 오지인 폰투스의 아마세이아로 보내졌다. 971년 초, 유배지를 탈출한 바르다스는 카이사레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참칭했다. 여기에 레스보스에 유배되었던 레온 포카스와 니키포로스도 현지 주교를 통해 바르다스의 반란 소식을 트라키아에 퍼트리고 반군이 곧 도착할 테니 모두들 제위 찬탈자에 맞서 봉기하자고 선동했다. 그러나 레온 포카스의 지시를 받고 선동하고 있던 주교는 체포되어 모든 것을 털어놨고, 요안니스는 레온과 그의 아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이내 눈을 멀게 한 후 영원히 추방해버리라고 지시했다가 다시 마음을 돌려 눈을 멀게 하지 말고 단지 유배만 보내라고 명령했다.
요안니스는 바르다스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하면 목숨과 재산을 보전해주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바르다스는 거부하고 수천의 병력을 거느린 채 수도를 향해 진군했다. 이에 요안니스는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를 파견해 이들을 진압하게 했다. 다만 요안니스는 내전을 원치 않아 스클리로스에게 가능한 피를 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면서 항복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벌을 내리지 말고 명예와 경제적 보수도 주겠다는 제안을 하라고 명령했다. 스클리로스는 그 명에 따라 반군을 회유했고, 반란군은 매일 밤 진영에서 몰래 빠져나와 스클레루스에게 투항했다. 결국 바르다스 포카스는 자신의 병력이 수백명 밖에 남지 않자 야음을 틈타 가족과 함께 티로포이온 요새로 대피했다. 그러나 스클리로스가 티로포이온 요새를 포위하자, 바르다스 포카스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하에 항복했다. 요안니스는 바르다스 포카스의 목숨을 살려주는 데 동의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삭발한 후 가족과 함께 키오스 섬으로 보냈다.
그 후 7년간 키오스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바르다스는 978년 어린 바실리오스 2세 황제를 대신하여 섭정을 맡던 시종장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에 의해 풀려나 정부군 지휘관을 맡았다. 당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물리쳐주는 조건으로 군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바르다스는 곧바로 자신의 근거지였던 카이사레아로 잠입한 뒤, 스클리로스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군대를 일으켰다. 스클리로스는 후방이 위협받자 어쩔 수 없이 철수하여 바르다스와 격돌했다.
바르다스와 스클리로스의 전쟁은 3년간 이어졌다. 스클리로스는 여러 차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바르다스는 질서정연하게 퇴각한 뒤 증원병을 모아 다시 응전했다. 그러던 979년 봄, 양측은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바르다스는 전투 도중에 반란군에 단독 대결로 승부를 판가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스클리로스가 이에 응했고, 두 사람은 양측 병사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모인 한가운데에서 격투를 벌였다. 둘은 말을 타고 달려가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포카스는 스클리로스의 검을 피했지만, 그 검은 그가 탄 말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포카스가 내지른 검은 스클리로스의 머리를 스쳤다. 스클리로스는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졌고,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만 스클리로스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바그다드로 망명했다.
스클리로스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뒤, 바르다스 포카스는 동방군의 스클라리오스에 올랐다. 그러던 985년 자신을 지지하던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 시종장이 유배되어 재산을 몰수당하자, 바르다스는 황제가 자신도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비밀리에 반란을 꾀하고 수도의 상황을 살폈다. 986년 8월 17일 바실리오스 2세가 친히 이끄는 제국군이 트라야누스 관문에서 불가리아군에게 참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귀족들을 대거 포섭한 뒤 황제를 칭했다. 이때 스클리로스도 복귀하여 역시 황제를 칭하자, 그는 스클리로스와 협의해 자신이 유럽 지역을 맡고 스클레루스는 마르마리 해에서 동방 속주까지 아나톨리아 전역을 맡자고 제안했다. 스클리로스는 이에 동의하여 구체적인 협의를 위해 바르다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바르다스는 경호원도 없이 온 스클리로스를 곧장 체포하여 티로포이온 요새에 감금했다.
이리하여 경쟁자를 제거한 그는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이윽고 마르마라 해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군대를 둘로 나눠서 절반은 서쪽 헬레스폰트의 아비도스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맞은편에 위치한 크리소포리스에 주둔시켰다.그러나 정부군 소속 해군이 헬레스폰트, 마르마라, 보스포루스를 끊임없이 순찰하면서 바르다스의 군대가 유럽쪽으로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 바실리오스 2세의 요청을 받은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가 파견한 6천 명의 중무장 바랑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였다. 989년 2월 하순,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인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해협을 건너 크리소폴리스 해안의 반란군 진영을 급습했다. 이와 동시에, 제국의 함대는 해안 지대에 그리스의 불을 뿌렸고, 바르다스의 군대는 갑작스런 공격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다.
당시 예비 병력을 이끌고 후방에 있었던 바르다스는 크리소폴리스의 참상을 전해듣고 서둘러 아비도스 외곽에 주둔한 나머지 병력과 합류했다. 그는 헬레스폰트 입구에 위치한 아비도스 항구를 점령하면 육로로 수도 공략이 가능한 갈리폴리 반도까지 병력을 수송할 선박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아비도스는 결사적으로 저항했고, 제국 해군이 해협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어서 도시를 완전히 봉쇄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바실리오스 2세는 수도로 복귀한 뒤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아비도스로 향했다.
989년 4월 13일, 양군은 아비도스 외곽의 평원에서 대치했다. 양군은 곧 격돌하였고, 수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정부군이 서서히 승기를 잡았다. 그러던 중, 바르다스는 평원 맞은 편에서 말을 타고 병사들 사이를 누비며 사기를 진작시키고 있는 바실리오스 2세를 목격했다. 그는 전세를 역전시킬 호기가 왔다고 여기고, 말을 거칠게 몰며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실리오스는 바르다스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자 오른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왼손에는 성모 마리아상을 쥔 채 꼿꼿이 섰다. 그 순간, 이변이 벌어졌다. 바실리오스를 금방이라도 죽일듯 달려들던 바르다스는 돌연 낙마하더니 현장에서 사망했다. 미하일 프셀로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졸도하여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바르다스의 반란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