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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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브리타니아 섬에 처음으로 상륙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2. 배경
기원전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개시한 이래, 로마군은 그의 지휘하에 아라르 전투, 비브라테 전투, 보주 전투, 악소나 전투, 사비스 전투, 아투아투키 공방전, 모르비앙 해전 등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결과 켈트인(갈리아인)들은 당분간 로마 공화국의 패권을 받아들였고, 갈리아는 평온해졌다. 그러던 기원전 56년 라인(레누스) 강 동쪽의 게르만족 중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이 라인 강을 건너 메나피족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이사르는 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진격했다. 게르만족은 카이사르의 신속한 기동에 바로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지만, 라인 강 밖으로 나가라는 요구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카이사르는 저들이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라 의심하여 당장 전투를 벌이고 싶었지만, 명분 없이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기에 기병 부대를 적과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기동하도록 했다. 이에 게르만족 중 일부가 그들을 공격해 74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카이사르는 전투를 감행했다. 다음날 게르만족이 사절을 보내 사과의 뜻을 전하자, 카이사르는 이들을 구금한 뒤 게르만족 진영을 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히고 라인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1] 그러나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부당한 짓을 했다는 목소리가 일었다. 심지어 원로원파(옵티마테스)인 소 카토는 카이사르를 게르만인들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74명의 기병이 죽었으니 교섭은 끝났으며 카이사르의 행동은 정당하다고 반박했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원로원은 죄를 묻지 않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국내에서 자신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잠재우기 위해 당대 로마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라인 강 건너편의 수에비족에게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의 잔당을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는 이유로 10일만에 다리를 놓고 모든 군단을 통솔하여 라인 강을 건넜다. 그러나 수에비족이 숲속 깊숙이 숨어 있기만 할 뿐 싸워주지 않자, 카이사르는 숲속 깊숙이 들어갔다간 위험하리라 판단하고 갈리아로 되돌아갔다. 라인 강을 최초로 도하한 로마 장군이 되었으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그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카이사르는 표면상으로는 브리튼인들이 지난날 카이사르를 상대로 대항한 베네티족을 도운 걸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당대 로마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인 브리타니아 섬에 최초로 원정하여 막대한 선전효과를 거두는 걸 기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스트라본은 베네티족의 반란이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섬까지 쳐들어가 상업 활동을 저해하는 걸 막으려는 의도로 벌어졌다고 기술했다. 이는 카이사르가 이전부터 브리타니아 원정을 고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원전 55년 늦여름,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결심했다. 그는 그 섬과 왕래하는 상인들을 불러들여 정보를 입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브리튼인의 전술, 카이사르가 사용할 수 있는 항구 등 유용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아마도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정복해서 자기들이 지금까지 독점하던 브리튼인과의 무역 활동에 로마인들이 끼여들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대대장 가이우스 볼루세누스를 보내 해안을 정찰하도록 했다. 그는 켄트 해안을 조사했지만 상륙은 하지 않고 5일 만에 돌아왔다.
정보가 충분히 모이지 않았지만, 카이사르는 그래도 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7군단과 10군단을 80척의 수송선에 태운 뒤 모리니족의 영토에 속한 불로뉴 항에서 출항했다. 또다른 기병 수송선 18척은 다른 항구에서 항해할 예정이었다. 항구에 수비대를 일부 남겨둔 뒤, 8월 23일 자정이 지날 무렵에 항구를 떠났다. 이리하여 카이사르의 제1차 브리타니아 원정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기원전 55년 8월 26일, 카이사르의 함대는 도버 해안에 접근했다. 그러나 해변을 보니 절벽이 해안과 매우 가까웠고, 브리튼군이 언덕과 절벽 위에 모여서 로마군이 상륙하는 걸 저지하려고 들었다. 그는 기병대를 실은 두 번째 수송선들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오지 않자 전쟁 회의를 소집한 후 부하들에게 스스로 행동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다른 곳에 상륙하기로 하고, 도버 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약 7마일 떨어진 윌머 해변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브리튼군의 전차대와 보병대가 가로막고 있었고, 수심이 너무 낮아서 선박들이 해안으로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병사들이 깊은 물속에서 상륙지점까지 헤엄쳐 가야만 했다. 다들 물속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을 때, 10군단의 기수 한 명이 물 속에 뛰어들며 외쳤다."전우여! 독수리를 적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면 도전하라! 나는 공화국과 장군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로마군은 그 광경을 보고 황급히 물속에 뛰어들어 해변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야 해서 전열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브리튼군의 화살 세례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카이사르는 고전하는 병사들을 돕기 위해 전함을 최대한 가까이 대게 한 뒤 적을 향해 슬링과 투석 무기를 발사하게 했다. 이로 인해 브리튼군은 후퇴했고, 로마군은 가까스로 육지에 올라갈 수 있었다.그 후 숙영지를 건설한 카이사르는 귀순을 청한 브리튼 부족들에게 군대를 해산한 후 인질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얼마 후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갑작스런 폭풍으로 인해 브리타니아로 향하던 추가 수송선이 갈리아로 돌아가야 했고, 카이사르와 2개 군단을 수송한 선박 일부가 난파되었으며, 많은 선박이 파손당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급히 배를 수리하게 하면서 진영 근처에서 식량을 수집하게 했다. 그가 곤경에 처한 걸 알게 된 브리튼인들이 식량을 수집하러 파견된 로마군을 습격했지만, 카이사르가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들자 곧바로 퇴각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리라 짐작하고, 전군에 전투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브리튼인들은 며칠간의 폭풍우가 끝나자마자 로마군 진영으로 접근했다. 이후 양군은 평원에서 대규모 접전을 벌였는데, 로마군의 압도적인 전투력과 강력한 무장에 밀린 브리튼인들이 크게 패배하고 달아났다. 그 후 브리튼인들이 다시 사절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카이사르는 인질의 수를 2배로 늘릴 것을 요구해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겨울을 브리타니아에서 보내기 싫었던 그는 수리가 완료된 배에 병사들을 싣고 갈리아로 돌아갔다.
비록 인질을 실제로 보낸 부족이 거의 없는 등 원정 결과는 형편없었지만, 로마인들은 미지의 세계였던 브리타니아 섬에 원정을 갔다는 소식에 찬사를 보냈고, 원로원은 20일의 감사 축제를 선언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지난 원정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한 뒤 기원전 54년에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했다.
[1] 말이 막심한 타격이지 비전투원인 여자와 아이들까지 공격한 대규모 학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