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3:04:27

10군단 에퀴스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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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egio X Equestris. 기원전 6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어 갈리아 전쟁카이사르의 내전에서 맹활약한 레기오. 상징은 황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가장 신임한 군단으로서 그의 전쟁에 언제나 동행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군단'으로도 일컬어진다.

2. 창설

기원전 6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먼 히스파니아 또는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그가 맡은 지역에는 기원전 65년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수행하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창설한 8군단과 9군단이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루시타니아(현재의 포르투갈 지역)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한 원정을 수행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0군단을 창설했다. 이들은 마르스의 달인 3월에 창설되었기 때문에 마르스의 상징인 황소를 군단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카이사르는 기원전 61년 여름 루시타니아 원정을 개시했다. 원정군은 대서양 연안을 따라 북상하며 루시타니아인들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여러 정착지를 공략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침략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군대를 규합했지만, 카이사르는 이어진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루시타니아인들은 카이사르에게 복종했고, 원정군은 카이사르를 임페라토르로 선포했다. 이때 10군단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고 전해지며, 카이사르는 이때부터 이들을 주목했을 것이다.

3. 갈리아 전쟁

기원전 58년, 갈리아 키살피나, 갈리아 트란살피나, 일리리아 속주를 통괄하여 관리하는 총독을 맡고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이 갈리아로 이주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6개 군단을 소집했다. 이중에는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창설한 뒤 루시타니아 원정에서 활약한 10군단도 있었다. 10군단은 아라르 전투비브라테 전투의 승리에 일조해 헬베티족이 카이사르에게 굴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로마에 예속되는데 기여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하이두이족의 영역에서 군대를 휴식시켰다. 이때 디비키아쿠스 등 하이두이족의 유력 인사들이 그를 찾아와 승리를 축하하면서, 게르만계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의 핍박에 시달리고 있으니 그를 축출해달라고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을 물리쳐주면 갈리아인들이 로마군의 위용에 복종할 것이라 여겼고, 이대로 방치했다가 수에비족이 갈리아를 제패해 버리면 로마에게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디비키아누스 등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수에비족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출진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게르만인들의 키가 어마어마하게 크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맹하고 검술도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공포에 떨었다. 기원전 105년 80,000명에 달하는 로마군이 게르만족의 분파인 킴브리족에게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몰살당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지만, 로마인들은 여전히 그때의 공포를 간직하고 있었다. 군단병들 사이에는 암울한 분위기가 흘렀고, 몇몇 장교들은 유언장을 작성했다. 카이사르는 이 분위기를 읽고 나서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호통치며,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킴브리족을 물리쳤던 일, 앞서 그들에게 패배한 헬베티족이 게르만족과 여러번 싸워 물리친 일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무서우면 도망쳐도 좋다. 나는 제10군단만 이끌고 게르만인을 상대하러 가겠다. 10군단은 내 심복이니, 이제부터 내 호위병으로 삼을 것이다"
라고 선언했다. 이에 군단병들은 부끄러워하며 사령관을 따르겠다며 서약했고, 10군단 장병들은 카이사르의 신뢰에 감사를 표하며 영원히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기원전 58년 8월 초 진군을 재개한 카이사르는 6일간의 행군 끝에 정찰병들로부터 수에비군이 약 24마일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세웠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로마군이 근처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5일 후에 회담을 갖자는 제안을 했고, 카이사르는 수락했다. 회담 장소는 꽤 높은 언덕 기슭의 넓은 평야에서 열렸다. 둘은 기병대를 이끌고 만나기로 했지만, 카이사르는 갈리아 기병대를 신뢰하기 힘들었기에 제10군단 병사들을 말에 태워 회담장에 데려갔다. 이에 장병들은
"카이사르가 우릴 호위병으로 삼겠다더니, 한술 더떠서 에퀴테스(기사 계급)로 만들어줬다."
라고 농담했다. 이후 10군단은 '기병군단'이라는 의미인 '에퀴스트리스(Equestris)'라는 호칭이 붙었다.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의 회담이 결렬된 뒤, 로마군과 수에비족은 보주 전투에서 격돌했다. 이때 10군단은 우익에서 수에비족과 장시간 맞붙은 끝에 처음으로 적의 대열을 돌파했고, 수에비족은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패주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으로부터 해방시켜준 세콰니족의 영토에 숙영지를 세우고 겨울 동안 그곳에서 병사들을 쉬게 했다.

카이사르가 수에비족을 무찌른 후에도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고 갈리아에 그대로 남겨두자, 많은 갈리아인이 로마가 갈리아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고 의심했다. 그들은 벨가이인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를 타도할 움직임을 보였다. 카이사르는 이를 감지하고 기원전 57년 10군단을 포함한 원정군을 이끌고 벨가이인들의 영역으로 진격했다. 카이사르는 악소나 전투에서 벨가이 연합군을 물리친 뒤 각지로 흩어진 벨가이 부족들을 일일이 공격해 복속시켰다. 하지만 네르비족만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고, 카이사르는 이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비스 강(오늘날 프랑스 북부 셀레 강)으로 진격했다.

이어진 사비스 전투에서, 10군단은 9군단과 함께 좌익을 맡아 네르비족과 연합한 아트로바테스족을 밀어붙여 강 건너편 숲까지 몰아냈다. 그러던 중 로마군 우익을 맡은 7, 12군단이 네르비족의 맹공으로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0군단장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추격을 중지하고 아군을 구하고자 이동했다. 이때 중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8, 11군단은 비루만두이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이것이 10군단의 눈에 띄었다. 10군단은 강가에 정렬한 뒤 사비스 강을 도강하여 비루만두이족의 후방을 협공했다. 갑자기 후방을 덮친 로마군의 강공에 비루만두이족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후 로마군은 유일하게 남은 네르비족을 포위해 장시간에 걸쳐 격전을 벌인 끝에 섬멸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1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때 그가 동원한 병력은 7군단과 10군단, 기병 500명이었다. 그 해 8월 26일, 카이사르의 함대는 도버 해안에 접근했다. 그러나 해변을 보니 절벽이 해안과 매우 가까웠고, 브리튼군이 언덕과 절벽 위에 모여서 로마군이 상륙하는 걸 저지하려고 들었다. 그는 기병대를 실은 두 번째 수송선들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오지 않자 전쟁 회의를 소집한 후 부하들에게 스스로 행동할 것을 명령했다. 이후 다른 곳에 상륙하기로 하고, 도버 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약 7마일 떨어진 윌머 해변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브리튼군의 전차대와 보병대가 가로막고 있었고, 수심이 너무 낮아서 선박들이 해안으로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병사들이 깊은 물속에서 상륙지점까지 헤엄쳐 가야만 했다. 다들 물속에 뛰어들고 싶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을 때, 10군단의 기수 한 명이 물 속에 뛰어들며 외쳤다.
"전우여! 독수리를 적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면 도전하라! 나는 공화국과 장군에 대한 의무를 다할 것이다!"
로마군은 그 광경을 보고 황급히 물속에 뛰어들어 해변을 향해 달려들어 악전고투 끝에 브리튼군을 격퇴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돌아갔다가 기원전 54년 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단행했다. 이번에는 5개 군단에 기병 2,000명을 이끌고 갔는데, 어떤 군단을 이끌고 갔는지는 갈리아 전쟁기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카이사르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1차 브리타니아 원정에도 참여했던 10군단이 참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후에도 10군단은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수행한 모든 전투에 참여해 승리에 일조했다.

4. 카이사르의 내전

내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기원전 49년 겨울, 10군단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나르본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면서 소집령을 내렸다. 이때 10군단장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이같은 행위를 중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갈리아 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밤중에 숙영지를 떠나 이탈리아로 내려가서 폼페이우스에 가세했다. 하지만 10군단 병사들은 카이사르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바쳤고, 이어진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해 일레르다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참여해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수적으로 우월한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맞서 분전했지만,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진영에서 탈영한 갈리아 기병들이 알려준 정보에 따라 카이사르 군대의 약한 지점을 정확하게 찌르는 바람에 패전을 면치 못하고 후퇴했다. 카이사르가 집필한 내전기에 따르면, 폼페이우스 진영에 있던 라비에누스는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사로잡힌 옛 전우들을 따로 끌어낸 뒤 그들을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카이사르의 정예들이 싸우는 방식인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 다른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찔러 죽였다고 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내전의 향방을 판가름할 결정적인 회전인 파르살루스 전투를 벌였다. 이때 10군단은 우익에 배치되어 폼페이우스가 가장 신뢰하던 1군단과 대적했다. 명목상으로는 군단장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지휘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카이사르가 직접 그들과 함께 하면서 지시를 내렸다. 이때 10군단의 수석 백인대장이었던 크라스티누스는 적 대열과 처음으로 맞붙겠다고 자원한 120명 가량의 부대를 직접 이끌었다. 내전기에 따르면, 그는 전투 직전에 동료들을 향해 연설했다.
"전우여! 나를 따르라. 그리고 임페라토르에게 진정한 공헌을 하라. 이제 이 전투만 남았다. 이 전투가 끝나면 그는 디그니타스[1]를 되찾고 우리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연설을 귀담아듣는 것을 눈치채고 카이사르를 돌아보며 이렇게 외쳤다.
"임페라토르여! 저는 오늘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감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후 10군단은 1군단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은 끝에 패주시키는 데 성공했고, 폼페이우스군은 급격히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했다. 크라스티누스는 처음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격투를 벌이다가 적 군단병이 내지른 글라디우스에 입을 관통당하여 전사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전투가 끝난 후 크라스티누스의 유해를 찾아낸 뒤 자신이 그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며 그를 기리는 의식을 거행하고 제단을 세웠다고 한다.

파르살루스 전투 후, 10군단은 다른 베테랑 전사들과 함께 제대를 요구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자신이 폼페이우스를 잡고 돌아가서 그들을 제대시켜주고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800기 남짓한 기병대와 6군단의 2개 보병대를 이끌고 폼페이우스를 추격했다. 이후 10군단은 7군단, 9군단, 12군단과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캄파니아에 주둔한 채 카이사르가 자신들에게 보상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망명하려 했다가 살해된 이집트에 들어갔다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소식이 끊겨버렸고, 세간에서는 카이사르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베테랑 장병들은 이러다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10군단 장병들이 이를 주동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고위 장교가 살해되었고, 여러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했다. 카이사르를 대신해 로마를 통치하던 기병장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들을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다. 기원전 47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소아시아에서 침략 행위를 벌이던 폰토스 왕국파르나케스 2세젤라 전투에서 격파한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 돌아온 뒤 군단병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법무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살루스티우스와 함께 온 원로원 의원 2명을 살해했고, 살루스티우스는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고 탈출했다.

결국 카이사르는 개인적으로 반란군 숙영지에 직접 가기로 했다. 그는 위험하다며 말리는 수행원들을 뿌리치고 숙영지로 들어간 뒤 단상에 서서 군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 지 물었다. 이에 병사들은 한 목소리로 제대시켜달라고 외쳤다. 그들은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속주에서 할거하는 폼페이우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자신들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제대하겠다고 협박해 카이사르가 이를 무마하기 위해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딱 한 마디만 했다.
"제대를 허락한다."

그 때까지 기세등등하던 장병들은 카이사르의 말에 크게 놀랐다. 카이사르는 그런 그들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시민 여러분(Quirites)[2], 그대들은 이제 전장에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다. 안전한 곳에 가서 휴식을 취하라. 보상은 반드시 주겠지만, 다른 군단들과 함께 아프리카로 가서 원정을 완료하고 돌아온 후에 그렇게 할 것이다."

그 후 카이사르가 진영을 떠나려 하자, 군단병들은 카이사르에게 달려가서 자신들도 원정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오랜 세월 함께 싸워온 그들이 자신의 약속을 믿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것에 깊이 실망했다며 거절했다. 군단병들이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자, 카이사르는 오랫동안 뜸을 들이다가 10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에게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10군단 장병들은 더욱 절박해졌고, 카이사르에게 자신들도 데려가달라고 간청했다. 카이사르가 10군단만은 자신을 끝까지 따라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란을 주동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매우 실망했다며 끝까지 거부하자, 10군단 장병들은 10분의 1형을 받을 테니 제발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카이사르는 주변 장교들의 간곡한 설득에 '마지 못해' 10군단도 받아들였고, 반군 병사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다. 다만 반란을 주동했던 자들의 명단을 비밀리에 작성하고 다가오는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지점에 배치시켰다.

이상의 내용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에 실린 유명한 일화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으며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카이사르는 내전 초기에 9군단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10분의 1형을 감행하겠다고 위협해 겨우 복종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10군단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4개 군단이 전부 반란에 가담했는데, 카이사르가 '퀴리테스'를 운운했다는 이유로 저절로 반란을 지속할 생각을 버리고 카이사르에게 자신들을 다시 받아달라고 애원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카이사르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창조된 이야기를 수에토니우스가 별다른 검증 없이 실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아피아노스 등 다른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킨 여러 군단과 장기간 협상한 끝에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막대한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원정에 동참하게 했다고 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실제 상황과 부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 후 10군단은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동행했고, 탑수스 전투에서 2군단과 함께 우익을 맡았다. 익명의 저자가 저술한 <아프리카 전쟁기>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부하들은 얼른 싸우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공격 명령을 내릴 생각이 없었고, 병사들은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러던 중 10군단 병사들이 나팔수에게 공격 신호를 보내도록 강요했고, 나팔수는 강요에 못 이겨 나팔을 불었다. 10군단이 단독으로 적을 향해 뛰어드는 걸 목격한 카이사르는 그들을 제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 후 10군단과 2군단은 적군을 순식간에 격파한 후 방향을 틀어 적의 중앙을 강타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때 10군단은 자신들에게 끈질기게 맞서는 폼페이우스파에게 분노해 카이사르의 만류를 무시하고 10,000여 명의 적병을 학살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아프리카 원정에 마무리된 뒤, 10군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고 퇴역병들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에 정착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에서 세력을 다시 일으킨 폼페이우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진군하던 중 나르보를 통과했을 때, 퇴역 군인들이 자신들도 함께 가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10군단을 다시 조직하라고 명령했고, 10군단은 안토니우스의 지휘를 받으며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10군단은 히스파니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인 문다 전투에서 우익을 맡아 언덕에 포진한 적을 상대로 악전고투한 끝에 적군의 좌익 대열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적군 사령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즉시 라비에누스에게 우익에서 병력을 빼서 좌익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예비대로 편성되어 있던 우익 부대가 좌익 쪽으로 이동하자, 그때까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단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국왕 보구드의 기병대가 적의 우측면을 파고 들어가 후방 기지를 위협했다. 라비에누스는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5개 코호트를 이끌고 기지를 지키려 했다. 라비에누스가 기지로 달려가는 걸 본 폼페이우스 군단병들은 그가 달아난다고 오해해 공포에 질려 패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선이 무너졌고, 카이사르군은 이때를 틈타 맹공을 가해 적을 잡히는 대로 쳐죽였다. 그나이우스는 패배를 직감하고 개인 경비대를 이끌고 코르도바를 향해 달아났고, 미처 달아나지 못한 폼페이우스군은 기지를 점거한 보구드의 기병대에게 가로막혀 모조리 몰살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폼페이우스군은 3만 명에 달했으며, 카이사르군은 7천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한다.

5.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히스파니아 원정을 마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돌아간 10군단 퇴역병들은 기원전 44년 경애하는 지휘관이었던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카이사르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이후 그들은 해방자 내전에 투입되었고,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의 지휘하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간의 갈등이 불거졌을 때, 10군단은 안토니우스에게 충성을 바쳤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원전 41년 또는 40년에 '10군단 프레텐시스(Legio X Fretensis)'를 별도로 창설했다.

10군단은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고,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도 안토니우스를 따랐다. 그러나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로 도피하자, 그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한 뒤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향한 최후 공세를 단행했을 때 함께 했다. 이후 10군단 퇴역병들은 서부 그리스의 파트라스에 정착했다.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가 칸타브리아 전쟁을 단행하기 위해 10군단에게 소집령을 내리자, 이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위해 정착지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주동자를 체포해 처형했고, 에퀴스트리스라는 호칭을 박탈했다.

이후 10군단은 일부가 갈바 황제에 의해 다른 군단에서 차출한 백인대장과 병사들로 재구성되어 10군단 게미나(Legio X Gemina)가 되었다. 10군단 게미나는 이후 소위 '갈바 군단'으로 불리면서 이후 내내 로마 제국 방위에서 맹활약했다가 정예 코미타텐세스 부대로 개편되었고, 이 부대는 테마 제도 개편 때까지도 생존하여 디라키움 전투 때까지 존속했다.

한편 10군단 게미나 창설 당시 이 군단에 들어가지 못한 10군단 에퀴스트리스의 잔존 부대들이 있었는데, 동방에 파견된 게르마니쿠스가 이들의 전투력과 복무 상태를 보고 카이사르의 그 자랑스런 부대가 오늘날 어찌 이 꼴이 되었느냐고 한탄했을 정도로 전투력이 열악했다고 한다. 이 부대는 향후 리미타네이 부대들을 이루게 되었다가 이슬람 정복기에 소멸했다.[3]


[1] Dignitas: 로마 시민이 일생 동안 획득한 개인의 평판, 도덕적 지위, 윤리적 가치[2] 카이사르는 평소에 병사들에게 연설할 때 항상 '전우 여러분(Commilites)'이라고 호칭했는데, 병사들을 시민 여러분이라고 부른 것은 너희들은 이제 내 병사가 아니다라는 의미였다.[3] 훗날 시리아 일대의 옛 로마군 부대원 후손들이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하여 카라비시아니 해군 테마를 이루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10군단 에퀴스트리스에서 기원하는 동로마군 리미타네이 주둔지는 시리아였으므로 이들이 해당 리미타네이 부대원들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확실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