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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 삼두정치,(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 독재관 | ||
사건 · 사고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 ||
기타 |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차르 · 카이저), |
1. 개요
Legio IV Macedonica. 상징은 황소.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라인 전선에 배치되었다. 70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해체되었다.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49년 내전을 감행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들은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첫번째 전투를 치렀다. 파르살루스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에는 마케도니아 속주에 그대로 주둔했기 때문에 '마케도니카(Macedonica)'라는 별칭이 붙었다. 카이사르는 내전을 마무리하고 종신 독재관에 취임한 뒤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했는데, 4군단 역시 원정에 동원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원정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취소되었다.기원전 44년 여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이탈리아로 소환되었지만 얼마 후 카이사르가 남긴 유언에 의해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 편에 섰다. 기원전 43년 4월 무티나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지휘하에 안토니우스와 맞서 싸웠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그 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뒤 발칸 반도로 출진할 때 함께 했으며,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 군대를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41~40년 페루시아 내전 시기에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서서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맞서 싸워 옥타비아누스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에도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섰고, 악티움 해전에 참전했다. 내전이 종식된 후 4군단 출신 퇴역병들은 베네치아 일대에 정착했다.
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처음부터 지지해준 4군단을 스페인 타라코나 지방에 재배치한 뒤 칸타브리아 전쟁에 투입했다. 칸타브리아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헤레라 데 피수에르가로 이전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시기 4군단 출신 퇴역병들이 정착해서 세운 도시가 현재의 콰르탕고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콰르탕고의 옛 지명이 콰투오르(quattuor, 라틴어로 4를 의미한다)인 것에서 비롯된 가설이다. 안달루시아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 서기 1세기경에 세워진 비문에는 이들이 토목 공사를 수행했다는 내용이 많이 실려 있다.41년 또는 43년,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4군단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의 중심 도시인 모군티아쿰(현재 독일의 마인츠)로 이전시켰다. 이는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에 동원된 14군단 게미나를 대체하기 위한 조치였다. 4군단은 최근 창설된 22군단 프리미게니아와 요새를 공유했다. 22군단은 요새의 좌측면에 배치되었고, 4군단은 우측면에 배치되었다.
68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네로 황제의 폭정을 규탄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라인 강 상류 방면 로마군 사령관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가 반란군 토벌에 나섰는데, 4군단 역시 루푸스를 따라갔다. 반란이 성공적으로 진압되고 빈덱스가 자결한 뒤, 4군단을 비롯한 라인 전선 로마군 장병들은 루푸스에게 황제가 되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루푸스는 끝까지 거부했고, 군단병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네로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 사이 네로는 궁지에 몰린 끝에 자살했고, 갈바가 새 황제에 올랐다.
4. 네 황제의 해 시기
갈바는 루푸스를 잠재적인 정적으로 여기고 해임시킨 뒤 방탕하고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비텔리우스와 늙고 장애가 있는 호르도니우스 플라쿠스를 라인 군단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69년 1월 갈바에게 불만을 품은 군단병들이 비텔리우스를 받들어 반란을 일으키면서, 갈바의 이 선택은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4군단은 비텔리우스를 제일 먼저 황제로 추대했고, 대다수 장병들은 비텔리우스를 따라 이탈리아로 진격해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갈바를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격파하고 비텔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하는 데 일조했다. 비텔리우스는 4군단 장병 일부를 프라이토리아니에 선임하는 것으로 보답했다.그러나 69년 10월, 4군단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내세운 도나우 전선군과의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패배했다. 살아남은 장병들은 로마에서 끝까지 항전했지만, 그 해 12월 로마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궤멸되었다. 한편,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에서는 로마가 내전으로 정신 없는 틈을 타 독립을 꾀한 바타비족이 바타비아 반란을 일으켰다. 4군단은 이 반란 기간 동안 바타비족과 이에 호응한 게르만인들의 침략을 번번이 격퇴해 모군티아쿰을 사수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들이 비텔리우스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는 점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기고 70년에 해산시키고, 4군단 플라비아 펠릭스를 창설했다.
5. 이후
4군단은 달마티아에 있는 부르눔에 [1]잠시 주둔했으며, 이후에는 85년경 모에시아로 배치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 동안, 알레마니족과 다키아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훗날 트라야누스 황제의 군대와 합류하여 다키아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후 4군단은 3세기의 위기와 동남방으로 진주한 고트족의 위협속에 약 200여년간 서기 4세기까지 모에시아에 상주해있었지만, 이후 어떠한 사료에서도 해당 군단은 언급되지 않으며 결국 영영 역사속으로 사라진다.#[1] 오늘날 크로아티아 내륙에 있는 소규모의 고대 도시로써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