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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차르 · 카이저), |
1. 개요
Legio XI Claudia.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도나우 전선에 배치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다.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59년 갈리아 전쟁을 준비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12군단 빅트리스와 함께 창설되었다. 이들은 갈리아로 집단 이주하던 헬베티족과의 전쟁에 참여했고, 뒤이어 게르만계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와 맞붙은 보주 전투에서도 참여해 결정적인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의 벨가이 원정에도 참여했으며, 사비스 전투 당시 8군단 아우구스타와 함께 중앙 대열을 맡아 비로만두이족을 격파해 승리에 일조했다.이후에도 카이사르가 8년간 갈리아 전쟁에서 치른 전투에 대부분 참전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를 따라 이탈리아로 남하했고, 카이사르가 1차 히스파니아 원정을 단행한 동안 아풀리아에 주둔해 발칸 반도에 있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동행했고,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뒤이은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군단은 해산되었고, 퇴역병들은 중부 이탈리아의 보비아눔에 정착했다. 그러다 기원전 42년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재구성되어 필리피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에 돌아온 군단은 기원전 41년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옥타비아누스 편에 서서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대적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시칠리아를 점령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 맞서 시칠리아 내전을 단행했을 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미비해서 분명하지 않다. 또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도 참전했하여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격파했다. 이들의 악티움 해전 참여는 군단 병사들의 묘비에 기념되었다.
3. 도나우 전선 군단
11군단은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발칸 반도로 파견되어 도나우 전선의 방비를 맡았다.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 로마군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었을 때, 11군단은 달마티아 해안의 부르눔(현재 크로아티아 카스탄예)에 7군단 클라우디아과 함께 주둔했다. 42년 달마티아 총독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11군단은 7군단과 함께 스크리보니아누스의 매수에 넘어가지 않고 클라우디우스 1세를 끝까지 따랐다. 클라우디우스 1세는 반란을 진압한 뒤 이에 보답하고자 두 군단에게 '클라우디아 피아 피델리스(Claudia Pia Fidelis: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하고 충실하다)'라는 칭호를 선사했는데, 훗날 클라우디아로 약칭되었다.58년 7군단이 부르눔을 떠나 도나우 강 인근인 베오그라드 동쪽의 비미나키움(현재 세르비아 코스톨라츠)으로 이전했을 때, 11군단은 여전히 부르눔에 남았다. 69년 네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다른 도나우 전선 군단들과 함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편에 섰다. 이후 다른 도나우 전선군과 함께 오토를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내세운 라인 전선군이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오토를 격파하고 오토가 자결하면서 실패했다. 비텔리우스는 7군단을 포함한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켰다.
이에 원한을 품은 채 도나우 전선으로 돌아간 그들은 유대 반란 진압을 도맡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며 반기를 들었다. 이후 7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하에 다른 도나우 전선군과 함께 이탈리아로 진격해 69년 10월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병들을 격파하고 크레모나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로마로 진격해 그해 12월 시가전 끝에 로마를 공략하고 비텔리우스를 처단함으로써 복수를 마무리했다.
71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의 빈도니사(현재 스위스 빈디슈)로 옮겨져 라인 전선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았고, 3군단 플라비아 펠릭스가 부르눔에 대신 주둔했다. 73~74년 라인강 동쪽 강둑에서 게르만 습격대와 맞붙어 승리를 거뒀으며, 83년 모군티아쿰(현재 독일 마인츠)에 임시로 이동해 도미티아누스가 단행한 차티족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101년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에 참여한 뒤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브리게티오(현재 헝가리 쇠니)로 이전하면서, 30년 만에 도나우 전선으로 돌아왔다. 114년 이전, 도나우 강 삼각주 인근의 하 모이시아 속주의 두로스토룸(현재 불가리아 실리스트라)로 이전되었다.
11군단은 도나우 전선을 방비하는 것 외에도 분견대를 크림 반도로 파견해 1군단 이탈리카, 5군단 마케도니카와 함께 해안가에 조성된 그리스 계열 마을들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여기에 카르파티아 산맥 남동부의 부저우 계곡에 있는 드라슈나에 5군단 마케도니카와 함께 요새를 건설했으며, 모이시아 속주의 주도인 토미스의 방위를 맡기도 했다. 132~136년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이 벌어졌을 때 11군단 분견대가 유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황제를 자칭하자 즉시 세베루스를 지지했다. 다만 세베루스가 로마로 행진했을 때는 따라가지 않고 도나우 전선을 지켰다. 이후 세베루스가 동방에서 황제를 자칭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을 때 함께 했다. 그들은 1군단 이탈리카와 함께 비잔티움을 포위했으며, 뒤이어 킬리키아 관문을 돌파하고 이수스 전투에서 세베루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이후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동참하여 198년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 공략에 기여했다.
260년 갈리에누스와 포스투무스간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갈리에누스를 지지했다. 갈리에누스는 이에 보답하고자 'Pia VI Fidelis VI(6번 헌신하고 충실함)'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는 내용의 동전을 주조했다. 273년 다른 4개 군단과 함께 요르단 일대의 도로 건설 활동에 참여했다. 이 사실은 콰스르 엘 아자크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휘하에 이집트에서 일어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의 반란 진압을 수행했으며, 3년 후에는 또다른 분견대가 마우레타니아로 파견되었다. 이는 서기 4세기경에 사망한 11군단 소속 군인 아우렐리우스 수데센티우스의 묘비가 마우레타니아 지방에서 발견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302년 율리우스와 헤시키우스라는 이름의 군단병이 두로스토룸에서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고문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11군단은 마기스테르 밀리툼이었던 프라이센탈리스의 지휘하에 최소한 425년까지 도나우 강 유역의 두로스토룸에 계속 주둔하면서 도나우 강 하류 전선을 지켰다. 이후 이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