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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 삼두정치,(로마 공화정의 삼두정치), · 독재관 | ||
사건 · 사고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 ||
기타 | 율리우스력 · 카이사르(칭호),(차르 · 카이저), |
1. 개요
Legio XIII Gemina. 상징은 사자이다.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도나우 전선에 배치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다.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5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벨가이 연합군에 맞서 진군하기 전에 14군단과 함께 창설되었다. 사비스 전투 당시, 막 창설되었던 그들은 14군단과 함께 화물들을 경비하며 숙영지로 이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중 선배 군단들이 네르비 족 등의 갑작스러운 공세로 인해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즉시 전장으로 달려갔다. 네르비족이 7군단과 12군단 전열을 뚫고 자신들에게 몰려들자, 그들은 즉시 전투 대형을 결성해 무질서하게 몰려드는 적군을 물리쳤다. 그 후 카이사르로부터 어서 위기에 몰린 7군단과 12군단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즉시 달려와서 다른 군단들과 함께 네르비족을 섬멸했다.이후에도 카이사르가 8년간 갈리아 전쟁에서 치른 전투에 대부분 참전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할 무렵, 13군단은 카이사르와 함께 루비콘 강 인근에 있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이 자신을 반역자로 규정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13군단을 소집한 뒤 원로원의 부당한 처사에 대응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연설했다. 이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임페라토르를 위해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외쳤다. 카이사르는 즉시 그들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해 이탈리아 반도를 빠르게 장악했다.
그 후 카이사르가 1차 히스파니아 원정을 떠난 동안, 13군단은 아풀리아에 머물면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발칸 반도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를 따라 발칸 반도에 넘어간 뒤 디라키움 공방전과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에는 이탈리아로 보내져서 카이사르가 토지를 나눠주기를 기다렸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느라 소식이 오랫동안 끊기자 7군단, 9군단, 10군단, 12군단이 이러다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로마를 지켰다.
그 후 해산되어 이탈리아의 스펠로에에 정착했다가 기원전 41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재구성된 뒤 시칠리아 내전에 투입되었다. 기원전 32~30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벌어졌을 때 옥타비아누스 편에 섰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된 뒤 해산된 군단의 고참병들이 대거 편입되면서 '쌍둥이'라는 의미인 '게미나(Gemina)'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3. 도나우 전선 군단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13군단을 일리리쿰의 부르눔(현재 크로아티아 크닌)으로 옮겼다. 기원전 15년 슬로베니아 일대에 재배치되어 티베리우스의 지휘하에 판노니아의 부족들을 제압한 뒤 류블랴나에 주둔했다. 한편,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네이메겐 일대에 13군단 장병들의 투구와 조각에 새긴 낙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13군단 분견대가 그 쪽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서기 6~9년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되어 두드러진 활약을 선보였다. 서기 9년 9월 토이토부르크 전투 후 로마군이 대대적으로 개편되었을 때 아우크스부르크 일대로 이동했고, 잠시 동안 14군단 게미나, 16군단 갈리카와 함께 마인츠 일대로 이동했다가 마지막으로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의 빈도니사로 이동해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공 가능성에 대비해 알프스산맥의 고개를 방어했다.13군단은 클라우디우스 1세 치세 동안 판노니아로 파견되어 포에토비오(현재 슬로베니아 프투이)에 주둔했다. 69년 네 황제의 해가 발발하자 다른 도나우 전선군과 함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편에 섰다. 이후 오토를 돕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내세운 라인 전선군이 1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오토를 격파하고 오토가 자결하면서 실패했다. 비텔리우스는 8군단을 포함한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켰다.
이에 원한을 품은 채 도나우 전선으로 돌아간 그들은 유대 반란 진압을 도맡고 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며 반기를 들었다. 7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도나우 전선군을 규합하여 이탈리아로 진격해 69년 10월 2차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병들을 격파하고 크레모나를 공략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로마로 진격해 그해 12월 시가전 끝에 로마를 공략하고 비텔리우스를 처단함으로써 복수를 마무리했다.
70년 바타비아 반란 진압에 나선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의 지휘하에 2군단 아디우트릭스, 21군단 라팍스와 함께 바타비족을 물리쳤다. 도미티아누스 치세 때 빈도보나(지금의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전했다. 86년 데케발루스가 이끄는 다키아인들이 모이시아를 방어하던 13군단을 격파하고 모이시아 전역을 약탈했다. 88년, 모이시아 총독으로 부임한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는 13군단을 비롯한 여러 군단을 이끌고 다키아로 진격했다. 그들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라인강 전선의 게르만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사르마티아 부족과 마르코만니 족이 동방에서 로마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전선이 위험해지자, 도미티아누스는 데케발루스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였다. 로마는 매년 다키아에 8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바쳐야 했고, 그의 왕위 지위를 인정했다. 대신 로마의 '친구'가 되었고, 다시는 로마를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92~93년, 21군단 라팍스가 사르마티아인들의 급습으로 괴멸되자, 13군단은 도미티아누스의 지시하에 보복 원정을 단행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01~102년과 105~106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전쟁을 단행했을 때 참전했으며, 이후 아풀룸(현재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에 주둔하면서 로마 제국이 새로 확보한 다키아 속주의 방위를 맡았다. 113~117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이 벌어졌을 때 13군단 소속 분견대가 참전했으며, 161~166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도 참여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166~180년 마르코만니 전쟁을 수행할 때도 참여했다. 콤모두스 치세 초기인 182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등의 지휘하에 도나우 강과 다키아 속주 사이에 살고 있던 부리족 등 '자유 다키아' 부족들을 공격해 로마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받들었고, 세베루스가 이탈리아로 진군할 때 함께 했다. 이후 세베루스가 동방에서 황제를 칭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물리치기 위해 원정을 떠났을 때도 5군단 마케도니카와 함께 동행하여 킬리키아 관문을 돌파하고 이수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해 198년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공략하는 데 일조했다.
군인 황제 시대 시기인 260년, 13군단의 분견대가 갈리에누스 황제 휘하에서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한 알레만니를 격퇴했다. 갈리에누스는 13군단의 활약에 만족해 그들의 상징인 사자가 새겨진 안토니누스화를 주조했다. 또다른 분견대는 갈리아 제국 황제 빅토리누스를 따랐고, 빅토리누스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금화를 주조했다. 또한, 13군단 분견대는 5군단 마케도니카 장병들과 합친 기동대를 결성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대 고트 전쟁,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대 알레만니 전쟁에 투입되었다. 271년,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13군단의 본부를 새로 편성된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속주의 북쪽 경계에 설치된 라티아리아 요새로 이전시켰다.
297년 13군단 분견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휘 아래 이집트에서 반란을 일으킨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를 진압한 뒤 이집트 북동부 및 중부 일대인 헤르쿨리아 속주에 주둔했다. 이들 부대는 5세기 초 무렵에 하이집트와 상 이집트의 전통적인 국경에 있는 나일강의 전략적 요새인 바빌로니아에 주둔했다고 하며 이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
로마 제국의 직위 목록인 노티타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에 따르면 13군단의 분견대는 일부가 리미타네이로써 시리아에, 또 다른 분견대는 코미타텐세스로써 트라키아 기동군에 배속된 것으로 나와 있다. 전자는 이슬람 정복기에 소멸했을 가능성이 높고, 후자는 트라키아 기동군이 테마 제도 아래 동로마 제국 지역 방위군으로 편성되어 적어도 11세기 초 디라키움 전투 때까지 존속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