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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군단 게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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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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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3. 도나우 전선과 라인 전선4. 브리타니아 전선5. 갈리아 전선6. 도나우 전선

1. 개요

Legio XIV Gemina. 상징은 염소이다.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로마 제국 치세 동안 브리타니아, 라인 전선, 도나우 전선을 오갔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5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벨가이 연합군에 맞서 진군하기 전에 13군단과 함께 창설되었다. 사비스 전투 당시, 막 창설되었던 그들은 13군단과 함께 화물들을 경비하며 숙영지로 이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중 선배 군단들이 네르비 족 등의 갑작스러운 공세로 인해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들은 즉시 전장으로 달려갔다. 네르비족이 7군단12군단 전열을 뚫고 자신들에게 몰려들자, 그들은 즉시 전투 대형을 결성해 무질서하게 몰려드는 적군을 물리쳤다. 그 후 카이사르로부터 어서 위기에 몰린 7군단과 12군단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전달받고 즉시 달려와서 다른 군단들과 함께 네르비족을 섬멸했다.

이후에도 카이사르가 치른 여러 전투에서 참전해 승리에 기여하던 그들은 기원전 54년 11월 퀸투스 티투리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아우룬쿨레이우스 코타의 지휘하에 다른 군단에서 차출한 5개 코호트와 함께 카르누테스 족의 영역에서 겨울 숙영하면서 이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암비오릭스의 난에 휘말려 전멸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이 패배의 원인이 오로지 암비오릭스의 책략에 속은 사비누스의 아둔함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애초에 로마에 적대적인 부족민들의 영역에 군대를 분산시켜 배치한 카이사르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으며, 카이사르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사비누스를 무능한 장군으로 매도했다고 본다. 실제로 독자적으로 노르망디 일대의 갈리아족을 평정했고,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을 떠났을 때 반란을 일으킨 메나피족을 제압하기도 할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던 사비누스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무능하고 겁많은 인물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난을 진압한 후 14군단을 재창설했다.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봉기한 갈리아 연합군에 선배 군단들과 함께 맞섰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 편에 섰고, 카이사르가 1차 히스파니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동행하여 일레르다 전투를 벌였다.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도 따라가서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여했고, 뒤이은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해 승리에 기여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카이사르가 토지를 분배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치르느라 소식이 오랫동안 끊기자, 7군단, 9군단, 10군단, 12군단이 이러다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로마를 지켰다. 그 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동행한 뒤 해산되었다가 기원전 41년 이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재창설되어 시칠리아 내전에 투입되었다. 기원전 32~30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잉 발발했을 때 옥타비아누스 편에 섰고,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따르는 군단병들을 격파했다. 이후 14군단 퇴역병들은 이탈리아의 아테스테에 정착했다.

3. 도나우 전선과 라인 전선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해산된 안토니우스 군단 병사 상당수를 14군단에 편입시켰다. 이때부터 14군단은 '쌍둥이'라는 의미인 'Gemina(게미나)'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들은 일리리쿰 속주에 파견되어 속주민들을 복종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서기 6년 일리리아 대반란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하는 작전에 투입되어 3년간 전쟁을 수행했다. 서기 9년 9월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 로마군은 대대적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14군단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마인츠 일대로 이전되어 16군단 갈리카와 기지를 공유했다. 이 당시 복무했던 14군단 기수 그나이우스 무시우스의 묘비가 마인츠 부근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21년 율리우스 사크로비르와 율리우스 플로루스가 무거운 속주세에 신임하는 갈리아의 투로니족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14군단 분견대가 투입되어 반란을 단시일에 진압했다. 39년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참전했고, 40/41년 겨울 갈바의 지휘하에 마인츠 인근에 거주하던 차티족을 복종시켰다.

4. 브리타니아 전선

43년,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2군단 아우구스타, 8군단 히스파나, 20군단 발레리아 빅토릭스, 그리고 14군단을 동원해 브리타니아 침공을 단행했다. 원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14군단은 레스터 일대에 주둔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 총독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휘하에서 웨일스 북서부의 코르노비아인들을 정벌했고, 나중에는 웨일스 북부의 부족인 데케아기족을 복종시켰다. 이후 잉글랜드 북부의 링컨셔 일대에 재배치되어 브리간테스족을 복종시켰다.

그후 14군단은 10여 년간 웨일스 남부의 실루레스족, 오르도비케스 족, 웨일스 북부의 데케아기족을 격파했다. 55년 이후에는 퀀월의 비로코눔에 주둔하면서 웨일스 일대를 통제했다. 60년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의 지휘하에 모나(현재 앵글시) 섬의 드루이드 성지를 파괴했다. 61년 부디카의 난이 발발하자 파울리누스의 지휘하에 20군단 발레리아 빅토릭스와 함께 진압에 착수해 와트링 스트리트 전투에서 압도적인 군세를 과시하던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네로 황제는 14군단의 활약상에 깊은 감명을 받고 '마르티아 빅트릭스(Martia Victrix: 마르스 신의 승리)' 칭호를 수여했다.

5. 갈리아 전선

67년, 네로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계획하고 14군단을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68년 여름 네로가 갈바의 반란과 원로원의 갈바 지지, 프라이토리아니의 배신에 휘말린 끝에 자결했고, 발칸 반도에서 이동 중이던 14군단은 이 소식을 듣고 멈춰섰다. 뒤이어 집권한 갈바는 14군단에게 발칸 반도에 머물라고 지시했다. 69년 네 황제의 해가 발발하자, 14군단은 도나우 전선의 군단들과 함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를 지지했다. 하지만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병들이 그들보다 먼저 움직여서 오토를 제압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비텔리우스는 다른 도나우 전선군과는 달리 그들에겐 어떠한 처벌을 내리지 않고 브리타니아로 돌려보냈다. 그 후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간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누구에게도 지지를 표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다.

70년 바타비아 반란 진압에 착수한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의 소환령에 따라 히스파니아에서 소환된 6군단 빅트릭스, 1군단 아디우트릭스와 함께 갈리아를 방비했다. 이후 브리타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마인츠 일대로 이동해 1군단 아디우트릭스와 함께 숙영지를 공유했다. 그들은 바타비아 반란으로 손상된 요새를 수리하는 한편 수로, 목욕탕 등 토목 공사를 실시했다. 이들은 때때로 라인자베른과 프랑크푸르트-니드 일대에서 벽돌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83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지령에 따라 1군단 아디우트릭스, 8군단 게미나, 21군단 라팍스, 8군단 아우구스타와 함께 라인강과 도나우 강 사이의 '검은 숲'을 장악하는 원정에 착수해 그곳에 거주하는 차티족을 복종시켰다. 그 후 14군단은 새로 장악한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는 사업을 실시했다. 89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도미티아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14군단은 21군단 라팍스와 함께 사투르니누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게르미니아 인페리오르 총독 라피우스 막시무스가 신속하게 공격하는 바람에 빠르게 진압되었고, 도미티아누스는 반란을 지지한 군단장 및 장교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21군단을 판노니아로 전출시켰다.

6. 도나우 전선

92년 21군단 라팍스가 다키아인들에게 괴멸되었다. 14군단은 이를 대체하기 위해 판노니아로 파견되어 빈도보나(현재 오스트리아 에 숙영지를 세웠다. 101~102년, 105~106년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카르눈툼으로 옮겨졌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때, 14군단의 일부 분견대는 북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연안에서 약탈을 벌이던 유목민족인 마우리족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161~166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 14군단은 상당한 병력을 원정에 참여시켰다. 뒤이은 마르코만니 전쟁 시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4군단의 숙영지인 카르눈툼에 본부를 두고 원정 전반을 이끌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하자, 14군단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선포하고 로마로 진격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몰락시키는 공적을 세웠다. 이후 동방에서 황제를 칭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토벌하는 원정에 가담해 13군단과 함께 킬리키아 관문을 돌파하고 이수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에도 참여하여 198년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 공략에 기여했다. 217년 카라칼라의 파르티아 원정, 231~232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도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242~244년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1세에게 참패하고 포로로 전락하자, 14군단은 레갈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261년 레갈리아누스가 몰락한 후에는 갈리에누스포스투무스 중 갈리에누스를 지지했고, 갈리에누스는 이에 보답하고자 자 'Pia VI Fidelis VI(6번 헌신하고 충실함)'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는 내용의 동전을 주조했다. 268년 갈리에누스가 살해되자, 그들은 편을 바꾸어 갈리아 제국 황제 빅토리누스를 지지했다. 그러다 아우렐리아누스로마 재통합 전쟁을 단행해 갈리아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로마 제국에 도로 편입되었다.

368~369년, 발렌스 황제는 14군단의 숙영지인 카르눈툼에 본부를 설치하고 고트족의 왕 아타나리크와 전쟁을 벌였다. 14군단은 이후에도 카르눈툼에 계속 머물면서 도나우 전선을 지켰다. 4세기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트라키아 야전군에 편재되었고 덕택에 5세기 초 발간된 로마 제국의 직위 목록인 노티타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에서 거론된다. 트라키아 야전군이 동로마 제국 트라키시온 테마로 개편될 때 그 예하 부대로 들어갔을 개연성이 크다. 이 부대는 이후 디라키움 전투 때까지 존속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