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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89년 |
직위 | 집정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 |
반란 대상 | 도미티아누스 |
재임기간 | 로마 제국의 집정관 |
82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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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플라비우스 왕조의 반란자.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원로원의 갈등이 격화된 계기가 된 인물이다.2. 생애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인물이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기 전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로마 공화정 말기 농지법 개혁과 시민권 확대를 추진하다가 피살된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로날드 사임에 따르면, 그는 761년경 마케도니아에서 총독으로 활동했으며, 78년부터 81년 사이에 유대 총독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는 82년 7월 보결 집정관을 지냈으며, 4개 군단으로 구성된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을 맡아 89년까지 역임하였다. 89년 1월 1일, 사투르니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는 불확실하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사투르니누스가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비웃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열받아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지만, 이것이 사실과 부합한지는 알 수 없다.사투르니누스는 반란을 일으키면서 병력을 규합하려 했지만, 인근의 하부 게르마니아 지방 총독 라피우스 막시무스가 신속하게 공격하는 바람에 빠르게 진압당했고,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결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사투르니누스는 자결하기 전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에 관한 문서를 모조리 소각했다고 한다. 한편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히스파니아 제7군단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반란을 진압하러 갔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반란이 진압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사투르니누스와 공범들의 머리는 로마로 보내져 포럼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미티아누스는 총독 한 명이 2개 군단을 동시에 이끌 수 없다는 법안을 제정하였다.
사투르니누스의 반란 후, 원로원 반대파들이 재무관직에 종신 취임하고 밀고자를 대거 고용해 의원들을 숙청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반란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소문이 신빙성 있다고 여기고 원로원을 의심했고, 위험 인물을 가능한 한 솎아내려 들었다. 이로 인해 황제와 원로원간의 갈등은 격화되었고,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