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0c0ff><colcolor=#000> 아우렐리아누스 원정 영어: Aurelian's campaign | ||
아우렐리아누스 원정 전후의 군인 황제 시대 로마 제국의 영토(보라색) | ||
시기 | 270년 ~ 275년 | |
장소 | 이탈리아 반도, 갈리아,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반도, 시리아, 이집트 | |
원인 |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 등 외세의 침략과 갈리아 제국 및 팔미라 제국의 독립으로 삼분된 로마 제국을 재통합하려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도전. | |
교전 세력 | 로마 제국 |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 사산 왕조 반달족 고트족 알레만니 유퉁기족 사르마티아 로마 반란군 |
지휘관 |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 테트리쿠스 1세 제노비아 바발라투스 자브다스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 칸나바우데스 바흐람 1세 펠리키시무스 피르무스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로마 제국의 재통합. |
[clearfix]
1. 개요
서기 270~275년, 게르만족, 사르마티아, 사산 왕조 등 외세의 침략과 각지의 총독들에 의한 반란으로 분열된 로마 제국을 재통합하기 위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원정이다. 군인 황제 시대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 로마 제국이 200년을 더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된 전쟁이었다.
2. 배경
서기 235년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모군티아쿰(오늘날 독일 마인츠)의 군영에서 살해당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게르마니아 전선 군단병들에 의해 새 황제로 추대된 이래, 로마 제국은 미증유의 혼란에 휘말렸다. 막시미누스 황제는 3년 동안 게르만족을 상대로 소모전을 전개하면서 막대한 세금을 속주민과 이탈리아 본토의 주민들로부터 뜯어내 군자금을 마련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아프리카 속주의 유지들이 238년 막시미누스의 세금 징수인들을 살해하고 관청을 파괴한 뒤,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고르디아누스 1세와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후 전개된 내전에서 여섯 명의 황제가 잇따라 옹립된 끝에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가 최종적으로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당시 13살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원로원과 관료 및 근위대장 등이 어린 황제의 업무를 대리했고, 어머니인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241년 딸 트란퀼리나를 고르디아누스 3세와 결혼시키고 근위대장으로 발탁된 티메시테우스가 전권을 쥐고 국정을 운영했다. 242년 사산 왕조의 제2대 샤한샤였던 샤푸르 1세가 로마 제국의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시리아 속주의 대도시인 안티오키아를 위협했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황제를 대동한 채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로마군은 티메시테우스의 지휘하에 레세나[1]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사산 왕조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티메시테우스가 243년 이질에 걸려 돌연 사망했고, 고르디아누스 3세 역시 244년 2월 신임 근위대장인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암살되거나(로마 측 기록) 사산 왕조와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사산 왕조 측 기록).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군대에 의해 새 황제로 추대된 뒤 샤푸르 1세와 협상한 끝에 로마군이 점령한 영토를 페르시아 제국에게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귀속되는 걸 용인했으며, 금화 500,000데나리우스를 페르시아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바치기로 했다. 그는 이 배상금 지불을 위해 동방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물었고, 이로 인해 민심이 요동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244년 늦여름 로마로 귀환한 뒤 248년 4월 21일 로마 건국 1,000년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그러나 248년 말, 동게르만계 고트족과 서게르만계 콰디족이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략하여 마르시아노폴리스를 포위했으며, 동방에서는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부과한 막대한 세금에 반발한 시민들이 마르쿠스 요타피아누스의 지휘에 따라 폭동을 일으켰으며, 도나우 강 전선 로마군도 파카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필리푸스는 일단 발칸 반도 문제부터 수습하기로 하고, 다뉴브 강 방면군 사령관 데키우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데키우스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249년 봄 반란을 일으켜 수도 로마로 진군했다. 249년 9월 데키우스의 반란군은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를 물리쳤고, 패배한 필리푸스는 부하들에게 버림받자 절망에 빠져 자살했다. 로마에 있었던 아들 필리푸스 2세 역시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병사들의 손에 의해 제거되었다.
데키우스는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가 된 뒤 원로원이 선사한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가문의 이름으로 채택하고, 로마 재건을 위해 수많은 공공 건축물을 보수하며 신축 건축물을 입안해 건설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서의 직위를 인정받은 뒤 이미 사라져버린 감찰관직을 부활했다. 또한 제국에 대한 로마인의 충성심을 끌어올려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전국에 희생제를 지내라고 명령했는데, 이에 따르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했다. 그러나 251년 6월 발칸 반도에서 활개치던 고트족을 물리치기 위해 진군했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아들인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와 함께 전사했다.
데키우스 사후 장병들에 의해 새 황제로 옹립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고트족의 왕 크니바와 협의한 끝에 고트족이 확보한 전리품과 포로들을 그대로 데리고 가는 걸 용인하고, 로마군은 고트족에게 다양한 편의품을 제공하며, 고트족이 로마 영토를 다시 침범하지 않는 조건으로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제공하는 아주 굴욕적인 평화협약을 맺었다. 그후 로마로 귀환한 뒤 원로원이 황제로 추대한 데키우스의 아들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고, 자신의 아들인 볼루시아누스를 카이사르로 지명했다. 그러나 로마 귀환 직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인명이 죽었고, 호스틸리아누스 역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갈루스는 친아들 볼루시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승격시켜 본인과 아들의 지위를 공고히하고 전염병 퇴치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제국 곳곳에서 그의 통치에 반기를 든 무리가 속출했다. 동방에서는 안티오키아의 귀족인 마리아데스가 반란을 일으켜 시리아와 카파도키아를 파괴한 후 진압군에게 패배하자 사산조 페르시아로 도망쳤다. 샤한샤 샤푸르 1세는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아르메니아를 침략했고 253년 바르바리소스를 기습하여 그곳에 주둔한 로마 군단을 섬멸했다.(바르바리소스 전투) 이후 샤푸르 1세는 전력의 공백이 생긴 시리아 지역을 침공하여 안티오키아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을 파괴했다. 샤푸르 1세는 254년에도 침략을 개시했지만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가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우라니우스는 곧 황제를 자칭하고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동전을 주조했다.
한편,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은 고트족의 크니바 왕이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포로를 획득하고 매년 상당한 양의 황금을 얻게 되자 자신들도 똑같은 권리를 얻기 위해 253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쏟아져 들어와 소아시아 일대를 휩쓸었고, 에페수스를 불태우며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확보하고 본토로 돌아갔다. 이때 판노니아와 모이시아의 총독이었던 아이밀리아누스가 로마군을 규합하고 침략군을 격퇴해 다뉴브 강 너머까지 내쫓았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아이밀리아누스는 이미 제위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중이었기에 조공의 명목으로 거두어들였던 황금을 군인들에게 은사금으로 나눠주었고, 군인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리고 아이밀리아누스는 도나우 강 방어선 일대의 판노니아 및 모이시아 일대의 군단을 이끌고 그대로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다. 연공금이 끊긴 고트족은 다시 제국을 침략하여 아이밀리아누스가 주력군을 대거 이끌고 가버려서 힘의 공백이 생긴 도나우 강 전선을 가볍게 돌파하고,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옛 마케도니아의 부유한 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했다. 갈루스 황제는 라인(레누스) 강 전선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발레리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한 뒤 로마에 주둔 중인 군대를 동원하여 스폴레티움 들판에서 아이밀리아누스와 맞붙었으나 참패했고,(스폴레티움 전투) 253년 8월 부하들에 의해서 아들인 볼루시아누스와 함께 살해되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갈루스 부자의 수급을 확인한 뒤 로마로 입성한 후, 원로원 의원들에게 트라키아와 동방에서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로마 제국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함과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원로원에게 넘겨주겠다고 했다. 원로원은 그런 그를 '자신들의 장군'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가 갈루스의 잔여 병력까지 규합한 뒤 황제를 칭한 후,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를 살해한 반역자로 규정한 뒤 '국가의 적'을 처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로마로 진군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이에 맞서고자 했지만, 병력 차이가 큰 것을 본 아이밀리아누스의 부하들이 253년 9월 ‘피의 다리’로 알려진 곳에서 아이밀리아누스를 살해하고, 그의 수급을 발레리아누스에게 바쳤다.
발레리아누스는 로마에 입성한 후 일련의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 제국을 혼자서 지탱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뒤, 당시 40세였던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아우구스투스로 선임해 서방을 맡기고, 자신은 동방을 맡기로 했다. 갈리에누스는 기동 야전군을 창설해 메디올라눔(현재 밀라노)에 배치하여 구원이 필요한 곳에 신속하게 이동하여 적을 물리치도록 했다. 또한 전방에 있는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제국의 요충지에 배치하고, 요새화하여 적이 전선을 뚫어도 강력한 요새에 직면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르디아누스 부자, 데키우스, 아이밀리아누스의 사례가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로원 의원들이 군사령관이 되는 것을 금지했고, 문관과 무관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 결과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할 군사령관들은 군사 전문가들이 전담하게 되었고, 원로원 의원 출신 총독은 단지 민정 분야만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로원 의원들의 권력은 약화되어 황제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이렇게 준비를 갖춘 뒤, 갈리에누스는 253년부터 258년까지 5년 동안 도나우 강 유역과 일리리아 일대를 순방했고 대부분의 기간을 라인 강 국경 지역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게르만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라인 강을 수차례 건너 게르만 족의 여러 부락을 불태웠다.
한편, 발레리아누스는 동방으로 가서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수케시아누스 등 유능한 인재들을 발탁해 동방 속주의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고, 도시를 재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사산 왕조의 샤한샤인 샤푸르 1세를 상대로 시리아 속주 내에서 여러 전투를 벌였다. 257년 대도시인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고 시리아 속주를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돌려놨다. 발레리아누스는 원로원에게 승전보를 보냈고, 원로원은 '세계의 복구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한편, 데키우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정책을 이어받아 257년과 258년에 칙령을 잇따라 반포하여 교황 식스투스 2세, 프루덴티우스,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노, 스테파노, 펠리치시모와 아가피토, 라우렌시오, 성 로마누스 오스티아리우스, 성 로렌스 등을 처형했다. 하지만 259년 갈리에누스가 관용령을 선포하고 교회를 복원하고 몰수했던 재산을 신자들에게 돌려주게 하면서, 기독교 박해는 종식되었다.
이렇듯 발레리아누스 부자가 로마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분투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258년에서 260년 사이, 판노니아 방면군 사령관이었던 잉게누우스가 두 부자 황제가 다른 지역에 정신이 팔리느라 자신에게 신경을 못 쓰는 틈을 타 황제를 참칭했다. 이때 도나우 강 유역에서 임무를 수행중이던 갈리에누스의 장남인 발레리아누스 2세가 사망했는데, 기록은 없지만 잉게누우스에게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차남인 살로니누스를 실바누스와 포스투무스의 지도하에 후방에 남겨두고, 260년에 발칸 반도를 지나 아우레올루스가 지휘하는 새로운 기병부대를 이끌고 무르사 또는 시미늄에서 잉게누우스와 격돌해 대승을 거뒀다.(무르사 또는 시미늄 전투) 잉게누우스는 수도로 정했던 시미늄이 무너진 후 도주하다가 사망했다.[2]
그러나 갈리에누스가 잉게누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국경 지대의 일부 병력을 차출한 틈을 타, 서게르만계 알레만니족이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라인 강 하류 방어선을 돌파해 갈리아를 공격했고, 일부는 히스파니아(스페인) 남부까지 도달해 타라고나를 공격했다. 알레만니족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일삼고 이탈리아 반도로 진군해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급히 소집한 로마군의 저지를 받은 그들은 약탈품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철수했다. 그러던 중 메디올라눔에 이르렀을 때, 갈리에누스 황제가 친히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알레만니족은 메디올라눔 전투에서 대패했고 일부 병력 만이 알프스 산맥을 간신히 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다. 260년 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에데사 전투에서 샤푸르 1세의 사산조 페르시아군에게 참패하고, 근위대장인 수케시아누스와 원로원 의원 등 수뇌부와 함께 생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로마 제국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었다. 포스투무스는 갈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실바누스와 살로니누스를 죽이고 갈리아 제국을 건국해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동방 로마군의 기병대 지휘관이었던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는 재정관리인 칼리스투스와 팔미라군의 기병 지휘관이었던 오다에나투스와 함께 킬리키아 및 카파도키아 등 36개 도시를 급습한 샤푸르 1세에 맞서 싸워 성공적으로 격퇴한 뒤, 두 아들인 소 마크리아누스와 퀴에투스를 공동 황제로 내세우며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지에서 마크리아누스 일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여기에 발칸 반도의 주민들이 현지 사령관인 레갈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로마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레갈리아누스는 수개월 동안 황제를 칭하고, 적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싸웠으나 결국 사르마티아계 록솔라니족에게 패배해 살해당했다.
261년 봄,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해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아우레올루스는 261년 봄 또는 초여름에 알리리쿰 전투에서 반란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두고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와 소 마크리아누스 부자를 주살했다. 이후 갈리에누스는 오다에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둑스 로마노룸[3]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에 오다에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여전히 그에게 적대하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처형당한 마크리아누스의 차남이었던 퀴에투스는 칼리스투스와 함께 에메사로 도주했으나, 에메사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갈리에누스는 반란 진압을 대신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262년 오다에나투스에게 코렉토르 토티우스 오리엔티스[4]라는 칭호를 내렸다.
262년, 이집트 총독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했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아우렐리우스 테오도투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고, 테오도투스는 262년 3월 30일 상이집트(이집트 남부)의 고도 테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이밀리아누스를 생포한 뒤 곧바로 처형했다.(테베 전투) 하지만 테오도투스 역시 반란을 꾀하다가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렇듯 이집트를 다스려야 할 이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면서, 이집트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당시 외적의 침략, 내전, 역병, 기근으로 인한 이집트의 참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서신을 남겼고, 이는 이 시대의 혼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소중한 자료로 다뤄지고 있다.
262년, 오다에나투스는 메소포타미아 속주로 진군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수비대를 몰아내고 에데사와 카르헤를 탈환했다. 그후 니시비스로 진군해 역시 탈환하고, 샤푸르 1세가 그동안 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뒤이어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격해 사산조 페르시아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크테시폰에서 서쪽으로 28마일(45km) 떨어진 유대인 도시인 네하르데아를 파괴했다. 263년 말 또는 264년 초에 크테시폰에 도착한 뒤 도시를 포위하고, 주변 일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고트족이 소아시아의 해안지대를 습격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후 샤푸르 1세는 피해를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로마 제국을 상대로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오다에나투스는 오스로에네와 메소포타미아 탈환에 성공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은 뒤 그 중 많은 이를 로마로 압송했다. 263년 말, 갈리에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페르시쿠스 막시무스[5]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오다에나투스가 보내온 포로들을 전리품으로 삼아 개선식을 거행했다.
265년, 갈리에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격해 포스투무스를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을 일단 용인해주기로 결정했다. 황제는 참칭자인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 반도를 공격하지 않고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대신 격퇴하는 조건하에 그가 갈리아 제국의 황제를 칭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후 포스투무스는 로마 제국의 정치 제도를 본떠 제 나름대로의 제국을 운영했다. 267년, 갈리에누스로부터 동방 속주 전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다에나투스는 킬리키아로 쳐들어온 고트족을 물리친 뒤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카 또는 사촌인 마에오니우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아내였던 제노비아는 즉시 마에오니우스를 처형한 뒤 동방의 권력을 이어받아 오데나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바발라투스를 오다에나투스의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배후에서 실권을 잡았다.
267년, 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처음에 흑해를 건너 발칸 반도를 유린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함선을 구성해 지중해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약탈했다. 로마 해군은 이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게르만족들이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챙긴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막지 못했다. 268년, 훨씬 더 많은 침략군들이 해상을 통한 침략을 개시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지난해에 맛본 쓰디쓴 패배를 잊지 않고 해군을 제때에 투입해 트라이스 해전에서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이후 육군을 이끌고 발칸 반도로 진군해 네스토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퇴했다. 그런데 메디올라눔에 남아 있었던 기동 야전군 지휘관 아우레올루스가 갈리아 황제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을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메디올라눔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 전투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메디올라눔에 가둬놓은채 포위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포위 공격 후 승리를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장교들에게 암살당했고, 자신들의 권력을 박탈해버린 갈리에누스에게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던 원로원은 즉시 로마에 남아있었던 갈리에누스의 황후 코르넬리아 살로니나, 3남인 마리니아누스, 이복동생인 소 발레리아누스 등의 황족들을 처형했다.
갈리에누스의 암살 이후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클라우디우스 2세)는 메디올라눔을 공략한 뒤 아우레올루스와 추종자들을 모조리 처형한 후 발칸 반도를 휩쓸며 수많은 인명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있는 고트족을 물리치러 진군했다. 269년, 클라우디우스 2세는 나이수스에서 기병대를 매복시킨 후 고트족을 유인한 뒤 방심한 적을 습격했다. 훗날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오르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때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다고 한다. 이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 50,000여 명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시장에 팔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고트족들은 마케도니아로 탈출했지만 로마 기병대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아 여러 병사들이 굶어죽자 하에무스 산맥으로 숨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 2세는 하에무스 산맥을 포위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 추운 겨울을 보내는 동안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대다수가 사망하고 일부 전사들만 살아남아 로마군에게 투항했다. 로마 원로원은 이 승리에 감격하며 클라우디우스 2세에게 고티쿠스라는 존칭을 바쳤다.
클라우디우스 2세는 고트족을 물리친 뒤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개치고 있었던 동게르만계 반달족을 물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고트족을 몰살시킨 전염병은 로마군에게도 퍼졌고 많은 로마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클라우디우스 2세 마저 전염병에 걸려 며칠간 신음하다가 270년 3월 시르미움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라우디우스 2세가 사망한 후 원로원은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지만 군대는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이 두 개로 양분된 사이, 그동안 로마에 충성을 표하던 팔미라의 제노비아가 마각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브다스를 팔미라군 사령관에 선임한 뒤 아라비아 속주를 공격하도록 했다. 자브다스는 보스트라 전투에서 아라비아 총독이자 로마군의 제3군단 키레나이카를 지휘한 트라수스를 사살하고 아라비아 속주의 주도인 보스트라를 공략한 뒤 제우스-아문 신전을 약탈하여 병사들에게 제물을 나눠줬다. 이후 요르단 계곡을 따라 이동하여 페트라에 무혈 입성했으며, 유대 속주도 손쉽게 장악했다. 270년 10월 이집트 동쪽 국경으로 진격한 자브다스는 로마군의 수비대 장교인 티마게니우스를 회유해 아군으로 끌여들임으로써 총 5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한 뒤,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고 5,000명의 팔미라군 수비대를 남겨뒀다.
당시 이집트 총독이었던 테나기노 프로부스는 해적을 쳐부수러 바다에 나가 있었는데, 뒤늦게 알렉산드리아가 팔미라군에게 함락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급히 돌아와 로마군을 재편성하고, 11월에 알렉산드리아를 되찾은 후 나일 강 삼각주에서 팔미라군을 내쫓았다. 하지만 자브다스는 재차 반격을 가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공략하고, 프로부스를 이집트 남부로 쫓아냈다. 그후 테나기노 프로부스는 바빌론 요새에서 항전했지만, 자브다스가 후방을 매복 공격해 요새를 기습 공략하자 자살했다. 이렇게 이집트를 확보한 뒤, 자브다스는 여세를 몰아 시리아를 완전히 평정했으며, 뒤이어 갈라티아와 킬리키아 등 아나톨리아 반도 대부분을 공략했다. 오직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쪽 끝에 위치한 칼케돈 만이 로마 제국에 끝까지 충성했다.
이렇듯 로마 제국이 미증유의 혼란에 휩싸였던 270년 가을, 아우렐리아누스가 퀸틸루스를 꺾고 로마에 입성한 뒤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공인되었다. 그후 그는 제국을 재통합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3. 전개
3.1. 반달족 격퇴
270년 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활개치고 있었던 반달족, 유퉁기족, 사르마티아인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해 그들을 몰아냈다. 이후 아퀸쿰과 브리게티온 사이의 판노니아 일대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던 반달족의 주력 부대로 눈길을 돌렸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시르미움에 전투 기지를 세운 뒤 각지의 도시들에게"모든 식량과 가축 및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적들로부터 숨기라"
고 명령했다. 반달족은 로마인들의 청야전술에 휘말려 식량이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본토로 귀환하려고 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시 추격하여 이들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반달족 측이 평화를 요청하는 사절을 보내자, 아우렐리아누스는 2,000명의 기병을 보조병으로 보내준다면 식량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달족은 이를 수락했고, 그는 반달족이 도나우 강을 건너는 걸 용인했다. 그러던 중 500명의 반달족 병사들이 본대에서 이탈하여 한 마을을 약탈했다. 이에 로마군이 출격하여 500명 전원을 사살하고, 그들의 지도자는 반달족 지도자들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반달족은 제국의 영토를 떠나 자신들의 영역으로 흩어졌다.
3.2. 알레만니족과의 전쟁
271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발칸 반도에서 반달족과 격돌하느라 주력 병력이 이탈리아 반도를 빠져나간 틈을 타 알레만니족이 유퉁기족, 마르코만니족과 연합하여 이탈리아로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했다. 당시 발칸 반도를 재정비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아우렐리아누스는 이 소식을 접하자 서둘러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는 메디올라눔에 도착한 뒤 침략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들은"우리는 자유인이다. 당신이 싸우고자 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
라는 답신을 보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로 진군하는 그들을 추격했으나, 플라켄티아 인근에서 매복에 걸리는 바람에 패배했다.(플라켄티아 전투)아우렐리아누스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공황에 빠졌다. 당시 로마는 기원전 46년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시를 확장하면서
"로마는 이제 세계의 주인이 되었으니 성벽 뒤에 숨을 이유가 없다"
는 이유로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한 이래 성벽이 없었기 때문에, 알레마니족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신들에게 앞다퉈 희생 제물을 바치며 구원을 호소했고, 많은 이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한 번 졌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재빨리 수습한 뒤 적을 계속 추격했다.이윽고 로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메타우루스 강 인근의 파노에 주둔하고 있었던 게르만인들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고, 많은 이가 강에 뛰어들어 익사했다.(파노 전투) 알레만니족, 마르코만니족, 유퉁기족은 사절을 보내 평화협상을 제안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를 받아들이는 척했다. 그러나 그들이 방심한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 아우렐리아누스는 은밀히 추격하여 파비아에서 섬멸했다.(파비아 전투) 일부 기록에 따르면, 소수의 생존자들은 산악 지대에 숨은 채 저항을 이어나갔지만 얼마 안가 진압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이탈리아에 진입한 게르만족을 토벌하는 데 성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6]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3.3. 펠리키시무스의 반란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
서기 271년, 로마로 귀환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에서 동전 주조를 맡고 있었던 펠리키시무스가 원재료인 은을 빼돌리고 질이 떨어지는 동전을 주조한 사실을 파악했다.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갈리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퀸틸루스, 그리고 아우렐리아누스의 집권 초기에 발행된 은화의 은 함유량이 2~3%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걸 파악했다. 이에 동전을 불신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제국의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시 펠리키시무스를 체포하려고 했다. 그러자 펠리키시무스는 조폐국의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카엘리우스 언덕에서 폭도들과 맞붙어서 모조리 섬멸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이때 7,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피살되었다고 한다.그후 아우렐리아누스는 펠리키시무스를 재판에 회부하여 처형하고, 반란과 연루된 원로원 의원 몇 명도 처형했다. 또한 징벌의 의미로 수도 로마에 있었던 조폐국을 메디올라눔으로 옮겼다. 또한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사비누스를 펠리키시무스의 후임자로 임명하고, 대대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해 오래되고 질 낮은 모든 동전을 회수하고, 5%의 은을 함유한 안토니아니 동전을 주조하게 하면서, 앞으로 발행되는 모든 동전은 이 기준을 따르도록 했다. 이러한 화폐개혁은 274년 경에 완료되었고, 메디올라눔에 옮겨졌던 조폐국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빨간 선 | <colbgcolor=#FFF,#000>서기 3세기 경에 지어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
파란 선 | 기원전 4세기 경에 지어진 세르비우스 성벽 |
펠리키시무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민족이 또다시 수도 로마로 쳐들어오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새 성벽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이 성벽 건설은 로마 시의 취약성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고 기술했다. 황제는 성벽 건설을 군단병이 아닌 시민들 스스로 수행하게 했는데, 아마도 그해 펠리키시무스의 반란에 동참한 행위에 대한 징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건설은 271년 경에 시작되어 4년 안에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마무리 작업은 프로부스 황제의 지휘하에 279년 경에 이뤄졌다고 한다. 여기에 피사우룸과 파눔 포르투나이 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도 요새화했으며, 조화와 단합의 여신이었던 콩코르디아의 이미지를 새긴 주화를 주조하여 모든 로마인이 단합할 것을 촉구했다.
3.4. 고트족 격퇴와 다키아 속주 포기
서기 272년, 일전에 클라우디우스 2세 고티쿠스 황제에게 크게 참패한 후 한동안 잠자코 있었던 고트족이 트라키아, 다키아, 모에시아 속주 등 3개 속주를 침략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안보를 확보하자마자 발칸 반도로 진군해 고트족을 격파하고 도나우 강 북쪽으로 몰아냈다. 이후 도나우 강을 건너 고트족의 영역 깊숙이 쳐들어가서 고트족의 지도자였던 칸나바우데스[7]를 죽이고 5,000명의 고트족 병사를 사살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 공적으로 원로원으로부터 고티쿠스 막시무스[8]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그후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키아에 남아 있었던 모든 군대와 현지 주민들을 도나우 강 건너편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다키아 속주를 포기하고, 국경을 도나우 강변으로 재설정하기로 했음을 의미했다. 그는 도나우 강 이북에 튀어나온 다키아 속주를 지키는 건 외세의 침략과 내란이 끊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며, 다키아 속주로부터 얻는 이익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무익하다고 여겼다. 이에 따라 주민과 군대를 이주시킨 뒤 모에시아 수페리오르 속주를 개편하고,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속주를 편성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대를 방어하게 했으며 세르디카를 다키아 아우렐리아나 속주의 수도로 정하고, 2개 군단과 다수의 보조군 부대를 도나우 강의 중하류 지대에 배치해 경계를 강화했다.
다만 모든 주민이 따라간 건 아니었다. 다키아에 남아있기로 한 이들은 이후에도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둔 채 로마 제국과 교류를 이어나갔다. 훗날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고트족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이루고, 사르마티아인들을 귀속시킬 때 다키아 일대가 로마 제국의 패권하에 도로 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직접적인 통치는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키아 속주에 남겨진 부족들은 서기 5세기까지 다뉴브 강을 건너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라틴계 로마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현재의 루마니아로 이어졌다.
3.5. 팔미라 제국과의 전쟁
발칸 반도 문제를 해결한 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가 통치하는 팔미라 제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제노비아는 아들인 바발라투스를 아우구스투스, 자신을 아우구스타로 칭하며 로마 제국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으며, 이집트와 로마 간의 곡물 교역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로마는 몇 주 만에 빵이 바닥나 기근의 위협을 받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제국을 제압하기로 결심하고, 달마티아와 마우레타니아 기병 및 군단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을 끌어모았다. 여기에 부관이었던 프로부스에게 함대를 맡겨 이집트를 공격하도록 했다.272년, 아우렐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칼케돈에 도착해 팔미라 제국에 끝까지 맞섰던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후 비티니아와 갈라티아 일대를 무혈 접수하고 앙키라를 손쉽게 공략한 뒤 티아나 시로 진군했다. 티아나 시민들이 성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저항하자, 공성전을 감행했다.(티아나 공성전) 그러나 공성전이 쉽사리 진행되지 않자, 황제는 열이 받은 나머지
"도시를 함락하면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않겠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막상 티아나가 함락되자 생각을 바꿔 주민들을 해코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앞서 한 약속을 잊었나며 항의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내가 개 한 마리도 살려주지 말라 한 건 사실이다. 그러니 개를 죽여라!"
라고 대답했고, 병사들은 박장대소하며 기분을 풀었다. 그후 아우렐리아누스는 관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하며, 전쟁에서 이기면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병사들은 이를 기꺼이 따랐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여기에 더해 자의가 아닌 강요에 의해 팔미라 여왕의 병사로 근무했던 자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시리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로마군은 에메사의 성문 앞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한편, 팔미라 제국군의 사령관이었던 자브다스는 안티오키아 근방에서 팔미라 궁기병과 중장 기병대를 이끌고 행군중인 로마군을 습격할 적기가 오길 기다렸다. 이를 눈치챈 아우렐리아누스는 보병대에겐 계속 행진하게 하면서, 몸소 경기병대를 이끌고 팔미라군을 상대하러 갔다. 양측은 곧 맞붙었는데, 경기병대로 하여금 원거리 공격을 가하다가 중장기병대가 접근하기 전에 후퇴한 후 다시 치고 빠지길 반복하는 전술을 적절히 구사한 아우렐리아누스가 완승을 거두었다.(안티오키아 전투) 자브다스는 안티오키아로 후퇴한 뒤 제노비아에게 패전을 보고했다. 두 사람은 딜레마에 직면했다. 당시 아우렐리아누스의 연이은 승리와 관대한 행보 때문에 시리아인들이 동요하고 있었기에, 팔미라군의 패전 소식을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자브다스는 반란을 피할 묘책을 기획했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와 비슷하게 생긴 자를 잡아다가 수레에 싣고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금 완승을 거뒀으며 로마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라고 선전했고, 시민들은 전쟁이 종식되었다며 크게 기뻐했다. 그날 밤, 자브다스는 제노비아와 함께 안티오키아를 극비리에 떠나 에메사로 퇴각했다. 날이 밝을 무렵 아우렐리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 그제야 속았다는 걸 깨달은 주민들은 공포에 질려 팔미라로 도주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즉시 기병대를 파견해 피난 행렬을 가로막게 한 뒤, 절대로 해치지 않을 테니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했다. 시민들은 그제야 안심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갔고,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프네 마을 인근 언덕에 배치되어 있었던 팔미라 궁기병대를 마우레타니아 경기병대를 파견해 가볍게 격파하고(다프네 전투) 라리사 등 여러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272년 6월, 에메사로 진격한 로마군은 제노비아와 자브다스가 대대적으로 동원한 팔미라군과 마주쳤다. 자브다스는 이전의 패배에서 교훈을 얻고, 로마 경기병대가 후퇴하려는 시점에 중장기병대를 갑작스럽게 출격시켜서 미처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도록 했다. 이로 인해 로마 기병대는 크게 고전해, 자칫하면 괴멸될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번에도 적절히 대응했다. 그는 후방에 대기중이던 예비대를 급파하여 아군 기병대를 몰아치고 있는 팔미라 기병대의 후방을 치게 했고, 자신은 중앙의 보병대를 독려하여 팔미라 보병대에 맹공을 퍼부었다. 로마 기병대를 구하러 달려온 병사들은 몽둥이로 팔미라군이 타고 있는 말을 마구 쳤다. 이에 당황한 팔미라 기병대의 공세는 둔화되었고, 그 사이에 팔미라 보병대가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몰아붙이는 로마 군단병들에게 참패했다. 아군이 무너지는 걸 목격한 팔미라 기병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달아났다.(에메사 전투)
이리하여 완승을 거둔 아우렐리아누스는 에메사에 입성한 뒤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를 모신 신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자브다스는 제노비아와 함께 팔미라로 퇴각하면서, 도시 방어를 강화할 시간을 벌기 위해 사막 지대에 매복군을 배치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를 모조리 격퇴하고 팔미라 성벽 앞에 당도했다. 그는 무더운 여름에 공성전을 벌이면 장병들이 고통받을 것을 우려해 제노비아에게
"보석, 은, 금, 비단, 말과, 낙타를 공물로 바친다면 그대의 가족이 원로원의 경의를 받으며 훌륭한 궁전에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
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모욕적인 언사와 함께 거부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공성전에서 친히 전열의 맨 앞에 서서 군대를 지휘하다가 창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이 시기 그는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로마인들은 여자에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며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제노비아의 성격과 위엄을 모르는 자의 말이다. 그녀가 전쟁을 위해 준비한 돌, 화살, 그리고 각종 원거리 무기의 종류를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벽의 모든 구역에 두세 개의 발리스타가 설치되었으며, 그녀의 군용 무기에서 인위적인 불이 뿜어지고 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필사적인 용기로 무장시켰다."
제노비아는 곧 기근이 돌아 로마군이 사막 지대에서 퇴각할 것이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군대가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는 탄탄한 보급로를 확보해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켰고, 페르시아는 마침 샤푸르 1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팔미라에 대규모 병력을 보낼 여력이 없었으며, 그나마 보낸 소수의 병력은 아우렐리아누스가 급파한 기병대에게 격퇴되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누스는 페르시아가 보낸 기병대 중에 일찍이 페르시아에 강제로 복속되었던 아르메니아 왕국 출신이 많은 걸 보고, 그들을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여들었다고 한다.얼마 후 프로부스가 이집트 평정을 완료한 후 아우렐리아누스와 합류하자,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제노비아는 아들인 바발라투스와 함께 가장 날랜 낙타에 올라타 달아났다. 그러나 그녀가 유프라테스 강둑에 도착했을 때 로마군에게 생포되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끌려왔다. 결국 더 이상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자브다스는 272년 말 팔미라의 성문을 열고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특별히 약탈을 금지하는 대신 막대한 양의 황금과 무기, 말, 낙타, 비단, 보석을 헌납하게 했다. 그후 군사 재판을 실시해 자브다스와 그리스 출신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디오니시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팔미라 제국의 핵심 관료들을 처형했지만 제노비아와 바발라투스는 살려줬다. 팔미라에 600명의 로마군 병력을 남기고 에메사로 돌아가 승전에 따른 포상과 징벌을 실시하던 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에게 어떻게 로마의 황제들에게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제노비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아우렐리아누스는 제노비아를 로마로 끌고 가 개선식에 참석시키게 한 뒤 자신 역시 귀국길에 올랐다가 도나우 강을 건너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던 사르마티아인들을 토벌했다. 그런데 273년, 팔미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노비아의 친척인 셉티미우스 안티오쿠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600명의 로마군 수비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9]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단숨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3일 동안 약탈하는 걸 허용했다. 이때부터 동방에서 번영하는 도시였던 팔미라는 쇠퇴했고, 나중엔 촌락으로 전락했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피르무스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에 대한 밀 공급을 또다시 끊었다. 이에 아우렐리아누스는 이집트로 진격해 반란을 몇 주만에 평정하여 이집트의 소요를 잠재웠다. 이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무세이온이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동방의 질서를 회복한 공적으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레스티투토르 오리엔티스[10]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3.6. 갈리아 제국과의 전쟁
서기 274년 로마로 귀환한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 제국 평정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갈리아 제국의 황제였던 테트리쿠스 1세는 아들인 테트리쿠스 2세를 카이사르로 삼고 군림하고 있었다. 274년 여름, 로마군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로 이동하여 현지 병력과 합류한 뒤, 론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했다. 테트리쿠스 1세는 군대를 이끌며 남하했고, 양군은 274년 2월 또는 3월에 살롱에서 마주쳤다. 테트리쿠스 1세는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위명을 두려워했고, 병사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기에 승리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준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전투 당일 테트리쿠스는 아들과 함께 아우렐리아누스에게 귀순했다. 갈리아 제국의 장병들은 두 사람의 배신에 비난을 퍼부으며 전투를 감행했으나, 끝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섬멸되었다.(살롱 전투)아우렐리아누스는 뒤이어 갈리아 벨기카 속주의 주도인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 독일 트리어)에 거점을 두고 테트리쿠스 1세의 뒤를 이어 황제를 자칭한 파우스티누스의 진압에 착수해 단번에 격파했다. 파우스티누스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전사했거나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가 브리타니아 섬에 소유하고 있었던 영지는 몰수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트레베로룸에 입성하여 자신의 주화를 주조하게 했고, 갈리아 제국의 관원들이 제 자리를 계속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여전히 복종하지 않고 있었던 루그두눔(현재의 리옹)을 점령하고 막대한 벌금을 매겼다. 이렇게 해서 갈리아 제국을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 아우렐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거대하고 화려한 개선식을 열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개선식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왕의 전차 3대가 있었다. 하나는 은, 금, 보석으로 장식된 오다에나투스의 전차였다. 두 번째 전차는 페르시아 왕(바흐람 1세)이 선물로 보낸 것이었고, 세 번째 전차는 제노비아가 훗날 로마로 입성하기를 희망하면서 자신을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이에게 패배한 뒤 로마에 들어갔다. 4마리의 사슴이 끄는 또다른 전차가 있었는데, 이것은 고트족 왕의 것이라고 한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에게 승리를 보고하고 유피테르 신전에서 코끼리 20마리, 리비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온 4마리의 호랑이, 기린, 무스 및 여러 동물들을 포함한 200마리의 가축화된 야생 동물을 바쳤다. 고트족, 알란족, 록솔라니족, 사르마티아인, 프랑크족, 수에비족, 반달족을 비롯한 여러 야만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반란에 대한 징벌로 끌려온 팔미라 귀족들과 이집트인, 갈리아인들이 있었다. 개선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갈리아의 왕 테트리쿠스와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였는데, 각자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연도에 늘어선 로마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제국의 재통합을 환영했으며 원로원은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세계의 재건자'라는 뜻의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개선식이 끝난 뒤 제노비아를 로마 근교 티볼리의 어느 저택에서 살게 해줬고 그녀의 세 딸은 로마인 귀족들과 결혼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제노비아의 집은 훗날 관광 명소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또한 테트리쿠스와 그의 아들은 예전의 재산을 그대로 유지했고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테트리쿠스는 나중에 루카니아 총독을 역임했다.그후 아우렐리아누스는 일찍부터 아내로 두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때까지 아우구스타 칭호를 주지 않았던 울피아 세베리나에게 비로소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했다. 그녀가 아우구스타가 되었음을 알리는 주화에는
"마테르 카스트로룸 에트 세나투스 에트 파트리아이"[11]
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또한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무적의 태양신) 숭배 의식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태양신 숭배를 통해 로마 제국의 모든 민간인 및 군인들을 하나로 단합하여 외적에 맞서 싸우기를 희망했다. 이 숭배의 중심지인 신전은 274년에 아우구스투스 영묘 북부 지역에 지어졌고, 12월 25일을 솔 인빅투스 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는 강력한 통치권자가 없다면 하나의 구심점이 없어 따로 노는 제국의 서부와 동부를 하나로 이어 놓게 하려는 통합의 목적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동전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면서 "데우스 에트 도미누스 나투스"[12]
라는 문구를 덧붙이도록 하고, 로마 황제의 모든 명령에는 하나의 강력한 신과 통치자권의 위엄을 넣도록 했다. 이는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채택한 전제군주정(도미나투스)에 그대로 재도입되었다.3.7. 마지막 원정
서기 274년 말 또는 275년 초, 게르만인들이 빈델리키아(오늘날 독일 님부)에서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쳐들어왔다. 이와 동시에, 갈리아에서 셉티미우스라는 인물이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갈리아로 진군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게르만인들을 격멸했다. 이후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복수하고 메소포타미아를 로마 제국의 통치하로 되돌려 놓기 위해 동방으로 출진했다. 이때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의 비서들 중 한 명인 에로스와 마찰을 빚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에로스에게 거칠게 화를 내며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공포에 질린 에로스는 사형 집행서를 위조하여 여러 고위 관료들의 이름을 적은 뒤 이 문서를 관료들에게 보여줬다.아우렐리아누스는 군인 황제 시대에 등장한 로마 황제들 중 가장 유능한 황제였지만,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는 집권 이래 군대의 엄격한 규율을 민간에 그대로 적용했고, 군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민간인보다 책임을 엄하게 묻도록 했다. 따라서 그의 치세동안 범법자가 된 이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법 그대로 처벌받았다. 여기에는 황제의 가족, 측근 혹은 친구라고 해도 예외가 없었다. 상관의 아내와 불륜을 맺었던 한 부하는 양 팔과 양 다리가 두 그루의 나무에 묶인 후 나무들이 잡아당겨지면서 온 몸이 찢겨지는 처벌을 받았고, 병사들도 범죄를 저지르면 가중처벌을 받았다. 이렇듯 아우렐리아누스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익이나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관료들은 이런 황제를 잘 알고 있었기에 두려움을 품었고, 이내 자기들이 죽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결국 275년 9월, 에로스와 노타리우스 무카포르 등의 관료들은 트라키아의 카이노프루리움에서 아우렐리아누스를 암살했다. 나중에 에로스가 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암살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후회했고, 일부 가담자들은 자살했다. 나머지도 모두 붙잡혀 에로스는 산 채로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고, 다른 가담자들도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4. 이후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어이없게 암살된 이후, 장성들은 황제로 나서길 꺼려 원로원에 차기 황제 선출을 위임했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들은 그들의 의도를 의심했기에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장성들이 계속 황제를 세워달라고 청하자 70대에 접어든 의원인 타키투스를 새 황제로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고대기록과 별개되게 근대 이후의 군인황제 시대 연구자들은 20세기 초 몸젠과 그 제자 데사우의 비문 해석과 연구 속에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일부 위조된 것을 토대로 온전히 그 내용을 신뢰하지 않는다. 해당 내용도 비슷한데, 동로마 시대때부터 이 기록이 일부 간접 반박된 그대로 근대 이후 고전학자들은 실증주의 아래 재해석한 이래, 이를 반박 중이다. 따라서 20세기 이탈리아, 튀르키예, 프랑스 등지의 당시 금석문 연구와 비교한 현대 고전학계에서는 아우렐리아누스 암살 이후 그 공백 자체가 없었다고 평한다. 더욱이 새 황제 타키투스가 조시무스, 조나라스의 주장처럼 원로원의 선출 아래 군대의 선포로 즉위할 당시 그의 나이가 50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서던, 하지, 왓슨, 리드베터, 맥마흔 등이 분석 중이고 확정적이기에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대관식 없이 안정적으로 권력승계가 이뤄졌다고 평가한다.[13]이런 배경 때문에 2개월 가까운 공백 대신 오랜만에 원로원, 군대가 힘을 합쳐 혼란을 최소화했고, 이 과정을 기리는 차원에서 관련 주화가 발행됐다. 조화와 평화의 여신 콩코르디아(Concordia)를 기념하는 동전이 그것이다. 화폐학자들은 이 주조된 것이 아우렐리아누스 개혁 후 조폐소가 있는 로마와 안티오키아 및 티키눔에서 발견된 세베리나의 외양을 새긴 동전의 뒷면에 콩코르디아 여신이 담겨 있는 점을 토대로 울피아 세베리나 황후가 제국의 통치를 대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는 세베리나가 실제로 통치했음을 입증할 문헌 기록이 없으며, 해당 동전은 세 도시 외에 다른 도시에서는 주조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화폐학자들의 주장에 지극히 회의적이다. 다만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아우구스타인 울피아 세베리나가 2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면서 내란이 일어나는 걸 미연에 방지했을 가능성은 존재하며, 아우렐리아누스가 짧은 개혁 속에서도 안티오키아누스의 도움 아래 원로원과 군대 모두를 예기치 못한 공백에도 내전 가능성을 최소화한 장치를 꾸렸다고 되레 평한다.
새 황제 타키투스는 서던, 하지 등이 이탈리아에서 발굴된 유적, 유물 등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캄파니아에 있다가 원로원에게 지명돼 제위를 이어 받았다. 그는 이런 과정 때문인지 몰라도 즉위 직후 전 재산을 공공 사업에 기부한 뒤 로마군의 실질적인 지도자들인 프로부스 등을 내각에 끌어들여 안정을 도모한다. 그러면서 프로부스에게 제국 동쪽의 군권을 넘긴다. 이후 그는 프로부스의 도움 아래 로마군을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침략한 동게르만계 헤룰리족과 싸워 승리했다. 이후 서게르만계의 프랑크족과 알라만니족이 서방 방어선을 돌파해 갈리아로 쳐들어왔다는 전갈을 입수하자 갈리아로 이동할 채비를 하다가 티아나에서 급사했다. 일부 기록에는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하며, 조시무스에 따르면, 시리아에 있었던 친척 막시미누스의 가혹한 세금 징수에 불만을 품은 이들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한다. 타키투스 황제의 사후 그의 이부동생이자 근위대장이었던 플로리아누스가 황제를 선포한 뒤, 타키투스가 이끌고 있었던 서방군과 소아시아 주둔 병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제국 동방의 총사령관이었던 프로부스가 이에 불복하여 황제를 칭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내전은 3개월간의 전쟁 끝에 프로부스의 승리로 끝났다.
프로부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공인된 뒤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과 롱기오네스족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끝에 격퇴했고, 그가 파견한 장군들은 프랑크족을 격파했다. 여세를 몰아 라인 강을 건너 여러 부락들을 불태우고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이후 프로부스는 라이티아와 판노니아 일대로 처들어온 반달족, 알레만니족 등 제국 각지의 반역자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이렇게 서방 일대를 안정시킨 뒤 이민족들을 황폐화된 지역으로 이주시켜 그 지역을 재건하게 했으며, 군대를 수차례 동원해 갈리아, 판노니아 및 기타 지역에 끊임없이 '유익한 노동'을 부과함으로써 군대의 일탈을 미연에 방지했다. 이집트에 주둔할 때는 식량의 원활한 공급망 재건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나일 강의 준설 공사를 했다. 또 갈리아와 판노니아에서는 구릉 지대에 포도밭을 일궜다. 이렇듯 오랜 내란과 외침으로 황폐해진 로마 제국과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킨 프로부스 황제는 선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추진하려고 했으나 도중에 암살당하면서 이루지 못한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282년 거듭된 토목 공사에 반감을 품은 군단병들에게 살해당했다.
뒤이어 제위에 오른 카루스는 프로부스를 살해한 군단병들을 처형한 뒤 서방 일대를 장남인 카리누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차남인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카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은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하고 셀레우키아와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시켰다. 카루스는 여세를 몰아 티그리스 강까지 진군했고 곧 강을 건너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하기로 했으나, 283년 중순 번개에 맞아 사망했다. 누메리아누스는 원정을 중단하고 귀환하던 중 마차에서 암살된 채 발견되었고, 경호대장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누메리아누스 암살범으로 지목된 근위대장 아리우스 아페르를 처형한 뒤 병사들의 추대를 받고 새 황제에 올랐다. 뒤이어 서방으로 진군해 카리누스 황제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 이래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혼란을 종식할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하기로 마음먹고, 역사상 유명한 사두정치(테트라키아)를 단행했다.
[1] 오늘날의 시리아 라스 알 아인[2] 일부 기록에서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했고, 다른 기록에서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했다.[3] Dux Romanorum, 로마인의 지도자[4] Corrector totius orientis, 동방 전체의 교정관[5] Persicus maximus, 페르시아 정복자[6] Germanicus maximus: 게르만족 정복자[7] 251년 6월 데키우스 황제를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시킨 크니바 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8] Gothicus maximus: 고트족 정복자[9] 팔미라의 반란자들은 처음에는 메소포타미아 총독 마르켈리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지만, 마르켈리누스가 이 사실을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알리자 안티오쿠스를 황제로 내세웠다.[10] Restitutor Orientis: 동방의 재건자[11] mater castrorum et senatus et patriae, 군대, 원로원, 나라의 어머니.[12] deus et dominus natus ; 태어나신 신(神)이시자 주인님[13] 이 부분은 아우렐리아누스가 취한 내정개혁의 성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