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7:05:03

오다에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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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
(라틴어: Septimius Odaenathus, 팔미라어: Ōdainaṯ, 아랍어: أذينة)
출생 220년
사망 267년 (향년 47세)
아내 제노비아
자녀 하이란 1세, 바발라투스, 하이란 2세, 성명 미상의 딸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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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이 극도로 혼란스럽던 260년대에 동방 총독으로 재임하며, 사산 왕조로부터 동방 속주를 지켜낸 인물이었다. 그는 팔미라 제국의 황제였던 바발라투스의 아버지이자 제노비아의 남편이었다.

2. 생애

"Odaenathus"는 그의 이름을 라틴어로 음역한 것으로, 팔미라어로는 'Ōdainaṯ'로 쓴다. '셉티미우스'(Septimius)는 조부 대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대한 충성의 표현으로 체택한 성이었다. 오다에나투스는 아랍인과 아람인의 혼혈로 추정되며, 할아버지는 와흐브 알랏(Wahb-Allat), 아버지는 하이란(Hairan)이었다. 5세기의 역사가 조시무스는 그를 "저명한 선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만, 정확한 출신 성분은 불분명하다. 부유한 상인이었다는 설, 팔미라 카라반의 지주이자 후원자로서 부를 축적한 부족 지도자였다는 설, 베두인 중 로마 제국에 정착한 엘리트 계층이라는 설이 제기되지만 불확실하다. 다만 초기부터 팔미라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을 볼 때, 팔미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로마 제국군에 입대해 보조군 장교로서 상당한 기량을 발휘하여 추종자들을 많이 모았던 것으로 보이며, 한편으로는 팔미라 원로원의 의원으로서 정계에서 활동했다.

팔미라는 로마 제국에 귀속된 자치도시로, 원로원이 별도로 존재했고, 지역 유지들이 도시의 행정을 담당했다. 팔미라 군대는 여러 장군의 지휘하에 분권화되었다. 그러나 224년 사산 왕조의 등장 이래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 갈수록 격렬해지는 상황에서 팔미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최고 지휘관을 선출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244년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가 페르시아 원정 도중에 사망[1]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원로원은 더 이상 총사령관 선출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오다에나투스가 팔미라의 라스(Ras: 총사령관)로 발탁되었다.

그는 라스가 된 이래 사막의 유목인들을 용병으로 모집하고 중기병 숫자를 대폭 늘려 군대를 강화했다. 253년 에메사의 귀족이었던 우라니우스 안토니누스샤푸르 1세의 침공을 저지했다. 요안니스 말라라스에 따르면, 샤푸르 1세가 철수하던 중 유프라테스 강 인근에서 "에나투스"라는 장수에게 공격당해 패퇴했다고 한다. 에나투스는 오다에나투스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샤푸르 1세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253년 아나를 공략하고, 256년 두라-에우로포스 등 여러 무역 도시를 공략했다. 6세기의 역사가 페트루스 파트리키우스에 따르면, 오다에나투스는 샤푸르 1세에게 팔미라 시의 무역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협상을 요청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은 팔미라 시가 보낸 선물을 강에 던지며 모욕했다고 한다.

257년 말 또는 258년 초에 세워진 비문에서는 오다에나투스를 'ὁ λαμπρότατος ὑπατικός'(호 람브로타토스 휘파티코스, 가장 유명한 집정관)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이 칭호는 보통 집정관직을 맡은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수여되었다. 오다에나투스가 이 지위에 오른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원로원 계급이 된 것이 라스보다 이르다는 설, 라스가 된 후 원로원 계급이 되었다는 설, 동시에 올랐다는 설이 제시되었지만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못했다. 포이니케(페니키아)의 수도 티레에서 "가장 유명한 셉티미우스 오다에나투스에게"라는 글이 새겨진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비문의 날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250년대 후반 즈음에 포이니케 총독에 부임했을 가능성이 있다.

260년 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에데사 전투에서 근위대장 수케시아누스와 원로원 의원 몇 명 및 장군들과 함께 샤푸르 1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이후 샤푸르 1세는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를 휩쓸고, 36개 도시를 모조리 파괴한 후 막대한 포로와 전리품을 끌고 수도 크테시폰으로 돌아갔다. 오다에나투스는 이에 대항하기로 마음먹고, 샤푸르 1세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고 있을 때 기병대를 이끌고 습격하여 사산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많은 포로를 구출했다. 이후 동방 로마군의 기병대 지휘관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가 재정 관리인 칼리스투스와 함께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켰을 때 가담했다. 마크리아누스 본인은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황제를 칭하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 두 아들인 소 마크리아누스퀴에투스를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다. 두 사람의 이름으로 금화와 은화가 주조되었는데, 당시 마크리아누스 일가의 영향력이 상당했는지 훗날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동전의 양이 상당했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지에서 마크리아누스 일가를 로마 황제로 인정했다.

마크리아누스는 제국 서방의 황제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었던 갈리에누스에 맞서기 위해 장남과 함께 서쪽으로 진군했고, 퀴에투스와 칼리스투스는 동방에 머물렀다. 261년 가을, 마크리아누스와 소 마크리아누스는 일리리쿰에서 갈리에누스가 급파한 기병대 지휘관인 아우레올루스와 격돌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마크리아누스는 장남과 함께 로마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얼마 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 갈리에누스는 더 이상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다에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Dux Romanorum'(로마인의 지도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오다에나투스는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여전히 그에게 적대하는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마크리아누스의 차남이었던 퀴에투스는 칼리스투스와 함께 에메사로 도주했으나, 에메사 주민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갈리에누스는 반란 진압을 대신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262년 그에게 'Corrector totius orientis'(동방 전체의 교정관)라는 칭호를 내렸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totius Orientis imperator'(동방 전체의 사령관) 칭호를 내렸다고 서술하지만,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오다에나투스는 북쪽의 폰토스 해안에서 남쪽의 팔레스타인까지 이르는 로마의 동방 일대를 책임졌다.

262년, 오다에나투스는 메소포타미아 속주로 진군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수비대를 몰아내고 에데사와 카르헤를 탈환했다. 그후 니시비스로 진군해 역시 탈환했고, 샤푸르 1세가 그동안 로마로부터 빼앗은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뒤이어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격해 페르시아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크테시폰에서 서쪽으로 28마일(45km) 떨어진 유대인 도시인 네하르데아를 파괴했다. 263년 말 또는 264년 초에 크테시폰에 도착한 뒤 도시를 포위하고 주변 일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페르시아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고트족이 소아시아 해안지대를 습격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후 샤푸르 1세는 피해를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로마 제국을 상대로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오다에나투스는 오스로에네와 메소포타미아의 탈환에 성공하고 수많은 포로를 잡은 뒤 그 중 많은 이를 로마로 압송했다. 263년 말, 갈리에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페르시쿠스 막시무스'(Persicus maximu, 페르시아 정복자)라는 칭호를 수여받고 오다에나투스가 보내온 포로들을 전리품으로 삼아 개선식을 거행했다.

오다에나투스는 팔미라에 귀환한 뒤 장남인 하이란 1세(헤로디아누스)와 함께 공동 왕에 올랐다. 하이란 1세는 왕중왕(Mlk Mlk dy Mdnh)의 칭호를 팔미라 원로원으로부터 수여받았고, 팔미라의 두움비리(자치지역의 집정관)인 셉티미우스 우로드와 프로쿠레이터(재무관)인 율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하이란 1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비문을 세워 헌납했다. 오다에나투스의 경우엔 그가 왕중왕이 되었음을 입증할 유물이 남아있지 않지만, 아들이 왕중왕이 되었는데 그는 일개 왕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그 역시 왕중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것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오다에나투스는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고, 황제가 임명한 총독들이 동방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걸 받아들였다. 다만 팔미라 안에서는 오다에나투스가 절대 군주로서 군림했고, 사산 왕조로부터 팔미라와 동방을 구원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을 여러 개 세우는 등 명성을 드높이고자 애썼다. 어쩌면 사산 왕조의 군주가 아니라 자신이야말로 동방의 샤한샤가 될 자격이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그랬을 수도 있다.

267년, 오다에나투스는 카파도키아까지 침략한 고트족을 격멸한 뒤 헤라클레아 폰티카 인근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를 벌였다. 그런데 연회 도중에 조카인 마에오니우스(Maeonius)[2]에게 아들 하이란 1세와 함께 암살당했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오다에나투스의 조카'는 사자 사냥 도중에 오다에나투스보다 화살을 먼저 쐈다. 오다에나투스가
"지도자인 내가 먼저 쏴야 하며, 넌 내가 쏜 뒤에 쏴라"
라고 경고했지만, 조카는 이를 무시하고 같은 행동을 두 번 더 했다. 이에 분노한 오다에나투스는 조카를 쇠사슬로 나무에 묶었다. 이때 아들인 하이란 1세가 아버지에게 사촌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원한을 가지게 된 오다에나투스의 조카는 연회 석상에서 오다에나투스와 하이란 1세를 죽인 뒤 경호원에게 살해되었다. 7세기의 역사가인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암살 배경에 왕중왕을 칭한 그를 경계한 로마 황제 갈리에누스가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한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왕비인 제노비아가 의붓아들인 하이란 1세 대신 자신의 아들인 바발라투스를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해 암살극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제노비아가 친로마 정책을 추구하는 남편 오다에나투스에게 반감을 품고, 독자적으로 팔미라를 이끌려는 욕망에 의해 암살을 조장했다고 추정한다. 실제로 제노비아는 270년 자브다스를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뒤 팔미라 제국을 건국했다.

오다에나투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 번째 아내로부터 하이란 1세를 낳았다. 하이란 1세는 251년에 만들어진, 팔미라 인근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라스'로 묘사되었는데, 이때 이미 성인이었을 것이다. 263년 그의 대관식을 기념하는 비문에서는 '헤로디아누스'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전장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267년 연회 석상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해되었다. 오다에나투스는 250년대 후반, 즉 제노비아가 17세 또는 18세일 때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두 사람은 바발라투스와 성명 미상의 딸을 낳았다. 바발라투스는 아버지 사후 어머니에 의해 팔미라의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나이가 10대에 불과했기에 실권은 어머니에게 주어졌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공격으로 팔미라 제국이 무너진 뒤 로마로 끌려갔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바발라투스는 로마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은 제노비아와 바발라투스가 274년 아우렐리아누스의 개선식에 참가했다고 서술한다. 또한 성명 미상의 세 딸도 있었는데, 가족과 함께 로마로 끌려간 뒤 로마 귀족들과 결혼했다고 한다.

3. 기타

역사 RTS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 확장팩 로마의 적들(Enemies of Rome) 캠페인의 4번째 시나리오에서 오다에나투스의 입장이 되어 플레이해 볼 수 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적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 문명은 팔미라이다.


[1] 로마측 기록에는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살해했다고 전해지며, 사산 왕조측 기록에는 크테시폰을 놓고 페르시아군과 맞붙던 중 전사했다고 한다.[2] 다른 문헌에는 오다에나투스의 조카라고만 나올 뿐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오직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만 이름이 명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