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영어: Second Mithridatic War | ||
시기 | 기원전 83년 ~ 기원전 81년 | |
장소 | 소아시아 | |
교전국 | 로마 공화국 | 폰토스 왕국 |
지휘관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 | 미트리다테스 6세 카파도키아의 고르디오스 |
결과 | 폰토스 왕국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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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83~81년, 로마 공화국의 장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본국의 허락없이 폰토스 왕국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패배로 실추된 명성을 회복했다.
2. 상세
기원전 8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다르다누스에서 만나 평화협약을 체결했다.(다르다누스 강화조약)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동안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돌려주고 3,000탈렌트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며 70여 척의 함선을 술라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대신, 술라는 포로가 된 폰토스군 병사들을 전원 석방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가 폰토스의 왕위를 계속 맡는 걸 용인했다. 그 후 술라는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따르며 자신에게 대적한 자들과 제2차 술라의 내전을 벌이는 한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를 소아시아에 남겨둬서 폰토스 왕국을 감시하도록 했다. 무레나는 지난날 술라에 대적했다가 부하들의 배신에 직면하자 자살한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의 2개 군단을 자기 병력으로 삼았다.한편, 미트리다테스 6세는 나라를 재건하는 한편 용병대를 대거 고용해 지난 전쟁으로 잃은 병력을 복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그는 팔랑크스가 로마 군단병을 상대로 연전연패한 걸 교훈으로 삼아 팔랑크스를 버리고 기병과 궁병 위주로 군대 체계를 개편했다. 보스포루스 지역과 콜키스에서 과중한 세금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아들 미트리다테스 필로파토르를 이 지역의 섭정으로 삼아서 이를 진압하게 했다. 미트리다테스 필로파토르는 반란을 모조리 제압하고 질서를 잡았지만, 너무 유능한 나머지 지역 주민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경계심을 품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들을 긴급 체포해 처형하고, 다른 아들을 새로운 섭정으로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폰토스군 총사령관으로서 술라에게 맞섰으나 연전연패한 전적이 있었던 아르켈라오스가 미트리다테스 필로파토르와 손을 잡고 역모를 도모했다며 의심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폰토스에서 달아나 무레나에게 귀순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가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징집했으니 먼저 침공하라고 설득했다. 무레나는 핌브리아의 휘하에 있었던 장병들의 군심을 사고 공적을 세울 기회가 왔다고 여기며,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본국에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채 전쟁을 단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83년, 무레나는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의 국경 인근의 마을인 코마나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코마나 전투)
미트리다테스 6세는 당시 콜키스인과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간 상황이라서 코마나를 구원할 병력을 보내기 힘들었다. 이에 그는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무레나는 술라가 그리스로 돌아가기 전에 평화협정을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조약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무레나는 약탈을 벌인 후 카파도키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사절단을 로마로 보내 평화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82년에 무레나는 미트레다테스 6세에게 속한 400개의 마을을 점거했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는 사절단이 오기를 기다릴 뿐 그와 전투를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무레나는 막대한 제물을 챙기고 카파도키아로 무사히 돌아갔다.
얼마 후, 술라가 보낸 사절이 무레나를 찾아와 조약이 여전히 유효하니 폰토스 왕국을 상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술라는 무레나에게 폰토스를 좀 더 괴롭히라고 종용하는 밀서를 보냈다고 한다. 무레나는 사절 앞에서 본국의 지령을 따르겠다고 밝혔지만, 사절이 돌아가자마자 전쟁을 재개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가 전쟁을 선언했다고 믿으며 즉각 대응했다. 우선 카파도키아 출신의 귀족으로 미트리다테스 6세에 의해 카파도키아 왕으로 옹립되었다가 술라에 의해 축출된 뒤 미트리다테스 6세의 부관을 맡고 있었던 고르디오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무레나를 견제하게 했다. 고르디오스는 할라스 강가에서 로마군을 목격하고 고지대에 진영을 설치한 뒤 미트리다테스 6세가 올때까지 기다렸다.
무레나는 소규모의 폰토스군이 고지대에 진을 치고 있는 걸 확인했지만, 지난 전쟁 때 연전연패한 폰토스군을 우습게 여기고 강 건너편 평야지대에 진영을 세웠다. 얼마 후 현장에 도착한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군이 별다른 경계없이 진영에서 쉬고 있는 걸 보고 기병대를 대거 파견해 적진으로 돌격시키고, 궁병대에게 그 뒤를 따르며 기병대를 지원하도록 했다. 로마군은 지난 전쟁과는 달리 팔랑크스를 대동하지 않고 기병과 궁병 위주로 몰려오는 폰토스군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무레나는 급히 일부 보병대로 폰토스 기병대를 저지하게 해 시간을 끌게 하는 한편, 나머지 병사들에게 언덕 위에서 전투 대형을 갖추도록 했다.
그러나 폰토스 기병대는 앞을 가로막은 로마 보병대를 무참히 짓밟고 언덕 위의 적을 향해 돌격했다. 미처 전열을 갖출 틈이 없었던 로마군은 순식간에 압도되었고, 무레나는 몇몇 측근만 대동해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이 할라스 강 전투의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의 편을 들었던 소아시아의 많은 도시국가들이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귀순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여세를 몰아 카파도키아로 진군해 모든 로마군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또다시 전쟁을 벌이는 무레나를 비난하고, 가비니우스를 파견해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또한 가비니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카파도키아의 아리오바자네스 1세를 화해시키기 위해 협상을 주관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의 4살짜리 딸과 아리오바자네스 1세를 약혼시켰고, 아리오바자네스 1세의 카파도키아에서의 영유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무레나는 로마로 소환되어 정계를 강제로 떠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패배로 손상되었던 명성을 회복했다. 그 후 기원전 75년 또는 기원전 74년에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4세가 사망하면서 자신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넘기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기원전 73년 대군을 동원하여 비티니아로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