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 영어: Constantine V's campaigns against the Bulgarians | ||
시기 | 756년 ~ 775년 | |
장소 | 발칸 반도 | |
원인 |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의 외교 마찰 | |
교전국 | 동로마 제국 | 불가리아 제1제국 |
지휘관 | 콘스탄티노스 5세☠ | 코르미소쉬† 비네흐† 텔레츠† ← 사빈 우모르† 토크투† 파간† ← 텔레리그 |
병력 | 불명 | 불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불가리아 제1제국의 대혼란과 동로마 제국의 발칸 패권 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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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56~775년,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불가리아 제1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 총 8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불가리아에게 막심한 타격을 입히고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보했다.2. 배경
아바르 칸국 휘하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 불가르족은 7세기 전반에 쿠브라트의 지도하에 독립하여 캅카스 북부의 대 불가르 지역을 중심으로 불가르 칸국을 건국했다. 665년 쿠브라트가 사망한 뒤, 세 아들이 영토를 분할했다. 그러나 668년 하자르의 침략으로 불가르 칸국은 큰 타격을 입었고, 쿠브라트의 삼남 아스파루흐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다뉴브 강 이북 지대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하자르족의 공세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뉴브 강 건너편의 동로마 제국 영내로 진입할 기회를 노렸다.마침 동로마 제국은 우마이야 왕조군의 침략에 시달렸고, 급기야 674년부터 678년까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치렀다. 아스파루흐는 이 틈을 타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고, 도브루자 북부 일대를 점거했다. 680년,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우마이야 왕조와 강화를 맺은 뒤 발칸 반도의 제국 영토를 잠식해가는 불가르족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이끌고 보스포루스를 거쳐 흑해로 들어가 다뉴브강 삼각주 바로 북쪽에 상륙했다.
아스파루흐는 적군의 수가 많은 걸 보고 페브키 섬에 건설된 요새로 후퇴했다. 황제는 즉각 이 요새를 포위하러 진격했지만, 사전에 척후병을 보내지 않아 이 지역이 늪이 많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조직적인 행군을 하지 못했고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급기야 콘스탄티노스는 통풍에 걸려 인근의 메셈브리아로 가서 며칠 쉬었다. 그런데 돌연 황제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자 병사들이 겁먹고 도주했다. 불가르군은 이 기회를 틈타 추격하였고,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까지 진격하여 제국군 병사들을 학살했다.
아스파루흐는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7개의 슬라브 종족을 손쉽게 정복하였고, 발칸 산맥 이남의 동로마 영토를 약탈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불가르족과 협상하여 681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하여 불가리아의 건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물을 매년 바치는 대신 불가르족이 발칸 산맥 너머로 약탈하는 걸 금지했다. 또한 양측은 무역 관계를 맺기로 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의 동의를 받아낸 그는 폴리스카를 수도로 삼고 칸을 칭했다.
701년경 하자르와의 전쟁도중 전사한 아스파루흐의 뒤를 이어 칸에 선임된 테르벨은 705년 유배지에서 탈출한 전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보호해주고 15,000명의 병력을 지원해주는 대가로 제국의 부황제가 되기로 약조받았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황위를 되찾고 자신을 축출한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를 처형한 뒤, 테르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초청했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자주색 황제복을 걸쳐주며 부황제로 공식 선임했다.
708년경,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리아가 너무 커지자 위협을 느끼고 원정군을 일으켜 다뉴브 강 하구의 앙키알로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테르벨의 역공으로 제국군이 참패했다. 711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필리피코스의 반란으로 참살된 뒤, 그는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712년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여 여러 촌락을 파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다 옵시티온 테마 부대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와 필리피코스를 폐위하고 수도에 주둔하자,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에도 매년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고, 7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재차 진격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압박에 전념하고 싶었던 황제 테오도시오스 3세는 테르벨과 협의 끝에 아래의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 값비싼 붉은 가죽을 불가리아에 기증한다.
2. 자고리아 지역을 포함한 불가리아 왕국의 영역을 인정한다.
3. 양국은 정당한 통치자에 대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망명한 자들을 인도한다.
4. 각국 정부의 인감이 있는 상품만 수입할 수 있으며, 위반 시 압수될 수 있다.
2. 자고리아 지역을 포함한 불가리아 왕국의 영역을 인정한다.
3. 양국은 정당한 통치자에 대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망명한 자들을 인도한다.
4. 각국 정부의 인감이 있는 상품만 수입할 수 있으며, 위반 시 압수될 수 있다.
717년 여름 우마이야 왕조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대적으로 침략하자, 레온 3세는 테르벨에게 구원을 청했다. 테르벨은 이에 응해 718년 초 콘스탄티폴리스 인근에서 혹독한 추위로 고통받던 아랍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719년, 전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가 불가리아에 찾아와서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테르벨은 군대와 50 센타나리온의 금화를 주었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레온 3세는 이를 격퇴하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를 붙잡아 처형했다. 이후 테르벨에게 서신을 보내 "지난날 아랍에 공동으로 싸워놓고 어찌 이러느냐?"라고 항의했다. 이에 테르벨은 제국 국내문제에 끼어든 걸 사과하였고, 불가리아에 망명한 아나스타시오스의 잔당을 레온 3세에게 보냈다.
그 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는 상호 교류를 이어가며 평화를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은 아랍 세력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불가르인들과 가급적 사이 좋게 지내야 했고, 불가르인 역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상당한 공물을 받고 무역을 통해 짭짤한 수입을 얻고 있는데 굳이 제국을 적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던 753년, 불가르 칸에 오른 코르미소쉬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불가리아와의 국경 지역을 요새화하고 아르메니아인과 시리아인들을 트라키아에 정착시키는 걸 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신을 보내 협약 위반이라고 항의라면서 공물을 더 보내준다면 양해해줄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절을 추방하는 것으로 응답하자, 코르미소쉬는 전쟁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대규모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756년, 코르미소쉬는 대군을 일으켜 트라키아로 진격해 콘스탄틴폴리스에서 40km 떨어진 아나스타시아 성벽에 도착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에 맞서 친정하였고, 양측은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군이 대패하여 본국으로 패주했다. 그 직후 폴리스카에서 정변이 일어나 코르미소쉬가 피살되었고, 비네흐가 새 칸으로 옹립되었다.콘스탄티노스 5세는 불가리아의 정세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들을 제국에 완전히 복종시키기로 마음먹고 불가리아 영내로 진격했다.(1차 원정) 로마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불가리아로 쳐들어갔고, 마르첼레에서 비네흐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섬멸했다. 비네흐는 자식들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759년 콘스탄티노스 5세가 재차 다시 쳐들어왔지만(2차 원정), 이번에는 리슈키 고개 전투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하지만 비네흐는 장기전으로 가면 자신이 불리할 거라 여기고 협상을 통해 평화를 얻으려 했다. 이에 불가리아 귀족들은 반발하였고, 760년 정변이 일어나면서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비네흐 사후 칸위에 오른 텔레츠는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의 국경 지대를 황폐화시켰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맞대응했고, 763년 6월 16일 80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와 9,600명의 기병을 포함한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로 쳐들어갔다.(3차 원정) 텔레츠는 20,000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산길을 차단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바꿔 평야 지대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763년 6월 30일, 양군은 안키알로스 평원에서 맞붙었다. 하루 종일 지속된 격전 끝에, 불가리아군은 참패를 당하고 많은 병사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군도 큰 손실을 입었기에, 콘스탄티노스 5세는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수도로 돌아갔으며, 포로들을 거리에 전시했다. 이 일로 텔레츠는 신망을 잃었고, 얼마 안가 정변이 일어나 피살당했다.
텔레츠가 피살된 후 새 칸이 된 사빈은 765년 재차 쳐들어온(4차 원정)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을 지속하길 원하는 귀족들은 이를 눈치채고 인민 회의를 열고, 사빈이 불가르인을 동로마 제국의 노예로 만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사빈은 766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고, 우모르가 새 칸이 되었지만 40일만에 토크투와 바얀 형제에 의해 피살되었다. 토크투가 뒤이어 칸위에 올랐지만 767년에 반란군에게 패해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칸위에 오른 파간은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와 직접 만나서 평화 회담을 벌였다. 이 자리엔 지난날 칸의 직위에 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던 사빈도 있었지만,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황제가 불가리아인들이 평화를 맺었다가 다시 전쟁을 벌이고, 불리해지면 다시 협상하려드는 등 변덕이 심하다며 질책하면서, 협상장 분위기는 상당히 격화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곧 불가리아의 평화를 지키겠다고 하였고, 그 역시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는 데 동의했다.
이리하여 평화 협상은 이뤄지는 듯 했지만, 콘스탄티노스 5세는 북부 슬라브 부족의 지도자 슬라븐을 기습해 공개 처형한 뒤, 스타라 플라니아 고개를 넘어 발칸 산맥의 북동부로 쳐들어가 티차 강에 도착하여 불가리아 영내를 약탈했다.(5차 원정) 하지만 불가리아인들의 저항이 심했기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했다. 이 일로 불가리아인들은 분노했고, 파간은 동로마 제국에게 속아 국가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지탄을 받은 끝에 768년 부하들에게 피살당했다.
775년 5월, 콘스탄티노스 5세는 또다시 불가리아 원정에 착수했다.(6차 원정) 이번에는 결정적인 전투 없이 끝났고, 양측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해 말, 불가르 칸 텔레리그는 평화 조약을 파기하고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르치티아(현재의 마케도니아 북부)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사전에 황제의 귀에 들어갔고, 콘스탄티노스 5세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불가리아군을 물리쳤다.(7차 원정) 황제는 여세를 이어가 불가리아로 쳐들어가려 했지만, 함대가 메셈브리아(현재 네세바르) 인근에서 북풍에 저지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텔레리그는 배신자들이 황제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작전이 실패했다고 여기고, 황제에게 "제국에 망명하고 싶으니 이를 도와줄 불가리아 내 인사들을 알려달라"라는 서신을 보냈다. 황제는 그가 사빈처럼 정말로 망명할 거라 여기고 그들의 정보를 전달했다. 텔레리그는 즉시 그들을 숙청해 후환의 싹을 잘랐다. 황제는 감히 자신을 속인 그를 응징하고자 775년 8월 친정하였으나(8차 원정), 도중에 폭염으로 다리가 붓자 아르카디오폴리스를 거쳐 회군하다가 9월 14일에 배 위에서 죽었다.
4. 이후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스 5세의 연이은 원정으로 큰 타격을 입고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콘스탄티노스 5세를 속여서 배신자를 밝혀내어 모조리 숙청했던 텔레리그도 777년 궁정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축출된 뒤 동로마 제국에 망명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렇듯 불가리아가 쇠약해지면서, 동로마 제국은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립하고 다뉴브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그러나 불가리아는 새 칸 카르담 휘하에서 다시 강력해졌다. 791년, 카르담은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 프로바트에서 콘스탄티노스 6세의 로마군을 격파하고 적의 기지를 점령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는 792년 7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양국의 국경 근처에 이르렀다. 그는 마르켈라 요새(현재 카르노바트 인근)를 건설하여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카르담은 7월 20일 그의 군대와 함께 인근 고지를 점거한 후 동로마군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이때 점성술사 판크라티우스가 별자리를 보니 불가리아군을 섬멸하는 미래가 보였다고 주장하자, 황제는 이에 고무되어 주둔지를 떠나 불가리아군이 점거한 고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역공을 가해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판크라티우스를 포함한 많은 장군들이 전사했다. 카르담은 황제의 천막과 수많은 물자를 점거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황제는 불가리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796년, 콘스탄티노스 6세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카르담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서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트라키아 전역을 파괴하고 금문으로 가겠다."라고 위협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공물을 보내겠다"라며 금 대신 똥물을 보냈다. 그 후 불가리아로 출정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 숲에 불가리아군과 대면하자 주둔지를 세워둔 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카르담이 17일 동안 어서 회전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황제는 주둔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양측은 평화 협상을 이어갔고, 792년의 조약을 갱신하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거듭된 원정 실패는 콘스탄티노스 6세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결국 797년 어머니 이리니가 정변을 일으켜 아들을 붙잡아 실명형에 처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원정을 통해 획득했던 발칸 반도 패권을 잃어버렸고, 카르담의 뒤를 이어 칸위에 오른 크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시련에 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