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00:01:00

유스티니아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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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70대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
Ιουστινιανός Β' ο Ρινότμητος
파일:Justinian_ii_(2).pn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유스티니아누스 리노트메토스
(Justinianus Rinotmetos)
출생 668년/669년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711년 11월 4일 (향년 42세)
동로마 제국 옵시키온 다마트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차
685년 7월 10일 ~ 695년 (10년)
로마 황제 2차
705년 8월 21일 ~ 711년 11월 4일 (6년)
전임자 콘스탄티노스 3세
후임자 필리피코스
부모 아버지 : 콘스탄티노스 4세
어머니 : 아나스타시아
배우자 에우도키아
하자르의 테오도라
종교 기독교
1. 개요2. 생애
2.1. 1차 즉위
2.1.1.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공세2.1.2. 불가르족 격퇴와 사민 정책2.1.3. 아랍인과의 재격돌
2.1.3.1.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2.1.4. 퀴니섹스툼 공의회2.1.5. 교황과의 갈등
2.2. 레온티오스의 찬탈2.3. 유배지에서 재기를 시도하다2.4. 2차 즉위
2.4.1. 외세의 침략2.4.2. 교황의 마지막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
2.5. 바르다네스의 반란2.6. 죽음과 멸족
3. 평가4. 여담5. 참고자료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70대 황제이자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이름을 이어받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매우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아르메니아마케도니아 등 실지 회복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불가르 족을 테살로니카에서 격퇴하였으나, 아르메니아 방면에서는 692년의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대패하며 제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그 후 695년, 헬라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였던 레온티오스가 반란을 일으켜 폐위되었고, 코가 잘린 채 크림 반도케르손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 세력을 모은 유스티니아노스는 유목민인 하자르족, 이후엔 불가르족의 군대를 빌려 유배된 지 10년 만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회복하였고,티베리오스와 레온티오스를 처형한 뒤 두 번째 치세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복수심이 가득했던 그는 숙청을 연발하였고, 불가르족과 아랍인과의 전선에서도 연이어 패배하며 제국민의 지지를 또 다시 잃었다. 이에 크림 반도의 장군 필리피코스가 반란을 일으켜 손쉽게 수도에 입성, 유스티니아노스 일가를 처형하여 이라클리오스 왕조가 단절되었다. (711년)

2. 생애

유스티니아노스는 668년에 콘스탄티노스 4세[1]와 황후 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첫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똑똑하고 추진력 있는 성격이었고 685년 9월 14일에 18세의 나이로 바실레오스가 되었다.

2.1. 1차 즉위

파일:justinian.ii.first.reign.solidus.jpg

2.1.1.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공세

685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황제로 즉위한 바로 그해에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말리크도 5대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686년, 장군 레온티오스캅카스로 진군하여 알바니아(아제르바이잔의 고대 지명)에서 아랍 군대를 격파하였다. 한편, 내부의 불안(이븐 주바이르 등)에 먼저 집중해야 했던 아브드 알 말리크는 688년에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 조약을 갱신하였고, 일시불로 1,000 노미스마타를 지급하며 매주 금요일마다 말과 노예를 바치기로 하였다. 또한, 키프로스이베리아(현재 조지아 중부), 아르메니아의 세금도 양국이 양분하기로 하였다. 특히 키프로스는 근현대에도 상당히 이례적이고 전근대에는 전례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던 양국의 공동통치구역(Condominium)으로 삼았다.[2] 그 밖에도 시리아 해안의 그리스도교 해적인 마르다이트를 동로마 측에 귀순시켜 헬라스 테마의 노꾼으로 정착시켰다. 이렇듯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치세는 7세기의 황제들 중 가장 순조롭게 시작하였다.

2.1.2. 불가르족 격퇴와 사민 정책

688 ~ 689년에 걸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르 칸국을 공격, 그 예속민인 슬라브인들을 생포하였고, 인구가 감소하던 아나톨리아로 그들을 이주시켰다. 그 숫자는 무려 25만 명에 이르렀는데, 소아시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3] 참고로 이렇게 유럽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얻은 인구 집단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멀리 재배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산가족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인적 집단 자체를 한 덩어리로 유지시키지 않고 분산배치했던 것과 더불어, 로마의 전통적인 디바이드 앤 룰 통치술이었다.[4] 아예 자기의 연고지와 한참 먼 지역으로 재배치되면 그 곳 현지인들과는 말부터가 잘 안 통하니 뭉쳐서 반란을 선동한다던지 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고, 기댈 데는 제국 당국밖에 없게 된다. 동쪽 출신 사람을 서쪽에, 서쪽 출신 사람을 동쪽에 배치함으로써 제국 내 지역색을 줄이고 통합을 추구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들을 자작농으로 만들어 귀족 지주들의 간섭을 피하게 하였으나 대신 막 정착한 이들에게 과도한 세금[5]을 부과하였다. 따라서 슬라브인들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고 결국 691년에 우마이야 왕조와의 전쟁 시에 아랍 측에 2만여 명이 투항해 버리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러자 분노한 황제는 니코메디아에 슬라브인들을 모은 후 수천여 명을 죽여 마르마라해에 던져버렸다.

2.1.3. 아랍인과의 재격돌

파일:a-solidus-of-justinian-ii-from-the-dumbarton-oaks-collection.jpg
아랍과의 전쟁은 동전 문제로 재개되었다.

690년의 협정으로 우마이야 조는 동로마 제국의 동전을 그대로 만들어 바쳐야 했는데,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692년부터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노미스마 금화를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인간의 모습을 새기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칼리파는 황금의 무게는 같게 하되 예수의 모습이 없는 동전을 주조하여 바쳤는데,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를 빌미로 삼아 선전포고하였다.
2.1.3.1.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당시는 이븐 주바이르가 메카에서 마지막 저항을 할 무렵이었고, 이슬람 사회가 재차 단결된 것을 확신한 우마이야 조의 칼리파 말리크는 즉각 반격에 나서며 동생인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에게 아나톨리아 공격을 명령하였다. (692년) 그후 아나톨리아 동부의 세바스토폴리스[6]에서, 동방 군사령관 레온티오스가 아랍 군대와 맞서 그들의 1차 공격을 격퇴해 냈다. 유리해 보이던 전황은, 무함마드 이븐 마르완이 본래 불만이 많던 동로마 측의 슬라브 군인들을 매수하며 결정되었다. 20,000여 명의 슬라브 병사들이 진영을 이탈하였고, 아랍 군대는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황제는 지금까지 잘 싸우다가 단 한 차례 배신으로 패배한 레온티오스를 문책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 결정적인 전투로 동로마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상실하였고 향후 200년 넘게 회복하지 못하였다. 결국 금화 문제로 빌미를 잡아 전쟁을 개시하지 않은 것만 못한 상황이 되었다.

2.1.4. 퀴니섹스툼 공의회

691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165명의 동방 주교들을 소집해 퀴니섹스툼(Quinisextum) 공의회를 소집했다. 'quin'은 라틴어로 5, 'sex'는 6으로, 이 공의회는 제5차와 제6차 세게 공의회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다뤘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황제가 종교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 시시콜콜한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제정된 교회법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가령, 교회법 3조는 성직자의 재혼을 금지하며 세례를 받은 뒤 과부, 창녀, 노예, 여배우와 결혼한 남자는 절대 사제가 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또한 교회법 11조는 사제는 유대인 의사에게서 진료를 받거나 유대인과 함께 목욕탕에 들어가지 말 것을 규정해 이 시대의 반유대주의를 보여준다. 그 외에도 온갖 사소해보이는 것까지 중요하게 다뤘는데, 자세한 내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 참조.

2.1.5. 교황과의 갈등

692년, 퀴니섹스툼 공의회를 마무리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 102개의 교회법 조항을 보내며 당장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교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에 대표단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도 강제로 따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세르지오 1세는 기혼자의 사제 서품을 허용하고[7] 사순시기 토요일마다 금식하는 것 등 몇 가지 조항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라벤나 총독 요안니스 2세 플라티노스에게 교황을 체포하라고 지시했고, 총독은 심복인 자카리아스에게 교황을 당장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아마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비질리오 교황을 체포한 일, 할아버지 콘스탄스 2세마르티노 1세 교황을 탄압한 일을 떠올리며 교황을 함부로 해도 괜찮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다. 세르지오 1세는 그 불행한 전임 교황들보다 훨씬 권력이 강했고 지지기반이 탄탄했다. 라벤나 시와 라벤나 주둔 제국군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다. 자카리아스가 교황을 잡으러 로마에 들어오자, 오히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로마 시민들과 함께 자카리아스를 감금했다. 자카리아스는 교황의 침대로 피신했다가 세르지오 1세가 직접 중재에 나선 덕분에 겨우 살아 나왔다. 황제는 이에 분노를 터트렸지만 교황을 해치우려 병력을 보내기도 전에 반란군에 의해 폐위되었다.

2.2. 레온티오스의 찬탈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리스의 슬라브인들을 복속시키고 헬라스 테마를 설치하였는데, 그 스트라테고스로 2년 전에 투옥시켰던 레온티오스를 임명하였다(695년). 하지만 레온티오스는 부임하러 가기는커녕, 비슷한 처지의 감옥 시절 고위직 수감자들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청색당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성공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찬탈당한 후 쇠사슬에 묶인 채 군중으로부터 비난과 욕설을 들으면서 원형 경기장을 한바퀴 돌았다. 그는 목숨만은 건졌지만 코가 잘린 후 크림 반도헤르손[8]으로 유배를 가 10년간의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2.3. 유배지에서 재기를 시도하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추방하고 제위에 오른 레온티오스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반달 왕국으로부터 탈환한 후 160여 년간 유지해오고 있던 카르타고를 697년에 뺏겼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698년에 지원군을 보내서 카르타고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했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그 이후 영원히 로마의 품에서 떠나고 말았다.[9] 이런 정권이 인기가 있을 리가 만무해서, 그 전투를 치르고 남은 해군이 크레타로 후퇴했는데 거기서 아프시마로스라는 게르만 혈통의 해군 사령관이 추대받아 티베리오스로 개명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해 레온티오스를 쫓아내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레온티오스는 수도원에 감금되어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티베리오스 3세는 나름대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나톨리아의 육상과 바다의 방어를 강화했고 700년에는 사라센이 장악하고 있던 시리아를 침공해 아르메니아의 일부를 잠시 되찾았다. 그 뒤 703년과 704년에도 아랍인들의 연이은 킬리키아 침공을 물리쳤다.

한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케르손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차 도모하려 했다. 702년 또는 703년 초, 케르손 현지 당국은 유스티니아노스 일당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를 눈치챈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면 처형될 거라고 여기고 몰래 케르손을 빠져나와 하자르족의 카간인 이부지르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이부지르는 그를 크게 환대하고 여동생을 시집보냈다. 이 여동생의 원래 이름이 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결혼한 뒤 이름을 의미심장하게도 테오도라로 바꿨다.

704년 어느 날, 제국의 사절이 이부지르의 궁정을 방문해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넘겨주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의했다. 이부지르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제국의 압력을 받자 마침내 굴복했다. 며칠 후, 한 무리의 병사들이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있는 파나고리아를 찾아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위해 파견된 경호병이라고 밝혔지만,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왔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병사들의 두 지휘관을 따로 자기 집에 초대해 그들이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

그 뒤 임신한 테오도라를 남긴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항구로 나와 낚시배 한 척을 징발한 후 한밤 중에 크리미아 해안을 돌아 케르손으로 향했다. 그는 지지자들을 비밀리에 규합한 후 야음을 틈타 배를 타고 서쪽으로 흑해를 가로질러 항해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이 탄 연약한 배는 사나운 폭풍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한 사람이 황제에게 신의 분노를 달래려면 그가 제위를 되찾았을 때 예전에 그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모두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한 놈이라도 살려주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물에 빠져죽겠다!"

얼마 후 폭풍은 가라앉았고, 배는 무사히 불가르족의 영토인 도나우 강 삼각지대에 도착했다. 불가르 칸 테르벨은 하자르족의 카간이 그랬던 것처럼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따뜻하게 맞아줬고 그의 제위를 되찾아주기 위해 모든 군사적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부제의 직함을 받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했다. 마침내 705년 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으로 이뤄진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2.4. 2차 즉위

마치 콧구멍에서 콧물을 닦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죽음을 명하였다.
파울루스 디아코누스[10]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도착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3일 동안 대기하면서 수비병에게 성문을 열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병과 시민들은 조소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동안 정찰병들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옛 수도가 성벽 아래를 통해 도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병사 몇 명만을 데리고 직접 수도를 따라 들어가서 성벽의 북쪽 끝에 위치한 블라케르니아 궁전의 바로 바깥에 도착해 졸고 있는 경비병들을 해치웠다. 이렇게 해서 궁전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와 병사 몇 명에 의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이튿날 아침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궁전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접한 티베리오스 3세는 비티니아로 도망쳤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야만족에게 약탈당하느니 항복하기로 하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복종했다.

얼마 후, 티베리오스 3세는 체포되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폐위시키고 코를 잘랐던 레온티오스도 수도원에서 끌려나왔다. 706년 2월 15일, 두 사람은 사슬에 묶인 채 시내를 가로질러 원형 경기장을 돌았고, 시민들은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오물을 던졌다. 그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그들의 목에 발길질을 한 번씩 가했다. 그러자 군중은 성경의 시편 91장 13절[11]를 읊었다. 이후 두 사람은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제위에 복귀한 뒤 불가르 왕 테르벨의 어깨에 자주색 황제복을 걸쳐주며 그를 부제로 공식 임명했다. 이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티베리오스 3세와 레온티오스의 측근 및 지지자들을 모조리 참수하거나 교수형에 처했고, 두 반역자의 대관식을 치러준 갈리니쿠스 총대주교는 두 눈을 뽑힌 후 로마로 추방되었다. 그 밖에 수많은 시민들이 고문과 사지 절단 형벌을 당했다. 한편 하자르족의 카간 이부지르는 테오도라와 아들 티베리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고, 테오도라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출신 황후가 되었다.

2.4.1. 외세의 침략

복위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전임 티베리오스 3세 대에 사로잡은 아랍인 포로 6,000여명을 우마이야 조에 송환하였고, 칼리파 왈리드 1세에게 메디나의 대모스크 재건을 위한 금과 숙련공, 모자이크 장식을 보내주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왈리드는 수십 톤의 후추와 향신료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사방의 적들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유능한 장군들을 대거 숙청한 것을 좋은 기회로 여겼다. 708년 동로마군은 불가리아의 성장세를 두려워한 황제의 명에 따라 다뉴브 강 하구의 앙키알로스를 공격했지만 불가르 국왕 테르벨에게 참패했다. 그리교 709년엔 아랍군이 카파도키아의 중요한 요새 티아나를 함락시켰다.

2.4.2. 교황의 마지막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

709년 봄,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테오도루스에게 함대를 맡겨 라벤나로 파견해 사사건건 제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압하게 했다. 라벤나에 도착한 테오도로스는 황제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어 모든 고관들을 초청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고관들은 아무 의심 없이 약속된 날짜에 연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나 펠릭스 대주교만이 실명형에 처해진 후 폰투스에 유배되었다가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처형된 뒤에야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테오도로스의 병사들은 라벤나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라벤나 시민들은 당연히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라벤나 총독부는 수년간 마비되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 콘스탄티노는 이런 상황에서도 퀴니섹스툼 공의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710년에 출발한 교황은 711년 초봄에 도착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와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황제인 티베리오스의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교황 일행은 금으로 된 마구를 달고 화려한 옷을 입힌 말을 타고 금문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도에 입성하여 플라키디아 궁전으로 행진했다. 당시 니케아에 있었던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환영의 서신을 보내 니코메디아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에서 마나자고 제안했다. 교황은 선뜻 동의했고, 이틀 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광경이 연출되었다. 수많은 이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황제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정복을 입고 제관을 쓴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춘 것이다! 이후 황제는 일요일에 교황이 집전한 미사에 참례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고, 교황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서 회의를 시작했다. 교황은 퀴니섹스툼 공의회의 교회법 중 약 절반 가량을 승인했고, 황제는 나머지 조항들을 폐기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작별했고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교회의 모든 특권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출발한 지 1년 만인 711년 10월에 로마에 귀환했다.

2.5. 바르다네스의 반란

711년 초,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케르손 공격에 나섰다. 당대의 역사가 니케포루스와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황제는 케르손 시가 자신을 찬탈자 티베리오스 3세에게 넘겨주려 한 것에 복수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복위한 지 6년이 지난 후에야 케르손을 공격했기 때문에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실 케르손은 하자르족의 카간이자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처남이었던 이부지르가 임명한 총독의 지배하에 놓여 있어서, 유스티니아노스 2세로서는 케르손을 되찾기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원정군은 목적을 달성했다. 케르손 시 지도자 7명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돌멩이가 매달린채 강물에 던져졌으며, 하자르족 총독과 시장 조일로스를 포함한 30명 가량은 가족과 함께 사슬에 묶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또한 엘리아스가 케르손 총독에 임명되었고 많은 동로마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했다. 그런데 황제가 원정군을 귀환시키던 중 흑해에서 폭풍이 닥쳐 함대가 뒤집히며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광기가 가득찬 채 크게 웃었다고 한다.

얼마 후, 하자르족이 케르손으로 쳐들어와서 동로마군이 도시 방어에 나섰지만, 엘리아스 총독과 제국군 수비대가 하자르족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하자르족 총독과 시장 조일로스를 석방하고, 300명의 호위대를 붙여 케르손으로 돌려보냈다. 아울러 로고테테스 책임자인 시리아의 게오르기우스를 보내 이번 사건에 대한 사과를 이부지르 카간에게 전하게 하는 한편, 엘리아스 총독과 바르다네스를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학살을 경험한 케르손 시민들은 이미 유스티니아노스 2세에게 돌아선 상태였다. 그들은 게오르기우스를 처형했고,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여기에 크리미아의 여러 도시들이 가세해 공식적으로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불신임하며 바르다네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바르다네스는 옛 로마식 이름인 '필리피코스'로 이름을 고치고 황제를 자칭했다.

2.6. 죽음과 멸족

케르손 시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파트리키오스 마우로스에게 케르손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성 안에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 마우로스는 거대한 공성기를 가지고 와 케르손의 방어용 망루 두 개를 파괴했다. 그런데 하자르족 대병력이 도착하자, 마우로스는 중과부적이라고 판단하고 필리피코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후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이 당시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수도를 떠나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소규모 봉기를 진압하러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리피코스가 마우로스를 굴복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최대한 서둘러 수도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먼저 도착한 필리피코스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수도에 입성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도망쳤지만 몇달 전 자신이 케르손의 총독으로 임명했던 엘리아스가 지휘하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엘리아스는 자신이 직접 처형을 담당하겠다고 나서서 단칼에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목을 베어 머리를 새 황제에게 보내고 시신을 마르마라 해에 던졌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모친인 아나스타시아 태후는 황급히 어린 손자 티베리오스를 데리고 블라케르나이에 있는 성모성당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필리피코스의 부하 2명이 들이닥쳐 공동 황제를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늙은 태후가 애원했으나, 요안니스 스트로우토스라는 부하가 한 손으로는 제단을, 다른 손으로는 성십자가의 한 조각을 움켜쥔 채 덜덜 떨고 있던 티베리오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년의 손아귀에서 성십자가 조각을 빼앗은 후, 공손하게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공동 황제의 목에 걸린 성물함을 벗겨 자기 목에 걸었다. 그 다음에는 소년을 이웃 성당의 현관으로 끌고 가서는 옷을 벗기고 목을 베었다. 이리하여 이라클리오스 왕조는 창건자 이라클리오스의 4대손[12]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 대에서 종말을 맞게 되었다.

3. 평가

탁월한 재능을 지닌 군주 유스티니아노스 2세, 그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달리 새로운 국가조직을 확충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자신의 무제한한 전제정으로 인해서, 자제력 없고 비인간적인, 거의 병적인 잔인성으로 인해서 비극적인 운명을 준비했고 왕조의 몰락을 초래했다.
-Georg Ostrogorsky 씀, 한정숙·김경연 옮김, 《비잔티움 제국사 324-1453》Byzantinische Geschichte 324-1453, 112쪽.
동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가 집권과 숙청, 몰락을 반복하는 사이 제국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고, 아랍인들은 이를 결정적인 기회로 삼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만약 이를 격퇴해내지 못했다면 제국은 그대로 멸망하여,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로마 제국의 망국을 초래한 황제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를 쭈욱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그가 최악의 군주 중 하나로 기억되는 것은 능력이 형편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로, 그는 상당히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실제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제국의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고, 적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테마 제도를 개선했고, 주민들을 이주시켜 지역 개발을 용이하게 했으며, 종교 방면에서도 성과를 거두었고 아랍인과 불가르족과의 관계도 개선시켰다. 내부 문제를 겪고 있었다지만 대체적으로 로마 제국을 압도하던 우마이야 왕조에게서 승리하고 조공이나 다름없이 재물들을 뜯어냈다. 특히 로마 교황 콘스탄티노에게 보여준 행동을 봤을 때, 그를 마냥 폭군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는 교황에게 예를 다해 대접했고,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던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봉합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이같은 능력은 충동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성향으로 인해 빛이 바랬다. 그는 감정의 기복이 극심했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제거하려 들었다. 또한 외교 방면에서 실책을 여러 차례 저질렀고 별다른 대책 없이 라벤나를 약탈했다가 분노한 주민들의 봉기를 초래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절제력이 부족해 지나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으며 자신의 섣부른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집행했다가 실패했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코가 절단당한 뒤 10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제위에 복귀하겠다는 야망을 꺾지 않았고 현지에서 지지자들을 확보하면서 하자르족과 불가르족의 지원을 얻어내 마침내 제위에 복귀했다. 이것만 봐도 그는 불굴의 의지를 갖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불굴의 의지를 제국의 번영에 쓰지 않고 권력 탈취에 써먹었고,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4세가 애써 구축한 안정된 제국을 20년간의 혼란이라는 난세의 소용돌이에 빠뜨렸다.

4. 여담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비잔티움 황제 작위를 가졌던 사람 목록에 있으며, 코가 잘린 것은 disfigured 트레잇을 통해 간접적으로 구현되어 The Reaper's Due부터 가면을 쓰고 있다.

5. 참고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 당시 겨우 17세였다[2] 이따금씩 한 쪽이 차지했던 적도 있지만 10세기 중반까지는 대강 현상유지가 되었다가, 조약의 원래 상대였던 우마이야 왕조의 후신인 압바스 왕조가 바그다드마저 부와이 왕조에게 내어주고서(945-946) 그 칼리프가 신흥 정권에게 도장이나 찍어주는 상징으로 전락하여, 조약 자체의 구속력이 떨어졌으며, 또한 더 이상 라쉬둔-우마이야-아바스의 통일 이슬람 제국 시절의 이슬람권 전체를 상대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지방정권인 함단 왕조 정도만 상대하면 되어서 힘의 균형이 깨져 키프로스 인근의 육지인 킬리키아 및 안티오키아를 위시한 북시리아 일대가 키프로스와 함께 960년대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전부 동로마에게 넘어갔다. 키프로스 Cyprus in the Middle Ages 중 'In 688, the emperor Justinian II and the caliph Abd al-Malik reached an unprecedented agreement. The Arabs evacuated the island, and for the next 300 years, Cyprus was ruled jointly by both the Caliphate and the Byzantines as a condominium, despite the nearly constant warfare between the two parties on the mainland. The collected taxes were divided among the Arabs and the emperor. Under Basil I the Macedonian (r. 867–886) Byzantine troops recaptured Cyprus, which was established as a theme, but after seven years the island reverted to the previous status quo. Once again, in 911, the Cypriots helped a Byzantine fleet under admiral Himerios, and in retaliation the Arabs under Damian of Tarsus ravaged the island for four months and carried off many captives.'[3] 이렇게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재배치강제이주된 슬라브인을 가리키는 (영어 위키백과)'Asia Minor Slavs'라는 용어까지 있다. 이들의 후손 중 하나가 제6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반란군의 주동자였던 슬라브인 토마스(Thomas the Slav)이다.[4] 서로마 멸망의 신호탄은 로마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협상력이 떨어져, 이민족에 대한 이 전통적인 정책(뭉쳐서 살려면 멀리 가든가, 아니면 흩어져 살든가)의 강요가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고트족이 멀리 가지도 않으면서(다뉴브 강 유역 중하류의 강 너머에서 강 이쪽으로 넘어온 것에 불과하다.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 남프랑스 등에 서고트 왕국이 세워지는 것은 이 시점으로부터 수십 년 뒤의 일이다.) 종족 단위로 뭉쳐 있는 상태로 제국 영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던 것에서부터 시작했다.[5]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150년 전 동명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를 선망하여 재정복과 성당 건립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고, 따라서 세금을 많이 거두었다.[6] 토카트에서 서남쪽으로 40km 떨어진 마을. 고대에는 시바스에서 아마시아로 가는 길목이었다[7] 교회법 3조에서 성직자의 '재혼'을 금지한다고 기술되었지만 결혼한 사람이 사제가 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8] 당시의 지명 ‘헤르손’의 위치는 현재의 헤르손과는 좀 거리가 있다.[9] BC 146 ~ AD 698에서, 중간의 반달 왕국 100년 439 ~ 534를 빼면 로마 땅이었던 시절이 750년이 좀 못 된다.[10] 영어명 Paul the Deacon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몇 십년 정도 후에 랑고바르드 왕국 ~ 프랑크령이었던 북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베네딕토회 수도사제였다. 랑고바르드의 역사(Historia Langobardorum)를 집필한 바 있고 오늘날에도 잘 전해지고 있다.[11]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2] 이라클리오스-콘스탄티노스 3세-콘스탄스 2세-콘스탄티노스 4세-유스티니아노스 2세 이렇게 5명이 전부 뒤가 앞의 아들로 부자상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