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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티니아 왕국 10, 12대 군주 Νικομήδης | 니코메데스 4세 | ||
제호 | 한국어 | 니코메데스 4세 |
그리스어 | Νικομήδης | |
영어 | Nicomedes IV | |
존호 | 바실레프스 | |
별명 | 필로파토르(Philopator: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74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94년 ~ 기원전 91년(1차 재위) 기원전 89년 ~ 기원전 74년(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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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티니아 왕국 10, 12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2. 생애
비티니아 왕국 9대 군주 니코메데스 3세와 아리스토니카의 아들이다. 이복 남동생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와 이복 여동생 니사가 있었다. 기원전 9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비티니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통치 능력이 부족하고 성격이 우유부단해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91년, 폰토스 왕국의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가 동맹시 전쟁을 치르느라 대외 상황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비티니아를 곧장 침공하여 그를 몰아내고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를 새 왕으로 세웠다. 여기에 카파도키아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사생아 아리아라테스 9세를 카파도키아 왕으로 앉혔다.로마는 이 일에 반발하여 소크라테스 크레스투스와 아리아라테스 9세의 즉위 승인을 거부하고 그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를 복위시키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89년 로마 사절 마니우스 아퀼리우스가 폰토스에 찾아와 복위를 이행하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경고했다. 아직 로마와 싸울 준비가 안 되었던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미트리다테스는 그에게 보상하라는 아퀼리우스의 요구에 "내가 프리기아를 공략하라는 로마 공화국의 요청을 시행했으니, 로마 공화국은 내게 빚을 졌다"라고 답하며 거절했다. 폰토스 왕의 태도에 화가 난 아퀼리우스는 기원전 89년 그를 부추겨 폰토스를 침공해 아마스트리스를 약탈하게 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펠로피다스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 항의했다. 그는 프리기아와 카파도키아는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데 니코메데스 3세가 제멋대로 빼앗았으며, 이제는 그가 아마스트리스를 침공하여 약탈한 건 명백한 불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로마가 일방적으로 비티니아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며, 계속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로부터 미트리다테스가 아시아 전역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편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에게 비티니아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요구가 거부당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마침내 로마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89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아르켈라오스를 대동하여 프리기아로 진격했다. 그가 이끄는 비티니아군은 이에 맞서 할리스 강의 지류인 암니아스 강변으로 진군하여 폰토스군과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는 비록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낫전차를 동원하여 적 보병대를 무차별 살육하자 비티니아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한 덕분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잔여 병력을 이끌고 마니우스 아퀼리우스의 로마군과 합세한 뒤, 프로토파키움 요새로 쳐들어온 폰토스군과 재차 맞붙었다. 그러나 이 전투 역시 폰토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마니우스 아퀼리우스는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둠을 틈타 로마군 진영을 이탈하여 페르가몬 왕국으로 도주했고, 진영에 남아있던 아시아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로마 장수들은 니코메데스 4세와 함께 프리기아의 '사자의 머리'로 불리는 요새로 피신해 프리기아인들을 징집하여 훈련시키려 했지만, 프리기아인들이 비협조로 나오자 포기했다. 카시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파메아로 갔고, 그는 페르가몬으로 망명했으며, 아퀼리우스는 미틸레네로 재차 피신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여세를 몰아 군대를 소아시아 전역으로 파견하여 순식간에 공략했고, 흑해 어귀를 지키고 있던 로마 함대 지휘관들의 항복을 받아낸 덕분에 에게 해의 패권도 확보했다.
기원전 88년, 아퀼리우스는 폰토스군에게 체포되어 미트리다테스 6세로부터 전쟁의 주범으로 비난받고 당나귀에 묶어서 여러 곳을 돌며 대중 앞에서 미친 척 하라고 강요당한 후 녹인 금이 목구멍이 들이부어지는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이후 폰토스군이 소아시아 전역을 휩쓸자, 그는 로마로 망명하여 4년간 사태 추이를 지켜보다가 기원전 85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연전연패한 미트리다테스 6세가 전쟁 전 상태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다르다누스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식되자 기원전 84년 비티니아로 복귀했다. 이 일로 비티니아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이 공고해졌다.
기원전 81년, 아시아 총독의 부관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특사로서 비티니아에 파견되었다. 카이사르는 그의 궁전에 오래 머물렀는데, 나중에 이것 때문에 그와 카이사르가 동성애 관계였다는 스캔들이 벌어졌다. 고대 로마에서 동성애는 윤리적으로 금기되지는 않았지만, '삽입 당하는' 행위는 남자답지 못하는 것으로 폄하당했다. 당시 카이사르의 나이나 신분 차이를 볼 때, 카이사르가 '당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니코메데스가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자 절륜한 솜씨(?)로 카이사르가 공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카이사르에게는 '비티니아 왕비' 라는 별명이 붙어버렸다. 어지간히 놀림거리가 되었던지, 오죽하면 카이사르의 개선 행사 때 개선장군을 놀려 먹는 전통에 따라 병사들이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니코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정복했다!"고 소리칠 지경이었다. 물론 카이사르는 동성애가 사실이 아니라며 반박했지만, 로마 시민 대부분은 믿지 않았다.
기원전 74년, 니코메데스는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에게 남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왕국 전체를 로마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로마가 유언을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단행했지만,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연전연패한 끝에 파멸했고, 비티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