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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발티 왕조 초대 군주 𐌰𐌻𐌰𐍂𐌴𐌹𐌺𐍃 | 알라리크 1세 | ||
[1] | ||
제호 | 한국어 | 알라리크 1세 |
고트어 | 𐌰𐌻𐌰𐍂𐌴𐌹𐌺𐍃 | |
라틴어 | Alaricus | |
생몰 년도 | 370년? ~ 410년 | |
재위 기간 | 395년 ~ 4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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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때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던[2] 게르만족의 군주. 이름의 뜻은 세계의 왕이다. 서기 395년부터 410년까지 서고트족의 대왕으로 재위하였고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한 게르만 군주로 유명하다.[3]1.1. 로마의 동맹자
알라리크의 등장에 앞서, 알라리크가 활동했던 시기 로마와 게르만의 관계를 반드시 간략히 설명해야 한다. 후기 로마 제국은 자체 군사력 부족을 벌충하고자 이전까지는 로마군의 군제하에서 보조병으로 활용하거나 일방으로 압박하기만 했던 게르만족을 포이데라티(foederati)라는 이름의 비정규군으로 로마군에 편입시켰다. 즉,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던 게르만족들이 부족별로 독자 지휘체계를 유지한 채 로마에 협조하는 형태로 로마와 게르만의 관계가 변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통솔에 실패하여 378년에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라는 희대의 흑역사를 적립하기도 하지만, 이 전투에서 전사한 발렌스의 뒤를 이어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비를 재건하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고트족을 압박, 로마와 게르만족의 관계를 복원하는 데 일단 성공한다.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360년대 말에서 370년대 초에 지금의 루마니아 일대에 해당하는 도나우 강 하구의 페우스 섬에서 출생한 알라리크는 서고트(Visigoth, 비시고트)족의 유력한 가문인 발티(Balti) 가문 승계자라서 젊어서부터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군에 종군하면서 지휘자로서 역량을 인정받은 듯하다.
로마군 장수로서의 알라리크의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서기 394년 프리기두스 전투에서의 일로, 이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첫째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라의 친족이 되는 플라비우스 티마시우스,[4]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사위이자 근위대장이었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각각 지휘했고 여기에 알라리크가 이끄는 20,000명의 서고트족이 가세하였다.[5] 서로마의 황제 참칭자 에우게니우스와 격돌한 프리기두스 전투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바, 이 전투의 최대 공로자는 스틸리코와 알라리크였다.
1.2. 알라리크, 거병
프리기두스 전투에서의 승리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로마와 동로마를 재통합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이듬해인 395년 초에 그만 지병으로 졸사,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6]와 호노리우스[7]가 각각 다스리는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17세의 아르카디우스나, 10세의 호노리우스 모두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바닥에 가까워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측근들이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게 되는데 서로마 제국보다는 안정되어 있던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선친 테오도시우스 장군 시절부터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자문역을 맡아오던 갈리아 아퀴타니아[8] 출신의 법률가 루피누스가 재상 겸 섭정역으로 권력을 장악하였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자신의 주력 부대를 배치하면서 재건하려 했던 서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측근 무장인 스틸리코가 호노리우스의 인척 자격으로 섭정하면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의 명저 <로마 제국 쇠망사>를 보면, 이 무렵 알라리크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의 전공을 기회로 제국의 정규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으나, 이런 희망은 당시 제국의 권력을 두고 스틸리코와 다투던 동로마의 재상 루피누스에 의해 거부되었고, 모이시아 일대에 정착하던 서고트족이 루피누스의 막장 정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겹치면서 알라리크가 반란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추대되고 이어서 "방패 위에 올려지게"[9] 되었다고 한다. 일설로는, 이러한 서고트족의 반란이 동로마의 제위를 노리던 루피누스가 유약한 황제 아르카디우스를 제거하려는 음모의 일환이었다고도 하고, 알라리크가 그리스 일대를 공격하는 동안 자신이 황제가 되도록 하면 알라리크를 돕겠다고 제의했다지만, 진실은 불투명하다.
1.3. 동로마의 위기
1.3.1. 그리스 진공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정책에 따라 서고트족은 황제의 최고위 포이데라티로서 황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까운 모이시아 일대에 집중적으로 정착했기에 알라리크는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근교까지 진격할 수 있었지만, 그 전설 같은 3중 성벽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라 하더라도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래로 제국의 중심으로 번영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힘은 당시 서고트족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에 알라리크는 그리스로의 진격을 결정했다.여타 황제보다는 선정을 펼쳤던 테오도시우스 1세의 18년 치세의 결과, 동로마 제국은 상당히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에는 하필 그 강력한 군대가 이리저리 분산된 상태였다. 즉, 티마시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동로마 군대의 주력은 이른바 '백(白)훈족'으로 알려진 훈족의 분파 에프탈을 상대하고자 소아시아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테오도시우스 1세 직속 정예군은 프리기두스 전투 이후 아직 스틸리코 장군의 지휘하에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터였다. 이는 곧 동로마, 특히 그리스에는 알라리크의 서고트 군대를 상대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고, 테르모필레를 돌파한 알라리크는 그리스 전역을 휩쓸면서 동로마 제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때 황제 아르카디우스에게 지시를 받은 스틸리코가 그리스에 상륙하면서 알라리크의 진격은 1차 저지되었다. 스틸리코의 찬미자로 유명한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이때 스틸리코가 일리리쿰 일대로 진군하여 알라리크를 압박하였으나 알라리크를 스틸리코가 끝장내면 그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추단한 동로마 궁정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알라리크는 결국 귀환하게 되었고 이 시점부터 스틸리코와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1.3.2. 제2차 그리스 진공
그러나 이 직후, 스틸리코가 귀환시킨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재상 루피누스가 살해되고, 환관 에우트로피우스가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혼란에 다시 휩싸였다. 알라리크는 이 기회를 틈타 그리스로 재진격, 아테네, 아티카, 스파르타, 코린트를 위시해 고대 지중해 문명의 중심지로 알려진 여러 도시를 휩쓸면서 '정복자'라고 자처했다. 전설로는, 이때 자신을 달래고자 찾아온 아테네의 사신들에게 알라리크가 아테네인들보다 뛰어난 그리스어로 대답하여 아테네인들을 털어버렸다고도 한다.[10]그러나 397년, 스틸리코가 서로마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진격하면서 이런 알라리크의 행보는 다시 제지되고 스틸리코의 재빠른 진격을 저지하지 못한 알라리크는 폴로이 일대에서 스틸리코에게 포위되었다. 알라리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스틸리코가 철수[11]하면서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코린트 해안을 거쳐 에페이로스 일대로 진격한 알라리크는 동로마 제국 궁정과의 협상을 이용해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magister militum per Illyricum), 곧 일리리쿰 일대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2]
그런데 일리리쿰 일대, 정확히 일리리쿰 관구(dioecesis) 혹은 (이 당시 명칭으로는)판노니아 관구[13]는 당시 동•서로마의 영역에서, 엄연히 서로마의 영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어찌보면 동로마가 자기 영역에서의 골칫거리를 무마하고자 엉뚱하게 서로마의 재산으로 선심을 쓴 것 같아보인다. 허나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은 일리리쿰 대관구 전체의 군을 통솔했고, 상술했듯 일리리쿰 대관구는 동로마의 관할이었다. 따라서 마기스테르 밀리툼을 알라리크로 임명하건 말건 서로마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판노니아(일리리쿰) 관구는 서로마 영역인 이탈리아 대관구에 속했다는 점, 그리고 알라리크가 동로마의 자원을 이용해 서로마를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는 점이다.
알라리크는 동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서로마 제국의 군구 총독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십분 활용, 동로마 제국의 병기창을 마음껏 가동하여 휘하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동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여러 부족과 협상하여 자신의 군대를 증강시키면서 서로마의 권력자, 스틸리코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4. 제1차 이탈리아 침공
서기 401년경,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알라리크는 숙적 스틸리코가 지키던 이탈리아 침공을 결정했으나 그의 재능을 두려워해 스틸리코를 이탈리아에서 떼어내고자 동고트족을 지도하던 라다가이소[14]와 동맹을 맺고 스틸리코를 북이탈리아에서 끌어낼 것을 사주했다. 이를 승낙한 라다가이소의 동고트족과 다른 게르만족들이 북이탈리아를 침공할 기미를 보이자 스틸리코는 야전군을 이끌고 급히 출진하였으며 이로써 이탈리아 방위선에 공백이 생겼다.알라리크는 전술가로서의 재능은 스틸리코만 못했다고 여겨지지만,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출중했다고 후대의 혹자들에게 대체로 평가된다. 실제 제1차 이탈리아 침공을 앞둔 상태에서 알라리크는 동고트족과의 연계로 강적 스틸리코를 배제한 뒤에도 서고트족의 결속을 공고히 하고자 초자연력을 빌리려 했다고 전한다.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알라리크가 고트족이 숭배하는 신성한 숲에서 기도하던 중 다음과 같은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망설이지 말라, 세계의 군주(알라리크)여, 바로 이 해에 그대는 알프스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도시'(로마)에 입성하게 되리라."
이러한 신탁의 존재로 사기가 오른 서고트족은 알라리크의 지휘하에 스틸리코가 없는 북이탈리아로 진입, 한때 밀라노에 체제하던 황제 호노리우스를 사로잡기 일보 직전까지 갈 만큼 이탈리아를 종횡무진 휩쓸고 다녔으나, 그의 숙적인 스틸리코는 자신도 전쟁에 능숙했던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조카사위로 맞이할 정도로 신임했던 최측근 무장답게 알라리크에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동고트족과 연계한 다른 게르만족들을 잇따라 격파한 스틸리코는 측근 소수 부대만 이끌고 한겨울의 강행군을 감행해 밀라노로 귀환, 황제 호노리우스를 구출하여 로마로 피신하게 하고서 북부 전선으로 재이동하여 게르만족들을 제압하고 그들을 동맹군으로 맞이하여 전력을 증강하게 하는 방식으로 알라리크의 전략을 무산시켰다.
브리타니아에서 소환된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을 비롯한 각지의 로마 정규군과 스틸리코에게 패한 뒤 협력하게 된 게르만족의 가세로 전력이 크게 증강된 스틸리코 휘하의 서로마 군대는 402년 4월 6일 부활절에 지금의 피아몬테에 해당하는 폴렌티아 근교에서 알라리크가 지휘하는 서고트 군대와 격돌했다. 알라리크는 이 폴렌티아 전투에서 선전하여 스틸리코 휘하의 기병대장 사울(Saul)을 전사시키는 등 초반에는 서로마 군대에 우세를 점했으나, 스틸리코가 지휘하는 본대가 도착한 뒤에는 결국 패배하여 처자마저 내버려 둔 채 휘하 부대만 이끌고 퇴각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알라리크 휘하의 서고트족은 강력했고 알라리크가 터놓은 통로를 이용해 이탈리아로 잇따라 이동한 다른 게르만 부족들이 가세하여 알라리크는 상당한 군세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전술 차원에서 자신이 스틸리코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알라리크는 전략 차원에서 스틸리코에게 화의를 청한 뒤 일시 퇴각을 단행했다. 클라우디아누스는 당시 알라리크의 의도가 스틸리코를 방심하게 하고서 이탈리아를 재침공할 기회를 엿보려는 것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여기서 역으로 알라리크를 낚았으니, 즉 알라리크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알라리크를 비밀리에 추격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스틸리코는 403년 초로 추정될 무렵에 베로나 근교에서 알라리크의 군대를 포위하여 알라리크를 '그 자신이 탄 말의 다리에 자신의 운명을 걸게 할 정도'[15]로 크게 격파했다(베로나 전투).
알라리크는 알 수 없는 스틸리코의 의도[16]에 의해 일리리쿰으로 퇴각,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점령은 무산되었다.
1.5. 제2차 이탈리아 침공
1.5.1. 스틸리코와의 화해
스틸리코와 알라리크는 403년 이후, 더는 서로 쓰러뜨릴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알라리크는 스틸리코에게 대패하고서 약화된 군사력을 회복하게 하기에 급급했고, 스틸리코는 동고트족을 비롯한 다수의 게르만족들을 상대하면서 궁중의 환관들과 원로원 의원들 같은 로마 고위층과의 정쟁에 골몰하여 외부로 힘을 행사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역량이 호적수라는 말에 어울릴 정도로 비등했다는 사실은 분명했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설정에 애를 먹던 스틸리코로서는 동로마 제국의 실력자라고도 할 알라리크의 힘을 빌리는 것을 바람직하게 고려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408년 5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죽으면서 그때까지 동로마 제국에 정치상으로 밀리는 처지에 있던 서로마 제국은 황제 호노리우스가 동로마 제국의 제위를 겸병하거나 동로마의 신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섭정을 맡는 것을 고려하는 등, 동로마의 정계에 실력 행사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에페이로스에 체류하던 알라리크가 서로마 제국의 동맹자가 되기를 청하면서 그 대가로 금 4,000파운드를 요구했다. 이는 로마 원로원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당시 라인 강을 비롯한 각 전선에서 증대되던 게르만족의 압력을 타개할 유일책이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통합뿐이라고 간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스틸리코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1.5.2. 스틸리코의 사망과 제1차 로마 포위
그러나 408년 8월, 티키눔에서의 쿠데타로 말미암아 스틸리코가 실각하여 국가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스틸리코를 따르던 게르만 외원군(포이데라티)은 스틸리코 파 장군들이 잇따라 숙청당하면서 이탈리아를 떠나 알라리크 휘하에 편입되었다. 그 수는 거의 30,000명에 육박했다. 그들에게는 숙련된 전쟁 경험이 있었기에 즉시전력감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 덕택에 완벽하게 재기할 수 있게 된 알라리크는 '친구이자 동맹자인 스틸리코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이탈리아를 침공, 408년 9월에 로마를 포위하게 되었다.스틸리코와 같은 실력자는커녕 변변한 군대도 없었던 로마로서는 알라리크가 공격해 온다면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로마 원로원은 평화사절을 파견했다. 이들이 알라리크에게 협상을 제안할 때, 로마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포에 떤다는 등으로 동정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건초는 무성할수록 베어내기 좋다!'라는 말을 하며 한껏 로마를 위압하였고, 결국 로마 포위를 푸는 대가로 원래 로마에 동맹을 제의하면서 요구했던 금 4,000파운드를 상회하는 거액[17]을 뜯어내게 된다.[18]
이 때까지만 해도 알라리크는 로마를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원래 그는 로마 제국의 장군이 되기를 희망했던 바 있었고,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이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그가 원했던 것은 서고트족과 다른 게르만족의 군사력을 기반으로 스틸리코의 지위[19]를 그가 물려받는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1.5.3. 제2차 로마 포위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실의 인척이자 로마 제국의 고관이라는 사실을 자부했고, 서로마 체제의 중심인물이었던 스틸리코와는 달리, 알라리크는 어디까지나 서고트족의 왕 내지는 부족장으로서 그 지위를 원했고 때문에 서로마 제국과의 교섭 때, 도나우 강 남안과 베네치아 해안에 이르는 영토 전부를 서고트족의 영지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것은 과중한 요구였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당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던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알라리크라는 당대 최고 수준의 무장을 입수할 호기이기도 했다. 설령 요구를 받아들여 땅을 할양했다가, 알라리크가 죽고 나서[20] 부족장 지위의 계승 문제가 벌어질 때 [21] 흔들어서 서로 싸움을 붙이거나 하는 이이제이로 땅을 충분히 되찾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천연의 요새인 라벤나에 웅거하면서, 동로마 제국에서 보낸 경호 병력까지 도착해 안심하고 있던 황제 호노리우스는 이러한 알라리크의 요구를 숙고하지도 않은 채 거부했다. 이에 격노한 알라리크는 409년에 로마로 재진격, 이번에는 로마의 장관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황제로 옹립하여 호노리우스 배제를 시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의 호응이 적자 알라리크는 아탈루스를 폐위하고는 호노리우스에게 재협상을 제안한다.
1.5.4. 로마 약탈과 죽음
호노리우스와 알라리크의 협상 장소는 라벤나로부터 12km 떨어진 곳이었다. 헌데 여기서 호노리우스는 한가지 실책을 저지르는데 협상 도중 스틸리코의 부관이자 고트족 출신이었던 사루스를 시켜 알라라크를 기습한 것이다.간신히 도망친 알라리크는 더이상 로마 황제와 협상할 여지가 없음을 실감했다. 원로원의 무례하고 경솔한 서간, 그리고 황제와 그 측근 신하들에 의한 거듭되는 배신에 분노한 그는 410년, 서고트군을 이끌어 로마를 함락시켰고, 3일에 걸쳐 약탈했다.(로마 약탈(410년)) 이때 로마는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비롯해 역대 황제의 무덤이 도굴되었고 많은 재물을 약탈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어서 알라리크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아프리카로 남하하던 중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코센차에서 수해를 만나 앓다가 병사했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부족민들에게 안전한 땅을 찾아 주지 못해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알라리크의 유해는 콘센티아 성벽 아래로 흐르는 부센티누스 강의 물길을 잠시 바꾼 다음 드러난 마른 강바닥 위에 부장품들과 함께 묻혔고, 알라리크의 부하들은 장례를 치르느라 잠시 바꾸어놓았던 물길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공사에 동원된 모든 포로를 살해했다고 한다. 무덤의 위치를 영원히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처남인 아타울프[22]가 알라리크의 뒤를 이었지만 로마의
1.6. 기타
영국의 BBC 방송에서 제작 6부작 다큐멘터리 로마 제국의 탄생과 멸망 마지막화 '몰락의 시작'에서 등장한다. EBS 방영 당시의 성우는 김준.[23] 로마측 인물(스틸리코 제외)에 비해 상당히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된 부족민들에게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언제까지 이런 떠돌이 생활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묻는 부족민에게 "곧 좋은 땅이 생길 테니 조금만 참게"라며 따스하게 달래고, 로마군에 고트족을 복무시키는 대가로 부족민이 정착해 살 안전한 땅을 로마로부터 받는다는 조건으로 맹약을 맺는데, 너무 많은 것을 내주는 거 아니냐는 아타울프에게 "황제를 믿어서가 아니라 실세인 스틸리코를 믿기 때문에 약속했다"고 말하지만, 스틸리코가 암살당하고 로마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로마 안에서 야만족 병사들을 마구 학살하자 황제가 있는 라벤나로 들어가는 대신(라벤나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늪지라서 공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로마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떠올리다 무력 시위로써 로마 시를 포위하고는 "우리는 오랫동안 굶주렸다. 로마인들도 굶주림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겪어 봐야 한다"며 로마로 들어가는 모든 공급을 차단해 버리고, 로마는 거의 유령도시화된다.로마에 남아 있던 원로원 귀족 의원 및 시민들이 끝까지 로마를 지키며 알라리크와 싸울 것이라는 말에도 코웃음을 치며 "건초는 무성할수록 베어내기 쉽지"라고 한다든가, 전재산을 몸값으로 내놓으라는 요구에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게 되느냐고 묻는 로마측 의원에게 "목숨은 남겨주지"라고 말하는 등 역사 속에서 등장한 알라리크 본인의 발언 역시 재연되었다. 로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조건으로 노리쿰[24]을 고트족이 정착할 땅으로 내달라는 요구에 황제는 찬성하는가 싶더니, 최종 협상을 앞두고 로마에서 알라리크가 철수하자마자 "지금이 알라리크를 칠 기회"라는 환관 올림피우스의 꾐에 넘어가서 퇴각하는 알라리크를 공격하는 병크짓을 저지른다. 알라리크는 이들 로마군을 가볍게 밟아준(...) 뒤 다시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당신들 손으로 나와 떳떳하게 협상할 수 있는 참신한 황제를 뽑아보라"며 원로원 의원들을 부추기고, 로마 지사 아탈루스를 추천해 황제로 앉힌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노리우스를 자극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생각이었는데 호노리우스는 "로마를 굶주리게 하면 로마 시민들이 아탈루스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라는 요비우스의 주장에 북아프리카에서 로마로 오는 곡물 무역로를 끊어버리고, 시민의 지지를 잃은 아탈루스를 황제에서 끌어내린 뒤 알라리크는 "내가 직접 가서 황제와 협상하고 싶다"며 아탈루스가 입었던 황제의 옷을 보내며 "이번에도 약속을 어겼다간 로마는 끝이다. 내 맹세하지."라며 분노를 찍어누른다. 호노리우스는 알라리크에게 라벤나로 오라고 하지만, 고트족 출신으로 알라리크에게 원한이 있었던 장군 사루스가 알라리크와의 협상을 반대하다 급기야 소수 호위병만 데리고 호노리우스가 있는 라벤나로 향하던 알라리크를 중간에서 습격해버린다. 사루스의 얼굴을 알아보고 "황제가 우리를 또 배반했다!"며 절규하면서 알라리크는 결국 꼭지가 돌아 로마를 약탈하게 된다. 로마 공격 직전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투구를 쓰고 말에 올라 게르만족을 거느리고 로마로 진군.
약탈이 벌어지는 가운데에도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교회는 불태우지 말고 놔둬라"는 명령을 남기는가 하면, 로마 약탈이 끝나고 약탈품을 챙기는 부족민들을 보며 아타울프가 "다 끝났습니다. 이기셨습니다."라고 하자 "이게 우리가 원하던 거였나?"라고 자조하듯 중얼거리고, 당하고만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아타울프의 대답에 씁쓸하게 "그만 가지."라고 대답하는 등, 마냥 악역으로만 보기 힘들다.
토탈 워: 아틸라에서도 서고트족의 군주로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로마 제국의 이야기를 다룬 흰 말 트레일러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캠페인 시작시점인 395년에는 그리스 지역을 침공하는 행보를 보인 점을 감안했는지 마케도니아 속주에서 시작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에 추가된 캠페인의 주인공으로 위에 나온 그의 행적이 그대로 묘사되었다. 캠페인의 화자는 포가튼에서는 알라리크의 부인이었지만 이후 결정판에선 처남인 아타울프로 바뀌었다.
쓰레기 게임인 카스미 닌자에도 알라리크가 등장한다. 게임의 배경이 현대인 만큼 알라리크 왕 본인은 아니고 이름만 동일한 후손이지만. 게임이 워낙 막장인지라 다른 캐릭터들도 다 그렇지만 알라리크 역시 성능이 좋기를 기대할 수 없다.
로마 디펜스에서는 원역사대로 1차 침공을 벌이나 주인공의 개입으로 역사가 달라져[25] 원역사보다도 더 처참하게 패배해버린다. 그 뒤 주인공의 라이벌 비디메르를 등용하고 원역사보다 일찍 모습을 드러낸 라다가이수스가 로마의 어그로를 끄는 동안 다시금 세력을 모은다. 비디메르와 거의 형제처럼 지냈는데 비디메르가 게르마니아에서 주인공에게 패해 죽자 분노해 그의 시체를 찾아야 한다며 군대를 일으키려 할 정도. 그 뒤 올리브리우스의 부탁을 듣고 로마로 진격하며 현재는 베로나에서 주인공과 맞서 싸우고 있다. 원래 개인의 무력이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생각했으나 그 예상을 박살 내는 주인공을 보고 공포에 질렸으며 독자들은 원역사의 로마 약탈도 못해보고 주인공의 트로피가 되겠다며 조소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와중에도 끈질기게 살아 남으며 활동을 이어나갔고 올리브리우스 휘하에서 스틸리코에게 복수전을 성공하기도 하며 피크를 찍으나 결국 마리우스에게 쓰러진다.
바바리안 라이징 6화에서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 배우는 루이스 하이네스(소년)/개빈 드레아(청년). 훈족의 정찰대의 습격으로 여동생과 함께 마을의 유이한 생존자가 되지만 프리티게른에게 구출되며 살아남기 위해 로마로 향했지만 로마군의 만행으로 여동생이 노예로 끌려가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로도 프리티게른과 지내면서 노략군에 합류해 숲을 정찰하다 사라센 족의 공격을 받고 간신히 살아남으며 프리티게른에게 아드리아노플을 공격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7화에서는 장성하여 1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원래 역사에서 스틸리코와 많이 역인것을 반영해 스틸리코와 친분이 있다는 설정으로 나오며 프리기두스 강에 자리한 적의 요새를 공격할 당시 부족민 1만이 목숨을 잃자 화가 나 황제에게 따지러 오지만 스틸리코에게 제지당하면서 시대가 자신들을 대우하는 쪽으로 바뀔것이라고 낙관하는 스틸리코와 반목하게 된다. 결국 역사대로 고트 족의 왕이 되어 그리스 지역을 공격하게 되고 이후 403년 스틸리코와 협정을 맺고는 동부 전선을 방어하던 와중, 408년 스틸리코가 쿠데타로 실각함과 동시에 처형되자 막사의 가구를 박살낼 정도로 분노하면서 로마를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3번을 포위했음에도 로마가 쓰러지지 않고 고트족 내에서도 병사 및 아사자가 늘어나자 부하와 대화하면서 프리티게른이었다면 어찌했을까라고 고뇌하던 와중 3차 포위전에서 협상은 없다는 원로원의 대답에 그렇다면 전사자들을 매장시켜 준다면 고트 족 정예병 300명을 노예로 보내주겠다고 말하면서 고트족 정예병을 잠입시키고는 전사자들의 매장지에서 참관하러 온 루피키누스를 죽이고는[26] 그대로 로마를 약탈해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약탈이 끝나고는, 처참히 파괴된 로마와 가족을 잃고 슬피 우는 로마인을 보고는 로마 군인들을 죽이는 부하들에게 우리는 훈족이 아니라면서 제지하고는 로마 병사에게 살려줄테니 이제 로마가 중심이었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를 자식들에게 전하라고 엄포를 놓는다. 이후에는 나레이션으로 로마 약탈 10일 뒤 열병으로 죽었다는 서술이 나온다.
8화에서는 그의 사생아 테오드리크가 등장해 역사대로 훈족에 대항하기 위해서 로마와 동맹을 맺는다.
[1] 아테네인들의 대접을 받는 알라리크, 루트비히 티르쉬 작(1894년)[2] 대제(大帝) 테오도시우스 1세 재위기에 외원군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포이데라티의 지휘관으로 로마군에서 봉직한 바 있다.[3] 로마 약탈 이후로도 서로마 제국은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버텼지만 알라리크는 그나마 남아있던 서로마의 저력과 저항의지를 분쇄하여 게르만족이 서로마의 땅을 활개치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4]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에도 동로마 제국군을 지휘하면서 활약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환관 에우트로피우스에 의해 숙청당했다.[5] 알라리크의 370년 출생설을 좇으면, 이때 알라리크는 24세에 불과한 나이에 서고트족 전체를 대표하여 정예병 2만 명을 지휘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6] 테오도시우스 1세는 프리기두스 전투 이전, 이미 아르카디우스를 자신과 함께 동로마를 다스리는 공동 황제로 만들어 두었다.[7] 프리기두스 전투의 승전 직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호노리우스를 자신과 공동으로 서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로 즉위하게 했다.[8] 現 아키텐.[9] 즉, 왕으로서 추대.[10] 의외의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무렵 게르만 고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로마와 그리스의 학문을 학습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례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측근이었던 프랑크족 출신 리코메르 장군은 그리스 학자들을 모아 일종의 살롱을 조성하기도 하였고, 알라리크의 숙적인 스틸리코도 클라우디아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법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즉, 이때까지는 로마와 그리스가 소위 '소프트파워'로 게르만족을 '로마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11] 역사가 조시무스는 스틸리코가 알라리크와의 1차전에서 승리한 뒤 승리에 취해 술을 퍼마시고 놀다가 알라리크를 놓쳤다고 주장하는데, 이 기록은 앞뒤가 영 맞지 않기에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리 많지 않다.[12] 동로마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은 서로마의 마기스테르 페디툼/에퀴툼과 동격으로, 각각 그 위에 황제 및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퀘 밀리티아이(서로마)/마기스테르 밀리툼 프라이센탈리스밖에 없는 최상위급 사령관이었다. 현대로 따지면 야전군사령관급.[13] 일리리쿰 대관구는 동로마의 관할이었다.[14] 라틴어로는 라다가이수스, 영어로는 라다가스트. 406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한 그 사람.[15] 에드워드 기번의 기록.[16]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는 알라리크를 대상으로 한 스틸리코의 비밀 교섭 본격화가 이때부터의 일이라고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17] 금 5,000파운드, 은 30,000파운드, 향료 3,000파운드, 비단옷 4,000벌, 주홍빛으로 염색한 가죽 3,000벌.[18] 이때 원로원 의원이 "그러면 왕이여,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게 되는 겁니까?"라고 묻자, 알라리크는 "살려는 드릴게그대들의 목숨은 남겨 주지."라고 대답했다.[19]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쿠이 밀리타이(magister utriusquae militiae), 즉 '최고사령관'.[20] 실제 역사에서도 조만간 죽었다. 로마군과 전투중에 상처를 입어서 더 빨리 죽었다는 기록도 딱히 없다.[21] 게르만 전통은 '장자상속제'가 아니었고 '분할상속제'였으며, 더구나 당시 고트족은 로마 내외를 배회하는 유랑민족이라 부족장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한 가문으로 쭉 이어지지 않았고, 부족장의 아들 등 후계자들이 능력이 영 아니었으면 다른 능력자에게로 부족장직이 넘어갔다.[22] 로마 약탈 때 호노리우스의 누나 갈라 플라키디아를 포로로 잡았는데 414년 혼인동맹의 형식으로 정식 혼인했다. 참고로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타울프와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사망 후 라벤나로의 귀환에 성공해 훗날 서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가 되는 장군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와 재혼한다.[23] 2화 '카이사르의 선택'에서 라비에누스도 맡았다.[24] 도나우 강 남부와 오스트리아 중앙부 및 바이에른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의 로마 시대 명칭(출처: 두산백과). 당시에는 척박한 황무지에 가까운 땅으로 야만족들의 침략에 상시 노출되어 있었던 곳이었기에(작중에서도 "산밖에 없는데 주면 뭐 어때서?"라고 황제가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협상에서 알라리크가 지닌 유리한 위치가 믿기지 않을 만큼 로마에게는 관대한 조건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25] 원역사와 달리 호노리우스가 친위대를 이끌고 스틸리코를 지원왔고 그 결과 속전속결로 끝나지 않고 1달 반의 대치기간이 있었다. 거기다 퇴각 과정에서 호노리우스의 패기로 수만의 전력이 고스란히 포로로 잡혀버린 건 덤.[26] 루피키누스는 본작에서 알라리크가 어린 시절 그의 여동생을 노예로 끌고 간 인물로 나온다. 알라리크는 여기서 그를 찔러 죽이면서 여동생의 복수를 이루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