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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발티 왕조 9대 군주 𐌰𐌻𐌰𐍂𐌴𐌹𐌺𐍃 | 알라리크 2세 | ||
제호 | 한국어 | 알라리크 2세 |
고트어 | 𐌰𐌻𐌰𐍂𐌴𐌹𐌺𐍃 | |
라틴어 | Alaricus | |
생몰 년도 | 미상 ~ 507년 8월 | |
재위 기간 | 484년 12월 28일 ~ 507년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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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9대 군주. 정교에 대한 박해 정책을 완화하고 로마인과 고트인 모두를 위한 법전을 개편하는 등 유능한 면모를 보였으나, 507년 8월 부이예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에게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2. 행적
서고트 왕국 8대 왕 에우리크와 라그나길드 왕비의 아들이다.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따르면, 라그나길드는 라틴어를 할 수 있었으며 시인과 예술가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그가 로마인들에게 온건한 정책을 취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데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484년 12월 28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서고트 왕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그가 집권한 시기, 서고트 왕국의 입지는 탄탄했다. 에우리크의 정복 전쟁으로 히스파니아 대부분과 남부 갈리아를 석권했으며, 로마 제국이 건재하던 시기 우수한 밀 생산지로 정평났던 프로방스 일대는 서고트 왕국의 영역으로 귀속된 후에도 여전한 생산력을 보여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또한 로마 가도는 이 시기에도 건재하여 원활한 물자 운송을 가능케 해주었기에 활발한 상업 활동과 대외무역이 이뤄졌다. 시오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등 여러 연대기 작가들은 서고트 왕국이 지극히 부유했으며 자원이 풍부했다고 서술했다.
그는 이러한 왕국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피레네 산맥의 통행을 보장하고 히스파니아 일대를 통제하기 위해 에흐-슈흐-라두흐(Aire-sur-l'Adour)에 별도로 궁전을 세웠으며, 오도아케르를 꺾고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한 뒤 강성해지고 있는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크 대왕과 동맹을 맺기 위해 대왕의 딸 테오데고타와 결혼하여 아들 아말라리크를 낳았다. 이와 별도로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서 게살레크를 낳았지만 사생아로 취급되었기에 왕위 계승권은 아말라리크에게 돌아갔다.
한편, 그는 아버지 에우리크와 대다수 서고트 귀족들처럼 아리우스파였지만, 정교 신자들에 대한 에우리크의 박해 정책을 중단하고 시게리우스가 아를의 주교로 선임되는 것을 인정했다. 또한 로마인과 고트인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법전을 만들고자 아니아누스가 이끄는 법전 편찬 위원회를 설립해 로마법과 고트법의 장단점을 분석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배제한 신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506년 2월 2일에 반포된 법전은 <브레비아리움 알라리키아눔(알라리크의 서약서)>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갈리아 북부에서 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급격히 신장하면서 평온했던 왕국에 전운이 감돌았다. 481년 왕위에 오른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는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계 군벌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했다. 시아그리우스는 전장에서 탈출한 뒤 알라리크 2세에게 귀순했다. 이에 클로비스 1세가 시아그리우스를 내놓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자,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그는 시아그리우스를 프랑크 왕국에 넘겨줬고, 시아그리우스는 곧바로 처형되었다. 클로비스 1세는 뒤이어 갈리아 북동부에 있는 튀링겐족을 제압하고, 라인 강 상부와 중부에 부르군트족과 알란족을 제압했다. 그러던 중 랭스에서 부하 3,000명과 함께 정교로 개종하면서, 로마 교회와 갈리아 현지민들의 지지를 받고 가톨릭 주교들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았다.
이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은 서고트 왕국과 국경을 마주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서고트 왕국 내의 정교 신자들은 클로비우스에게 귀순하기를 희망했다. 비록 알라리크 2세가 그들에게 온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서고트 왕국 수립 이래 수십 년간 천대받았고 에우리크 치세 때 가혹한 박해를 당했던 그들이 그 정도로 회유될 리 없었고, 각지에서 서고트 왕국의 지배에 반항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506년 루아르 강 중류의 한 섬에서 클로비스 1세와 만나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낭트, 앙제, 투르, 오를레앙을 프랑크 왕국에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들은 루아르 강 하류에 위치한 주요 도시였는데, 주민들은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서고트 족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었다. 알라리크 2세는 아마도 통제가 안 되는 이 땅을 프랑크 왕국에게 넘겨주면서 전쟁을 모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클로비스 1세는 불가침 조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르군트 왕국의 군주 군도바트와 군사 동맹을 주선했다. 이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위인 알라리크 2세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걸 사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부르군트 왕국에 맡기려는 계획으로 추정된다. 이후 507년 2월이나 3월 초에 프랑크 왕국 전역에 군대 동원 명령을 내렸고, 이른 봄에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으로 진격했다. 알라리크 2세는 프랑크군이 조약을 깨고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푸아티에에 군대를 집결했다. 양군은 507년 8월 부이예 평원에서 결전을 치렀다.
부이예 전투는 서고트 왕국의 재앙이었다. 고트군은 프랑크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려 섬멸되었고, 알라리크 2세는 전사했다. 프랑크군은 여세를 몰아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전역을 휩쓸었고,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툴루즈도 함락하여 왕실의 숱한 보물을 노획했다. 한편, 클로비스와 연합한 부르군트 왕국군도 나르본을 공략했다. 클로도베쿠스 1세는 내친 김에 서고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려 했지만,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절을 보내 그러지 말라고 권하자, 아키텐만 얻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서고트 귀족들은 왕이 죽자 게살레크를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로 망명한 아말라리크를 보호한 테오도리크 대왕은 게살레크를 찬탈자로 규탄했고, 511년 게살레크를 폐위한 뒤 아말라리크가 성인 되어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 때까지 대신 맡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서고트 왕국의 '섭정왕'으로 등극했다. 아말라리크는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한 526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