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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

칼 폴라니
Karl Polanyi | Polányi Káro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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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Karl Polanyi
카를 폴라니 (독일어)
Polányi Károly
폴라니 카로이 (헝가리어)[1]
출생1886년 10월 25일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적헝가리,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캐나다
사망1964년 4월 23일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자치령 피커링, 온타리오
학력부다페스트 대학교[2] (법학 / 학사)
가족배우자 일로나 두친스카(Ilona Duczynsky)
직업학자[3], 연구가, 대학교수
이력《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 저자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당적헝가리 급진당
1. 개요2. 상세3. 생애4. 평가5. 여담6. 주요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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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학자, 사상가, 대학교수.

2. 상세

정치학·경제학·사회학·사학·철학·인류학인문학사회과학 전 분야에 걸쳐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으며, 전통적인 경제사조에 이의를 제기하며 서구의 시장경제 체제를 분석한 저서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으로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막스 베버,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슘페터 등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사회과학 연구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이른바 '자기조정 시장경제'라 일컫는 기성 경제 체제를 향해 "애초에 현실적으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같은 개념"이라고 비판하였고, 시장경제 논리로 인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화폐 등 세상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이 태초의 생성 목적과 달리 상품으로 치부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회의 파괴를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시장에 맡기면 알아서 잘 조정된다"는 자기조정 시장경제 논리를 비판하였으나, 동시에 국가와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수반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에도 반대 입장을 밝혔다.

3. 생애

1886년 10월 21일 에서 태어나서 1964년 4월 23일 온타리오주의 피커링에서 사망했다. 그는 엔지니어이자 사업가인 헝가리인 아버지, 미할리 폴라섹과 헝가리의 지식인 사회에서 유명했던 러시아인 어머니, 새실 볼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콜로주바르 대학교에서 1909년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8년 그는 대학교에서 그는 갈릴레이 서클을 창립하는데 참여했고, 헝가리에서 급진파 운동권 학생들의 문화 운동의 첫 번째 회장으로 활동했다. 삼촌의 법률 사무소에서 직원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인 1910년까지 갈릴레이 서클의 멤버로 활동했다. 1912년 변호사로 임명되었지만, 그 직업을 싫어했다. 갈릴레이 써클는 Szabadgondolat(사밧곤돌라트, Free Thought)라는 잡지를 출간했고, 출판이 전까지인 1919년까지 편집자로서 활동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915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기병대 장교로 복무했다. 하지만, 심한 병으로 인해 그는 부다페스트와 빈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때 그는 부인인 일로나 두친스카를 만나 1923년에 결혼했다. 빈에서 요양하는 동안 그는 과학, 의학, 인간의 고통의 근원, 공산주의자의 도덕성 등 폭넓은 주제에 걸쳐 원고를 썼다 (출간되지는 않았음). 1921년 그는 오스카 야씨가 편집자로 일하고 있던 헝가리 주간지 《Bécsi Magyar Ujság》의 스탭으로 합류했다.

1924년부터 1933년까지 그는 빈에서 출간된 중앙 유럽의 주류 경제 금융주간지인 <Oesterreichische Volkswirt>에서 일했다. 그는 국제적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뤘고, 1933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이 부상하면서 강제로 사퇴하기 전까지 공동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런던으로 이민을 갔지만, 1938년까지 계속적으로 <Volkswirt>에 기사를 기고했다. 빈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자택에서 민주적인 연합의 사회주의 경제를 모델로 한 작은 비공식적인‘세미나’를 열었다.

영국으로 건너간 폴라니는 기독교 좌파 그룹에 참여했고, 존 맥머레이, 조지프 니덤 등과 함께 ‘기독교와 사회혁명(1925)’을 공동 편집했다. ’파시즘의 본질‘은 그 책에 실려있다. 1935년 그는 국제 교육 연구소로부터 미국의 대학교들에서 당시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미국에서 여러 강연을 하는 동안 그는 38개의 주를 방문했다.

1937년부터 폴라니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성인 파트타임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인 노동자 교육 협회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영국사회, 경제 역사와 국제적 문제에 대한 그의 강의는 ‘거대한 전환’에 큰 기여를 했다.

1940년 록펠러 재단은 폴라니가 미국 버몬트주의 베닝턴 대학교에서 상근 학자로 일할 수 있도록 3년동안 보조금을 주었고, 여기서 폴라니는 1944년에 그의 가장 중요한 책인 ‘거대한 변환’을 완성시키고 출간했다. 그의 부인은 1941년에 폴라니와 같은 대학교에서 수학 교수직을 제의 받았다. 그의 강의는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좋은 강연자와 좋은 사람으로서 인정받았다.

1943년 폴라니와 부인은 전쟁 중인 런던에 돌아왔고, 헝가리의 정치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영국에 돌아온 폴라니는 노동자 교육 협회에서의 그의 직책을 재개했다. 또한 영국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 등 많은 기관에서 그에게 강의를 요청해왔다.

1947년 폴라니는 뉴욕컬럼비아 대학교의 경제학과 초빙교수로 임명되었다.1953년 은퇴하기 전까지 컬럼비아 대학교의 사회과학 연구의원회의 지원으로 경제제도의 기원을 다루는 일반 경제사를 가르쳤다. 하지만, 일로나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에서의 공산당 활동 기록 때문에 미국 입국이 거절되었다. 그래서 1950년 폴라니 부부는 캐나다의 토론토 근교에 위치한 피커링(Pickering)에 정착했고, 폴라니는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통근했다.

67세에 교수직에서 퇴임한 후, 그는 포드 재단에서 두 번 째 연구 보조금을 받아 ‘제도적 성장의 경제학적 측면’에 대한 학제간 연구를 계속 했다. 콘래드 아렌스 버그와 해리 피어슨의 도움으로 프로젝트의 사무국장을 맡은 칼 폴라니는 젊고 우수한 학자들의 연구를 감독했다. 그 결과물은 ‘초기 제국의 교역과 시장’ 이었고, 이는 ‘The Economy as Instituted Process’의 세미나 논문들도 같이 실려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헨리 피어슨은 칼 폴라니의 강의 노트와 그의 중요한 미발표 원고들을 편집하여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Dahomey and the Slave Trade-1966)’과 ‘사람의 살림살이(and The Livelihood of Man-1977)’를 출간하였다. 그의 책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1963년 칼 폴라니와 일로나 두친스카는 1930과 1956년 사이의 헝가리 문학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The Plough and the Pen’를 공동으로 편집했다. 그가 사망하기 전 해인 1963년 10월 그는 1919년 이후 처음으로 헝가리에 방문했다. 그는 헝가리를 방문할 때 헝가리 국립과학원에서 일련의 강의를 했다. 그의 마지막 작업은 계간지 ‘공존(Co-existence)’을 출간 하는 일이었고, 이는 루돌프 슐레신이 편집했다. 칼 폴라니와 일로나 두친스카는 헝가리 국립과학원에서 주최한 칼 폴라니의 생애와 업적을 기념하는 100주년 행사 때 부다페스트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다.

4. 평가

폴라니는 경제가 사회와 문화 속에 착근된 방식을 강조하는, 경제학을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실질주의의 주창자로 간주되고 있다. 이는 주류 경제학에는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인류학정치학에서는 인기가 높았다. 고대의 경제에 대한 폴라니의 접근은 다소의 학자들이 통상적으로 고대 사회에서의 경제의 유용성을 부인하고 있으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다양한 경우에 적용되었다. 그의 책 《거대한 변환》은 또한 역사사회학에서 하나의 모형이 되었다. 또 그의 이론은 경제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거대한 변환》을 통해 폴라니는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불안정 요인을 밝혀냈다. 그는 자본주의가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 또는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상품화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불안정 요인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가치인 노동능력을 상품화함으로써, 제도와 신뢰의 표시인 화폐를 상품화함으로써, 만인이 공유해야 할 자연(토지)을 상품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불안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계금융위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 경제이론으로 그의 문제 의식이 각광받고 있다.

5. 여담

  • 대한민국에 그의 저작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경제 모델을 구현하려는 목적을 지닌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KPIA)'라는 협동조합 형태의 민간 연구기관이 있다. 한때 지구정치경제학자 홍기빈 박사[4]가 소장을 맡아 사회적 경제 실현을 주창했다. 연구소 홈페이지

6. 주요 저서

《거대한 변환 (The Great Transformation)》, 1944, 박현수 옮김, 민음사, 1997
《초기 제국의 교역과 시장 (Trade and Markets in the Early Empires)》, 1957, 이종옥 옮김, 민음사, 1994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들 (Dahomey and the Slave Trade)》, 1966
Primitive, Archaic, and Modern Economics: Essays of Karl Polanyi, 1968
《사람의 살림살이 (The Livelihood of Man)》, 1977, 박현수 옮김, 풀빛, 1998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2
《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 홍기빈 옮김, 길(박우정), 2009
[1] 헝가리유럽에서 유일하게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그 다음에 쓴다. 따라서 헝가리어로 성명을 표기하면 앞뒤 순서가 바뀐다.[2] 그가 대학을 졸업한 1912년 당시 학교명은 '부다페스트 대학교'였으며, 오늘날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3] 경제사학자, 경제인류학자, 경제사회학자, 정치사회학자, 역사사회학자, 사회철학자로 활동했다.[4]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외교학 석사 학위를 받고 요크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민간 연구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도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