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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c2c><colcolor=#dde3ea> 미합중국 제3대 중부사령관 노먼 슈워츠코프 Norman Schwarzkopf | |||
본명 | H. 노먼 슈워츠코프 2세 H. Norman Schwarzkopf Jr.[1] | ||
출생 | 1934년 8월 22일 | ||
뉴저지 트렌튼 | |||
사망 | 2012년 12월 27일 (향년 78세) | ||
플로리다 탬파 | |||
묘소 | 웨스트포인트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3대 중부사령관 | ||
1988년 11월 23일 ~ 1991년 8월 9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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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56년 ~ 1991년 |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육군) | ||
주요 참전 | 베트남 전쟁 그레나다 침공 걸프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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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장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미합중국 중부사령관으로서 다국적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당시 미군 51만명 포함 68만에 달하는 다국적군을 지휘하여 95만의 이라크군과 격돌하는 동안 294명의 전사자(미군 전사자는 고작 148명)만으로 이라크군 전사자와 실종자만 합쳐서 25만의 피해를 입히며 수도 바그다드 등 이라크를 맹렬히 공격했고, 첨단 유도병기와 디지털화된 전장의 시대를 열어 현대전의 개념을 바꿔버린 장군이다. 당시 합참의장 역시 미국군 역사에서 손꼽히는 인물인 육군대장 콜린 파월 장군으로서, 둘의 손발이 맞았던 것도 성공 비결이었다.
하지만 슈워츠코프는 파월의 정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겨 '파월은 정치군인이 되었다'라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대단히 중시하고 정치권력과는 거리를 두었던 슈워츠코프가 파월의 행보를 좋아할 리 없었다.
2. 일생
1934년 뉴저지 주 트렌튼에서 노먼 슈워츠코프 시니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1956년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187공수연대 2공수전투단 E중대에서 소대장과 부중대장직을 맡았다. 중위로 진급 후에는 독일 주둔 제6보병사단에서 소총소대장과 연락장교, 수색소대장을 역임했다. 대위 진급 후에는 고등군사반을 수료하고,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항공우주 기계공학과에서 미사일 공학을 전공하여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기계공학과에 교수요원으로 재직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는 원래 3년을 근무해야 했는데, 그는 전투를 경험하고 싶은 나머지 육사 근무 1년만에 베트남 근무를 자원했고, 베트남 공화국 육군(남베트남) 공수사단에 군사고문으로 배치되었다. 베트남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그는 둑코 전투에서 영웅적 전공으로 은성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베트남군 공수부대와 장거리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단일 작전에서 4차례의 총상을 입고도 의무후송을 거부하며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전공으로 다시 두번째 은성훈장과 퍼플하트를 수훈했다.
1년간의 베트남 파병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남은 근무기간 2년을 더 채우고,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했다. 결혼 후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대대장직을 월남에서 수행하기를 희망하여 두 번째 베트남 파병을 지원했다. 주월 미 육군 제23보병사단 198보병여단 6보병1대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데, 당시 지뢰밭에 고립된 병사들을 구조하다 입은 부상과 전공으로 세 번째 은성훈장과 두 번째 퍼플하트를 수훈했다.
1970년 겨울 그는 걸을 수 없을 정도의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병원에서 선천적 허리 이상이 반복된 공수훈련으로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수술과 재활훈련을 받았다. 이후 미 육군대학에 입학했다. 대령 진급 후 알래스카 주둔 미 육군 제172보병여단 부여단장을 거쳐 위싱턴 주 포트 루이스 주둔 미 육군 제9보병사단 1여단장을 맡았다. 준장 진급 후 하와이 주둔 미 태평양사령부에서 정책계획차장으로 근무했고, 독일에 주둔한 제8보병사단에서 부사단장을 지냈으며, 이후에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인력관리국장을 지냈다.
1983년 소장 진급 후에는 육군 제24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재직 중 그레나다 침공작전 편조부대인 제120혼합합동군(CJTF-120) 사령부에 육군 선임고문으로 차출되어 작전에 참여했다. 작전 둘째 날부터는 CJTF-120 부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레나다 침공작전시 미 해병대 제22해병상륙부대(MAU)장인 해병 대령이 육군 레인저 병력의 해병대 헬기 이용을 거부하는가 하면, 작전에 참가한 육군 헬기들에 대한 급유 비용 부담 문제로 해군 상륙함에서 급유를 거부하는 등 전쟁터에서 관할구역을 따지는 혼란한 현실을 체험하고 후일 합동작전 교리를 완성했다. 그레나다 침공 작전 후 24사단장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1986년 중장 진급 후에는 미 워싱턴 주 주둔 제1군단장을 거쳐 육군본부 작전계획참모부장으로 근무했다. 1988년 대장 진급과 동시에 미 중부사령관으로 부임, 재임 중 걸프 전쟁을 맞았고, 이라크를 격퇴하기 위해 편성된 다국적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세계의 우려가 무색하게 불과 백 단위의 아군 사상자만 남긴 채 이라크군을 철저하게 격파하며 사실상 와해시키고,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그나마 그 아군 사상자들 중에서 반이 사고사 혹은 아군의 오사/오폭이었다.
다국적군의 작전명인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은 슈워츠코프 장군의 별명인 "폭풍의 노먼(Stormy Norman)"에서 따온 것이었다(그 외에 "곰(the Bear)"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걸프 전쟁 당시 작전 브리핑을 하는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 미군의 100시간만의 승리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너무나도 명료한 슈워츠코프의 브리핑은 가히 전설로 남았다.
이후 콜린 파월과 함께 원수직 영전을 고려받았으나 최종적으로는 육군참모총장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전역했다. 역시 정치계에서 영입하려는 시도들도 많았으나 모두 거절했으며, 회고록을 쓰거나 군사자문 등을 하며 조용히 지내다 2012년 겨울 플로리다의 탬파에서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2]
3. 기타
- IQ 168, 멘사 회원이라고 한다.
- 키 191cm의 장신에 상당한 거구였다. 몸무게는 75kg으로 미국인들의 평균 이하 수준이었다고.
- 명장으로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만, 군 생활의 초기에는 여러차례 군 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군복을 벗으려 했다. 제 아무리 천하의 미군이라도 동서고금의 여느 조직들처럼 각종 부조리나 일부 무능한 상사 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작전지휘와 업무 자체를 할 마음이 없는 상관을 고발하거나 자리 보전만 하려는 간부들을 여러 번 몰아세웠다가 오히려 자기 자신만 다치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초급장교 시절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187공수연대 2공수전투단에 복무하며 군 내부의 부조리한 상황에 실의에 빠진 슈워츠코프 중위에게 전투단 본부의 토마스 월란 소령이 해준 충고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월란 소령은 "그것에 접근하는데 두 가지 방법이 있지, 첫째는 떠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자리를 고수하는 것일세. 그래서 언젠가 더 높은 계급으로 승진하면 그 문제들을 해치우는 것일세. 그러나 잊지 말게. 자네가 떠나면 나쁜 놈들이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슈워츠코프 중위는 나쁜 놈들이 이기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군에 남았다고 본인의 자서전에 언급했다.[3]
1965년 8월 둑코 특수부대 캠프에서 박격포 공격으로 부상당한 남베트남 낙하산병을 부축하고 있는 사진. 이 사진은 훗날 걸프전쟁 취재로도 유명해진 AP통신의 피터 아네트 기자가 촬영한 것이다.
- 베트남 2차 파병 당시 미 육군 제23보병사단 198보병여단 6보병1대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지뢰를 밟아 쓰러진 병사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지뢰밭 한 가운데로 들어가 끌고 나와 후송 헬리콥터에 실어 보내 목숨을 건지게 했는데, 구출된 병사가 흑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엄청난 상황이었기에 흑인 병사 한 명을 위해 백인 장교가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였는데, 게다가 슈워츠코프는 이 때 멀쩡히 돌아온것도 아니고 그 자신도 지뢰의 폭발로 가슴에 부상을 입었었다. 때문에 당시에는 겨를이 없어 자기가 구한 병사가 흑인인지도 몰랐고, 나중에 다른 흑인 병사들이 자신에게 감사를 표한 후에야 알아차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대대장이 되자마자 장교 식당을 없애고 장교들도 부사관 및 병들과 함께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도록 해 부하들의 신망을 얻기도 했다.[4]
- 제24보병사단 사단장과 제1군단 군단장 재직시 "주말에 훈련을 하고 싶으면 6주 전에 계획서를 제출하고 결재를 받으라."는 지시를 하달했는데, 사실상 주말의 휴식을 철저히 보장토록 한 것이었다. 부대 PX의 햄버거가 너무 맛이 없다는 부하들의 불만을 접수하자 과감히 영내에 버거킹 지점을 입점시키기도 했다[5].
- 베트남 전쟁과[6] 그레나다 침공 당시 특수부대의 시행착오들을[7] 직접 목격했기에 한 때 특수부대들을 건방진 양아치 집단처럼 여기며 싫어했으나,[8] 걸프 전쟁에서 그린베레 등 특수부대의 맹활약상을 본 뒤로 생각을 바꿔 "특수부대 팬"에 가까울 정도로 호감을 가지고 이들을 칭송했다.
- "영웅은 필요없다.(It doesn't take a hero)"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남겼다. 자서전에서 슈워츠코프 장군은 172보병여단 부여단장 시절 여단장이었던 짐 보트너 준장에게 다음과 같은 명언을 들었다고 적었는데, 권력자가 되면 자신이 매력있는 인기인이 된다는 것(으로 착각해서 주변 여성들과 부정을 저지르게 되는걸 경계하라는 금언)이다."그건 정말 놀랍더군. 준장으로 진급해서 별을 달자 나의 유머감각이 드라마틱하게 발전되더군. 이제 내가 한마디 농담을 던지면 모두들 웃어댄다네."ㅡ 짐 보트너 준장[9]
- msn.com에서 미국 최고의 전쟁영웅 16인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1] 이름 앞의 H는 그냥 H다. 그의 아버지인 노먼 슈워츠코프 시니어는 허버트라는 이름을 싫어하고 H. 노먼이라고 불리기를 바랐는데, 매정한 육군은 꿋꿋하게 공문서에 '허버트'라고 표기했기에 첫번째 이름을 H라는 글자 하나만으로 지었다고 슈워츠코프 자신이 자서전에서 밝혔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퍼스트 네임이 아닌 미들 네임이 더 잘 알려진 이유는 이 때문.[2] 본인의 생전 공로를 생각하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충분하지만, 역시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가 묻힌 곳이라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웨스트포인트 묘지에 묻힌 이들 중 지명도가 있는 인물로는 조지 커스터,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베트남전 당시 미군 총사령관) 등이 있다.[3] "영웅은 필요없다-상", H. 노먼 슈워츠코프, 성훈출판사, 1993, 171페이지.[4] 장교진이 사병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건 의외로 가장 효과적인 사기 증진법 중 하나이다. 식사를 같이 하면서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유대감이 쌓이며, 식사 과정에서 서로의 고충을 의논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쉽기 때문에 서로를 향한 불필요한 적개심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엔 장교와 사병간의 사적인 친분이 형성되면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로 발전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하는 방법이다.[5] 현재 미 육군 PX를 위탁 운영 중인 미 육군 공군 복지지원단(AAFEX)에 유일하게 입점해 있는 햄버거 체인점이 버거킹이다.[6] 각 사단의 레인저 중대와 그린베레의 개판인 군기는 유명했고, MACV-SOG는 비윤리적 행동을 밥먹듯이 했다.[7] 델타포스는 충분치 않은 정보만 들고 작전을 하다, 갑툭튀한 대공포대에 걸려서 비싼 특수전 헬기 하나를 잃었고 작전 목표도 이루지 못했고. 네이비 씰은 굳이 해상 강하를 고집해서 대원 4명을 익사로 잃었고, 겨우 총독관저에 갔지만 무전기를 두고 내리는 바람에 국제전화를 통한 화력지원을 했다.[8] 본인도 특수훈련인 레인저 스쿨을 수료하긴 했으나, 레인저 스쿨은 특수부대와 무관한 부대 소속이라도 미 육군에서 별을 달기 위해서는 사실상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특수부대뿐 아니라 일반보병이나 여러 병과들에서도 야심 있는 간부라면 입교를 희망할 정도다. 슈워츠코프 역시 레인저스쿨은 수료했지만 특수부대에서 근무한 적은 한 번도 없다.[9] 영웅은 필요없다(상), 노먼 슈워츠코프, 성훈출판사, 1993, 405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