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012e, #01013a 20%, #01013a 80%, #01012e); color: #ffc224;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조지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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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 ||||
조지 2세 | ||||
<rowcolor=#ffc224>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로버트 월폴 | 스펜서 컴프턴 | 헨리 펠럼 | 토머스 펠럼홀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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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캐번디시 | 토머스 펠럼홀스 | |||
조지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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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펠럼홀스 | 존 스튜어트 | 조지 그렌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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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페티 | 소 윌리엄 피트 | 헨리 애딩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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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윌리엄 피트 | 윌리엄 그렌빌 | 스펜서 퍼시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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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램 | 로버트 필 | 존 러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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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밀턴고든 | 헨리 존 템플 | 헨리 존 템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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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디즈레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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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 ||||
엘리자베스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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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 앤서니 이든 | 해럴드 맥밀런 | 알렉 더글러스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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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 존 메이저 | 토니 블레어 | 고든 브라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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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 | |||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 | 앤서니 찰스 린튼 블레어 Anthony Charles Lynton Blair | ||
출생 | 1953년 5월 6일 ([age(1953-05-06)]세) | ||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
재임기간 | 제73대 총리 | ||
1997년 5월 2일 ~ 2007년 6월 27일 | |||
서명 | |||
링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레오 블레어 | |
형제자매 | 형 윌리엄 블레어 | ||
배우자 | 셰리 블레어[1][2] (1980년 결혼~현재) | ||
자녀 | 3남 1녀 | ||
학력 | 페티스 컬리지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존 컬리지 (법학 / B.A.) Inns of Court School of Law[3] | ||
종교 | 성공회 → 가톨릭[4] | ||
사상 | 블레어주의, 자유사회주의 | ||
신체 | 183cm | ||
정당 | |||
지역구 | 세지필드 | ||
의원 선수 | 6 (하원) | ||
의원 대수 | 49, 50, 51, 52, 53, 54 |
[clearfix]
1. 개요
영국의 노동당 소속의 정치인. 제73대 영국 총리(1997년 ~ 2007년)를 역임했다.노동당 출신으로 역대 5번째 영국총리이며, 영국 정계에서 신노동당과 제3의 길이라는 중도적 노선을 표방하며 18년만에 보수당으로부터 정권을 가져와 집권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당 출신 총리로서는 매우 중도적인 성향을 띄었다.
20세기 영국 총리 중 최연소로 집권했으며[5], 노동당 출신 총리 중 가장 오랜 기간 집권했다.[6]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 치세에 출생한 최초의 영국 총리이기도 하다. 취임 2개월 후 홍콩이 반환되면서 대영제국의 마지막 총리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정치 입문 전
1953년 5월 6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2세 시기의 영국 총리 중,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간 때 태어난 최초의 총리이다.(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에 즉위)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성장기의 대부분을 스코틀랜드에서 지냈지만, 스코틀랜드인은 아니다. 집안은 원래 잉글랜드 북부 출신이고 정치적 입지를 다진 곳도 잉글랜드이다. 그래서 그런지 스코틀랜드 출신인 고든 브라운 전 총리와 달리 스코틀랜드 억양이 드러나지 않는다.
아버지 리오 블레어는 법률가로 보수당을 지지했다.[7] 아버지가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교 로스쿨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3년 반 동안 호주에서 지내기도 했고, 이후에는 잉글랜드 북부(더럼)에서 살기도 했다. 10세 때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페티스 칼리지(Fettes College)[8]을 다녔다. 엄격한 교칙과 선배 학생들에 의한 부조리에 반발하여 무단으로 교정을 이탈하기도 했으며, 록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71년에 페티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1년 정도 알바를 하며 지냈고 그 덕에 프랑스어가 유창하다. 돌아와서는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다녔다. 전공은 법학.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고. 머리를 치렁치렁 기르고 록밴드 보컬을 하기도 했다. 밴드이름은 어글리 루머스. 대학 졸업 후에 영국 노동당에 입당했고, 법률 사무소에서 만난 동료 셰리와 1980년에 결혼했다.
2.2. 정치 입문
1982년 보수당 의원 로널드 벨이 사망함으로써 보궐선거로 치러지게 된 지역구 비컨즈필드에 출마하나 보수당의 텃밭인 지역구였고, 당시 마가렛 대처 내각에 밀리고 있던 노동당이라 자유민주당 후보에게도 패하며 3위로 낙선한다. 하지만 그는 이 선거에 출마함으로써 당 내 의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1년 뒤 열리는 총선에서 노동당의 텃밭이라 불리는 북동부 잉글랜드에서 9년만에 복설된 지역구 세지필드에서 당선되며 공직에 처음 입문한다.하원 재선의원 시절 노동당의 그림자 내각에서 노동부, 에너지부, 내무부 장관 등을 맡았고, 노동당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1994년 노동당 대표 존 스미스가 급사하면서 차기 노동당 대표를 뽑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 노동당의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각광받던 동료이자 라이벌 고든 브라운과 같이 식당에서 노동당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국 2명이 합의하여 블레어를 먼저 밀어주고 그 다음에 브라운을 밀어주기로 약속한다. 이에 힘입어 블레어는 손쉽게 제1야당 노동당의 대표가 되었다.[9] 즉 노동당이 집권하면 총리가 되는 것.
2.2.1. 총리 취임
블레어가 노동당 대표에 취임할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보수당의 존 메이저 총리는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관련한 보수당 내의 반발, 지방선거에서의 대패 등으로 곤경에 처했으며, 블레어와 노동당에게는 정권 탈환의 기대를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당 대표에 취임한 지 3년만인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43.2%의 득표율로 659석 가운데 418석을 획득하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면서, 총리에 취임했다.이때 노동당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양당 통틀어 사상 최다 의석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보수당은 1832년 영국 총선 이후 최저 득표율(30.7%)과 165석이라는 보수당 역사상 역대 두 번째 최저 의석 수[10]라는 결과를 받아들어야만 했다. 이로서 보수당의 존 메이저 총리가 퇴임하고 노동당은 제임스 캘러헌이 1979년 내각불신임 결의로 물러난 지 무려 18년 만에 재집권하게 됐다. BBC는 선거 방송에서 이 결과를 다루면서 'End of Era'(시대의 끝)이라는 부제를 붙였을 정도.
총선 승리 직후, 아내 셰리와 함께 총리 관저에 도착한 모습 |
취임하자마자 영국 의회에서 대총리질의[11]가 기존의 화요일, 목요일 15분으로 진행되던 관례를 깨고 수요일 30분으로 고쳤다. 또한, 언론인들로부터 1달에 1번씩 기자회견을 열기도 하는 등 소통의 문을 기존에 비해 열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2기와 같은 시기에 집권했고, 바로 그 클린턴의 선거 전략을 모방하여 1997년 총선에 승리하는 등 초기에는 중도 좌파의 이미지가 강했다. 수개월 후 프랑스에서도 조기 총선에서 우파 여당(공화국연합)이 참패하여 리오넬 조스팽 내각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집권하면서 유럽에 불어닥친 '제3의 길' 노선의 선두주자로 조명되었다.
당시 블레어를 위시한 유럽 중도좌파의 강세는 한국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New DJ Plan' 및 DJP연합을 통해 집권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블레어가 야당 대표 역할을 맡아 총리직에 도전하는 시기에 영국에 유학 중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었다.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97년 8월 31일에 다이애나 스펜서가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려다가 교통사고로 서거했는데, 영국 왕실을 설득하여 다이애나 스펜서를 추모하게 했다. 이 과정은 영화 더 퀸에 잘 나온다. 영화에서 그의 아내 셰리는 공화주의자라고 표현된다. 이 점은 극중에서 엘리자베스 2세와 보좌관들이 토니 블레어의 정권 교체를 달가워 하지 않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실제로는 셰리 본인이 확실하게 밝히지 않아서 알 수 없으며 왕실에서는 필사적으로 다이애나 사망 직후 왕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어 관련인들의 파편적인 증언만 남아있어 실제 진행이 얼마나 영화와 일치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당시 영국 왕실이 존폐 자체를 걱정할 정도로 엄청난 위기에 처했던 건 사실이며 왕실이 관례를 깨고 다이애나의 국장 등 파격적인 결정을 하는데 토니 블레어의 설득이 큰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2.2.2. 총리 재임
'신노동당'(New Labour)이라는 브랜딩을 통해 고든 브라운과 함께 노동당의 우클릭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90년대 보수당 정권 시절부터 이어진 노후화된 제조업 탈피 및 금융, 문화 산업 중심으로의 체제 개편을 계승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블레어주의로 표현되는 현대 영국의 생산적 복지 체계를 확립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이러한 노력들이 블레어 시기 평균 3% 중후반의 경제성장률을 이끌었으며, 제3의 길로 대표되는 현대적인 선진국 이미지를 세계에 어필했다는 평가도 있다. Cool Britannia가 당시 현대적인 영국의 이미지를 상징하던 표어였다.2001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40.7%의 득표율로 단 5석만을 잃은 413석을 획득하며 압승, 블레어 총리는 재선에 성공한다.[12] 이 무렵 블레어의 인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블레어 총리에 대한 대중들의 사랑은 "그가 물 위를 걷는다면 걸을 수도 있을 것이라 믿을 정도"라는 언론인의 회고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우클릭 정책 때문인지, 노동당의 전통적인 지지층들을 중심으로 안티들이 블레어에 대한 경멸적인 별칭들을 여럿 만들어냈다. 블레어가 우파인지 좌파인지 애매하고 흐릿하다는 토니 블러(Tony Blur), 사실상 보수당원이라고 공격하는 토리 블레어(Tory Blair)[13], 아예 둘을 합친 토리 블러(Tory Blur)도 있었다. 노동당도 Red Tories(색깔만 노동당 상징인 빨간색으로 칠한 보수당이라는 뜻)라고 공격당하기 일쑤였다.[14][15]
여기에 이라크 전쟁에 미군 다음으로 많은 규모의 숫자의 영국군을 파병하게 되며 스멀스멀 올라오던 비판 여론을 키워버리고 만다. 파병은 당시 제1야당에서도 반대했었고, 언급한 여당 노동당 내 좌파 세력들에게도 비난받으며[16] 인기를 점차 잃게 된다. 이때 '조지 W. 부시의 푸들(Bush's Poodle)'이란 좋지 않은 별명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좌파 진영으로부터 부시와 함께 전범이라고 공격당하게 되었고 후에 2010년대 중반 노동당 당대표가 되는 '정통 좌파' 제레미 코빈이 대놓고 "이라크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블레어를 전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 는 발언까지 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블레어와 코빈 사이에는 같은 당 소속이라는 의식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결국 2005년 총선에서 35.2%의 득표율로 58석을 잃고 355석으로 추락하여 노동당 내 여러 의원들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의석수가 많이 줄었다손 치더라도 과반수를 훌쩍 넘는 의석수를 확보한 결과라 노동당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이라크 전쟁 파병 및 여러 구설수로 인해 지지율은 계속해서 내려갔고, 마침 젊은 나이로 보수당 당수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이 이러한 약점들을 파고들어서 날카롭게 비판하며 본격적으로 레임덕을 겪기 시작한다.[17]
2.2.3. 총리 퇴임
퇴임 선언 후 마지막 총리 질의 응답 시간을 가진 토니 블레어 |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은 총리로 유명했다.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도 3번 읽어봤다고. 나름 종교적인 신심이 있는 인물이라서 그런지 종교의 유용성에 관하여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TV 토론을 벌인적도 있다.
2.2.4. 총리 퇴임 이후
2010년에는 야인 자격으로 국회에 출석해 "테러와의 전쟁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강변했다. 같은 해 9월 1일에는 회고록인 The Journey을 출간했는데 출간 몇 시간 만에 가장 빨리 팔린 자서전이 되었다.그러나 2015년 10월 25일, 2003년 당시 영국이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점과 또 전쟁의 여파로 ISIL의 세력확장 원인을 제공한 한 점에 대해 "나와 당시 영국 행정부의 오판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라고 CNN과의 인터뷰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연합뉴스,BBC(비디오클립포함).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사과가 아니었다고 비판받았는데 '영국의 이라크 전쟁 참전은 2002-2003년 당시 미국 행정부가 주장했던 이라크 WMD보유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기인되었으며, 전쟁의 결과로 이라크와 중동에서 일어난 오늘날의 후폭풍은 2003년 당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다. 또한 따지고 보면 해당지역의 오늘날 딜레마는 2011년 아랍의 봄으로부터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고, 더욱이 예로부터 시리아 및 이라크 북부에 존재해왔던 정치, 종교, 역사적 문제들과도 연결된 문제다' 로 일축 및 일관하는 떠넘기기식 뉘앙스를 보였다. 그래서 영국 내 이라크 전쟁 전사자 유가족들은이리 무책임할 수 없다며 폭풍같이 분노하는 중이다.
2016년 영국의 이라크 전쟁 참전에 대해 조사한 칠콧 보고서가 "영국의 전쟁 참전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오판에 의한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자, 토니 블레어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올바른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오히려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은 데다, 분노한 전사자 유족들이 "토니 블레어를 전쟁 범죄자로 고소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하겠다!!"고 들고 일어났다.
2016년 9월 이라크 전쟁에서 영국군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블레어 본인이 직접 일으킨 전쟁인 만큼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블레어는 영국군을 두둔하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며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위원회를 비판했다.
위원회 측은 "영국 내에서 자체 조사를 면밀히 하지 않을 시, 국제 재판소에 기소될 수 있다"며, 어느 측도 억울하지 않게 풀어가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여론 반응은 "만약 군인들이 전쟁 범죄를 저질렀으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불법 전쟁을 일으킨 토니 블레어도 법의 심판대에 올라야 한다"는 반응이다.
2.2.5. 정계 복귀 선언 이후
2017년 브렉시트에 분개하며 정치 복귀를 선언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 정계 복귀 선언. 노동당과 별도의 정당을 만들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부동산 투기 및 독재자 초고액 컨설팅으로 이미지가 실추될 대로 실추된 터라 대중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돈벌이 혈안' 블레어 정계복귀 선언에 영국내 반응 싸늘블레어 본인 또한 이러한 비판을 의식하여 정계 복귀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비난이 쏟아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순간이 지나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황에 있고 싶지 않다.”이라고 스스로 변명했지만 여론의 비판과 싸늘한 반응이 이어졌고, 결국 그의 정계 복귀는 흐지부지되었다.
2017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이라크 전쟁 관련으로 블레어 전 총리를 전쟁범죄로 기소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침략범죄라는 죄명이 국제법상으로는 인정될 수 있겠지만 영국법상으로는 범죄가 아니므로 기소가 불가능한 사안이라고 판결했다.#
2019년 3월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만나 영국의 EU 잔류 방안을 조언하는 것으로 알려져 영국 내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당연한 것이 엄연히 타국 정상인 마크롱에게 무려 전직 총리가 자국의 국내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라는 식의 발언이 될 수 있기 때문.#
같은 해 11월에는 브렉시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혼돈을 두고 보수당, 노동당을 모두 비판하였다.#
제58회 영국 총선 이후 인터뷰에서 코빈 시절 노동당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과 함께 "제레미 코빈의 브렉시트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가 참패의 원인"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보리스 존슨 총리의 노림수에 따라 보수당과 조기 총선을 합의한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지적했다.#[21]
2020년 5월 신임 노동당 대표로 선출된 키어 스타머를 향해 “능숙하면서도 철저하게 보수당을 파고드는 강력한 리더십이 돋보인다”며 “노동당의 현주소는 확실히 과거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좋은 평가를 내렸다.
2022년 9월 10일, 전직 총리 자격으로 찰스 3세의 즉위 서약식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블레어를 포함해 본인의 전임이었던 존 메이저, 후임이었던 고든 브라운 전 총리를 비롯해 생존 중인 모든 전직 총리들이 참석했다.
2024년 영국 총선을 통해 14년 만에 노동당이 집권하자 극우를 막기 위해서 이민 통제, 신분증 도입 등 조언했다.#
3. 평가
대다수의 영국 진보주의자들에게는 극찬을,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매우 큰 비판을 받은 인물이다. 때문에 위대한 영국인 순위에 든 적이 있으나 반대로 최악의 영국인 순위에도 들었을 정도이다.[22]그러나 대중들에게 그의 전전임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처럼 큰 호불호가 갈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보다 학계에서 평가가 좋은 대처와 마찬가지로 그의 신노동당 노선이 재평가받으며 학계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고의 영국 총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3.1. 긍정적 평가
3.1.1. 제3의 길을 통한 유럽 좌파의 부활
1990년대 냉전 종식 후 쇠퇴하던 유럽 좌파 정당을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죠스팽과 함께 이른바 제3의 길 3인방으로 꼽혔는데, 이들은 당시 변화없는 좌우 모두에 질린 대중들에게 제3의 길을 제시하며 집권에 성공한다.한국에서도 당시 상당수 진보주의자들에게 좌파 의제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조정해 대중적 지지를 회복했다고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경제적 우클릭 정책 덕분에 전경련 같은 경제단체 및 보수 진영 지지자들에게도 긍정평가를 받기도 했다.[23]
물론 제3의 길을 내세운 이들 역시 좌파도 우파도 아니라는 비아냥 속에 결국 2000년대 중반부터 이에 실망한 대중들에 의해 차례로 퇴장하게 되지만, 그래도 블레어는 그 3인방 중 높은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가장 오랫동안 권좌를 지켰다. 전후 10년이나 권좌를 지킨 총리는 그와 마거릿 대처 단 두 명뿐이다.
3.1.2. 금융업의 성장과 경제성장 견인
토니 블레어 임기 10년 동안 영국은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정부지출 증액과 더불어, 금융업의 폭발적인 성장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특히 금융업의 경우, 2001년 12월에 출범된 금융감독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금융감독청은 영국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총괄하는 기관으로서, 영국의 내각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된 기관이었던 만큼, 당시 집권 노동당의 전반적인 경제정책 기조와 달리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규제의 정도를 매우 낮게 유지했다.
실제로 금융감독청이 주관하게 되고 나서부터 영국 금융업이 크게 활성화되어,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매출액이 무려 393억 파운드나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기간 영국 경제의 성장을 주도해 나갔다. 이 덕에 토니 블레어 정권 내각 시절 첫 해인 1997년 4.2% GDP 성장을 시작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평균 3%p대 경제 성장률을 유지하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2010년 이후 보수당 집권이 장기화되는 과정에서 영국 금융업의 중심지인 시티 오브 런던 등 금융업 기반의 도심 지역에서 노동당의 지지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데 브렉시트 역풍 등과 함께 이 시절 금융 규제 완화와 호경기에 대한 추억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3.1.3. 벨파스트 협정 체결
1998년 4월 10일, 영국과 아일랜드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오랜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무장 해제, 영국계와 아일랜드계 공동 자치 정부 수립을 골자로 체결된 협정이다. 이 협정으로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주장해온 구교계와 영국 잔류를 고수해온 신교계가 1969년 이래 계속되던 유혈 분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으며, 아일랜드와의 관계를 개선했다.토니 블레어 총리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보수당에서도 인정하는 정책이다. 이후 보수당 정권 하에서 벌어진 브렉시트 과정에서 아일랜드 - 북아일랜드 국경 백스톱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 협정의 성과가 다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3.1.4. 영국 급식 개선
마거릿 대처 시기 예산 삭감 및 외주화로 인해 영국의 학교 급식은 당시 신흥공업국이었던 한국의 급식보다 품질이 매우 떨어졌으며,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서유럽의 선진국 평균보다 훨씬 떨어졌다. 이 시기 영국 어린이들이 패스트푸드만 먹고, 그런 어린이들이 소아비만 - 비만, 당뇨병 등 성인병을 갖게 되고 부모세대보다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은 텔레토비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그런데 스타 셰프인 제이미 올리버 주도로 학교 급식 개혁 프로그램이 진행되었고,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하고 국가적으로 지원한 사람이 바로 블레어 총리였다. 2010년을 마지막으로 노동당 정권이 교체된 이후에도 급식 개혁 프로그램은 보수당에서도 이어받아 계속 진행되고 있다.
3.1.5. 영란은행의 독립
이 것은 보수당에서는 반대했던 정책이다. 관습과 관례가 중요한 영국에서 영란은행은 정부가 소유하는 은행이고, 정부는 은행을 감독하지만 부당한 방식으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고, 영란은행은 운영 상 자유권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를 명문화하고 정부의 간섭을 배제시킨 사람은 고든 브라운 당시 재무장관과 블레어 총리였다. 이 정책의 성과가 나타나자 보수당에서도 인정하기 시작했다.3.1.6. 영국 사회보장망의 부활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시기를 지나면서 마거릿 대처 시기에 크게 악화된 영국의 사회보장망이 나아졌다. NHS(국민 보건 서비스)에서 특히 긍정적인 결과를 거두었는데, 블레어는 대처와 메이저 시기 보수당 정부보다 의료 장비와 의료진을 늘려주어 의료진와 간호사들의 만족도를 크게 높였다. 무상 의료 시스템이 가동되는 NHS의 대기 순번은 노동당 정부 시기 가장 짧았고, 고든 브라운 총리 시기인 노동당 정부의 말기인 2010년에 NHS는 대중들에게서 역대 최대의 만족도를 보일 정도였다. 거기다 블레어 내각 시기에는 교육에 많은 투자가 진행되어 실제 취업에 도움이 되는 교육 커리큘럼이 도입되었으며, 아카데미 등을 통해 교육 개혁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Special Schools(한국의 특목고에 해당)등을 늘리고 순위제를 도입해 교육열을 끌어올렸다.3.1.7. 시민 권리 증가
1998년, 블레어 내각 시기 통과된 인권법은 영국이 유럽 인권 조약에 명시된 권리를 보호받게 해주었으며, 블레어 내각 시기 지속적으로 LGBTQ+를 위한 정책이 실시되었다. 비록 동성결혼의 법제화는 2010년대에 이루어져야 했지만, 시민 결합이 공식적으로 영국에서 허용되었고 2006년에는 동성커플이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이성 부부와 같게 만들었을 정도로 블레어 내각 시기 성소수자 인권은 크게 개선되었다.3.2. 부정적 평가
3.2.1. 이라크 전쟁 책임론
이라크 전쟁 참전에 대한 책임론으로 자국 내에선 욕도 많이 먹었다. 노동당 내에서도 2010년대 들어 강성파들에게 당권을 내주며 예전만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덕분에 퇴임한 영국 총리에게 관례적으로 주어지는 가터 훈장 역시 심한 반대 여론으로 인해 토니 블레어가 퇴임한지 1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수여되지 않다가 2022년이 돼서야 겨우 받았다.
3.2.2. 재정건전성 악화
토니 블레어가 레토릭상으로는 제3의 길을 지향했으나, 실제로는 이전 노동당 정권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무분별한 정부지출 확장을 추진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블레어 정권의 1998년도부터 2007년도 예산안까지의 정부지출 증가액은 2545억 파운드였으며, 이는 같은 기간동안의 GDP 증가액의 63.1%나 됐다. 해당 기간동안의 정부지출 증가율 또한 6.52%나 됐다.#해당 기간 동안에는 전체 GDP에서 정부지출이 차지하는 비율도 3.7%p 증가했는데, 같은 기간동안 OECD 평균 GDP 대비 정부지출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
이러한 급격한 정부지출 증액으로 인해, 노동당 정권동안 영국의 연간 재정적자는 급격하게 증가했다. 1998년도부터 2009년도까지 영국의 연간 재정적자는 1726억 파운드로, 같은 기간동안의 GDP 증가액의 55%를 넘을 정도이다.
심지어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이라 전세계적으로 경제가 호황이었던 1998년도부터 2007년도의 경우에도 재정적자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316억 파운드 늘어났다. 대외채무 또한 1조 5000억 파운드에서 6조 파운드로 증가하여, 액수로 따지면 4조 5000억 파운드, 배수로 따지면 무려 4배나 늘어났다. 대외채무의 급증은 순대외채권에도 악영향을 주어, 1997년에 -0.2%였던 영국의 GDP 대비 순대외채권(대외채권에서 대외채무를 제외한 수치)의 비율은 2007년에는 -3.4%까지 악화되었다.
3.2.3. 제조업 쇠퇴
제조업의 경우, 금융업 성장과는 반대로 급격하게 하락했다. 실제로 마거릿 대처와 존 메이저의 보수당 내각 18년동안 1610억 파운드에서 1860억 파운드로 250억 파운드 증가했던 영국의 제조업 총부부가치는, 블레어와 브라운의 13년동안에는 1860억 파운드에서 1450억 파운드로 410억 파운드 감소했다. #
제조업 총부부가치가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 또한 노동당 정권 13년동안 급감했다. 비록 블레어 이전부터 이미 감소하는 추세였긴 했지만, 보수당 내각 18년동안에는 23%에서 18%, 상대적으로 완만한 감소세였던 반면, 노동당 정권 13년동안에는 18%에서 10%까지 추락했다.
3.2.4. 주택 가격 폭등
블레어 재임 기간인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영국의 주택 가격은 무려 3배나 폭등했다. 지표를 보면 블레어가 집권한 1997년부터 주택 가격 폭등이 시작되어 블레어 퇴임 직후까지 폭등이 지속되다가 2008년 대침체가 오며 주택 가격 상승이 멈추었다. 2023년 현재 영국의 주택 가격은 블레어 재임 말기인 2007년의 주택 가격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다.살인적인 주택 가격은 현재 영국의 각종 문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꼽히고 있으며, 현재 영국의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영국의 젊은 세대에게 주택 가격은 엄청난 짐으로 작용하고 있다. 런던에서는 원룸 수준의 작은 주택의 월세만 해도 수백만원 수준이다. 때문에 월급 받아서 월세와 관리비 내고 나면 남는게 없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때문에 부모에게 유산을 상속받지 않는 이상 월급만으로 주택을 구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블레어는 재임 기간 동안 이전 보수당 정권 시절보다 공공 주택 공급을 크게 줄였다. 존 메이저 정부 시절인 90년대 중반에도 영국의 공공 주택 공급량은 최소한 연간 5만 ~ 6만채를 유지했다. 하지만 블레어 집권 이후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의 공공 주택 공급량은 2 ~ 3만채 수준으로 크게 감소했다.
아래에 나오지만 블레어는 자신이 소유한 수십채의 주택으로 수백억대의 큰 재산을 형성했는데, 주택 공급 억제 등 정책을 통해 의도적으로 주택 가격을 폭등시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24]
3.3. 논란이 있는 평가
3.3.1. 자치권 이양에 대한 논란
비록 영국의 자치권 이양과 벨파스트 협정이라는 역사적인 발자취를 남겼으나, 벨파스트 협정을 제외하면 자치권 이양은 마무리가 좋지 않아서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토니 블레어 본인도 실수를 인정했다. 특히 블레어가 스코틀랜드를 향한 자치권 이양이 독립 여론의 불씨를 죽일 것이라고 판단해 추진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여론을 다시 강화시키는 시발점이 된 점에 대해서 영국 정계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또한 무리하게 노스이스트 잉글랜드를 대상으로 한 자치권 이양을 추진했다가 역풍을 맞아서 이후 영국 정부 차원에서 잉글랜드로의 자치권 이양을 위해 나서는 정치인들이 없다. 대신에 자발적으로 행정구역들이 뭉쳐서 자치권을 일부 이양 받고 있으나, 이양 받은 지역 단위가 넓지 않은데다 자치권 이양 속도가 느려 아직도 이양받지 못한 지역들이 많기 때문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4. 개인적 논란
토니 블레어는 수천억원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재산만 천억원이 넘지만, 해외에 알려지지 않은 재산도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재산 축적이 대부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어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4.1. 기업적 부동산 투기 문제
블레어 부부는 현역 총리 시절부터 주택을 여러채 소유하며 부동산 투기를 통해 수백억대 자산을 형성하여 구설에 올랐다. 퇴임 후에는 더욱더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려 주택을 수십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한 의혹과 비판이 여러차례 제기된 바 있었다.블레어가 총리직에 있던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영국의 주택 가격은 무려 3배나 폭등해서 청년들과 서민들의 자기 집 마련이 요원해진 상황이다. # 문제는 영국의 이런 부동산 폭등을 블레어가 정책 수단을 통해 의도적으로 유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이미 총리 재직 시절 보유 주택만 거의 10채에 달하여 당시 폭등하던 부동산 정책이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블레어가 부동산 자산을 매각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블레어는 부동산 폭등은 우연한 결과이며, 자신의 부동산 소유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집을 팔기는 커녕 재임 기간 중 보유 주택수를 더욱 불렸다.
블레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8만 파운드[25] 정도에 불과한데 아무리 변호사와 정치가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고 쳐도 몇백억 파운드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자산을 형성한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혹이 여러 차례 언론을 통해 제기되어 왔다. 그러던 차에 판도라 페이퍼스를 통하여 거액의 탈세 사실+비리까지 알려지면서 블레어에 대한 영국 여론은 가뜩이나 안 좋았는데 더더욱 싸늘해지고 있다.
자녀들에게 수십억 짜리 집들을 준 사실도 도마에 올랐다. 블레어 측과 그의 지지자들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데 왠 시비냐는 반응이지만, 일부 시민들과 학생들은 그동안 노동자와 약자, 서민의 편이라는 것을 강조해오며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강조해온 노동당의 최장기 당수 출신인 블레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에는 아예 자식들도 (혹은 블레어가 자식을 동원해서) 부동산 투자에 가세하는 상황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집을 종자돈 삼아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거액의 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굴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블레어의 아들 유안은 아예 부동산 기업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블레어 가족이 보유한 부동산이 460억원에 달한다고 보도되었다. 그런데 아래에 나오는 정치자문료만 해도 1년에 300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블레어이기 때문에 해외에도 알려져 있지 않은 부동산에 많이 투자해 두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
4.2. 독재자 및 기업 대상 초고액 정치자문 및 브로커 활동 논란
퇴임 후 초고액 기업 자문 등으로 매년 수백억원의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초고액 유료 컨설팅이라는 자본 지향적인 행보 자체가 노동당 출신의 진보 정치인으로서 자가당착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는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십억원 이상의 거액이 오가는 만큼 단순한 컨설팅이 아니라 국가 내부 정부를 불법적으로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게다가 그의 초고액 정치 자문 컨설팅 대상이 주로 중동, 중앙아시아의 독재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되고 있다.총리에서 퇴임하고 몇개월 후인 2008년 1월부터 세계 최대 금융기업인 JP모건 체이스 그룹의 고문으로 영입되었다. 정확한 연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른 기업도 아닌 JP모건 체이스인 만큼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때 슈뢰더와 함께 유럽 좌파의 상징이었던 블레어가 자본주의, 그것도 신자유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JP모건체이스의 고문이 된 것은 참 아이러니하며, 내로남불이라는 평을 받았다. JP모건 체이스는 좌파들의 가장 주요한 적인 신자유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으로, 세계최대의 금융회사일 뿐만아니라 그 자체가 그간 제한되어 오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간 분리라는 규제를 깨고 탄생한 매머드 은행기업이다. JP모건 체이스는 좌파들에게 신자유주의의 표상으로 여겨지며, 독점자본주의 기업, 규제없는 자본은 독재라는 등의 숱한 공격을 받아왔던 기업이다.
총리 퇴임 직후 블레어는 UN 중동평화특사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영국의 시민단체와 대학생들은 이라크 전쟁의 주범 블레어가 중동평화대사를 맡는게 말이 되냐며 반대하기도 했다.
문제는 한참 뒤에 터져나왔는데, 블레어가 UN 중동특사 자리를 이용해 중동 등에서 천문학적인 정치자문 커미션을 챙겨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터였다. 블레어는 중동 특사에 임명된 뒤 자문회사 '토니 블레어 어소시에이츠(TBA, Tony Blair Associates)'를 설립해 각국 정부 및 기업에 컨설팅 서비스를 하고 있다. # TBA는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 등에 사무실이 있으며 여기서 고액의 정치 컨설팅 자문료를 받아 논란이 되었다.
처음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2010년으로 유아이 에너지 및 쿠웨이트 왕실에 자문료로 각각 최소 수십만 파운드 및 100만 파운드의 거액을 챙긴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며 논란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유아이 에너지는 대한민국의 기업이었는데, 이 기업의 회장 최규선은 김대중 정부의 막후 실세이자 2002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최규선 게이트'의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 정부 시절의 치부가 영국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블레어는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블레어가 자신이 고액 자문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마저 드러나며 블레어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블레어 반대파들은 블레어가 '부시의 개' 노릇을 한 대가로 중동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다고 비난했다. #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몇 개월 뒤에는 블레어가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에게 정치자문을 한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심지어 카다피 아들도 이를 인정했다. 블레어가 카다피의 "사적인 친구"로 총리 퇴임 후 지난 3년간 리비아를 "수도 없이 많이" 방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블레어는 자신이 리비아의 석유 기업들을 자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카다피와 그의 정부와는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다. 카다피 컨설팅 사실이 알려지며 블레어의 행각이 영국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2007년 총리 퇴임 후 2010년까지 3년간 이미 2천만파운드 이상의 거액을 벌어들인 사실이 밝혀졌다. # #
또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 대한 정치 자문으로 1300만 달러(약 134억원)를 챙긴 사실도 드러났다. 블레어는 2011년 카자흐스탄에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비무장 파업 노동자 14명이 숨진 유혈참사에 대해 이를 포장하기 위해 연설문을 수정하는 것을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이같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자 노동당 당수 출신으로 이같은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영국 언론도 적잖이 놀란 듯 하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유럽ㆍ중앙아 담당자인 휴 윌리엄슨은 “토니 블레어가 카자흐스탄의 엄청난 인권 문제들은 외면한 채 독재자를 위한 원고를 써주고 수백만 파운드를 받았다니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
쿠웨이트 정부에 정치자문을 제공하는 대가로 270만 파운드(약 46억원)를 받았다.
아부다비 국부펀드 무바달라 투자 회사와 컨설팅 계약을 맺은 것을 비롯, UAE에도 정부, 기업 등에 컨성팅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사우디 왕실과 관계가 있는 페트로사우디도 블레어의 고객인데, 페트로사우디라는 기업 자체가 조세회피처 케이먼 군도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 논란이 있는 기업이다. 결국 페트로사우디와 관련된 부적절한 행동을 한 사실도 2011년 11월 9일 언론에 보도되었다. 블레어는 페르트사우디와 2010년 11월부터 자문 계약을 맺었으며, 페트로사우디와 중국의 고위 정치인, 특히 산업정책 입안자들, 기업인들과 만남을 주선해주며 계약당 2%의 커미션을 받아온 사실이 밝혀졌다. #
콜롬비아, 페루, 베트남에서도 정부 및 은행, 기업들에게 정치자문 명목으로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
아랍권 소식통에 따르면 블레어가 오만 정부의 장기발전 계획 수립을 위한 자문계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
또 아랍의 봄의 결과로 성립된 이집트 민선 정부를 무너뜨린 압델 파타 엘 시시 대통령의 군사정권을 위해 경제 자문 계약을 맺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집트 정권 지원 활동에 블레어가 개입한 정황이 추가로 보도되기도 했다.
루마니아에도 자문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이렇게 중동, 동유럽, 남미 독재자들에게 제공한 정치컨설팅 자문료 수입이 2013년 한해만 수입만 2000만 파운드(약 345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대체 어떤 자문을 해주길래 자문하는 데 수백억원의 고액의 수업료를 내느냐에 대해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으며, 결국은 블레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영국 내부 정부와 인맥을 이용해 이권에 개입했기에 이러한 수백억대의 자문료가 오가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처음에는 의구심만 표하던 영국과 서방 언론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블레어의 행보가 이어지고, 실제 블레어가 여러 더러운 일에 관여한 정황들이 하나둘씩 밝혀지자 결국 영국 언론도 브로커라는 노골적인 언어를 써가며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사유화, 규제 완화 등이 블레어의 정책자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그의 고객들이 거액의 이권을 챙길 수 있다고 비판하며, 블레어의 중동평화특사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블레어가 총리가 은퇴한 후 기업과 국가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냈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부적절한 행태가 관행으로 뿌리내리기 전에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6]
블레어의 이같은 행각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자 영국 정치인들은 UN에 블레어의 중동특사 해임을 촉구했다. 영국 정부도 블레어 전 총리가 특사 혜택만 누릴 뿐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통제 불능의 행태를 보인다는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UN 중동특사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중동에서 컨설팅 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사무실과 지점을 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며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2015년 1월에는 블레어가 카다피에게 보낸 친서가 유출되며 그가 카다피 정권의 불법 행위에 공모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블레어는 더욱 궁지에 빠졌다. #
2015년부터는 미국 언론까지 가세하여 블레어의 해임을 UN에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논란이 심화되고 있는 와중에 이전부터 블레어의 고객 중 하나라고 보도된 바 있던 베트남 정부는 2015년 3월 블레어를 베트남에 공식 초청하여 대담회, 토론회 등을 열며, 베트남 발전에 여러 자문 및 도움을 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
2015년 중반에는, 2011년 아랍권 민주화 운동 당시 반정부 시위에 의해 축출된 카다피를 구하기 위해 블레어가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에게 압력을 행사한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확대되었다.
블레어 정치 브로커 활동이이 세계적인 논란이 되며 UN에 중동평화특사직 박탈 여론이 빗발쳤고, 결국 UN에서도 블레어의 특사 자격 박탈을 위한 조치를 밟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자 2015년 5월 결국 블레어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에게 사의를 표하는 서한을 제출했다. # 자진 사퇴라는 모양새로 사퇴했지만, 언론에서는 사실상 해임된 불명예 퇴진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블레어는 특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컨설팅 사업을 중단하라는 여론의 요구에는 응하지 않으며 컨설팅 사업을 이어가 논란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2016년 9월 20일 블레어는 성명을 발표하고 자문사인 '토니블레어어소시에이츠(TBA)'와 자회사인 파이어러시·윈드러시를 폐업키로 했다고 밝혔다. 당시 이 자문회사의 연수익은 280억원에 달했다.
2022년 1월 영국 텔레그래프는, 블레어가 2016년 정치컨설팅 회사를 문닫으며 더러운 사업에서 손을 뗀것처럼 위장했지만, 이후 6년째 비밀리에 독재자들의 정치컨설팅을 하며 그들의 '세탁'을 도와주는 짓을 계속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블레어는 이를 숨기기 위해 여러 법인을 설립해 자금을 분산해서 수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4.3. 탈세
2021년 10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가 공개한 판도라 페이퍼스를 통해 조세 회피처에 거액의 재산을 은닉하고, 거액을 탈세한 사실이 드러났다. 2017년 역외 회사를 인수하는 형식으로 원래 런던에 보유한 부동산에 대해 납부했어야할 312,000파운드 규모의 세금으로부터 도피한 것인데 블레어 측은 모르고 그랬으며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하지만 그동안 블레어가 노동당 당대표로 재임하는 동안 조세 피난처와 부자들의 편법적 절세에 대해 여러차례 강도 높은 비판을 해왔던터라 영국에서는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안그래도 여러 논란으로 최근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가 추락해있던 블레어 전 총리로서는 한번 더 체면을 구긴셈이 되었다.
5.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2 | 보궐선거 | 비컨즈필드 | | 3,886 (10.42%) | 낙선 (3위) | [27] |
1983 | 제49회 영국 총선 | 세지필드 | 21,401 (47.56%) | 당선 (1위) | 초선 | |
1987 | 제50회 영국 총선 | 25,965 (56.02%) | 재선 | |||
1992 | 제51회 영국 총선 | 28,453 (60.50%) | 3선 | |||
1997 | 제52회 영국 총선 | 33,526 (71.16%) | 4선 | |||
2001 | 제53회 영국 총선 | 26,110 (64.86%) | 5선 | |||
2005 | 제54회 영국 총선 | 24,421 (58.88%) | 6선[28] |
6. 기타
- 서방세계가 코소보 전쟁에 적극 개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코소보에서 인기가 많다. 인기가 많은 정도를 넘어 컬트라는 말 까지 나올 수준. 동상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 아이의 이름을 토니블레어(Tonibler)라고 짓는게 유행한 적도 있다. 풀네임에서 따온 '토니블러' 말고도 토니, 블러 등의 다른 바리에이션도 흔하다.
- 1984년생인 아들인 유안 블레어(현재 [age(1984-01-01)]세)가 꽤나 꽃미남으로 유명해서, 2000년대 초반 한참 국내에 꽃미남 열풍이 불 때 회자되기도 했다. 하지만 16살 때 음주운전으로 입건된 적이 있고, 2006년에는 미국 공화당 의원 사무실의 인턴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같은 센터의 한국인 여대생과 인턴 모임을 가졌다가 연애로 오인받아 기사화되는 등, 한때 꽤나 트러블 메이커였다. 2015년 총선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아버지의 정치 세습을 준비 중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그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 이후 사업쪽으로 진로를 바꿔서 유안은 블레어 가족이 50%의 지분을 보유한 부동산 회사 ‘올드베리 주택’의 이사로 일하고 있다. 이 회사는 맨체스터와 스톡포트에서 아파트 27채의 임대 사업을 벌이고 있다. 2021년에는 스타트업 기업인 멀티비즈를 창업해 2억 달러의 가치를 내고 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 비교적 근래에 활동했던 정치 지도자임에도 영화,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 편이다.
2003년의 TV 영화 《The Deal》, 2007년의 영화 《더 퀸》, 2010년 HBO의 TV 영화 《특별관계》[29]가 대표적. 블레어 역으로는 모두 마이클 쉰이 출연.
- 토니 블레어는 총리 시절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30]을 임명하지 않았다. 아내 셰리 블레어가 수렵보좌관을 매우 싫어해서, 전임 보좌관인 험프리(Humphrey)를 1997년 해임한 이후 총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관저 수렵보좌관을 임명하지 않았다.[31] 이 때문에 후임 총리인 고든 브라운이 2007년 시빌(Sybil)을 수렵보좌관에 임명할 때까지 보좌관 직은 공석으로 남았다. 험프리는 내각 직원이 자택으로 데려가서 돌보다가 2019년 사망했다. 셰리 블레어가 험프리를 싫어한데다 험프리가 해임을 전후해서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자 셰리가 험프리를 죽인 것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 해서 총리실에선 이를 해명하느라 곤욕을 치뤘다.
- 2010년 자서전을 출간했다. 제목은 <토니 블레어의 여정(TONY BLAIR A JOURNEY)>이다. 2014년 한국판으로도 출판되었다. 10년이나 영국 총리를 지낸 정치인답게 책의 분량도 상당한 편이다. 1,000페이지가 넘는다.
- 일각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한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기 쉬운 환경에 자랐음에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 지도자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소속 당 내에서 비주류로 분류되었다는 점[32], 참신하고 신선한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다는 점, 아내 때문에 반대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는 점[33], 집권 후 몇몇 우파적인 정책[34]을 추진하다 당대 지지 진영 일각에서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물론 세부적으로 가면 차이점도 당연히 있겠지만, 이런 유사성도 있다는 것.
- 부부 금슬이 무척 좋은 편이다. 심지어 그가 46세, 아내가 45살이던 2000년에 늦둥이로 넷째(현재 [age(2000-01-01)]세)를 출산했다. 장남 이안과는 무려 16살이나 차이가 난다.
- 록 음악의 광팬이다. 대학생 시절에는 학교 록밴드에서 리드 보컬을 맡은 바 있으며, 1970~80년대 고전적인 영국 록밴드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2005년 자선 공연인 라이브 8에서 핑크 플로이드가 재결합한다는 소문이 돌자 공개적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재결합을 바란다고 발표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음악가들과 친분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2019년 12월 15일,비 지스의 배리 깁과 조우하여 잼 세션을 가졌다. 버킹엄셔에 배리 깁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 기타를 들고 바로 달려가 같이 음악 활동을 했다고 한다. 둘은 비 지스의 히트곡 Stayin' Alive와 You Win Again을 연주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노엘 갤러거나 데이먼 알반도 자신의 파티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35]
- 가끔씩 장관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멋대로 정책을 바꿔서 장관들을 격노하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과 복지 예산을 늘리겠다고 상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다던지, 불법 이민자 유입률을 또 자기 마음대로 방송에서 말해 내무장관이 엄청난 격노를 하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
- 잘 나갈 때만 해도 노동당 중도좌파 지지층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으나[36] 세계금융위기 이후 안티층에선 금지어 비슷하게 낙인찍힌 측면도 있다. 당장 위의 배리 깁은 토니 블레어와 친하지만, 노엘 갤러거는 한때 토니 블레어를 심히 비판했다. 사실 노엘 본인은 이라크 전쟁 이전만 해도 토니 블레어를 지지했으나[37] 그가 이라크 전쟁 파병을 결정하자 크게 실망하여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아서버렸다.[38] 이외에도 사회주의자인 로저 워터스는 토니 블레어를 강하게 반대한 인물이다.
- 이라크전 참전 논란이 극심했던 2003년 Channel 4에서 진행한 '최악의 영국인 100명'에서 1위에 오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 생존 중이던 마거릿 대처(3위)보다도 높았다.[39]
장기집권한 2명이 나란히 최악이라고 욕 먹는 신사의 나라.
- 전 세계 정치인과 억만장자. 종교지도자, 연예인 등이 조세 회피처에 거액을 숨겨놓고 탈세와 돈세탁 등 불법을 일삼았다는 내용의 보고서, '판도라 페이퍼스'에 그의 이름이 포함돼 파문이 일고 있다. 전 세계 지도자 탈세·돈세탁 '판도라 페이퍼스' 공개.
- 2022년 11월 공개된 더 크라운 시즌 5 마지막 화에서 등장하는데, 배우는 버티 카벨[40]. 여러 오명으로 인해 블레어의 인기가 추락한 이후[41] 영상물에 등장하는걸로는 처음인데 막 총리직에 오르는 젊고 호리호리했던 1997년의 블레어 치고는 상당히 풍채가 좋고 호방하게 생겨서 배우와 역이 좀 안어울린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이전 시즌들과 달리 등장인물들이 노년에 접어든 해당 시즌부터는 더 좋은 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전 시즌 등장배우들이 싱크로율이 대단했던것에 비교하면 이번 시즌은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등이나 맞췄지 배우의 생김새는 완전 딴판인 사람들이 캐스팅됐다. 더 크라운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총리에 대한 작품의 묘사도 왕실의 시각[42]에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마거릿 대처와 더불어 영국 왕실이 최악의 위기상황이었던 당시의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어떻게 묘사될지 관심을 모았다. 당장 등장 초기가 시즌의 막바지와 맞물려서 크게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왕실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다이애나 비 사건 등과 관련해서 중재도 그렇고 이전에 나온 매체 작품들에서는 토니 블레어는 보통 왕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지막 시즌이 현재로서는 그런 기대들이 무색하게 다이애나비의 죽음을 전후한 블레어의 비중은 매우 작다. 일단 다이애나의 죽음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1~3회에서는 비중이 전혀 없으며 다이애나 비의 죽음 직후를 다루는 4화에서도 지나가듯 몇번 등장하는게 전부이다. 왕실의 장례식 참석을 둔 갈등도 찰스 왕세자와 기타 가족의 대립이 중심이고 블레어는 통화로 참석을 권하는게 전부(그것도 매우 정중한 말투로)이다. 오히려 다이애나의 죽음 이후 파트에서 더 비중이 크다. 임기 초기에는 여왕이 경계할 만큼 엄청난 인기를 누리지만[43] 이라크 전쟁 이후인 최종회에서는 이래저래 시달리는 신세가 된다. 역시 왕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은 없지만 여왕은 이래저래 블레어를 불편히 여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시즌 5에선 배역이 실제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었지만 시즌 6에선 분장과 표정연기를 통해 그래도 누군지 구분은 갈 정도의 싱크로율이 되었다.
- 축구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의 팬이다.
- 프랑스어가 유창한 편이다.# 2007년 5월 7일에 사르코지 대통령이 당선되자 프랑스어로 축하 영상을 올린 적이 있었다.# 2008년 1월 12일에 프랑스에서 열렸던 대중운동연합 행사에 참석했을 때 프랑스어로도 연설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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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 · 블레어주의 · 자유주의적 매파 · 제3의 길 | |||
비판 및 논란 | 비판 및 논란(판도라 페이퍼스) | |||
전쟁 | 이라크 전쟁 | |||
역대 선거 | 1997년 영국 총선 · 2005년 영국 총선 | |||
지역구 | 세지필드 | |||
관련 정치인 | 고든 브라운 · 마거릿 대처 · 존 메이저 · 제러미 코빈 · 데이비드 캐머런 · 테레사 메이 · 게르하르트 슈뢰더 · 빌 클린턴 · 리오넬 조스팽 | |||
기타 | 토니 블레어 내각 · 노동당 · 영국의 자치권 이양 · 벨파스트 협정 · 1997년 스코틀랜드 자치권 이양 주민투표 · 홍콩 반환 · 더 크라운 | |||
사회주의 | }}}}}}}}} |
[1] 혼전 성은 부스(Booth)[2]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리버풀 존 무어스 대학교의 총장직을 맡았다. 후임 총장이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였다.[3] 現 런던 시티 대학교 법학대학원[4] 본래 모태신앙의 성공회 신자였으나 2007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5] 21세기까지 포함할 경우 리시 수낙이 최연소 집권 총리이다.[6] 1997년부터 2005년까지 3차례의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참고로 마가렛 대처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영국 총리 중 10년 이상 집권한 유이한 인물이다.[7] 아버지는 본래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제적으로 성공하면서 보수주의자로 전향했다.[8] '스코틀랜드의 이튼'이라 불리는 명문 칼리지로, 이름은 칼리지지만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이다. 미국에서는 college가 (단과) 대학의 뜻이지만,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나 유럽 대륙에서는 고등학교 레벨의 기숙사 학교(boarding school)도 college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에서는 이튼 '스쿨'이라고 잘못 알려진 Eton College.[9] 그런데 블레어가 고든 브라운을 밀어줄 차례가 된 2003년에 블레어 측이 약속을 어겼다. 이에 4년 후인 2007년에 당권을 장악한 브라운이 영국 총리가 되면서 블레어는 정계를 떠났다.[10] 이 선거 이전 1위는 아서 밸푸어 총리가 지휘한 1906년 총선의 156석이다. 이후 2024년 영국 총선에서 리시 수낙 총리의 지휘 아래 121석 획득에 그쳐 역대 최악 기록을 깨면서, 메이저의 기록은 역대 세번째로 밀려났다.[11] PMQ(Prime Minister Question's)라고 한다.[12] 반면 보수당은 지난 총선에 비해 고작 1석만을 더 얻게되며 또다시 참패한다.[13] 영국 보수당의 옛 이름과 별명이 Tory Party이다. 지금도 보수당, 보수당 소속 의원, 보수당 지지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14] 영국 노동당의 이념 투쟁과 무관하게, 201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에서 노동당을 싸잡아서 Red Tories라고 비방하는 경우도 있다.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노동당이나 보수당이나 그게 그거라는 얘기. 반대로 노동당 지지자들은 SNP가 보수당과 적대적 공생을 하니 스코틀랜드의 보수당이라는 뜻에서 Tartan Tories(타탄은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면직물이다)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결국 2010년대 후반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이 SNP와 보수당 모두에 밀려 3등으로 추락하는 상황에 직면했다.[15] 심지어 보수당도 비슷한 소리를 듣곤 한다. 2010년대 이후 브렉시트 때문에 영국독립당(UKIP)과 다를 바 없다며 블루킵(Blukip: 색깔만 보수당 상징인 파란색으로 칠한 영국독립당이라는 뜻)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다.[16] 당시 노동당 의원 413명 중 139명(대략 전체 1/3 이상)이 반대했다.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여당 내부의 분열은 정책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 일이다.[17] 사실 이미 1999년의 코소보 내전 당시에 미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경한 군사 개입을 주장한 바 있었다. 당시 미국은 빌 클린턴이 르윈스키 스캔들로 탄핵 위기까지 몰려서 무기력한 상태였는데, 블레어가 미국을 직접 방문하여 코소보에 대한 '인도적 개입'을 촉구했던 것. 이를 보면, 부시 행정부 시절의 대테러 전쟁 개입도 단순한 '변절', '줄서기'보다는 그의 정치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8] 본인의 지역구인 세지필드 하원 의원직도 당일에 사퇴했다.[19] 성공회 신자 시절에도 가톨릭 미사에서 영성체도 했지만, 1996년에는 영국 가톨릭 추기경으로부터 "더 이상 가톨릭 영성체에 참여하지 말라"는 경고 서한을 받기도 했다. 천주교에서 영성체는 세례성사를 받은 천주교 신자와 특수상황에 처한 정교회 신자만 할 수 있다.[20] 성공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가톨릭에서 다시 영세하진 않는다.[21] 참고로 이 총선에서 자기 지역구였던 세지필드도 보수당에 털렸다.[22] 2003년 경에는 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BBC에서 조사한 최악의 영국인 1위였다.[23] 여담으로 2000년대 당시 학교 사회 과목 선생님들이 사회 이념의 변천을 설명하면서 자주 되뇌던 레파토리기도 했다. 좌→우→결국엔 융합. 물론 당시에는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런 분석이 잇따르던 시기였다.[24] 노동당과 그 지지자들은 공공 주택 사업 수익금을 지자체의 부채 상환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한 대처 시절 법 때문에 주택 공급이 줄었다고 주장하며 집값 폭등의 원인을 보수당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전 보수당 정부 시절에는 블레어 시절보다 훨씬 많은 공공 주택이 공급되었고 이로 인해 주택 가격 안정을 이루었다. 만약 보수당 시절법 때문에 신규 공공주택 건설에 지장을 받았다는 노동당 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노동당은 1997년 정권을 잡은 후 충분히 이 법을 바꿀 수 있는 다수당이자 여당의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블레어와 노동당은 전혀 법에 손을 대지 않았다.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노동당 정권 13년 동안 영국의 공공주택 공급이 급감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때문에 오히려 블레어 정부가 의도적으로 집값이 오르도록 상황을 방치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것이다.[25] https://www.fnnews.com/news/201306101117163614[26] 미국에서도 독재자 대상은 아니지만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퇴임 이후 대기업들을 상대로 고액 강연을 펼치고 자문 활동을 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또한 닉 클레그도 부총리 퇴임 후 페이스북에서 고액 연봉을 받고 욕받이자리를 차지해서 까였다.[27] 전임자 로널드 벨 의원 임기 중 사망[28] 2007.6.27 총리직 사임 후 의원직 사퇴[29] 원제는 'Special relationship'으로 미영 동맹관계를 지칭하는 관용어이기도 함. 내용 자체는 블레어의 집권 초기 빌 클린턴 미국 행정부와의 관계가 주를 이룬다. 르윈스키 스캔들, 코소보 전도 등장.[30] 모르는 사람을 위해 소개하자면, 고양이다. 인간이 고양이 역할을 하는게 아니라 진짜 고양이다. 쥐를 제거해 총리 관저의 위생을 돕는 역할이랜다. 정식 총리 참모 중 하나로 쳐 주는 듯 하다.[31] 참고로 셰리 블레어는 영국 왕실의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이전의 영국 총리 배우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32] 당시만 해도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주류 세력은 동교동계로, 친노를 비롯한 영남권 인사들은 철저하게 비주류였다.[33] 노무현의 아내인 권양숙의 아버지는 빨치산 행위를 한 적 있는 좌익 인사였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 이미 사망한 상태라 딱히 대통령과 연관이 크진 않다. 오히려 더 유명한 건 이에 대해 공격하는 이인제 당시 경선 상대에게 "그럼 내 아내를 버립니까?"라고 반문한 것.[34] 노무현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은 집권 전 강성으로 분류되던 노무현 본인의 이미지와는 달리, IMF 탓도 있었지만 신자유주의스런 측면도 많았다. 한미 FTA 체결도 비슷한 맥락으로, 노무현 대통령 본인부터가 자기가 지지자들을 배신한 것이니 내가 그들을 설득할 문제라고 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지지자들 등 돌리면서까지 밀어붙인 한미 FTA는 발효 10년이 지난 2022년 시점에서는 무역, 투자 등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그외 갈등이 심했던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 및 제주 해군기지 건설 시작과 자국 군대 이라크 전쟁 파병도 토니 블레어처럼 최종 승인하였다. 다만 이 부분은 본인이 원한 방향과 100% 일치하는 건 아니기에 정치 갈등 속 고민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당장 한국의 경우 이라크 파병도 후방 지원이지 목숨이 걸린 전투병은 아니었다.[35] 다만 데이먼 알반은 좌파 성향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게 뻔하다면서 참석을 거부했다. 노엘 갤러거는 당시만 해도 토니를 광적으로 지지했으나 이후 이라크 전쟁 파병에 실망하여 트럼프그렛과 유사하게 극심한 비토 성향을 가지게 되었으나, 코빈 체제 이후로 노동당이 극좌화되자 블레어를 '상식이 통하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며 재평가했다. 또한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도 극좌에 가까운 사회주의자들인지라 블레어는 핑플의 팬일지 몰라도, 핑플은 블레어의 안티팬에 가까우며 훗날 데이비드 캐머런은 더 스미스에게 팬질을 금지당하는 등 더 참혹한 취급을 받았다(...).[36] 정책상 이견이 있어도 선거에서 연전연승하니 따라가는 부분이 있었다.[37] 심지어 이쪽은 토니 블레어가 파티를 열때마다 재깍재깍 참석하는 등 광적인 지지 수준이었다. 이로 인하여 동생 리암 갤러거에게 비판받기도 하였지만.[38] 그러나 노엘 갤러거의 경우 여전히 좋아하지 않기는 하지만, 코빈 체제 이후 노동당이 극좌화되자 블레어를 재평가했다.[39] 참고로 2위는 조단(Jordan)이라는 활동명을 가진 글래머 여배우 케이티 프라이스였다.[40] 한국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원작으로 알려진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에서 이태오의 모티브가 된 불륜남 사이먼 포스터 역을 맡았다.[41] 다만 영국 내에서 블레어가 전직 총리들 가운데 그나마 인기가 좋다는 점은 감안해야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구관이 명관이라고 다시보니 제3의 길 정책이 재평가를 받는 측면도 있고, 제러미 코빈을 비롯한 반 블레어 극좌파들의 삽질,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를 위시로 한 후대 보수당 정부의 삽질(...) 등이 합쳐져 Yougov 등의 여론조사에서 일반적으로 블레어는 보수층 지지자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마거릿 대처와 함께 인기있는 총리 여론조사의 상위권에 오른다.[42] 일반적으로 마거릿 대처가 해럴드 윌슨보다 더 대중적이고 역사적으로도 매우 큰 영향력을 끼쳤지만, 왕실과 사이가 좋았던 윌슨이 비교적 호의적으로 그려진 반면 왕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처는 왕실에 부정적이거나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이 그 예시이다.[43] 여왕은 토니가 여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해 노동당 왕조를 여는 악몽까지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