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776년 | 1777년 | 1779년 | 1781년 | |
조지 워싱턴 |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 소장 앤서니 웨인 | 사령관 헨리 리 3세 | 준장 대니얼 모건 | |
1781년 | 1787년 | 1800년 | 1805년 | 1813년 | |
소장 너새니얼 그린 | 존 폴 존스 |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 |
1813년 | 1814년 | ||||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 대령 제임스 로렌스 |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 |
1814년 | 1814년, 1848년 | 1814년 | |||
대령 루이스 워링턴 |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 소장 제이콥 브라운 | 소장 윈필드 스콧 |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 |
1814년 | 1815년 | 1816년 | |||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 소장 알렉산더 마콤 | 소장 앤드루 잭슨 | 대령 찰스 스튜어트 | 대령 제임스 비들 | |
1818년 | 1835년 | 1846년, 1847년, 1848년 | 1847년 | 1854년 | |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 대령 조지 크로간 | 소장 재커리 테일러 |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 중령 덩컨 잉그함 | |
1858년 | 1863년 | 1864년 | 1866년 | 1867년 | |
프레더릭 로즈 |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 |
1867년 | 1871년 | 1873년 | 1874년, 1904년 | 1883년 | |
조지 피바디 | 조지 F. 로빈슨 |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 존 혼 주니어 | 존 폭스 슬레이터 | |
1888년 | 1890년 | 1900년 | 1902년 | 1909년 | |
조셉 프랜시스 |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 중위 프랭크 H. 뉴컴 |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 라이트 형제 | |
1912년 | 1914년 | 1915년 | 1928년 | ||
선장 아서 로스트론 | 폴 H. 크라이봄 그 외 |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 찰스 린드버그 |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 |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6년 | ||
토머스 에디슨 |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 소령 월터 리드 |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 링컨 엘즈워스 | |
1936년 | 1938년 | 1939년 | 1940년 | ||
조지 M. 코핸 |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 하워드 휴즈 | 목사 프랜시스 퀸 | 윌리엄 시넛 | |
1942년 | 1945년 | 1946년 | |||
롤런드 바우처 |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 준장 빌리 미첼 | |
1949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8년 | |
앨번 W. 바클리 | 어빙 벌린 | 조너스 소크 박사 |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 준장 하이먼 리코버 |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
로버트 고다드 | 로버트 프로스트 |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 밥 호프 | 샘 레이번 | |
1962년 | 1968년 | 1969년 | 1973년 | 1977년 | |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 월트 디즈니 | 윈스턴 처칠 | 로베르토 클레멘테 | 매리언 앤더슨 | |
1978년 | 1979년 | ||||
중장 아이라 이커 | 로버트 F. 케네디 | 존 웨인 |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 휴버트 험프리 | |
1979년 | 1980년 | 1982년 | |||
미국 적십자사 | 케네스 테일러 |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 베아트릭스 여왕 | 대장 하이먼 리코버 | |
1982년 | 1983년 | ||||
프레드 워링 | 조 루이스 | 루이스 라머 | 레오 라이언 | 대니 토머스 | |
1984년 | 1985년 | ||||
해리 S. 트루먼 | 레이디 버드 존슨 | 엘리 비젤 | 로이 윌킨스 |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 |
1986년 | 1987년 | 1988년 | |||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 해리 차핀 | 에런 코플런드 | 메리 래스커 | 제시 오언스 | |
1988년 | 1990년 | 1991년 | |||
앤드루 와이어스 | 로런스 록펠러 |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 대장 콜린 파월 | |
1994년 | 1996년 | 1997년 | |||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더 테레사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
1998년 | 1999년 | ||||
넬슨 만델라 | 리틀록 9인 |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 로자 파크스 | 시어도어 헤스버그 | |
2000년 | |||||
존 오코너 | 찰스 M. 슐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 나바호족 코드 토커 | |
2002년 | 2003년 | ||||
대장 휴 셸턴 | 토니 블레어 | 재키 로빈슨 | 도러시 하이트 박사 |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 |
2004년 | 2006년 | ||||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 터스키기 에어맨 | 달라이 라마 14세 | 바이런 넬슨 | 노먼 볼로그 박사 | |
2007년 | 2008년 | ||||
마이클 데바키 박사 | 아웅 산 수 치 |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 |
2009년 | 2010년 | ||||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 아널드 파머 | 무함마드 유누스 |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 |
2011년 | 2012년 | 2013년 | |||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 9.11 테러 참사 사망자 | 라울 발렌베리 |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 제1 특수임무단 | |
2014년 | |||||
둘리틀 특공대 멤버 | 미국의 공군 에이스 |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 시몬 페레스 | 모뉴먼츠 맨 |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제65 보병연대 | 잭 니클라우스 | 셀마 몽고메리 행진 |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 OSS | |
2017년 | 2018년 | ||||
밥 돌 | 래리 도비 |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 안와르 사다트 | |
2019년 | |||||
스티브 글리슨 | 캐서린 존슨 | 크리스틴 다든 | 도로시 본 | 메리 잭슨 |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무명의 수여자들 | 그렉 르몬드 |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 제369 보병연대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 |
2022년 | 2023년 | ||||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 제6888 중앙우편대대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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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로베르토 클레멘테 | ||||||||||||||||||||||||||||||||||||||||||||||||||||||||||||
헌액 연도 | 1973년 | |||||||||||||||||||||||||||||||||||||||||||||||||||||||||||
헌액 방식 | 기자단(BBWAA) 투표 | |||||||||||||||||||||||||||||||||||||||||||||||||||||||||||
투표 결과 | 93.38% (1회)[1] |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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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 |||||||||||||||||||||||||||||||||||||||||||||||||||||||||||||||||||||||||||||||||||||||||||||||
1960 | 1971 |
1966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 ||||
윌리 메이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 → | 올랜도 세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1971년 월드 시리즈 MVP | ||||
브룩스 로빈슨 (볼티모어 오리올스)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피츠버그 파이리츠) | → | 진 테니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스즈키 이치로 (2005) | → | 로베르토 클레멘테 | → | 레이첼 로빈슨 (2007) |
보유 기록 | |
외야수 최다 골드 글러브 수상 | 12회[2] |
}}} ||
<colbgcolor=#000000><colcolor=#fdb827> 피츠버그 파이리츠 No.21 | |
로베르토 엔리케 클레멘테 워커 Roberto Enrique Clemente Walker | |
출생 | 1934년 8월 18일 |
푸에르토리코 캐롤리나 | |
사망 | 1972년 12월 31일 (향년 38세) |
니카라과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틀:국기| ]][[틀:국기| ]][[푸에르토리코| ]]) |
신체 | 180cm / 79kg |
포지션 | 우익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54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BRO) |
소속팀 | 피츠버그 파이리츠 (1955~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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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신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Anytime you have an opportunity to make a difference in this world and you don't, then you are wasting your time on Earth.)
(Anytime you have an opportunity to make a difference in this world and you don't, then you are wasting your time on Earth.)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전 야구선수. 메이저리그의 1세대 카리브해/중남미 출신 선수 중 한 명이다. 통산 타율 0.317과 3,000안타, 외야수로서 12회의 골드 글러브 및 MLB MVP 1회 수상한 실적 외에도 인품, 사회봉사 정신 또한 투철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각계각층으로부터 존경받는 선수이다.
통산 성적은 타율 .317, 240홈런, 3,000안타, 출루율 .359, 장타율 .475, OPS .834, 순장타율 .158, BB/K 0.5, wRC+ 129, 1305타점, 1416득점을 기록했다.
2. 선수 시절
처음에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스카우트인 앨 캄파니스가 클레멘테를 강력히 추천하여 다저스와 연봉 5000달러 보너스 1만 달러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다저스가 제일 먼저 인종차별을 철폐하는데 앞장서는 바람에 뛰어난 실력을 지닌 흑인 및 히스패닉 계열 선수가 많아서 클레멘테가 뛸만한 자리가 없었고 마이너리그에서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유는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4000달러 이상의 보너스를 받은 선수는 무조건 2시즌 동안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시켜야 한다.'라는 보너스 룰이라는 규정이 있었고, 이를 어길 경우 그 선수를 룰5 드래프트에 내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저스는 그를 출전시키지 않고 그의 존재 자체를 숨기려고 했다.그러나 그를 숨기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바로 다저스에서 흑인 차별을 없앴던 전설적인 명 단장 브랜치 리키가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단장으로 취임한 후 그를 지명해 자신의 팀으로 데려온 것.[3] 그리고 1955시즌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폴로 그라운즈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의 첫 홈런을 때리며 그의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4]
마구잡이 타법으로 유명했다. 머리부터 무릎까지 모든 공을 다 친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였고, 선수 생활 끝까지 이 배드볼 히터 성향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안타왕인 조지 시슬러의 지도로 무거운 방망이를 쓴 후 정확하게 볼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0년과 1971년 두 차례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피츠버그에 안겨주기도 했고, 본인은 꾸준히 3할 타율을 유지하면서 3,000안타까지 도달했다. 아울러 역대 최고 수준의 우익수 수비를 자랑하기도 했다. 풋아웃과 '엘 바주카'로 불릴 정도의 엄청난 강견을 바탕으로 한 어시스트 같은 고전적인 스탯부터 Total Zone Runs 같은 세이버메트릭스 지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역대 우익수 지표에서 정상권을 기록하고 있다. 스즈키 이치로조차 클레멘테에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
일찍이 중남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서 맞서던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은 반드시 본명인 로베르토로 불리기를 원했고, 엉뚱한 별명이 붙을 경우 이를 정정하기 위해 언론과 맞서는 것도 불사했다. 아직 흑인 차별의 잔재가 남았던 시절에 비 미국인이자 흑인으로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중남미 출신의 흑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스타 선수로서 자존심을 세우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끝까지 투쟁했던 것이다. 덕분에 중남미 출신 선수들 모두의 우상이 되었다.
잔부상이 굉장히 많았고, 특히 담 증세에 꽤나 시달려서 자신의 차례의 타격이나 수비가 끝나면 몸이 굳어지지 않게 벤치에서 스트레칭하느라 엄청 부산스러웠다. 그럼에도 좋은 성적을 남겼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1956년 7월 25일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한 끝내기 인사이드 파크 만루홈런을 쳐서 9-8로 극적인 역전승을 이끈 적이 있다. 아쉽게도 영상으로는 남지 않았다.
3. 영광의 절정과 비극적 최후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사망을 다룬 피츠버그 지역지 헤드라인.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영광보다도, 비극적이면서도 영웅적인 최후로 인해 후대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 팔팔한 현역이던 1972년 10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12를 기록했으며, 통산 12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더불어 시즌 마지막 타석의 마지막 안타를 정확하게 통산 3,000번째 안타로 장식하였다.[5][6] 이로써 사실상 명예의 전당행도 일찌감치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MLB 오늘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마지막 타석 '3000안타' (1972.09.30)
그 해 연말에는 전세 비행기에 식량 등의 구호물자를 가득 싣고 니카라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니카라과에 구호물자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탄 비행기는 악천후 속에 추락하고 말았고, 그를 포함한 구호팀은 전원 사망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였다.[7][8]
4. 명예의 전당 입성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그는 루 게릭 이래 최초로 5년간의 유예기간 없이 바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고, 92.69%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러면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미국 외 출신으로 들어간 첫 번째 선수로 기록되었다.[9]4.1.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 그레이잉크 | HOF 모니터 | HOF 스탠다드 | |
로베르토 클레멘테 | 23 | 154 | 231 | 51 |
HOF 입성자 평균 | 27 | 144 | 100 | 50 |
- JAWS - Right Field (6th)
career WAR | 7yr-peak WAR | JAWS | |
로베르토 클레멘테 | 94.5 | 54.3 | 74.4 |
우익수 HOF 입성자 평균 | 73.2 | 43.0 | 58.1 |
5. 사회공헌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매년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이 큰 선수에게 시상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으로 남아 있다. 이 상은 현재 모든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타고 싶어하는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10][11]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의 프로야구 리그도 그의 이름을 따 로베르토 클레멘테 프로야구 리그.히스패닉계의 영웅인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등번호인 21번[12]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전체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2000년대 중반에 있었으나 무산됐다.[13] 그의 등번호 21번은 1회와 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푸에르토 리코 대표팀이 영구결번 처리했다. 아울러 당연히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영구결번.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홈구장인 PNC 파크 바로 옆을 지나는 다리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베르토 클레멘테 브리지(Roberto Clemente Bridge)로 명명되었고, 파이리츠의 전 구장인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이 있던 자리에 로베르토 클레멘테 기념 공원이 조성되었다. 또 PNC 파크의 우측 펜스는 클레멘테 월(Clemente Wall)로 명명되고 있다. 펜스의 높이는 그의 등번호에서 딴 21피트(약 6.4m)이다.
이것은 뉴욕에 있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동상. GOYA 푸드에서 협찬해서 조성된 로베르토 클레멘테 주립공원에 있다.
그리고 정확히 33년뒤에 아들인 로베르토 클레멘테 주니어가 33년전 아버지가 준비했던 구호품과 똑같은 구호품을 가지고 니카라과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아시아 대지진으로 엉망이 된 동남아가 더 도움이 급하다고 하여 그는 동남아로 구호품을 가지고 직접 가서 전해줬다. 참고로 아들인 주니어도 필라델피아 필리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야구선수로 뛰었지만 부상 때문에 메이저리그의 꿈을 접고 은퇴한 뒤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았다. 대신 그의 사후 태어난 조카 에드가르드 클레멘테가 콜로라도 로키스, 애너하임 에인절스에서 1998~2000년까지 백업 외야수로서 메이저리그 선수로 뛰기도 했다.
2015년, 클레멘테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교황 프란치스코가 이를 축복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보도되었으나 교황청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다.
6. 연도별 기록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fdb827>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1955 | PIT | 124 | 501 | 121 | 23 | 11 | 5 | 48 | 47 | 2 | 18 | 60 | .255 | .284 | .382 | .666 | -0.9 | -0.4 |
1956 | 147 | 572 | 169 | 30 | 7 | 7 | 66 | 60 | 6 | 13 | 58 | .311 | .330 | .431 | .761 | 1.8 | 2.4 | |
1957 | 111 | 474 | 114 | 17 | 7 | 4 | 42 | 30 | 0 | 23 | 45 | .253 | .288 | .348 | .637 | 1.5 | 1.4 | |
1958 | 140 | 556 | 150 | 24 | 10 | 6 | 69 | 50 | 8 | 31 | 41 | .289 | .327 | .408 | .736 | 3.7 | 4.4 | |
1959 | 105 | 456 | 128 | 17 | 7 | 4 | 60 | 50 | 2 | 15 | 51 | .296 | .322 | .396 | .718 | 1.9 | 2.8 | |
1960 | 144 | 620 | 179 | 22 | 6 | 16 | 89 | 94 | 4 | 39 | 72 | .314 | .357 | .458 | .815 | 3.4 | 4.0 | |
1961 | 146 | 614 | 201 | 30 | 10 | 23 | 100 | 89 | 4 | 35 | 59 | .351 | .390 | .559 | .949 | 5.3 | 6.4 | |
1962 | 144 | 581 | 168 | 28 | 9 | 10 | 95 | 74 | 6 | 35 | 73 | .312 | .352 | .454 | .805 | 3.6 | 3.9 | |
1963 | 152 | 642 | 192 | 23 | 8 | 17 | 77 | 76 | 12 | 31 | 64 | .320 | .356 | .470 | .826 | 4.6 | 5.3 | |
1964 | 155 | 683 | 211 | 40 | 7 | 12 | 95 | 87 | 5 | 51 | 87 | .339 | .388 | .484 | .872 | 6.1 | 7.2 | |
1965 | 152 | 642 | 194 | 21 | 14 | 10 | 91 | 65 | 8 | 43 | 78 | .329 | .378 | .463 | .842 | 6.0 | 7.1 | |
1966 | 154 | 690 | 202 | 31 | 11 | 29 | 105 | 119 | 7 | 46 | 109 | .317 | .360 | .554 | .956 | 7.6 | 8.2 | |
1967 | 147 | 632 | 209 | 26 | 10 | 23 | 103 | 110 | 9 | 41 | 103 | .357 | .400 | .554 | .954 | 7.7 | 9.0 | |
1968 | 132 | 557 | 146 | 18 | 12 | 18 | 74 | 57 | 2 | 51 | 77 | .291 | .355 | .482 | .838 | 6.7 | 8.2 | |
1969 | 138 | 570 | 175 | 20 | 12 | 19 | 87 | 91 | 4 | 56 | 73 | .345 | .411 | .544 | .955 | 7.0 | 7.5 | |
1970 | 108 | 455 | 145 | 22 | 10 | 14 | 65 | 60 | 3 | 38 | 66 | .352 | .407 | .556 | .963 | 4.7 | 5.5 | |
1971 | 132 | 553 | 178 | 29 | 8 | 13 | 82 | 86 | 1 | 26 | 65 | .341 | .370 | .502 | .871 | 6.5 | 7.3 | |
1972 | 102 | 413 | 118 | 19 | 7 | 10 | 68 | 60 | 0 | 29 | 49 | .312 | .356 | .479 | .835 | 4.0 | 4.8 | |
MLB 통산 (18시즌) | 2433 | 10211 | 3000 | 440 | 166 | 240 | 1416 | 1305 | 83 | 621 | 1230 | .317 | .359 | .475 | .834 | 80.6 | 94.8 |
[1] 후술하겠지만 비행기 사고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으로 5년 유예 기간을 면제받았다.[2] 윌리 메이스와 동률.[3] 다만 클레멘테가 다저스에서 데뷔를 못한 것에 대해 당시 다저스의 단장인 버지 버베이시의 증언은 달랐다. 버지는 당시 흑인 선수의 비중은 문제될 것이 없었고 '팀의 승리'에 대해 클레멘테를 어떻게 할 지 두고 이사회를 소집했다고 한다. 이사회는 선수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재키 로빈슨이 "클레멘테가 올라오면 누굴 내릴 것이냐"라는 질문을 했고 이에 버지가 당시 부진에 빠졌던 조지 슈바를 내릴 것이라는 답변을 하자 로빈슨은 이에 "팀 내 최고의 선수는 아니지만 신망이 두터운 선수"라며 즉각 항변했고 이내 "내가 단장이라면 클레멘테를 올리지 않고 슈바나 다른 백인 선수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 결정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퇴보할 것."이라며 클레멘테의 콜업에 강력히 반대했다. 사실 로빈슨과 슈바는 다저스의 마이너리그 팀이었던 몬트리올 로열스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어쨌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클레멘테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로빈슨이었기에 더욱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현재 미국 내 흑인들이 비판받고 있는 문제점인 '히스패닉 차별'의 또 다른 사례가 될 수도 있다.[4] 당시 자신이 기록한 1호 홈런이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이었다. 초대형 구장으로 유명한 폴로 그라운즈의 3측 불펜 앞에 떨어지는 비거리 135미터 짜리 홈런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폴로 그라운즈 문서를 참조 할 것을 추천한다.[5] 말하자면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통산 3,000번째 안타는 (정규시즌 기준으로) 그의 생애 마지막 타석에서 나온, 마지막 안타였다. 비록 그 순간에는 본인을 포함해서 아무도 몰랐겠지만.[6] 그해 피츠버그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해 신시내티 레즈와 리그 챔피언십 결정전을 치렀고, 로베르토도 당연히 출전했다. 결국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메이저리그 출전이 되었다.[7] 이전부터 니카라과에 구호품을 전달해줬는데, 니카라과를 통치하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일당과 그 휘하의 부패한 관리들이 그걸 가로채는 일이 계속되었다. 결국 이를 참다못한 클레멘테가 자신이 직접 전세기를 타고 전달하려 했다가 그만 화를 입고 만 것. 여기에 6개월간의 수색에도 클레멘테의 시신은 끝끝내 찾지 못했는데, 이러한 사연이 알려진 후 더욱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8] 원래는 갓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절친한 후배인 톰 워커라는 선수도 같이 갈 예정이었지만 클레멘테는 미혼인 그에게 가족과 연말을 보내길 권했고 워커는 클레멘테가 구호물자를 싣는 것만 도와주고 돌아오게 되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화를 피한 워커가 결혼한 후 낳은 아들 닐 워커는 훗날 피츠버그에서 준수한 타자로 활약하게 된다.[9] 단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자치령이기 때문에 엄밀히 보면 클레멘테도 미국 국민이라 볼 수 있다. 미국 외 국적으로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는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후안 마리샬이다.[10] 2005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 수상자였던 존 스몰츠의 수상소감. "이 상은 지금껏 내가 받은 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이다. 사이 영 상을 받았을 때보다 더 영광스럽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준다는 의미에서 이 상은 그 어떤 상보다도 위대한 상이다."[11]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 자체는 클레멘테 사망 전부터 있었고 그 때는 그냥 커미셔너 특별상이라는 이름이었다. 클레멘테 사망 이후 그를 기리는 차원에서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12] 재밌게도 메이저리그 전체 영구 결번인 재키 로빈슨이 달았던 42의 정확하게 절반이다.[13] 일단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그다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기에 재키 로빈슨의 유족측에서도 부정적 입장을 비춘 것까지 더해져서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21번을 전체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것은 흐지부지되었다. 단순히 재키 로빈슨 유족의 반대만으로 무산되었다는 일부 주장은 와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