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776년 | 1777년 | 1779년 | 1781년 | |
조지 워싱턴 |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 소장 앤서니 웨인 | 사령관 헨리 리 3세 | 준장 대니얼 모건 | |
1781년 | 1787년 | 1800년 | 1805년 | 1813년 | |
소장 너새니얼 그린 | 존 폴 존스 |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 |
1813년 | 1814년 | ||||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 대령 제임스 로렌스 |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 |
1814년 | 1814년, 1848년 | 1814년 | |||
대령 루이스 워링턴 |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 소장 제이콥 브라운 | 소장 윈필드 스콧 |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 |
1814년 | 1815년 | 1816년 | |||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 소장 알렉산더 마콤 | 소장 앤드루 잭슨 | 대령 찰스 스튜어트 | 대령 제임스 비들 | |
1818년 | 1835년 | 1846년, 1847년, 1848년 | 1847년 | 1854년 | |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 대령 조지 크로간 | 소장 재커리 테일러 |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 중령 덩컨 잉그함 | |
1858년 | 1863년 | 1864년 | 1866년 | 1867년 | |
프레더릭 로즈 |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 |
1867년 | 1871년 | 1873년 | 1874년, 1904년 | 1883년 | |
조지 피바디 | 조지 F. 로빈슨 |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 존 혼 주니어 | 존 폭스 슬레이터 | |
1888년 | 1890년 | 1900년 | 1902년 | 1909년 | |
조셉 프랜시스 |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 중위 프랭크 H. 뉴컴 |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 라이트 형제 | |
1912년 | 1914년 | 1915년 | 1928년 | ||
선장 아서 로스트론 | 폴 H. 크라이봄 그 외 |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 찰스 린드버그 |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 |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6년 | ||
토머스 에디슨 |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 소령 월터 리드 |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 링컨 엘즈워스 | |
1936년 | 1938년 | 1939년 | 1940년 | ||
조지 M. 코핸 |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 하워드 휴즈 | 목사 프랜시스 퀸 | 윌리엄 시넛 | |
1942년 | 1945년 | 1946년 | |||
롤런드 바우처 |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 준장 빌리 미첼 | |
1949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8년 | |
앨번 W. 바클리 | 어빙 벌린 | 조너스 소크 박사 | 남북전쟁의 참전 용사 | 준장 하이먼 리코버 |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
로버트 고다드 | 로버트 프로스트 |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 밥 호프 | 샘 레이번 | |
1962년 | 1968년 | 1969년 | 1973년 | 1977년 | |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 월트 디즈니 | 윈스턴 처칠 | 로베르토 클레멘테 | 매리언 앤더슨 | |
1978년 | 1979년 | ||||
중장 아이라 이커 | 로버트 F. 케네디 | 존 웨인 |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 휴버트 험프리 | |
1979년 | 1980년 | 1982년 | |||
미국 적십자사 | 케네스 테일러 |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 베아트릭스 여왕 | 대장 하이먼 리코버 | |
1982년 | 1983년 | ||||
프레드 워링 | 조 루이스 | 루이스 라머 | 레오 라이언 | 대니 토머스 | |
1984년 | 1985년 | ||||
해리 S. 트루먼 | 레이디 버드 존슨 | 엘리 비젤 | 로이 윌킨스 |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 |
1986년 | 1987년 | 1988년 | |||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 해리 차핀 | 에런 코플런드 | 메리 래스커 | 제시 오언스 | |
1988년 | 1990년 | 1991년 | |||
앤드루 와이어스 | 로런스 록펠러 |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 대장 콜린 파월 | |
1994년 | 1996년 | 1997년 | |||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더 테레사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
1998년 | 1999년 | ||||
넬슨 만델라 | 리틀록 9인 |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 로자 파크스 | 시어도어 헤스버그 | |
2000년 | |||||
존 오코너 | 찰스 M. 슐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 나바호족 코드 토커 | |
2002년 | 2003년 | ||||
대장 휴 셸턴 | 토니 블레어 | 재키 로빈슨 | 도러시 하이트 박사 |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 |
2004년 | 2006년 | ||||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 터스키기 에어맨 | 달라이 라마 14세 | 바이런 넬슨 | 노먼 볼로그 박사 | |
2007년 | 2008년 | ||||
마이클 데바키 박사 | 아웅 산 수 치 |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 |
2009년 | 2010년 | ||||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 아널드 파머 | 무함마드 유누스 |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 |
2011년 | 2012년 | 2013년 | |||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 9.11 테러 참사 사망자 | 라울 발렌베리 |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 제1 특수임무단 | |
2014년 | |||||
둘리틀 특공대 멤버 | 미국의 공군 에이스 |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 시몬 페레스 | 모뉴먼츠 맨 |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제65 보병연대 | 잭 니클라우스 | 셀마 몽고메리 행진 |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 OSS | |
2017년 | 2018년 | ||||
밥 돌 | 래리 도비 |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 안와르 사다트 | |
2019년 | |||||
스티브 글리슨 | 캐서린 존슨 | 크리스틴 다든 | 도로시 본 | 메리 잭슨 |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무명의 수여자들 | 그렉 르몬드 |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 제369 보병연대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 |
2022년 | 2023년 | ||||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 제6888 중앙우편대대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 |
조 루이스 Joe Louis | |
<colbgcolor=#000000><colcolor=#aa9872,#8c7a55> 본명 | 조셉 루이스 배로 Joseph Louis Barrow |
출생 | 1914년 5월 13일 |
미국 앨라배마주 라피엣 | |
사망 | 1981년 4월 12일 (향년 66세) |
미국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권투 전적 | 69전 66승(52KO) 3패(2KO) |
신장/리치 | 187cm / 193cm |
체급 | 헤비급 |
스탠스 | 오서독스 |
링네임 | The Brown Bomb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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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2. 전적
- 주요 승: 잭 크레켄, 아트 스카이츠, 스탠리 포레다, 피르모 카르네라, 킹 레빈스키, 맥스 베어, 폴리노 우쿠둔, 찰리 레자에프, 잭 샤키, 밥 패스터(2), 제임스 J. 브래덕, 토미 파, 막스 슈멜링, 존 헨리 루이스, 토니 갈렌토, 아르투로 고도이(2), 존 페이첵, 태미 마우리엘로, 레드 버먼, 에이브 사이먼(2), 버디 베어(2), 빌리 콘(2), 루 노바, 저지 조 월컷(2), 리 새볼드, 지미 비빈스
3. 커리어
3.1. 유년 시절
1914년 5월 13일 앨라배마주 라파예트에 있는 목화밭 옆의 집에서 태어난 조셉 루이스 배로는 노예의 손자이자 노예주의 증손자였다. 루이스와 그의 일곱 명의 형제자매는 자라면서 종종 한 침대에서 서너 명이 함께 자곤 하였다.남부에서 쿠 클럭스 클랜이 부활하면서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폭력을 당하자 루이스의 어머니 릴리는 가족을 데리고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였다.
이후 루이스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동네에서 얼음 배달 일자리를 구했다. 나중에 그는 아파트 건물의 여러 계단을 올라가며 마차에서 무거운 얼음 블록을 나르는 데 시간을 보낸 것이 근육질의 몸매와 지구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캐비닛 제작을 공부하기 위해 전문 학교에 입학했다.
디트로이트 지역에서 성공적인 아마추어 복싱 선수였던 친구 서스턴 맥키니와 몇 라운드의 친선 경기를 가지기 전까지 루이스는 복싱 커리어를 쌓을 생각이 없었다. 맥키니는 루이스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위해 어머니가 준 돈을 대신 몰래 복싱 레슨에 쓰라고 제안했다.
루이스는 어머니에게 복싱을 한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조 루이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3.2. 아마추어 경력
아마추어 데뷔전에서 1932 LA 올림픽 권투 참가 선수인 조니 밀러에게 2라운드에만 7번이나 다운을 당한 후 패배했지만, 몇 년 만에 중서부에서 뛰어난 아마추어복서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1934년 시카고 골든 글러브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조 바우어를 제치고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런 다음 아리오 솔다티를 KO시키며 내셔널 AAU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아마추어 전적 54전 50승 43KO를 기록한 후, 그해 말에 프로로 전향했다.
3.3. 프로 경력
3.3.1. 1930년대
1934년, 디트로이트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폭력배 줄리안 블랙 과 존 록스버러가 루이스의 재정 후원자이자 관리자가 되었다. 그들은 즉시 루이스를 미래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키우고자 했으며, 루이스가 훗날 "채피(Chappie)"라는 애칭으로 부르게 될 베테랑 트레이너이자 전 라이트급 컨텐더 잭 블랙번을 영입하였다.또한 블랙과 록스버러는 링 안팎에서 루이스의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했다.
- 백인 여성과 함께 사진을 찍지 않을 것.
- 쓰러진 상대 앞에서 우쭐대지 않을 것.
- 승부조작에 가담하지 않을 것.
- 청렴하게 살고 청렴하게 싸울 것.
이러한 규칙은 이전에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유일한 흑인인 잭 존슨에게 심하게 불쾌감을 느낀 백인 사회와 팬들에게 루이스를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그의 매니저들이 그에게 행동을 훈련시키는 동안, 트레이너 블랙번은 루이스의 프로 데뷔를 준비시켰다.
1934년 7월 4일, 루이스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1라운드 시작 몇 초 만에 잭 크라켄을 KO시켰다.
연말이 되기 전에, 11연승 9KO를 거둔 루이스는 드디어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다. 그 상대는 바로 캘리포니아의 리 래미지로, 그는 30번 이상의 시합을 치른 베테랑이었으며,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기를 치른 적까지 있었다. 북메이커들은 래미지의 승리를 점쳤지만, 루이스는 상대를 8라운드에 무너뜨리면서 복싱계에 처음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래미지가 그 라운드에서 네 번째로 캔버스에 부딪혔을 때 세컨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프로 데뷔 불과 6개월 만에 링 매거진은 루이스를 헤비급 랭킹 10위로 승격했다.
래미지와의 재경기에서 2라운드 KO승을 포함한 7번의 연속적인 KO승 이후, 루이스는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인 프리모 카르네라와 링에 올랐다. 카르네라는 키가 6피트 반이 넘었고, 체중도 루이스보다 거의 65파운드가 더 나갔다. 이탈리아가 최근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것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면서 이 대결은 스포츠의 영역을 넘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뉴욕시 내의 민족적 긴장이 너무 위험해져서 도시의 많은 유력 인사들이 경기를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62,000명의 유료 고객이 양키 스타디움을 찾아왔다. 1라운드 종료 후, 카르네라의 얼굴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고, 아랫니 중 일부가 윗입술을 뚫고 들어갔다. 나머지 라운드는 불가피한 상황을 연장시켰을 뿐이었고, 6라운드 루이스의 오른손이 카르네라를 처참하게 쓰러뜨렸다. 전 챔피언은 일어설 때 용기를 보였지만, 몇 분 후 다시 넘어졌다. 그는 용감하게 다시 일어섰고, 세 번째로 캔버스에 쓰러질 때쯤이었다. 놀랍게도, 이탈리아 선수는 일어섰지만, 주심 아서 도노반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루이스는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후, 이제 체급 내에서 뛰어난 젊은 선수로 여겨졌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그 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선수로 즉시 받아들여졌다. 루이스의 일정에서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킹 레빈스키였다. 그는 또 다른 노련한 링 베테랑으로, 체급 내의 최고 선수 중 일부와 맞붙었다.
그러나 레빈스키 역시 강력한 펀처로 여겨졌지만, 디트로이트에서 온 이 젊은 강자를 분명히 두려워하는 듯했다. 그는 싸우기 위해 사실상 코너에서 밀려나야 했고, 1라운드도 채 안 되어 전멸했다. 또 다른 우수한 상대의 이러한 우세는 많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루이스의 "위대한 흑인의 희망"이라는 지위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제 본격적인 유명인이었고, 그의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블랙과 록스버러는 마바 트로터라는 이름의 십 대 여비서와의 결혼을 주선했다. 루이스는 무대 뒤에서 만족할 줄 모르는 여성을 좋아하는 남자로 남았지만 트로터와의 결혼은 그의 겸손과 정직의 이미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실, 결혼은 너무나 조작되어 루이스와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 맥스 베어의 시합을 홍보하는 데 적합했다. 루이스는 1935년 9월 24일 양키 스타디움에 도착하기 직전에 결혼했다.
베어는 불과 3개월 전에 제임스 J. 브래덕에게 챔피언십 경기에서 패배했지만, 여전히 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람들은 루이스의 매니저가 베어 수준의 선수와 싸우도록 너무 빨리 서두르고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위축된 사람은 루이스가 아니었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링에서의 두려움을 정의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베어는 "조 루이스와 링 맞은편에 섰고, 그가 일찍 집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답했다. 두 파워 펀처의 충돌을 보기 위해 약 88,150명이 1,000,832달러를 지불했는데, 이는 거의 10년 만에 가장 큰 입장료였고 대공황 중에 상당한 성과였다.
두 선수 모두 예상대로 파워샷을 던졌지만 루이스의 펀치가 더 짧고 빠르고 정확했다. 베어의 펀치는 반복적이고 아마추어적이었으며, 루이스한테서 어느 순간도 베어의 전설적인 파워의 효과가 보여지지 않았다. 두 선수는 3라운드 동안 펀치를 주고받았고, 루이스가 분명히 더 나은 액션을 취했다. 4라운드 루이스에게 엄청난 구타를 당한 후 지쳐 보이고 패배를 체념한 듯 보였던 베어는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가 48번의 프로 경기에서 처음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그는 일어나 싸우려고 했지만, 좌우 콤비네이션에 의해 금세 바닥에 납작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베어는 무릎까지 올라갔지만, 제때 일어나지 못해 첫 KO패를 당했다.
베어는 경기 후 기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일어나려고 애썼을 수도 있지만, 제가 처형당할 때 사람들은 좌석당 25달러 이상을 내고 구경해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프로 데뷔 1년을 조금 넘긴 후, 이제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의 넘버원 컨텐더로서 당연시되고 있던 루이스는 타이틀을 차지한 챔피언 브래덕에게 도전하기 전 독일의 막스 슈멜링과 맞붙었다.
슈멜링 역시 전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고, 일전에 베테랑 컨텐더 파올리노 우즈쿠둔과 찰리 레츨라프를 KO시키며 커리어를 이어갔으나, 이미 전성기가 지났으며 떠오르는 신예인 루이스에게 패배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슈멜링은 경기 전 루이스와 맥스 베어의 경기 영상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 루이스의 기술에 있는 명백한 결함을 분석했다. 그가 알아차린 약점 중 하나는 루이스가 레프트 잽을 던진 후 왼손을 내린다는 사실이었다.
링에서 슈멜링은 이 미묘한 결함을 이용해 루이스가 잽을 던지는 족족 크로스로 카운터를 날렸다. 이 경기는 처음 세 라운드 동안 치열하고 강렬한 경기였지만, 네 번째 라운드에서 슈멜링의 오른손 카운터로 루이스는 프로에서 처음으로 다운을 허용했다. 루이스는 일어났지만, 싸움이 끝날 때까지 심하게 멍했고, 슈멜링은 그 후 커리어에서 가장 훌륭한 성과를 냈다. 그는 다음 여덟 라운드 동안 루이스를 때려눕혔고, 종종 자랑스러운 펀처와 맞붙어 서서 같은 오른손을 턱에 반복해서 날렸다. 열두 번째 라운드에서 그는 조를 다시 한 번 캔버스로 쓰러뜨렸고, 이번에 루이스는 회복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캔버스에 앉아 혼란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KO패를 당했다.
예상치 못한 패배에 루이스와 그의 팬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언론은 그의 이전 업적을 사기로 일축했고, 이전에 챔피언십으로 향하는 그의 뚜렷했던 길은 이제 막힌 것처럼 보였다. 루이스는 당황스럽고 민망했지만, 우울증이 생기기를 바라지 않는 그의 관리자들은 현명하게 그를 다시 경쟁에 투입했다.
슈멜링과의 경기 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다른 전 챔피언인 잭 샤키와 함께 링에 올랐다. 1932년 슈멜링에게서 챔피언 타이틀을 뺏은 샤키는 해리 윌스와 잭 뎀시와도 링에 올랐지만, 이때 그는 전성기를 훨씬 지났고 루이스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완벽한 이름 있는 상대임이 분명했다. 샤키는 세 번째 프레임에서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쓰러지기 전에 세 번의 녹다운을 극복하였다.
다음 여섯 경기에서 무패를 기록하고 그 중 다섯 경기에서 KO로 승리한 루이스는 브래덕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을 놓고 경쟁에 복귀했지만 맥스 슈멜링은 루이스를 상대로 KO로 승리하여 넘버원 컨텐더로 남았고 브래덕과의 대결이 19937년에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경기의 주최측이 슈멜링(대부분 미국인이 나치로 잘못 인식)이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게 되어 부정적인 홍보가 생길까 두려워서 시간을 끌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브래덕의 매니저가 대신 루이스 진영과 협상 중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뉴욕주체육위원회(NYSAC)는 브래덕에게 슈멜링을 상대로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라는 명령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스포츠계에서 가장 큰 홍보 회사였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코퍼레이션은 브래독과 루이스의 경기에 대해 법적 가처분 명령을 받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루이스는 가든의 홍보 명단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2월 브래독측 사람들은 그가 루이스를 상대로 챔피언십을 방어하기 위해 계약했다고 확인했다.
1937년 6월 22일 시카고의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이 경기는 브래덕이 맥스 베어를 상대로 엄청난 이변을 일으키며 타이틀을 차지한 이후 2년 만에 치른 첫 경기였다. 25패를 기록한 그는 우연의 챔피언으로 여겨졌고, 타이틀을 차지할 준비가 되었다. 챔피언보다 도전자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이 더 많았던 드문 사례에서 루이스는 10:1의 탑독이었다.
1라운드 챔피언이 또 다른 감동적인 이변을 일으키는 듯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숏펀치를 날려 루이스를 바지 밑으로 내리쳤고 관중들은 깜짝 놀랐다. 루이스는 놀랐지만 다치지 않은 채 주심이 2를 세자 다시 일어나 챔피언에게 잔혹하게 구타를 가했다. 브래덕은 8라운드까지 버텼고 오른손이 그의 턱을 직접 때렸다. 브래덕의 무릎이 처졌고, 지연된 반응으로 그는 바닥에 쓰러졌고, 그의 코에서 피가 바닥으로 쏟아지면서 타이틀은 루이스의 차지가 되었다.
처음부터 루이스는 뛰어난 챔피언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첫 방어전에서 영국 챔피언십을 차지한 웨일즈 출신의 토미 파와 맞붙었다. 국가 타이틀과 뛰어난 복싱 실력에도 불구하고 파는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상대라고 여겨졌다. 대신 파는 용감하게 싸웠고 15라운드를 버텼지만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했다. 그 후 네이선 만과 해리 토마스가 루이스에게 KO패를 당했다.
1938년 6월 22일, 루이스는 여전히 세계 랭킹 1위 컨텐더로 평가받는 막스 슈멜링에게 당한 유일한 패배를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이 경기를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파장은 엄청났다. 슈멜링의 고향 독일을 통치하던 나치당의 점점 더 공격적인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의제 때문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슈멜링이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여 독일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넘길까 두려워했다. 슈멜링은 나치가 아니었지만 나치로 여겨졌다. 독일 외의 대중은 루이스에게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세계에 상징적인 승리를 안겨주라고 많은 압력을 가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개인적으로 루이스의 훈련 캠프를 방문했고, 히틀러는 공개적으로 슈멜링과 사교를 나누었다.
국제적 영향은 분명했고, 경기가 시작되자 지난 2년 동안 루이스가 보여준 발전이 분명해졌다. 그는 1라운드 만에 맹공격을 퍼부었고, 독일 선수는 1차전에서처럼 반격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루이스는 슈멜링에게 카운터를 날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미국인은 도전자를 덮쳐 모든 각도에서 펀치를 날렸다. 로프로 몰려들어 짧고 날카로운 일격을 맞은 슈멜링은 상대방에게 등을 돌리고 비명을 질렀는데, 몇 년 후에도 75,000명의 관중 중 많은 사람이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슈멜링의 무릎은 루이스의 일방적인 구타로 인해 휘청거렸고, 주심 아서 도노반은 루이스를 밀어내며 카운트를 세기 시작했다. 슈멜링은 마지못해 로프에서 물러났고, 도노반은 경기를 재개하였다. 몇 번의 펀치 후, 독일 선수는 캔버스에 누워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무력했다. 그는 일어났지만 몇 분 후 쓰러졌고, 도노반은 경기를 중단했다. 이 승리는 루이스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였고, 한 세대 동안 복싱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조는 슈멜링을 물리친 후 영광과 부에 젖어 5개월 동안 링에 오르지 않다가, 세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존 헨리 루이스를 상대로 챔피언십을 방어했다. 조의 절친 중 한 명인 존은 자신이 실명할 것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비밀로 간직했다. 시력 문제가 자신의 커리어에 조기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존은 조에게 수익성 있는 타이틀전에 대해 접근했고, 챔피언은 기꺼이 허락했다.
친구의 병을 알고 있던 조는 존에게 장기적으로 최소한의 피해만 줄 전략을 고안했는데, 즉 폭행을 연장하지 않기 위해 그를 빨리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20년 만에 두 명의 흑인 선수 간의 첫 번째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에서 챔피언은 한 라운드도 채 걸리지 않아 도전자를 무너뜨렸다. 이 경기는 존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고, 조는 미래에 명예의 전당에 오를 선수를 상대로 연속으로 두 번째 1라운드 KO승을 거두었다.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조는 같은 라운드에서 잭 로퍼를 압도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루이스는 모든 믿을 만한 상대를 제거했다. 토니 갈렌토와의 스릴 넘치는 대결에서 루이스는 다운을 당했으나, 곧이어 4라운드 KO승을 거두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전에 루이스와 10라운드 판정까지 간 밥 패스터와의 재경기에서 챔피언은 11라운드 KO를 기록했다.
이 네 번의 싸움의 결과로 루이스는 1939년 링 매거진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3.3.2. 1940년대
루이스의 1940년 첫 경기는 아르헨티나의 아르투로 고도이와의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기였는데, 그는 15라운드를 모두 버텼지만 스플릿 판정으로 졌다. 두 라운드에서 적절하게 이름 붙여진 조니 파이체크를 물리친 후, 루이스는 고도이에게 재경기를 주었고 심판이 경기를 중단하기 전에 여덟 번째 라운드에서 두 번의 다운을 기록했다.루이스가 마침내 모든 가치 있는 도전자를 제쳐 버렸을 때, 그의 매니저들은 언론에서 "Bum of the Month" 클럽으로 알려지게 된, 챔피언에 맞설 수 없는 저니맨과 변두리 컨텐더들과 그를 매치시키기 시작했다. 1940년 12월에서 1941년 4월 사이에 챔피언은 비교적 쉽게 5명의 상대들(앨 매코이, 레드 버먼, 거스 도라지오, 에이브 사이먼, 토니 무스토)을 처리했다.
더 믿을 만한 상대인 맥스의 남동생 버디 베어는 이전 5명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위협이 되었다. 250파운드의 버디 베어는 더 유명한 그의 형보다 더 키가 크고 더 무거웠다. 그는 토니 갈렌토, 네이선 맨, 에이브 사이먼과 같은 저명한 상대들을 이겼으며 최고의 컨텐더 중 한 명으로 평가되었다.
흥미진진한 대결에서 베어는 1941년 5월 23일 경기의 첫 라운드에서 챔피언을 로프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그러나 루이스는 맹렬히 반격했고, 베어의 트레이너가 링을 떠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심판이 7라운드 시작에 도전자를 실격 처리했을 때 분명히 선두를 되찾았다. 베어의 부하들은 챔피언이 6라운드가 끝난 벨이 울린 후 캘리포니아인을 기절시킨 펀치를 날려 선수에게 파울을 걸었다고 주장했다. 심판 아서 도노반이 그들의 항의를 듣지 않자, 그들은 링에 남았고 도노반은 그들 무리를 실격 처리했다. 여전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베어는 어차피 계속할 상태가 아니었다.
루이스와 버디 베어의 첫 라운드 경기가 챔피언에게 아슬아슬한 승부로 판명났다면, 그의 다음 경기는 훨씬 더 위험할 것이다. 1941년 6월 18일, 그는 뉴욕 폴로 그라운드에서 전 라이트 헤비급 세계 챔피언인 빌리 콘과 맞붙었다. "피츠버그 키드"로 알려진 콘은 인기 있는 선수였고 그 시대의 P4P 최고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루이스가 헤비급에서 활동하던 것과 같은 시기에 미들급과 라이트 헤비급을 모두 휩쓸었다.
1940년, 그는 헤비급으로 월장하여 체급 내 최고의 선수들을 물리치면서 챔피언의 왕좌를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컨텐더로 자리매김했다. 두 선수의 기대되는 경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역대 최고의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로 여겨진다. 확실히 콘의 높은 평가를 받는 기술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드라마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계체량에서의 공식 결과는 챔피언의 체중이 25파운드 더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루이스는 199파운드, 콘은 174파운드). 그러나 프로모터 마이크 제이콥스는 경기가 덜 부조화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 숫자를 조정했다. 실제 체중은 루이스의 경우 200파운드, 콘의 경우 169파운드로, 루이스가 31파운드나 더 나갔다.
콘의 가벼운 체중 덕분에 그는 링 주변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루이스가 펀치를 날릴 수 있는 발을 딛지 못하게 했다. 첫 몇 라운드 동안 콘은 공격을 소홀히 하고 상대 주위를 빙빙 돌며 사정거리 밖에 머물렀다. 그러나 3라운드가 되자 도전자의 핸드 스피드 이점이 분명해졌다. 루이스는 반복적으로 잽과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맞았고, 양손에서 훅이 연발로 쏟아졌다. 챔피언이 대가를 치르자 콘은 그의 뒤로 뛰어 돌아갔다. 루이스는 까다로운 상대를 쫓아가 펀치를 맞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경기 중 어느 순간, 도전자는 챔피언에게 "당신은 싸움을 해야 한다"고 큰소리쳤고, 루이스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11라운드가 시작되자, 콘의 얼굴에 두 개의 커팅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모든 에너지를 잃은 듯했다. 하지만 그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했고, 당황하거나 낙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2라운드 마지막 몇 초 동안, 콘은 일련의 왼손 훅과 오른손 크로스로 루이스에게 대미지를 입혔다. 비틀거리는 챔피언은 로프로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도전자가 그를 끝내려고 돌진했을 때 루이스의 남은 본능은 그가 버틸 수 있게 해주었고, 그는 벨까지 갈 수 있었다.
12라운드가 끝나고 파이터들이 코너로 돌아왔을 때, 콘은 3명의 부심윈 중 2명의 점수표에서 앞서고 있었다. 3번째 심판은 무승부로 채점하고 있었다. 점수를 알지 못했음에도 도전자 역시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마지막 라운드까지 도망다닐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트레이너인 조니 레이에게 "이 개자식을 이 라운드에서 이길 수 있어요."라고 말했고, 레이는 단호하게 그래선 안된다고 충고했지만 그는 발을 딛고 챔피언과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콘의 핸드 스피드는 여전히 그를 앞서게 했지만, 루이스의 펀치가 적중했을 때 관중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13라운드의 마지막 순간에 접어들자, 루이스는 콘을 두 배로 쓰러뜨린 듯한 강력한 오른손을 날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챔피언은 여러 가지 콤비네이션을 날렸고, 마지막 한 번은 얼어붙은 도전자를 오른쪽으로 넘어뜨렸다. 멍한 콘이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쯤 심판은 10카운트를 끝까지 세었다.
빌리 콘의 충동과 조 루이스의 엄청난 펀치력이 합쳐져 복싱계 역사상 가장 스릴 넘치는 순간 중 하나를 선사했다. 그것은 확실히 루이스가 슈멜링을 1라운드 만에 무너뜨린 이후 가장 고무적인 승리였고, 10년 동안 가장 강렬한 헤비급 타이틀전이었으며, 재경기에 대한 관심을 즉시 불러일으켰다.
콘과의 2차전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루이스는 캘리포니아 출신의 루 노바를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56,000명이 넘는 팬이 모인 관중 앞에서 그는 흥미 없는 시합을 했지만, 권투 역사가 냇 플라이셔는 챔피언이 완벽하게 우세했기 때문에 "학살"이라고 묘사했고, 심판은 6라운드 마지막 1초에 시합을 중단해야 했다.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세계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고,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게 되었는데, 미국인들은 이미 루이스가 독일의 막스 슈멜링과 두 번이나 싸운 것을 보고 루이스를 인정했다. 그래서 미국 육군은 루이스를 "애국적 대의"의 대표로 찾았고, 1942년 1월 8일 현역 헤비급 챔피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군대에 입대했다. 하루 후, 그는 버디 베어와의 재경기를 위해 링에 올랐고, 이전 경기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잠재운 1라운드 KO승을 기록했다.
3월 10일, 그는 해군 구호 협회가 주최한 대규모 만찬에서 연설자로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나타났다. 루이스는 다른 손님들에게 "모든 붉은 피를 가진 미국인이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할 것이고, 이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We gonna do our part, and we will win, because we are on God's side.
– 조 루이스, "미국의 대의"에 대한 위대한 영감의 인용구 중 하나가 되었다.
2주 남짓 후, 그는 가든으로 돌아와 6라운드 만에 에이브 사이먼을 KO시켰다. 루이스가 베어와의 재대결과 사이먼과의 경기에서 얻은 상금의 대부분은 육군 구호 기금에 기부되었다.We gonna do our part, and we will win, because we are on God's side.
– 조 루이스, "미국의 대의"에 대한 위대한 영감의 인용구 중 하나가 되었다.
21회 연속 타이틀 방어라는 기록이 세워진 후, 루이스는 복싱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했다. 복싱 커뮤니티는 그의 타이틀을 그가 돌아올 때까지 "동결"시켰다(다른 체급의 챔피언들도 복무 기간 동안 타이틀이 동결되었다).
그는 미국 미덕의 가장 인기 있는 상징 중 하나였고 국민들에게 큰 자부심의 원천이었지만, 조 루이스는 군 복무 기간 동안 결코 전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복무 기간 동안 수십 번의 무급 시범 경기 사이에 주로 홍보 및 훈련 업무를 했지만, 1945년 10월 명예 제대 전에 상사 계급을 달성했다.
그의 재정이 완전히 혼란에 빠진 것도 군 복무 기간 중이었다. 입대 당시 무책임한 지출과 차용 때문에 이미 빚이 다소 있었고, 루이스는 수년 동안 프로로 싸우지 않았고, 그래서 프로모터와 매니저에게서 계속 많은 돈을 빌렸다. 게다가 국세청은 루이스에게 1941년 시합에서 얻은 수입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고, 그 중 대부분은 미국 정부에 기부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루이스는 IRS에 10만 달러 이상의 빚을 지게 되었다.
루이스의 프로 복귀전은 1946년 6월 19일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빌리 콘과의 재경기로, 그의 재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두 번째 경기는 첫 번째 경기가 끝난 후로 준비 중이었지만, 전쟁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 결과, 이 경기에 대한 대중의 수요는 계속 증가했다.
전쟁이 끝나 군인들이 미국으로 돌아왔고, 루이스와 콘의 인기가 높아졌으며, 경제가 성장하면서 입장료 수입이 거의 200만 달러가 되었다. 이는 거의 20년 만에 가장 큰 수치였다. 루이스의 대전료는 625,916달러였는데, 이는 그전까지 어떤 선수도 단 하룻밤에 벌어들이지 못한 금액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그의 엄청난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이 경기에서 받은 대전료에 대한 세금까지 내야 했다.
경기 자체는 졸전으로 끝났다. 콘은 이미 전성기가 지났고 루이스는 실력이 이전만 못하였다. 도전자는 경기 내내 도망다녔고, 챔피언이 그를 따라잡아 8라운드 KO시키기 전까지 펀치교환도 없었다. 이는 경기 전 그가 뱉은 유명한 발언 그대로였다.
"He can run, but he can't hide."
금전 문제로 인해 루이스는 3개월 후 링으로 돌아와 넘버원 컨텐더 태미 마우리엘로와 맞붙었다. 마우리엘로는 높은 순위에도 불구하고 주로 중간 수준의 컨텐더들을 상대로 자신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챔피언에게 쉬운 표적이 되었고, 마우리엘로의 고향인 뉴욕 외의 지역에서는 이 경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프로모터인 마이크 제이콥스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열고 티켓 가격을 낮추었고, 거의 40,000명의 팬들이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다. 이 경기의 첫 번째(그리고 유일한) 라운드는 루이스의 긴 커리어 중 가장 흥미진진한 경기 중 하나였다.
도전자는 초반에 의심치 않는 루이스를 강력한 오른손으로 잡았고, 챔피언은 로프로 돌진했다. 관중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마우리엘로가 영광에 대한 꿈으로 그를 밀어붙이며 돌진하자, 루이스는 클린치로 정신을 차릴 시간을 벌었다. 심판이 그들을 때어낸 후, 두 선수는 일련의 타격을 주고받았을 때에는 루이스가 우위를 점하는 듯했다. 그가 로프에 거의 서 있을 때로부터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루이스는 레프트 훅으로 마우리엘로를 쓰러뜨렸다. 도전자는 일어섰지만, 또 다른 레프트 훅은 그를 링 밖으로 거의 쓰러뜨렸고, 경기는 끝나게 되었다.
루이스는 자서전에서 이 경기를 그의 커리어에서 마지막으로 위대한 성과라고 언급했다.
마우리엘로와의 경기에서 거둔 KO승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1946년에 그의 빛나는 복싱 커리어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챔피언이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권투 선수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루이스의 다음 상대가 전 미들급 복서이며, 전적상 11패 12무를 기록한 전 스파링 파트너 저지 조 월컷이라는 소식을 들은 뉴욕주체육위원회는 처음에는 이 경기를 승인하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양보하여 두 선수 사이의 챔피언십 경기를 허용했다. 신체에 장기적인 신경 손상의 명백한 징후에 대한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월컷과 싸우기 위해 적절한 훈련을 받는 것보다 체중 감량을 걱정한 루이스는 자신 앞에 있는 결의에 찬 도전자에게 대비하지 못한 채 링에 올랐다.
반면 월컷은 20:1의 언더독으로 평가받던 것과 달리, 까다로운 풋워크와 베테랑의 기술로 챔피언 주위를 돌며 왼손 잽을 사용하여 루이스를 멀리했다. 가끔 그는 날카로운 오른손을 날렸고, 첫 번째는 1라운드에 루이스를 쓰러뜨렸다. 루이스는 일어나 월컷을 계속 쫓았지만, 느리고 서투르고 낙담한 듯했다. 4라운드에서 월컷은 또다시 다운을 뺏었다. 루이스는 싸우기 위해 일어섰지만, 자신을 방어하고, 앞으로 셔플하고, 게으르게 반격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리에 확신을 가진 월컷은 마지막 3라운드를 루이스에게서 사실상 도망치며 보냈고, 점수상 우위를 차지한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스가 스플릿 판정승을 거두면서 여전히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불리는 판결이 발표되었을 때, 월컷의 코너와 관중들은 모두 격노했다. 루이스에게 유리한 두 심판의 결정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의아하게 여겨진다.
루이스는 사적으로 월컷과의 경기 후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은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그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어했다. 항상 가치 있는 도전자에게 재경기를 주는 사람, 특히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재경기를 주는 사람인 루이스는 1948년 6월 25일에 월컷에게 재경기를 허락했다. 그는 한 기자에게 "다시 만날 때 논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그의 커리어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무거워서 213파운드의 체중으로 나왔고, 다시 느리고 서투른 것처럼 보였으며, 심지어 회피적인 도전자의 콤비네이션 때문에 3라운드에 캔버스에 쓰러졌지만 심판이 카운트를 시작하기도 전에 루이스는 일어나서 계속 싸웠다. 그 짧은 흥분의 순간을 제외하면, 루이스가 민첩한 도전자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못하는 동안 월컷은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경기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팬들에게 지루함을 안겨주었다. 10라운드 주심 프랭크 풀럼이 루이스와 월컷에게 "get the lead out of your ass"라고 명령했고, 마침내 두 선수는 서로 맞불을 놓기 시작했으며, 루이스가 우위를 점하는 듯했다. 11라운드 또다시 액션이 뜸해졌을 때 주심은 다시 선수들에게 펀치를 던지라고 말했다. 루이스는 오른손으로 월컷을 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괴적인 5연타로 그를 쓰러뜨리자, 풀럼은 그를 카운트아웃시켰다.
1949년 3월 1일, 오랜 챔피언은 은퇴를 선언하며, 남은 여생을 휴식과 골프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의 12년 동안 타이틀을 보유했고(현재까지도 역대 최고 기록) 권투 역사상 어떤 체급의 챔피언보다 많은 타이틀 방어(25회)를 성공했다. 이때 그의 프로 전적은 61승 1패 53KO.
루이스는 은퇴를 발표하기 직전에 국제복싱클럽(International Boxing Club)의 설립에 관여했는데, 이 클럽은 마피아 조직의 통제 하에 빠르게 들어온 프로모션 회사였다.
역대 최고의 선수로서의 그의 지위는 확실했던 반면, 불행히도 그의 사생활과 재정은 같은 안정을 자랑할 수 없었다. 널리 알려진 이혼의 와중에, 그의 난잡한 생활로 인해 여러 소송을 당하고, 정부와 채권자에게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여러 사업 벤처의 실패를 목격하면서, 루이스는 재빨리 복귀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루이스의 은퇴 직후 공석이 된 전미권투협회의 헤비급 타이틀을 걸고 에자드 찰스와 저지 조 월컷의 경기가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는데, 찰스와 월컷은 타이틀을 놓고 겨룰 수 있는 가장 적격한 헤비급 컨텐더들로 루이스가 직접 지목한 선수들이었다.
1949년 6월 22일 찰스가 월컷을 상대로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루이스의 후임 챔피언이 되었다. 찰스는 능숙하고, 경험이 풍부하고, 위험한 선수였지만, 루이스를 그의 세대의 아이콘으로 만든 눈길을 끄는 자질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
3.3.3. 1950년대
IBC와 대중은 찰스와 루이스의 타이틀전을 요구했는데, 찰스는 대중으로부터 마땅한 존경을 받고 싶어했고, 루이스는 돈을 원했다. 이 경기는 1950년 8월에 발표되었다.IBC는 1950년 9월 27일에 경기를 예정했고, 선수들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6주뿐이었다. 루이스는 은퇴를 발표한 이후로 4라운드 시범 경기에서 여러 번 복싱을 하긴 했지만, 2년 이상 프로로 싸우지 않았다. 그는 튜닝업을 소홀히 하고 찰스와의 타이틀전에 바로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1의 탑독으로 지명되었다.
이 경기는 CBS 텔레비전 네트워크에서 생중계되었고, 양키 스타디움에서 생중계가 저조했고 루이스는 205,370달러의 처참한 대전료를 받았다.
경기 자체는 전 챔피언에게도 똑같이 굴욕적이었다. 찰스는 젊음과 속도라는 이점을 이용해 도전자를 균형 잡히지 못하게 했다. 루이스는 초반에 결의를 유지했고 몇 가지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지만, 찰스가 경기에서 앞서나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왼손 훅으로 챔피언을 다치게 하여 10라운드를 승리했지만, 찰스는 살아남아 14라운드에 오른손으로 루이스를 비틀거리게 하여 호의를 보답했다. 마지막 라운드를 여는 종이 울리자, 루이스는 세컨에 의해 억지로 의자에서 들어올려져 링 중앙으로 밀려났다. 그는 마지막 라운드 내내 무력했고, 찰스는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14년 만에 조 루이스에게 패배를 안긴 인물이 되었다.
지인들의 바람과 의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계속 싸웠다. 그는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8연승을 거두며 메이저 대회의 드로이자 랭크된 경쟁자라는 지위를 유지했다. 여기에는 경쟁자 리 새볼드를 6라운드 KO시키고 미래에 명예의 전당 입성자인 지미 비빈스를 10라운드에서 판정으로 물리친 것도 포함된다.
1951년 10월 26일, 매사추세츠주 브록턴 출신의 무패 신인 록키 마르시아노와 맞붙었다. 마르시아노의 펀치파워와 강인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루이스가 이번에도 근소하게 탑독으로 지명되었다.
이 경기는 치열한 난타전으로 판명났는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펀처 두 명이 밤 내내 관중들에게 여러 번의 스릴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루이스의 체력은 싸움이 진행되면서 약해져만 갔고, 마르시아노의 젊음과 결의가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8라운드 루이스의 턱에 가해진 날카로운 레프트 훅이 그를 쓰러뜨렸다. 이 현명하고 노련한 선수는 9번째 카운트까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서 있다가 용감하게 일어나 더 많은 구타를 당했다. 마르시아노는 사방에서 헤이메이커를 쏟아부었고, 이내 밧줄에 걸린 전 챔피언을 불구로 만든 레프트 훅을 두 방 더 날렸다.
멍하고 지친 루이스는 마르시아노의 시그니처 펀치인 강력한 오른손을 턱에 정확히 맞고 로프 사이로 넘어가며 의식을 잃은 채로 누워 있었다.
루이스는 나중에 기자들에게 "오른손이 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완전히 은퇴를 하였다.
3.4. 은퇴 이후
링에서 은퇴한 후 루이스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특히 권투계에서 눈에 띄는 대중 인물로 남았다. 그는 복싱 프로모터, 해설자, 코너맨, 심판, 고문으로 공식 직책을 맡았지만, 권투 선수이자 군인으로 지내는 동안 쌓은 막대한 빚을 갚을 만큼 돈을 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주로 가족과 친구들의 자선에 의지해 살았다.1960년대에 권투 치매, 고혈압, 다양한 마약 중독을 포함한 여러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그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고, 다양한 약물 관련 문제로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중독을 극복한 후,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 팰리스에서 인사 담당자로 일했다.
그러나 건강이 계속 나빠졌고, 1981년 4월 12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파이팅 스타일
잭 블랙번은 루이스를 지도할 때, 인내심과 밸런스를 유지하고 샷을 낭비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특히나 양손의 펀치파워 모두 상상을 초월하던 루이스였기에, 라이트 크로스–레프트 훅 콤비네이션은 그의 장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레프트 훅을 셋업하기 위해 뒷손 어퍼컷으로 상대의 머리를 들어올리기도 하였는데, 이 펀치마저도 파워가 무지막지했다.또한 블랙번의 지도의 영향으로 루이스는 아마추어 시절 빠른 풋워크를 통해 인앤 아웃을 구사하던 것과 달리, 프로로 전향하고나선 중거리에서 상대에게 압박을 가하면서 라이트 크로스를 날리곤 했다. 이때 라이트 크로스를 날릴 수 있는 중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의 잽을 패링했고, 스티프 잽을 날리며 상대가 뒤로 물러나게 하거나 헤드 무브먼트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루이스가 그의 복싱스킬을 200%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천재적인 링IQ였다고 말할 수 있다.
1937년 제임스 J. 브래덕과의 경기에서 브래덕이 앞손을 뻗어 거리를 견제하자, 루이스가 레프트 훅으로 브래덕의 앞손을 치워버리고 라이트 크로스를 날려 브래덕을 그대로 침몰시킨 것 또한 예시로 꼽을 수 있다. 이외에도 상대의 라이트를 더킹으로 피하거나, 잽을 날린 후에 상대가 카운터를 치지 못하도록 풀 백을 하는 등 디펜스도 좋았다.
5. 평가
흑인들이 사회적 평등이나 상향적 이동의 대부분 기회에서 배제되었던 시대에 루이스는 스포츠에서 가장 값진 상을 획득하여 그 전의 다른 어떤 운동선수보다도 문과 마음을 열었다.링 안에서의 압도적인 힘과 기술로 챔피언 자리에 올랐지만, 스포츠맨십과 부드러운 말투의 위엄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우상이 되었다.
루이스는 사생활에서는 롤모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대중에게는 그보다 더 큰 가치의 상징이었다. 모든 인종, 성별, 신앙을 가진 미국인들은 그에게서 자유, 경쟁, 애국심의 이상을 보았고, 그로 인해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를 국가적 자부심의 완벽한 상징으로 만들었다.
6. 여담
- 복싱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11년 8개월 7일).
- 1936년, 1938년, 1939년, 1941년에 링 매거진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 1990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초대 회원 중 한 명이다.
- 1938년 영화 'Spirit of Youth'에 출연했고, 1968년 텔레비전 시리즈 'It Takes A Thief'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
- 2차세계대전이 터지자 흑인들의 참전을 독려하기위해 미 육군으로 자원입대했으나 그를 따라 입대했던 흑인들은 인종차별을 받았고 정작 루이스는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 1993년 미국 우편국은 조 루이스 우표를 발행했는데, 이는 권투 선수를 기리는 최초의 미국 우표였다.
- 2003년 링 매거진은 루이스를 역대 최고의 펀처 1위로 선정했다.
- 2005년 IBRO는 루이스를 역대 최고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선정했다.
- 어머니가 흑인, 체로키의 혼혈이였기 때문에 체로키 혈통도 가지고 있었다.
- 3번의 이혼경력이 있다.
- 한국 시인 배인철이 1947년 그에게 바치는 헌시 《쪼 루이스에게》를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