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09 16:33:56

노엘 갤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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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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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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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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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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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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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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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400AE><colcolor=#fff> 노엘 갤러거
Noel Gallag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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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노엘 토머스 데이비드 갤러거
Noel Thomas David Gallagher[1]
출생 1967년 5월 29일 ([age(1967-05-29)]세)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 주 맨체스터 시 롱사이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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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작곡가, 작사가
소속 오아시스 (1992 ~ 2009, 2024 ~ )
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즈 (2011 ~ )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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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400AE><colcolor=#fff> 부모님 어머니 페기 갤러거
아버지 토머스 갤러거[3]
형제 형 폴 갤러거, 남동생 리암 갤러거
배우자 멕 매튜스 (1997 ~ 2001, 이혼)
사라 맥도널드 (2011 ~ 2023, 이혼)
자녀 아나이스 갤러거 (2000 ~ )[4]
아들 도노반 로리 맥도날드 갤러거 (2007 ~ )[A]
아들 소니 패트릭 맥도날드 갤러거 (2010 ~ )[A]
신체 172~3cm[7], 62kg, 벽안, 왼손잡이
재산 약 $70,000,000[8]
종교 무종교 (무신론)
사용 악기 기타, 보컬
장르 , , 얼터너티브 록, 사이키델릭 록, 네오 사이키델릭
레이블 에픽 레코드, 크리에이션 레코드 }}}}}}}}}

1. 개요2. 생애3. 음악적 특징
3.1. 기타리스트로서3.2. 작곡가로서
3.2.1. 표절과 오마주의 경계
3.3. 보컬리스트로서
4. 사용장비
4.1. 일렉트릭 기타
4.1.1. 에피폰 레스폴 스탠다드4.1.2. 깁슨 레스폴 스탠다드4.1.3. 1972년산 깁슨 레스폴 커스텀4.1.4. 1982 깁슨 플라잉 V4.1.5. 에피폰 리비에라4.1.6. 1965 펜더 스트라토캐스터4.1.7. 1993년산 에피폰 쉐라톤4.1.8. 에피폰 쉐라톤 "유니언 잭"4.1.9. 1960년산 깁슨 ES-355
4.2. 어쿠스틱 기타
4.2.1. 에피폰 EJ-2004.2.2. 깁슨 J-150
5. 음반
5.1. 콜라보레이션
6. 여담7. 둘러보기

1. 개요

파일:noel-gallagher-1994-interview-2@1400x1050.jpg
▲ 1996년, 메인 로드
질문: 오아시스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노엘: 나!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영국의 록 밴드 오아시스의 리더, 메인 송라이터이자 서브보컬, 기타리스트이다.

1990년대 영국의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신의 동생, 데이먼 알반 등과 함께 90년대 영국 대중음악과 문화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09년 해체될 때까지 록 밴드 오아시스의 메인 작곡가, 리드 기타리스트, 공동 리드 보컬로 활동했다. 오아시스를 탈퇴한 후 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즈를 결성했다. 그는 영국 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8개의 영국 1위 싱글을 작곡하고 또 다른 싱글의 공동 작곡가이자 10개의 영국 1위 스튜디오 앨범의 단독 또는 주요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갤러거는 열두 살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21살에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로드니(로드 매니저)이자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동생 리암이 나중에 오아시스가 된 더 레인이라는 밴드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리암은 그에게 매니저로 그룹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 제안을 거절했던 갤러거는 밴드의 창의적 통제권을 갖고 단독 작곡가 겸 리드 기타리스트가 되는 조건으로 밴드에 합류하기로 동의했다.

밴드의 데뷔 앨범인 Definitely Maybe(1994)는 비평적,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째 앨범인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1995)는 여러 나라에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고, 세 번째 정규 앨범인 Be Here Now(1997)는 영국 차트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앨범이 되었다. 그러나 브릿팝의 인기는 결국 하락세로 돌아섰고 오아시스는 이를 되살리는 데 실패했지만, 마지막 두 앨범인 Don't Believe the Truth(2005)와 Dig Out Your Soul(2008)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최고의 앨범으로 찬사를 받았다. 2009년 8월, 동생과의 불화로 인해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 탈퇴를 선언했다.

오아시스 탈퇴 후,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라는 독자적인 백밴드를 결성하고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나, 오아시스가 해체한 후에도 여전히 팬들은 그를 "The Chief(대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2024년 오아시스가 해체 15년만에 재결합하면서 다시 밴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활동 당시 많은 영국 음악가들이 그랬듯 노동 계급 출신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노동 계급 시절을 다른 노동 계급 출신 뮤지션들보다도 더 많이 보냈다.[9]

브릿팝의 전성기, 다시말해 오아시스의 전성기 때 노엘은 동생 리암과 여러 차례 분쟁에 휘말리면서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거친 라이프스타일로 타블로이드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등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그렇지만 노엘은 브릿팝 운동의 선구자이자 선봉장으로 여겨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곡을 칭찬했으며, 그의 우상 비틀즈의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은 그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라고 불렀다.

2. 생애

2.1. 데뷔 전

파일:갤러거가족.jpg 파일:갤러거지.jpg
갤러거 가족[10]노엘 갤러거, 폴 갤러거, 리암 갤러거, 어머니인 페기 갤러거.] 동생 리암 갤러거와 함께
맨체스터 롱사이트에서 아일랜드 계통인 부모 페기 갤러거와 토마스 갤러거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노동 계급이었으며, 집은 부유한 편도 아니었다. 갤러거 형제는 아버지 토마스 갤러거에 의해 자주 폭행을 당했다.[11] 기절할 때까지 맞다가 다시 폭력으로 눈을 뜨는 게 일상이었다고. 이 때문에 형 폴과 함께 말더듬 증세를 겪어 4년 간 언어장애 치료를 받기도 했다. 결국 1982년 페기 갤러거는 세 아들들을 데리고 도망가게 된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지 않고, 언급이 되어도 또래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침에는 항상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일어났다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악감정이 전혀 없다고 말할 정도다.[12]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갤러거 삼형제는 엄청난 문제아로 자라났는데, 특히 노엘은 자주 무단 결석을 했으며 경찰과의 트러블도 잦았다. 구체적인 예로는 절도 전과 등이 있다. 또한 초등학생 시절엔 신장 감염을 오래 앓았다고 하며, 그 이유로 다른 애들은 촌스러운 밤색 반바지 입고 등교할 때 자기만 혼자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닥터마틴을 신고 다녀서 다들 자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어렸을 때 말더듬증과 실독증을 앓고 있었으며(난독증과 조금 다르다) 이는 오아시스 결성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노엘이 말하길 리암에게 가사를 줘서 부르게 했는데 'Don't Back In Anger, Not Today' 라고 부르길래 가사 틀렸다고 하니깐 '여기 그렇게 써 있거든?' 했다고 한다. 현재는 완전히 치료가 되었다.

록 음악에는 5살 때부터 관심을 가졌다. “Far out” 잡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노엘이 5살 때 어머니가 생일 선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록밴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II를 선물해 주셨으며, 이 앨범을 들으면서 록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노엘은 비틀즈,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 등 화려한 록밴드들의 엄청난 팬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5살 무렵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노엘은 여러 방식으로 이 때 일화를 이야기하는데 그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 한다. 선생에게 밀가루를 집어던지고 퇴학당했다고도 하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학교의 졸업식날이었다고도 이야기 한다. 잦은 무단 결석과 무단 조퇴 역시 문제였는데 어머니인 페기 갤러거는 학교의 급식실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더라도 점심 시간이 되면 급식을 먹으러 다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계속된 결석이 어머니인 페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자 그녀는 학교 선생에게 "하지만 점심 때 맨날 봤는데요?" 라고 반문하였으나 이윽고 노엘이 자신의 비행을 이실직고 했다고 한다.

또한 90년대 잡지 인터뷰에선 노엘은 훗날 '언제 음악으로 먹고 살거란 걸 알게 됐느냐'는 질문에 '내가 졸업장도 없이 학교를 나왔을 때 엄마가 어느날 밤에 앉아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냐고 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거, 내가 다른 건 관심도 없지만 처음으로 몰두한 게 기타였지' 라고 답한다. 다만 노엘에 의하면 페기 갤러거는 노엘에게 '빨리 제대로 된 일을 찾아라' 라거나 '적당히 결혼해서 정착하면 좋으련만' 등의 말은 하지 않았고 그저 '그게 니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니가 실업수당 받으면서 살아도 괜찮다. 하지만 사람은 돼야지. 내가 실망 할 일은 하지 마라' 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16살, 17살이 되자 엄마가 아침만 되면 자기를 걷어차면서 빨리 취업센터에 가라고도 했다고. 수조도 만들어 봤으며 제과점, 간판장이, 세탁소, 노가다 등 안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했다고 한다. 참고로 갤러거 형제들의 어머니는 당시 오아시스가 엄청나게 성공했음에도 그 때 그 시절 맨체스터 공영 주택에서 그대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리암이 큰 성을 사주려고 했으나 거절했다고. 또한 정원 손질을 잘해서 품평회를 나가도 된다던가 하루종일 식물이랑 대화를 한다고 한다. 동네를 돌아다니면 자식들의 유명세에 힘입어 페기 역시 대우받는다고 서술한다.

1980년대에는 언더-5즈(Under-5s), 영 거브너(Young Guvnor)와 같은 난봉에 가까운 축구 팬클럽 활동을 하기도 하고, 마약에도 빠져 살았다. '왜 학교에 가는 대신 마리화나나 피면서 들판에 널부러져 있으면 안되나' 라는 생각까지도 했다고. 학교에 있다가 몰래 빠져나온 무리들과 함께 친구들 집에 모여서 마리화나 피면서 레코드를 듣거나 슈퍼마켓, 자전거 등을 털었다고 한다. 형제끼리도 무지막지하게 싸웠는데, 특히 연년생인 폴과 노엘, 같은 방을 썼던 리암과 노엘이 많이 싸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형은 독방을 쓰고 자기는 동생과 같은 방을 쓰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걸로 보인다.

기타를 처음 치기 시작한 건 13살~14살 무렵이라고 이야기 한다. 기타를 얻게 된 경위는 본인이 그 때 그 때 다르게 이야기한다. 컨츄리DJ 노릇을 하던 자신의 아버지답게 집에 그냥 아무도 거들떠도 안보는 낡은 기타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서 한동안 집구석에 방치되어있을 때 아무도 건들지 않고 널부러져 있던 기타를 본인이 가지고 놀면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니면 아버지가 어머니 선물 사러 나갔다가 그냥 기타가 보여서(…) 선물 대신 사온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또한 다른 일화에선 당시 유명한 악기점에서 팔던 깁슨 허밍버드의 짝퉁 검은색 어쿠스틱 기타를 샀을 때가 처음 기타를 치기 시작한 걸로 이야기 한다. 본인 말로는 진퉁 살 돈은 없었다고 한다. 숙제도 내팽겨치고 기타 연습만 했는데, 애니멀스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과 비틀즈의 'Ticket To Ride'만 주야장천 쳤다고 하며 엄마가 매우 질려했다고도 한다. 또다른 일화에선 동네의 녹음기 등의 음악 장비를 가지고 있는 자신보다 몇살 많은 남자와 함께 기타를 연주하며 자신의 곡을 녹음했다고도 한다. 노엘이 가장 존경했던 기타리스트는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와 스미스조니 마였다고. 스톤 로지스존 스콰이어 역시 매우 존경했는데 오아시스 초창기엔 그의 연주를 포함한 모든 걸 따라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보컬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보컬이었던 스티븐 오트가 탈퇴했을 때 노엘은 도전했으나 탈락했다. 노엘이 그들의 오디션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노엘이 스톤 로지스 공연을 갔다가 만난 남자와 친분이 생겼는데 그가 맨체스터 밴드인 인스파이럴 카펫츠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노엘은 그들의 공연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결국 오디션 기회까지 얻었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노엘에게 로디 자리를 주었고 노엘이 승낙하면서 음악 산업에 발을 들인다. 노엘이 말하길 "너 노래 좀 해볼래? 넌 우리 노래를 다 아니깐" 이래서 노래를 했으나 "망할 한 음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지만 그들이 내게 로디라도 하라고 했고 난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했지" 라고 했다. 그는 밴드 안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밴드와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또한 이 시기에 훗날 오아시스의 엔지니어가 될 마크 코일을 만나게 된다.

이후 1991년, 로디 일을 하던 중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리암이 밴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맨체스터에 돌아왔을 때 그들을 보러갔으며 그 자리에서 밴드 매니저를 제안받는다. 아마추어인 그들과 다르게 프로 업계에서 일해본 적이 있기 때문. 하지만 노엘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고 결국 기타리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노엘이 말하길 '그들 이외에 같이 밴드하고 싶은 사람들이 없었으며 운명이었다'고 한다. 노엘 본인도 작곡을 해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지하게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그저 혼자 있을 때 부를려고 작곡했던 것이라고 한다. 리암이 있었기 때문에 밴드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처음에는 그들이 만든 곡들을 같이 연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노엘이 자신의 노래를 선보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밴드를 장악해 나갔다고 한다.

데뷔 초창기 시절엔 이 일화가 '자신이 밴드의 모든 작곡권과 지휘권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가입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후 그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노엘과 리암의 사이가 나빠진 이후 리암은 오히려 노엘 쪽에서 제발 밴드에 넣어달라고 빌었다는 농담을 하기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사실이 아니다.[13] 노엘과 리암의 형인 폴 갤러거의 경우 당시 노엘의 연인이던 루이스의 집이 밴드가 연습하던 장소와 매우 가까웠던 것을 노엘이 밴드 합류를 승락한 결정적인 이유로 언급했다. 둘의 관계에 따라 노엘의 오아시스 합류 과정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확실한 것은 노엘이 인스파이럴 카페츠에 있을 때부터 리암은 노엘을 밴드에 넣고 싶었고 노엘이 로디에서 해고당한 뒤 오아시스에 합류했으며, 노엘이 오아시스의 모든 곡을 작곡하며 밴드를 운영하게 됐다는 것이다.

오아시스에 가입한 후 1993년의 어느 날, 여러 클럽을 전전하던 그들은 시스터 러버스라는 여성 밴드와 함께 스코틀랜드 클럽으로 원정 공연을 갔다가, 당초 그곳에 방문할 거라 예상되었던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앨런 맥기를 사로잡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정식 계약으로 이어지며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노엘의 발언에 따르면, 이후 U2의 레코드사였던 마더 레코드에서 크리에이션보다 더 나은 계약 조건과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당시 앨런 맥기가 자신들을 얼마나 믿고 있으며, 자신들을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상당한 푼돈에 그냥 크리에이션과 그대로 계약했다고 한다.

2.2.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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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오아시스에서 데뷔를 한다. 같은 오아시스의 멤버이자 동생인 리암과의 충돌 끝에 결국 2009년 8월 28일, 노엘은 밴드의 공식 웹사이트에 오아시스를 탈퇴한다는 글을 올린다.
약간의 슬픔과 굉장한 안도감과 함께 여러분께 내가 오늘 밤 오아시스를 그만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고싶은대로 써갈기겠지만, 난 간단하게 '더 이상 리암과 함께 일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싶습니다. 파리, 콘스탄츠와 밀라노에 있을 예정이었던 공연의 표를 구입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를 표합니다.
오아시스 해체 이후 노엘은 겜과는 자선 공연도 함께 하고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그를 제외한 오아시스 멤버들과는 별다른 교우 관계가 없는 듯 했다. 그렇지만 비디아이의 해체 이후에는 페스티벌 장에서 전 멤버들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리암과도 크리스마스에 문자를 주고 받는 등 시간이 잘 해결해주고 있었으며, 해체 15년 후인 2024년 8월 27일 재결합했다.

2.3.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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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악적 특징

3.1. 기타리스트로서

노엘 갤러거 "난 나 자신을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난 앉아서 여러 가지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진 않아. 난 오로지 노래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지. 물론 나도 나만의 기타 스타일이 있는데, 정확하게 리듬을 치고 정확히 음을 조절하는 그런 거야. 난 내가 좋아하는 걸 연주하고, 그게 내가 하는 일이지. 하지만 난 기타 테크닉이나 여러 가지에 대해서 연연하진 않아. 난 작곡가라구."

기자 "하지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기타리스트로 보지 않는다고 말해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기타 히어로다."
- 2011년 MusicRadar와의 인터뷰 중
오아시스가 90년대에 난립한 그 무수히 많은 기타 밴드들 중 가장 성공한 극소수의 거대 락밴드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엘 갤러거는 단 한번도 뛰어난 기타리스트로서의 영예는 누려본 적이 없다. 응당 그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오아시스는 연주적인 측면에선 별다른 화두에 오르지 못했다. 연주 기술에 있어서 날고 기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음악계에서 오아시스의 음악은 기교 중심의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튠은 오로지 노래에 초점이 맞춰진 것들이었고, 악기 중심의 곡들이 대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노엘은 Take It Away 재단과의 홍보 인터뷰에서도 "우리 음악에 대체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코드들은 들어가 있지 않아. 항상 쉬운 오픈 코드들 위주였지. 그게 우리 음악이 사람들에게 공감 받고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였던 것 같아."라는 발언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솔직함과 허세 부리지 않는 무덤덤함이 오히려 오아시스와 노엘의 연주를 만만하게 보게 만들었던 여지가 있었으나, 스튜디오와 작업실 등지에서 노엘의 악기를 다루는 능력을 본 여러 뮤지션들과 관계자들에 의하면 노엘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저평가 당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비틀즈링고 스타의 아들이자, 전설적인 밴드인 더 후의 객원 드러머였고 오아시스의 6집과 7집에서 투어와 녹음 현장을 함께 했던 드러머인 잭 스타키오아시스를 떠나면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오아시스에서 연주하는 건 더 후에서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어렵다. 더 후에서는 쳐야할 드럼 솔로가 더 많다는 점과는 상관이 없다. '이봐, 오아시스 공연 정도는 난 한 손을 등 뒤로 묶고도 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병신같은 드러머들도 있지. 뭐,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x나 구릴 거라고 친구! 내 드러밍이 조금이라도 느리거나 빠르면 밴드의 모든 멤버가 그걸 알아차렸어. 그들은 내가 만나본 가장 똑똑한 뮤지션들이야.". 스타키가 원래 연주하던 밴드가 바로 그 전설적인 더 후였음을 감안한다면, 떠나가는 전 동료들을 위한 따뜻한 말이었다고 해도 오아시스를 충분히 높게 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The Jam의 기타리스트이자 프론트맨인 폴 웰러는 그의 커리어 내내 수십년 동안 노엘이 과소평가 당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서로가 돈독한 사이임을 감안하더라도, 웰러의 노엘에 대한 시각 자체는 충분히 핵심을 찌르는 의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표현해왔다.
"난 걔가 작업실에서 해온 걸 항상 봐왔다. 뮤지션적으로 훌륭한 베이시스트고, 훌륭한 드러머다. 모든 걸 다 잘 한단 말이다. 걔는 과소평가 받고 있다. 사람들은 걔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작곡 능력이 뛰어나다. 멜로디가 정말 천재적이다. 요즘도 계속 그의 노래 중 하나가 머리 속에 맴돈다··· 멜로디만 잘 만든다면 그걸 어떤 코드로 칠 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엘 본인은 자신이 기타를 잘 친다는 자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엘은 이미 데뷔 초부터 자신의 기타 연주에 대한 항의와 비난을 많이 받아왔는데, 데뷔 앨범의 미국 투어에선 한 관객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관객 "헤이. 난 당신 기타 치는 게 좋아. 맘에 들어."
노엘 "그게 무슨 소리지?"
관객 "항상 모든 곡의 리프가 다 똑같잖아. 뭔가 내면의 잠재의식 같은 걸 표현하는 거 아니야?"
노엘 "그렇지 않아! 자세히 들어보면 분명히 조금씩 뭔가 다른..."
관객 "아닌 거 같은데(...)
노엘 "(윽, 개새x. 들켜버렸군)"
90년대에 오아시스가 데뷔했을 당시, 오아시스의 성공 가도를 옆에서 지켜 보던 몇몇 밴드들로부터 '노엘 갤러거는 초보기타연주법 책부터 사서 기타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면서 노엘의 기타 연주를 까내리곤 했지만 노엘은 개의치 않아 했다. 노엘은 언제나 본인 스스로를 작곡가라고 지칭하였으며, 기타히어로가 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했기 때문이다. 노엘은 언제나 자신을 폴 매카트니피터 그린 정도의 기타리스트로 여겼으며, 자신이 만든 곡과 리프임에도 작업실과 라이브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기타리스트에게 그것을 맡기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간단명료하게 "난 그렇게 못 치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 그 예. Champagne Supernova에 나오는 후렴 기타 솔로는 노엘이 아닌 폴 웰러가 연주한 것인데, 웰러가 자신의 기타 솔로 음량을 왜 줄였냐는 언질에 노엘은 자신보다 웰러가 훨씬 잘 치는데 자신이 왜 웰러의 기타 음량을 줄이겠느냐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노엘이 존경하는 조니 마 또한 오아시스와 노엘의 솔로 앨범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기타 솔로를 연주해주고 있으며, 심지어 노엘의 크루 중 훌륭한 기타 테크니션 스태프가 있는지 그에게도 앨범의 기타 솔로를 연주하게끔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노엘은 기타리스트로서의 에고가 그렇게 강하지 않으며 그림을 항상 크게 보고, 자신이 연주하는 것보다 남이 연주하는 것이 더 뛰어난 상황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노래의 완성도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개의치 않아 하는 것이다. 심지어 Be Here Now 당시 프로 뮤지션이 아닌 배우 조니 뎁이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하게끔 하였다.

노엘은 언제나 자신들의 영웅들과 그 사고방식의 궤를 같이 하였는데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 더 스미스조니 마, U2디 에지, 티렉스 등에서 그가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십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모두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타 솔로 탑 10 리스트 같은 부류에 나올 법한 날고 기는 기타맨들이 아니라, 언제나 작곡과 노래를 만들어 내는 송라이터적인 관점의 뮤지션들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은 기타연주의 이론책이나 정론책을 독파하고 사전에 실릴 수 있는 모범적인 연주를 하는 연주가들이 아닌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자신만의 연주법과 접근법을 가진 연주에 있어서 개성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레논은 자신을 기타리스트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당신이 어떤 종류의 기타리스트를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난 괜찮은 기타리스트다. 난 테크닉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기타를 울부짖고 살아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 테크닉은 정말 별로다. 현란하게 연주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난 기타가 말을 하게 할 수 있다." 라고 언급한다.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 역시, 단순한 쓰리 코드 펑크 연주를 하기 때문에 뛰어난 연주자 리스트 안에서 존재감이 없지만, 그는 언제나 앨범 단 한 장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였으며, 그의 스트로크는 언제나 칼박자였다고 한다. 리듬 기타리스트들이 상대적으로 솔로와 장식 악절을 연주하는 리드 기타리스트들보다 저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스티브 존스의 업적은 의미있는 것이며, 노엘 갤러거 역시 스티브 존스의 그러함을 찬송하는 것이다. 리듬 기타리스트가 갖춰야 할 덕목인 '정확한 박자의 스트러밍과 에너지로 밴드의 곡을 나아가게 하는 재능'은 음악의 세계에서 언제나 상대적인 저평가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특유의 Funky한 리듬 기타로 추앙받는 Chic나일 로저스나 일본 굴지의 전설이자 컷팅 연주의 달인인 야마시타 타츠로 또한 엄밀히 말해 리듬 기타리스트의 범주에 들어감에도 말이다. 또한 조니 마디 에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기타 연주라는 측면에서의 접근론이 매우 개성 있는 인물들 중 하나이며, 티렉스마크 볼란이 연주하는 그 특유의 '광선총 사운드'는 그 누가 어떤 장비를 써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노엘 갤러거는 언제나 자신이 개성 있는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해 왔으며, 자기 자신을 기타리스트로서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크게 개의치도 않아 했으며, 그저 자신만의 방법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음악가로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 잡지인 MusicRader는 그의 연주를 '노엘 갤러거의 연주에는 아주 아름답고 간단해보이는 매력이 있다. 믿을 수 없이 캐쥬얼하며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그가 작곡한 Wonderwall이 얼마나 많은 초보 기타리스트들에게서 연주 되고 있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엘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전 세계 투어를 돌면서 어느 나라의 길가나 바를 가더라도 자신이 쓴 음악을 어린 아이들이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AC/DC레드 제플린 등으로 이미지 새겨진 대표적인 록의 퍼포먼스들, 혹은 메탈이나 재즈 장르에서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인 연주력과 현학적인 이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기타 연주와 개성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기타리스트일 것이다.

3.2. 작곡가로서

"노엘 갤러거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다."
- 조지 마틴 경(卿)
예나 지금이나 작곡 능력은 발군이라는 평을 받으며, 이를 증명하듯이 오아시스의 거의 모든 히트곡은 그가 작곡했다.[14] 그의 창작력이 절정을 치달았던 90년대 당시에는 정규 앨범뿐만이 아니라 싱글의 B-side 곡들까지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노엘은 "우리 B-side 곡들은 웬만한 밴드들의 싱글보다 훌륭하다. 그들의 가장 훌륭한 곡들을 전부 다 합해도 우리 B-side 수준도 안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밴드의 프로듀서였던 오웬 모리스는 그 당시 대중들은 오아시스의 B-side곡들도 듣기 위해서 싱글을 구매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애초에 미국 시장을 겨냥해 발매될 예정이었던 B-Side 모음집인 The Masterplan이 전세계에 발매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컴필레이션 앨범인 이 The Masterplan을 정규 앨범인 Be Here Now보다 높게 평가하는 오아시스의 팬들도 많다. 크리에이션 레코드 사장 앨런 맥기는 "이 노래를 들어봐. 이게 B-side라고. 노엘 갤러거는 천재임에 틀림없어."라며 감동했다고 한다.[15] 2000년대 이후론 노엘이 더 이상 많은 노래를 쓰지 못함과 동시에, 시장의 추세에 맞추어 싱글의 B-side 곡 수를 줄이게 되면서 브릿팝 시절처럼 자투리 곡에 크게 힘을 쏟지는 않았다. 또한 그의 지독한 자가 복제 성향은 2000년대 들어서 많은 질타를 받았으며 오아시스를 트렌드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성향 때문에 오아시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다시금 스타디움 밴드로서 그 공적을 인정받아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기까지 많은 부침과 방황을 겪기도 한다.
Q) 지난 내한 공연에서 'Don't Look Back In Anger'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을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한참동안 바라보더라.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노래는 더 이상 오아시스의 것도, 당신의 것도 아닌, 세상의 것이 된 노래라고. '노엘 갤러거'라는 이름과 당신의 수많은 노래들, 무엇이 더 오래 남을까?
A) Don't Look Back In Anger라는 노래를 쓴 그날 밤의 그 순간은 변치 않고 지금까지 25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반대로 나는 생에서 그 순간을 단 한 번 겪었고, 그 이후로 계속 나이 들고 있다. 음악은 영원하다. Live Forever 역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영원히 기억되는 것'에 대해 쓴 노래다. 그게 바로 음악이다.
-2015년 9월호, 아레나옴므플러스와의 내한 인터뷰에서#
그의 말에 따르면, 맨체스터에서 노동자로 살던 시절엔 항상 돈이 없었지만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고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너바나의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 같은 부정적인 노래를 쓰기보다는 긍정적인 곡을 쓰고 싶다고 했다.[16] 그래서 나오게 된 곡이 오아시스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Live Forever였다.

'Supersonic', 'Shakermaker', 'Live Forever'를 연이어 발매하며 주가를 높인 그들은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쐐기를 밖으며 단숨에 당대 최고의 밴드로 올라선다. 이무렵, 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리암 갤러거는 난봉꾼이며, 오아시스는 30년만 지나면 잊힐 허접한 밴드라고 독설을 퍼부었지만[17], 노엘은 재능 있고 훌륭한 실력을 가진 친구라고 칭찬했다. 이후 발매된 세번째 앨범 Be Here Now는 여전히 큰 세일즈와는 달리 초기의 열광과는 별개로 낮은 평가를 받으며 상승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후 그는 밴드에 찾아온 여러 대격변, 시대의 변화, 한 번의 이혼 그리고 마약 후유증 등의 영향으로 작곡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밴드는 점점 정상에서 내려오는 듯 했다. 노엘은 마약을 끊었고, 브릿팝의 광풍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2000년대에 들어서자 그와 밴드는 전체적으로 차분해지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밴드 멤버가 변경되고 실력이 향상되면서 한층 어른스러워짐에 따라, 노엘은 다양한 방식의 작곡 성향을 드러냈고 음악적 변화에도 꾸준히 싱글 차트 1위와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그 성과를 인정 받았다.
"지금이라도 Little By Little이나, Champagne Supernova 같은 곡들은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앞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난 이제 그런 싱얼롱 조의 곡들은 질렸다고. Lyla나 Don't look back in anger 같은 곡을 도대체 몇백곡이나 써줘야 직성이 풀리나? 나도 이쯤에서 기분 전환이 필요했어. 이번에 그런 전환점에 서 있던 나를 앞으로 나아 갈 수 있게 해준 것이 데이브[18]야. 내가 새로운 타입의 곡을 써서 들려줄 때마다 '이거 좋군!, 좀 더 이런 자신의 숨겨진 면을 보여 달라고.'라고 해서 나도 이후론 지금까지의 오아시스의 스타일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어. 좀 더 자신의 표현 영역을 넓히고 싶었고 만약 우리가 어떤 타입의 곡을 낸다고 해도 위화감 없이 "오아시스의 클래식이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앞으로의 이상이기도 해." (2008년 11월 rockin'on : oasis)
기타, 베이스,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다.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로디 시절엔 스탭 명단에 드럼 테크니션으로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7집 Dig Out Your Soul에서는 본인이 드럼을 친 곡도 꽤 있고(Bag It Up, Waiting For The Rapture, Soldier On) 농담조로 "내가 체력만 되면 이생키들 다 내쫓고 나 혼자 밴드할텐데."라고 말했다.

그외 X-Files: Fight The Future의 OST(Teotihuacan)[19]와 영화 Goal!의 OST(Who Put The Weight Of The World On My Shoulders) 등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2011년에 작곡의 기술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사 쓰는 일이 자신에게 악몽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말할 게 그렇게 많이 없으니까.' 인터뷰어가 '하지만 당신은 엄청난 이야기꾼이잖아요!'라고 하자 그렇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곡을 썼더라면 지금 당신은 나를 인터뷰하고 있지도 않을 거라며 플라시보의 브라이언 몰코 같은 꼴이 났을 거라고 말했다. 당신 앨범에 참여한 음악가들 상당수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말에 '쟈니 로튼은 결코 쟈니 로튼에 대해 노래하지 않았어. 그들은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했지. 더 스페셜즈도, 더 잼도 우리들에 대해 노래했어'라고 대꾸하며, 이어지는 비판에서 안 좋은 예시로 로비 윌리엄스를 들었다. 모든 게 얼마나 자신이 개 같은지에 대한 곡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겠냐고 했으며 랩 음악도 모든 게 래퍼 자신의 고투, 어떻게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출세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라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노엘의 음악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솔로 2집 발매 이후 인터뷰에서 새로 몇 곡을 썻는데 amazing하다고 한다. 3집을 준비할 때 쯤 그 데모들을 가지고 David Holmes에게 가져갔으나 ‘스튜디오에서 처음부터 같이 작업을 하자’는 제안을 했고 노엘이 받아들임으로써 3집의 보너스 트랙 Dead in the Water를 빼놓고는 모두 공개되지 않았다. 작업당시 작업해둔 리프를 즉석에서 떠올린 척 연주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렸다고 한다.

솔로 3집 발매 이후 인터뷰에서 현재 15살 이후로 처음으로 집에 기타가 없으며 베이스로만 작곡을 한다고 한다. The Police 느낌이 나며, 늘 그렇듯 amazing하다고 한다.

공개하지 않은 곡이 아주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로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정규앨범 3개 분량의 뛰어난 곡이 있다’라고 말한다. 다만 이 말은 데뷔 초창기 태고적부터 단골로 내뱉는 말이었다.

종합하자면,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가 성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인물이었며, 자신의 형제인 리암 갤러거와 함께 그 자체로 90년대 영국 문화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자신의 세대를 대변하는 작곡가였으며, 그 자신조차도 자신들보다 뛰어난 밴드는 영국에 얼마든지 있다고 인정할 정도로 솔직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자신들이 이 업계 챔피언이라고 주장하는 대범함과 확신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이는 노엘이 자주 무하마드 알리와 비교되기도 한 이유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노엘을 예술가와 아티스트라는 칭호 속에 넣기 보다 장인에 가까운 범주에서 그를 이해했으며, 그의 밴드인 오아시스 역시 음악적인 영향력보단 문화적인 영향력이 더 강한 밴드로 남아 있다.

이는 그의 기본적인 작곡 성향이 일명 '싸가지 있는' 전통적인 방식에 기인했기 때문인데, 이것이 당시 영국 음악계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렸던 것이 승승장구의 이유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영국밴드들은 너무 내성적인 것 같아. 씨발 음악은 TV 같아야지. 틀면 재미있게 해줘야 된다구. 우리가 바로 그런 밴드지. (생략) 우린 스웨이드나 스미스처럼 심오한 가사를 쓰고 싶은 열망은 없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그들이 뭘 할지, 뭘 입을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지 명령하길 원해. (생략)' '사람이 너무 열심히 하려고 애쓰면 이루지 못하는 법이지. 요즘 대부분의 팝스타들은 노력은 하는데 문제는 너무 애를 쓴다는 거야.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것처럼 들려. 그에 비해 우리가 하는 건 완전히 자연스럽지.' 등의 발언을 하면서 블러, 펄프, 스웨이드 등 무언가 일장연설과 자기 과시에 가까운 스웨그를 남발하던 자신 세대와는 다르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시각으로, 다시 말해서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영감을 얻을 줄 아는 현명함으로 그들 사이에서 돋보일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데뷔할 무렵 이미 그의 나이는 만 27세였으며, 요절한 천재들이 죽어간 나이가 돼서야 뒤늦게 데뷔했던 것이다.[20] 그만큼 그는 확실한 성공에 굶주려 있었으며 자신의 작곡 방식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데뷔 앨범이 20년뒤에도 여전히 팔리고 있을 것이며,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행과 사고 때문이 아닌 음악 그 자체만으로 이 앨범을 사고 들을 것이라는 지혜롭고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제 데뷔한 밴드치고 너무나 '조숙한' 음악을 했던 것이다. 데뷔 앨범에서부터 이미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각자 좋아하는 밴드들의 모든 장점을 모아놓은 듯한 밴드'라고 오아시스를 소개했으며, 신인의 패기를 넘어서서 이미 큰 성공이라도 해본 듯한 사람의 관록이 보일 정도였다. 성공을 가져본 적이 없던 아마추어들의 태도라기엔 너무나 성숙했다. 결국 이미 데뷔하기도 전부터 작곡과 음악 산업에 도가 튼 듯한 애늙은이 같은 면이 오아시스를 빠르게 정상의 자리로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이것으로 인해 빠르게 '생기'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된다. 또한 그 '생기'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노래를 대중과 관중에게 전달하는 리암 갤러거의 보컬 퍼포먼스와 컨디션에 의지하는 바 또한 컸던 것도 오아시스의 아킬레스 건이었던 것이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과 주어진 틀을 깨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능적으로 진보하려는 성향이 있지만, 노엘 갤러거는 자신의 인터뷰에서처럼 언제나 '안전지대'에 머물며 훌륭한 로큰롤 팝송을 지향하고 그것이 몇백만장씩 팔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양식을 고수했다는 데서 장인에 가까운 평가를 받아 왔다. 이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표현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는 오아시스가 해체한 이후에 일어났으나 이것은 당시까진 아주 먼 이야기였다.

결국 오아시스는 음악적으로 진보하고 기대감을 갖게 하며 트렌드의 선두에서 약진하는 밴드가 아닌, 자신들의 선배인 롤링 스톤즈, U2등과 같은 스타디움 밴드로서 성장하게 된다. 노엘에 의하면 '본인들은 그다지 스타디움 음악을 하는 밴드는 아니긴 하지만' 이라고 언급한다. 오아시스는 결국 프렌차이즈화 되었으며 앨범의 발매를 통한 음악적 '성과'보다는 공연과 투어 등의 음악적 '활동'에 더 무게를 싣는 밴드로서 마무리 되었다. 노엘이 끝끝내 추구해왔던 하나의 음악적 이상향은 언제나 쉽고 재밌게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후렴구를 가진 로큰롤 팝송이었으며, 그것만 충족이 된다면 아무것도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물론 예민한 그답게 자신들의 앨범에 악평을 쓰는 평론가들의 이름과 내용까지 기억해뒀다가 언급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있는 등 피드백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오아시스라는 밴드를 일종의 '왕국화' 혹은 '프렌차이즈화'했으며,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며 대중들에게 특정한 분야의 장인으로서 인식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결국 오아시스는 그 찬란한 시작과 너저분한 마무리 내내 훌륭한 후렴구를 가진 앤섬을 무더기로 쏟아내서 공연한번 가본 적 없는 사람도 공연장으로 불러내고 이윽고는 불특정다수가 그것을 따라부르게끔 만드는 우직한 밴드 였다고 할 수 있다. 오아시스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큰 성공과 인지도를 얻었던 밴드였으며, 자신들의 부족한 음악적 성과와 영향력을 넘어서는 그 특유의 압도적인 문화적 지배력과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오아시스 이후 노엘은 더이상 철저히 대중의 즐거움을 겨냥하고자 하는 집착과 자신이 키워온 왕조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좀 더 자신의 내면에 파고드는데 집중하면서 자신의 틀을 깨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본인 특유의 경직된 틀과 사보타주하는 경향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있다.

3.2.1. 표절과 오마주의 경계

노엘은 무수히 많은 곡을 써내면서 표절 시비에도 자주 휘말렸는데, 이는 영국 락음악 씬에서 선배 음악인에 대한 존경의 의미에서 오마주로 여겨지는 것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다만 오아시스와 노엘의 음악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표절에 대해 엄격한 사람들에게는 오마주는 명분일 뿐 이것들은 결국 근본적으로 표절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오아시스와 노엘의 솔로 프로젝트의 표절 의혹 곡들 모음. 오마주나 트리뷰트의 곡들, 표절로 판명된 곡, 단순히 표절 의혹만 제기된 곡, 원곡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곡들이 모두 섞여 있다.

대표적인 표절곡들로는, 당시 코카콜라 광고 삽입곡이었던 'I'd Like to Teach the World to Sing'을 표절한 Shakermaker[21]스티비 원더, 헨리 코스비, 실비아 모이의 'Uptight'를 표절한 'Step Out', 닐 이네스의 'How sweet to be an idiot'을 표절한 'Whatever',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에서 기타 리프를 훔쳐온 'Supersonic', [22]역시 조지 해리슨의 명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링고 스타를 대표하는 노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에서 따온 She's Electric[23], 티렉스의 'Get It On'의 리프를 가져와 만든 'Cigarettes and Alcohol', Wham!의 'Freedom'에 영향을 받은 'Fade Away'등 이 밖에도 많은 곡들이 있다. 또한 노엘의 솔로 앨범들에서 역시 여러 노래들과의 유사성이 드러나기도 했다.

노엘은 오마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표절 시비가 제기될 때마다 "응 맞아. 이 노래는 여기서 가져왔고, 이 노래는 저기서 가져왔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Cigarettes and Alcohol이 표절 시비에 걸렸을 때 "그래도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티렉스를 알게 됐잖아?" 라고 말했는데 대선배인 로드 스튜어트는 데뷔 1년차 신인 록밴드의 싱글 Cigarettes and Alcohol을 극찬하며 커버 버전을 자신의 앨범에 수록했다. 표절곡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노엘은 '누군가 우리 곡을 베껴도 아무 상관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몸소 실천했다. 트래비스가 2집 The Man Who의 히트곡 Writing To Reach You 발매 당시 리더 프랜 힐리는 '라디오에서 Wonderwall을 듣다가 그 코드를 훔치고 가사를 빌려왔다'고 밝혔는데 아무도 표절이라고 안 했고, 원래 트래비스의 광팬이었던[24] 노엘은 트래비스 무대에 함께 올라 All I Wanna Do is Rock을 함께 공연했다. 이렇듯 영국 록 음악 씬에서 오마주는 선후배 간의 긍정적인 교류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그린 데이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욕을 했다. 그가 그린데이를 원래 싫어하기 때문인데, 2007년 스터프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그린데이의 대표 히트곡인 Boulevard of Broken Dreams를 자신들의 곡인 Wonderwall을 그대로 갖다 배꼈다면서 비판했다. 인터뷰어가 '그렇게 치면 우리도 당신이 표절한 곡을 댈 수 있다' 라는 식으로 말하자, ''난 전체 다 베낀 건 아니다! 적어도 품위는 가져야지. 난 최소한 내가 베낀 사람들한테 돈은 지불한다고!' 라고 밝혔다.[25]

기본적으로 노엘은 음악적으로는 반미에 가까운 성향이고 친영국주의적인 사상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미국 밴드들인 메탈리카라스 울리히커크 해밋은 오아시스를 좋아하고, 푸 파이터즈의 데이브 그롤도 오아시스를 좋아하고, 마룬 5의 애덤 르빗이 오아시스를 좋아해도 정작 노엘은 대놓고 공식적으로는 그들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다.[26] 언제나 욕을 할 땐 '우리한테 무슨 욕을 해도 좋으니 제발 에어로스미스 같다고만 하지 마라' 라던가 '미국 애들이 그린 데이슬립낫 같은 거 듣지 말고 스트록스를 들었으면 좋겠다'고도 밝힐 만큼 미국 메이저 밴드들을 별로 좋아하질 않는다. 따라서 노엘은 영국 내에서라면 오아시스 음악에 영향을 받거나 조금씩 베끼는 것은 노엘 자신도 그랬 듯이 선후배 간에 서로 주고 받는 것 정도로 여기지만, 미국의 상업적인 밴드들이 자신의 음악을 그대로 베껴 가는 것에는 심히 불편해한 전력이 있다.

전체적으로 노엘의 작곡 기법에 대한 매우 절묘한 평가로 배철수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멜로디에 강한 스파이크로 되받아치는 듯한' 을 꼽을 수 있겠다.

3.3. 보컬리스트로서

현재는 자신의 밴드를 이끌며 프런트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오아시스 시절엔 엄연히 동생인 리암이 밴드의 얼굴 마담이었기에 프런트맨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 밴드 시작 당시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은 없었던 그가 지속적인 음악 활동과 노래 경험을 통해서 노래하는 것을 편안해 하게되고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내면서 서서히 리암과 맞먹는 무대 존재감을 갖게 된다. 그 이후 본인 스스로가 밴드의 프런트맨으로서 당당히 활약하고 있다.

오아시스 시절의 노엘은 밴드들의 일반적인 섭리를 벗어난 행보를 보였는데, 요컨대 팀의 보컬이 아니면서도 보컬 활동을 하는 빈도가 서서히 늘어나고, 리암의 목상태가 망가진 후에는 아예 프론트맨과 맞먹었던 것이다. 이는 보컬이었던 리암의 불안정성이 큰 원인이었지만, 프론트맨이 아닐 뿐 작곡가로서 노엘의 평소 입지가 막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컬과 같은 퍼포머에게 매우 치중되어 있는 현재와는 다르게 당시에는 밴드라면 어떤 곡을 쓰는가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일반적으로 밴드의 프런트맨은 메인 작곡가이거나 작곡에 참여하는 비중이 매우 높으며, 이는 안그래도 넓은 프런트맨의 밴드 내 영향력을 더 넓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아시스 초창기 프런트맨 리암은 작곡에 대한 재능과 관심이 부족했고 그 옆에는 최고의 작곡가라 불리는 노엘이 있었기에 리암 대신 노엘이 작곡을 전담하게 되고 그의 영향력이 넓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오아시스 전 노엘의 활동도 흥미로운데 인디 밴드인 인스파이럴 카펫츠의 보컬 오디션을 제안받아 참가했다가 탈락한 후, 밴드의 로디로서 음악산업을 경험하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 그 후 동생의 밴드에 들어가게 되었고 밴드의 유일한 경력자이자 작곡가로서 자신의 목소리와 의견을 내며 서서히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노엘이 작곡한 오아시스의 모든 데모곡은 노엘의 연주와 보컬로 이루어져 있기에 노엘이 노래하는 것 자체는 밴드 내부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통 음악계에선 작곡가가 데모를 만들 거나 혹은 데모를 공연자에게 실연을 해서 직접 들려주는 경우가 많고, 그럴 경우 작곡가가 노래를 직접 하는 경우가 많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기본적으로 데모에서 작곡가의 노래 실력이 뛰어난 경우는 스스로 보컬리스트도 겸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드물다. 데모는 데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래의 생김새를 알려주는 가이드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데모란, 노래의 핵심적인 특징을 담아내는 데 집중을 하며, 보컬의 실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노엘 역시 커리어 초창기에는 전형적으로 이러한 케이스의 작곡가였다. 직접 8트랙 녹음기를 통해서 어쿠스틱 버전을 녹음해서 들려주거나, 밴드 멤버들 앞에서 직접 연주를 하며 불러서 가르쳐 주는 방식이었다. 초창기 리암은 노엘이 쓴 멜로디 라인을 한 두 번 듣고 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익혀서 따라 부르며 보컬로서의 역량을 보여줬으며, 본헤드는 당시로선 코드 이름을 잘 모르던 노엘을 대신해서 코드를 따서 받아 적었다고 한다.

즉, 노엘이 작곡한 오아시스의 모든 곡은 노엘의 보컬 버전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노엘은 리암을 대신해서 오아시스의 모든 곡을 스스로 부를 줄 안다는 말이었다. 본래 그가 작곡하고 가사를 쓰고 편곡하고 불러 놓았던 곡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엘이 공연에서 보컬로 나설 수 있는 이유였다면, 노엘이 보컬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리암은 오아시스 후기 빈도가 줄어들긴 하지만, 전성기였던 초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공연을 펑크 내거나 공연 도중에 무단이탈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대체적으로 리암이 그날 관중들이 던지는 물건을 맞았다던가, 관중과 말싸움을 했다거나 공연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숙취가 심하거나 몸이 아프다던가, 목이 아프다든가 등의 이유로 노래를 부르다 말고 나가거나 갑자기 공연에 불참하는 상황들이 많았는데, 보통의 밴드 같으면 그 자리에서 공연이 중지돼서 밴드의 평판은 떨어지고, 관객들에게 티켓값을 환불해 주고, 공연 주최 측에 위약금을 무는 등의 악재가 생긴다.

노엘은 그런 불상사를 막고자 스스로 노래를 이어받아서 세트리스트를 다 소화해 내는 극적인 경험들을 많이 했었다. 나중에는 하도 익숙한지 오히려 리암이 부르다 말고 넘기면 신나게 부르는 경우도 있았으나, 매우 계획적인 성향인 노엘에게 있어선 이것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고 하며, '영국 최고의 밴드라기에 가봤더니 보컬은 뿔나서 나오지도 않고 웬 못생긴 놈이 걱정 말라며 대신 노래하면 관객들이 참 좋아도 하겠다'라며 자신이 프런트맨이 되는 것에 자조적인 표현도 많이 했었다. 초창기 노엘은 보컬 실력이 좋지 못했고, 본인의 목소리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으며, 노래 역시 보컬인 리암에 맞춰 편곡된 노래들이었다.

또한 항상 기복이 심하고, 자주 악화되는 리암의 목상태도 문제였다. 리암의 창법은 매력적이지만 목에 매우 무리가 가는 방식인데 정작 초창기 리암은 관리를 하기는 커녕 술과 담배, 약물 등으로 그걸 더욱 악화시키곤 했다. 오아시스 공연 영상들을 보면 술담배가 무대 위의 리암과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 오늘만 사는 것 같은 이런 락앤롤라이프는 오아시스의 인기요소 중 하나였지만 어째든 문제를 불러왔다. 흔히들 리암의 목은 2~3집 이후 악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데뷔앨범을 낸 94년 투어부터 이미 목의 문제로 인한 공연 취소가 빈번했고 밴드를 지속시키기 위해선 대책이 필요했다.

결국 이것이 노엘로 하여금 본인이 보컬이 되는 곡을 앨범에 실어야겠다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이 오아시스 최고의 명반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보컬인 리암의 다른 문제점이 있었는데, '곡을 가려서 부른다는 것' 이었다. 노엘이 썼다고 무조건 부르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듣기에 마음에 드는 곡만 불렀으며, 따라서 노엘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 하더라도 곡을 부르는 사람은 리암이니 그에게 늘 컨펌을 받아야만 했다. 리암은 초창기 적엔 노엘이 쓴 'Take Me Away'나 'Half The World Away', 'Talk Tonight', 'Going Nowhere' 등 어쿠스틱 넘버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락커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곡조의 곡들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노엘로서는 그 곡들을 묵혀 둘 수도 없고, 리암의 목 컨디션을 소모시키는 보컬 스타일로 인해 공연 중간중간 리암의 목에 휴식을 주고자 본인이 보컬로 나서는 어쿠스틱 넘버를 B면집 등에 실었으며, 공연 중간에 어쿠스틱 세트를 집어 넣었다. 보컬인 리암의 이러한 특징들로 말미암아 본디 프론트맨이 아니었던 노엘이 자연스럽게 보컬로서 공식적인 무대들을 접하게 된다.

또한 리암은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는 곡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보컬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하면 그냥 녹음을 포기하곤 했다. 가령, 'Little By Little'은 본래 리암을 보컬로 발매하려고 했지만 정작 리암은 본인 뜻대로 녹음이 되지 않자 노엘에게 '형이 불러. 형 보컬 중에 씨발 최고라고.'라며 곡을 양보한 일화가 있다.[27] 이에 노엘이 '네가 빌어먹을 보컬 아니냐?'라고 하자 리암은 '이 곡은 형이 더 나아'라고 했다. 노엘은 이에 '리암이 이 곡의 후렴을 불렀으면 끝내줬겠지만, 결국 걔 마음이니까'라는 언급을 한다.

그리고 2집인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서 처음으로 B사이드가 아닌 노엘 보컬 곡을 한곡 넣게 되는데 그게 바로 'Wonderwall'의 뒤를 따르는 오아시스의 대표곡 'Don't Look Back In Anger'다.

'Don't Look Back In Anger'의 성공으로 대중들이 노엘 역시 프론트맨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점차 노엘의 보컬을 선호하는 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노엘의 어쿠스틱 세트는 많은 오아시스 팬들에게 굉장히 값어치 있는 숨겨진 보물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B사이드의 곡들이기에 라이브가 귀했고 노엘 갤러거의 보컬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라이브를 듣고자 한다면 직접 공연장에 가거나 부틀렉을 사야만 했다. 실제로 오아시스 3집 투어에서 노엘이 갑작스럽게 보컬을 맡은 공연이 투어 중 가장 성공적인 공연으로 꼽히기도 했다.

허나 동시에, 노엘이 중간중간 리암의 시간을 빼앗아 노래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며, 노엘이 노래하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팬들도 많았다. 원리원칙에 따라서 리암은 프런트맨이고, 노엘은 기타리스트였으며, 노엘이 리암보다 목소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튀어나오려 해서 건방지다는 시선도 있었으나 노엘은 개의치 않아 했다. 이후 노엘은 이러한 초창기적 경험들을 발판 삼아 서서히 영향력과 존재감을 키워 나갔으며, 오아시스 해체 후 아예 완전한 솔로 뮤지션이자 프런트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노엘의 보컬 특징은 시기적으로 각자 다른데, 리암의 보컬 컨디션이 초창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하강 곡선을 그리다가 오아시스 해체 이후로 컨디션을 서서히 되찾은 것과는 반대로 노엘은 초창기엔 엉망이었으나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며 점점 일취월장한 케이스로 여겨진다.

초창기적엔 노래하는 재능이나 특징이 전문 락밴드 프론트맨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범했으며, 특별히 비범한 구석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아시스 후반기 그리고 솔로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훨씬 성장하여 팬들의 호평을 듣고 있다. 사실 초창기에도 'Don't Look Back In Anger'처럼 본인에게 어울리는 곡을 부를 경우 설득력과 호소력 있게 소화하기도 했다. 노엘의 보컬이 엉망이었다면 Don't Look Back In Anger가 지금과 같은 대곡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락앤롤스러운 노래보다는 주로 어쿠스틱 곡조에 어울리는 따뜻한 톤을 가졌으며 동시에 베이직하고 건조하다. 리암의 목소리가 개성 강하며 카랑카랑하고 목소리 자체만으로 주목을 끄는 것과 정반대이다. 다만 성량과 음역대, 노래하는 스킬, 목소리의 안정성 면에서는 강점을 가지고 있어 오아시스의 음악에 상반된 매력을 더해주는 서브보컬이었다고 할 수있다.

물론 초창기부터 이미 낼 수 있는 목소리의 범주가 리암보다 다양한 것은 분명했으나, 노래하는 재주를 익히지는 못한 탓에 노래 스타일이 단조로웠다. 노엘은 예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 성격으로 봐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이는 리암도 마찬가지다.[28] 따라서 그들은 스스로 계속 노래를 많이 해보면서 노래하는 것을 서서히 숙련시킨 케이스가 된다. 아무리 재능이 없다고 해도, 노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매일매일 수십 년을 해오다 보면 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리암의 경우엔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자신의 타고난 목소리 자체가 남다른 무기이다 보니 다소 그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나, 노엘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신의 평범한 목소리 톤에 의지하기보다는 좀 더 곡을 섬세하게 불러내는데 집중하는 스타일로 발전했다. 온몸의 힘을 목구멍으로 뽑아내서 내지르는 듯한 리암의 날카롭고 공격적인 스타일과 다르게 노엘은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묵직한 바리톤 스타일로 노래를 부르며[29], 따라서 노엘이 곡을 부를 경우 웅장하고 쩌렁쩌렁하게 공연장이 울리게 된다. 따라서 'The Masterplan', 'Don't Look Back In Anger', 'Acquiesce', 'Little By Little' 등 주로 후렴이 웅장한 곡들을 노엘이 잘 소화해 냈다.

노엘이 밝힌 바에 따르면, 7집 앨범의 'Waiting For The Rapture'를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 톤을 찾았다고 하며, 그 곡에서의 자신의 목소리가 자랑스럽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오아시스 후기로 갈수록 노엘의 보컬은 점점 일취월장하였다. 여유롭고 웅장해져갔으며 힘 있는 보컬이 되었다.

허나 오아시스 해체 이후로 솔로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나이가 중장년층에 접어들면서 목소리 톤에 변화가 생겼고, 노래를 소화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우선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 톤이 약간 더 잠겼고 호흡도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떨어졌으며, 스스로도 'The Importance Of Being Idle' 같은 높은 키의 곡은 이제 부르기가 힘들다고 밝힐 정도로 컨디션이 내려갔다. 2023년 투어까지도 여전히 'The Importance Of Being Idle'를 셋리에 넣고 잘 부르고 있다. 하이플라잉버즈 초기에 공연 중에 오아시스 곡을 불러달라고 무례하게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거절하기 위한 대답으로 보인다. 해당 곡 외에도 셋리에 없는 곡들을 요청 받을 때 이제 못부른다는 식으로 대답한 경우들이 종종 있다.

물론 단순한 기량의 하락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그리고 오아시스 시절에는 간헐적으로 소화하던 보컬을 이젠 풀타임으로 투어 내내 소화해야 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 등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솔로 활동 이후 목 관리에 대한 부분은 노엘이 철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 담배를 줄이고 젊은 시절에는 죽어도 안 가던 체육관도 다니고 자전거도 열심히 탄다고 한다. 다이어트에도 신경 써서, 노엘이 솔로 3집부터는 살을 엄청나게 빼고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1,2집 시절의 곡을 그때보다 훨씬 더 여유롭게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살을 얼마나 뺐는지 바지 사이즈가 26인 것이 공연 중 사진에 찍힌 적도 있다.

나이가 많이 들었고, 동시에 솔로로서 공연 전체를 책임지게 되다 보니 보컬의 힘과 웅장함은 오아시스 시절에 비해서 떨어졌지만, 좀 더 보컬의 완급 조절에 신경 쓰는 모습이 늘었다고 할 수 있다. 솔로 활동 시의 밴드 사운드가 오아시스 시절의 볼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박해진 것 또한 보컬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노엘이 보컬로서는 별다른 재능이 없던 오아시스 초창기 이후 메인보컬을 대신해 노래를 부르며 급격히 성장하였고 지금은 어엿한 한 명의 프런트맨으로서 공연을 책임질 정도로 숙련되었다는 것이다.

2023년 인터뷰에서 음역대가 넓어졌다고 밝혔다. 호흡이나 발성 역시 젊은 시절과 비교하면 부족함이 있으나 노래를 끝까지 밀어부르는 힘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특유의 강력한 성량으로 노래의 힘을 구절 끝까지 유지하여 시원한 느낌을 준다. 숨이 부족해 노래 끝을 유지하지 못하고 끊기는 리암의 경우를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또한 관리에 능하고 보컬 컨디션의 기복이 크지 않아 투어 중 공연의 퀄리티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는 안정감도 활동 기간 내내 보여주는 큰 장점이다.

4. 사용장비

4.1. 일렉트릭 기타

대표적인 모델들만 나무위키에서 나열하지만 더 자세히는 정리된 사이트가 있다.

4.1.1. 에피폰 레스폴 스탠다드

파일:노엘1.jpg
Supersonic 뮤직 비디오
노엘 갤러거의 오아시스 시절 첫 기타로, Supersonic 뮤비 전반에 걸쳐 등장했으며 싱글 커버에서도 볼 수 있다. 노엘은 음악활동 초창기에 기타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고 비싼 기타를 살 자금적 여유는 더더욱 없었던 관계로 레스폴은 사고 싶지만 깁슨을 살 돈은 없고 에피폰은 자기가 좋아하는 비틀즈가 사용했던 기타 브랜드이기 때문에[30] 에피폰 레스폴을 사게 되었다.

4.1.2. 깁슨 레스폴 스탠다드

파일:노엘2.jpg
1994년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Live Forever 라이브
조니 마가 노엘 갤러거와 친분이 생긴 후 빌려준 기타[31]. 원 주인은 무려 피트 타운젠드. 노엘은 이 기타로 Slide Away를 작곡했고 Definitely Maybe 수록곡 거의 대부분의 레코딩에 썼으며, Live Forever 뮤직비디오에도 들고 나왔다. 그러나 뉴캐슬에서 공연하던 중 무대에 난입한 관객의 머리를 기타로 깨버리면서(...) 망가져서 수리를 맡겨야 했다. 레스폴 스탠다드 바디는 1960년산으로 추정되지만 수리를 맡기면서 기타 테크니션이 "넥이 오리지널 넥이 아니라 교체한 것 같다" 라는 진단을 해 노엘도 피트 타운젠드가 예전에 부쉈다가 수리를 다시 한 기타가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피트 타운젠드는 영국 대중음악계에서 공연 중 가장 기타를 잘 부수기로 정평이 난 인물이라는 점이다.

4.1.3. 1972년산 깁슨 레스폴 커스텀

파일:노엘3.jpg
줄스 홀랜드 Whatever 라이브
노엘이 위에서 말했듯이 깁슨 레스폴을 부숴버리고 난 뒤 조니 마가 빌려준 또 다른 기타이다. 정확히는 노엘 측에서 뻔뻔하게도 또 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마가 웃으면서 수락했다고 한다. 조니 마는 이 기타로 무려 The Queen Is Dead를 작업했으며, "이번 건 더 무거운 녀석이니까 그 씨X놈 대가리를 확실하게 날려버릴 수 있을거야" 라는 편지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Morning Glory 노래 인트로에 등장하는 강렬한 벤딩 연주를 녹음할때 사용한 기타이다. 다행히 이 기타는 박살이 나진 않았으며 전에 관중의 머리에 휘둘러 조니의 기타를 작살내놓았던 노엘은 아무래도 미안한 마음에 노엘은 항상 조니에게 돌려줄까 하고 수차례 물었지만 그냥 가지라는 대답에 여전히 가지고 있다. 현재는 원본 험버커 픽업이 고장나서 깁슨 파이어버드에서 떼온 P-90 픽업으로 교체된 상태로 머무르고 있다.

4.1.4. 1982 깁슨 플라잉 V

파일:노엘4.jpg
D'You Know What I Mean? 뮤직 비디오
1994년부터 사용한 기타로 Cigarettes & Alcohol을 녹음했으며, D'You Know What I Mean? 뮤비에서 들고 나오기도 했다. 이것도 조니 마에게서 빌린 기타라고 한다. 어째 비싼건 죄다 조니 마한테 빌린거다 #

4.1.5. 에피폰 리비에라

파일:노엘5.jpg
Don't Look Back In Anger 뮤직 비디오
1980년대에 일본에서 생산된 기타.[32] 음악활동 초창기 기타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던 노엘은 단지 비틀즈가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에피폰을 선호했고 그중에서도 세미 할로우바디 기타를 원해서 본헤드랑 같이 구매한 기타이다.[33] 이 기타로 Don't Look Back In Anger, Champagne Supernova를 포함한 오아시스 2집의 거의 모든 노래를 작곡했으며 같은 앨범의 거의 모든 리듬기타 파트 녹음에 사용됐다고 한다. Don't Look Back In Anger, Morning Glory, Roll With It, Champagne Supernova 그리고 Rock 'N' Roll Star 뮤비에서 등장했으며, 1995년 얼스 코트 공연에서도 사용했다. 2022년 시그니처 모델을 발매했다.

4.1.6. 1965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파일:noelst.jpg
The Pedal Show 인터뷰
1995년 초에 조니 마로부터 산 1965년산 펜더 스트라토캐스터로 노엘은 그해 후반에 모닝글로리 세션에서 이 스트라토캐스터를 사용했는데, 복스 AC30에다가 이 기타를 연결해 "Wonderwall"과 "Don't Look Back In Anger" "She's Electric" 를 녹음하였다. 이후에는 하이 플라잉 버즈 1집에서 "AKA What a Life"를 녹음하는데 다시 한번 쓰였다.

4.1.7. 1993년산 에피폰 쉐라톤

파일:노엘6.jpg
1996년 넵워스 2일차 Some Might Say 라이브
1993년 미국 내쉬빌에서 생산된 기타 1. 노엘 갤러거가 2집과 3집 투어 중 주로 사용한 기타로, 그 유명한 넵워스와 지멕스 공연에서도 사용했다.

4.1.8. 에피폰 쉐라톤 "유니언 잭"

파일:노엘7.jpg
1996년 메인로드 1일차 Morning Glory 라이브
1993년 미국 내쉬빌에서 생산된 기타 2. 노엘이 직접 유니언 잭으로 리피니쉬했다. 후술할 깁슨 ES-355와 함께 노엘을 대표하는 기타이며, 나아가서 이 유니언 잭 기타는 오아시스를 상징하는 기타이다. 대표적으로 1996년 메인 로드[34]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4.1.9. 1960년산 깁슨 ES-355

파일:Noel_Gallagher3.jpg
이 기타를 칠 때마다 경외감에 빠져요. 아내와 섹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내 다음으로 중요하지만... 만약 기타와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1960년산 체리 컬러의 깁슨 ES-355는 노엘을 대표하는 또 다른 기타라고 할 수 있다. 이 기타는 모닝 글로리 투어가 끝나갈 1996~1997년 무렵, 어떤 기타 상인이 오아시스가 리허설하고 있는 곳에 찾아왔는데 항상 빨간색 세미할로우 바디 기타를 원하던 노엘[35]은 당시 4000 파운드를 주고 그 상인한테서 ES-355를 구매했다고 하며 아직까지도 메인 기타로 사용하고 있을만큼 노엘이 가장 좋아하는 기타이다. 노엘이 얼마나 이 기타를 좋아하냐면 와이프와 기타 둘 중에 누가 좋냐고 물어보면 고민할정도...이제 이혼했으니 고민할 필요 없다 현재 노엘이 소유하고 있는 ES-355는 96~97년에 샀던 그 기타가 맞으며 노엘이 역대 최고의 기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빅스비를 사용해도 튜닝이 절대 틀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특이점이라면 넥이 매우 가늘다는 건데(노엘이 표현하기를 꼬맹이 넥), 항상 자기는 손이 작아서 넥이 가는 기타를 좋아한다고 여러차례 밝혀온 노엘에게 안성맞춤인 것으로 보인다.

노엘은 90년대 말에 파리의 한 기타샵에서 ES-355를 하나 더 구매하게 된다. 기타샵에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이랑 거의 비슷한 녀석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ES-355를 하나 더 구매 했는데 알고보니 서로 시리얼 넘버가 딱 1 차이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조사를 해보니 깁슨의 서로 다른 장인에 의해 같은 날 만들어진 기타였는데 막상 사운드 체크를 해보니 파리에서 산 녀석은 완전 쓰레기(...)였다고 한다. 빅스비, 넥, 튜너 등이 기타에 무슨 짓을 해도 해결이 안 될 정도로 정말 끔찍할 정도로 안 좋았다고.

참고로 2009년 오아시스 파리 투어 때 리암이 부순 기타는 노엘이 최초로 샀고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 ES-355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부숴진 그 기타는 픽가드가 좀 더 크고 노엘의 넘버 1 ES-355는 픽가드가 작다. 부숴진 기타는 파리의 유명한 기타 리페어맨에게 수리를 맡겨 수리하였고 2022년 5월 이 기타가 경매에 나와 무려 389,900유로(2022년 8월 환율 기준으로 5억원)에 낙찰되었다.

2022년 8월 30일 깁슨에서 시그니처를 발매하였다.# 전세계 200대 한정으로 나왔으며 깁슨 생산 라인중 가장 고가 라인업인 머피랩 시리즈로 나와 출시가 9999달러, 한화로 1400만 원이란 엄청난 가격으로 출시되었다.[36] 노엘도 본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시그니처 모델의 퀄리티에 만족하는지 자신의 오리지널 기타는 이제 자기 스튜디오에 보관하면서 사용하고 바깥 활동에는 복각품을 사용한다고 한다.

4.2. 어쿠스틱 기타

4.2.1. 에피폰 EJ-200

파일:노엘9.jpg
1994년 MTV Most Wanted Live Forever 라이브
노엘이 오아시스 초기부터 사용한 기타이다. 노엘은 이 기타로 Definitely Maybe의 모든 어쿠스틱 파트를 녹음했으며 수많은 곡을 작곡했다. 메인 로드 공연에서도 쓰였다.

4.2.2. 깁슨 J-150

파일:노엘 갤러거 어쿠스틱.jpg
Little By Little 뮤직 비디오
노엘의 메인 어쿠스틱 기타. 깁슨J-200 시리즈에서 파생된 모델이며 2000년대 중후반부터 노엘의 솔로 활동 어쿠스틱 곡 라이브나 스튜디오 녹음에서 항상 사용된다.[37]

특이 사항으로는 기타의 넥 부분과 바디가 접해있는 부분 위쪽에 아디다스로고 스티커가 붙어있다. 노엘의 아디다스 사랑을 볼 수 있는 부분.

깁슨에서 빈티지 선버스트 색상이 시그니처로 출시됐으며, 200대 한정판으로 나왔다.

5.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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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2011. 10. 17.
Cha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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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2. 25.
Who Built The Moon?
2017. 11. 24.
Council
Skies

2023. 06.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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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콜라보레이션


노엘은 OST에도 종종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THE X-FILES의 OST로 사용하기 위해 작곡한 'Teotihuacan'이다. 이 곡은 노래가 없는 연주곡인데, 전자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노엘은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고[38]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 맥을 집에 들여놓고 사용한다. 실제로 이 곡 역시 컴퓨터 작업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직접 악기를 연주한 다음에 스튜디오에서 여러 효과를 줘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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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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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거 형제의 음악활동
더 레인 오아시스 비디 아이
리암 갤러거(솔로) 오아시스(재결합)
노엘 갤러거 하이 플라잉 버즈

[1] 갤러거는 Ó Gallachóir(오 골리허)라는 아일랜드계 성씨에서 비롯된 성이다. 즉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2] 아일랜드는 모계나 부계 어느 쪽이라도 아일랜드 출신이 있으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노엘 갤러거는 인터뷰에서 아일랜드 시민권이 있다고 밝힌 바 있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1순위로 '맨체스터 사람'이며 2순위로는 '영국인(British)'이고 3순위가 '아일랜드인'이라고 말한다. 맨체스터 시티와 함께 셀틱을 지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리암의 경우, 아일랜드계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지만 노엘 갤러거는 아일랜드인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편. 어린 시절엔 게일릭 풋볼 선수였기도 했다.[3] 페기 갤러거와 갤러거 형제들에게 자주 폭력을 행사하던 가정폭력범으로 1976년부터 별거했으며 1982년 노엘이 15살일 때 어머니 페기 갤러거가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여담으로, 외모가 노엘과 굉장히 닮았다.[4] 멕 매튜스 소생[A] 사라 맥도널드 소생[A] [7] 보통 5피트 8과 1/2인치로 알려져 있으며, cm로 환산시 약 174cm이다. 하지만 신발을 신고 잰 키이고, 나이가 중년으로 접어 들어 키가 줄었으므로 실질적인 키는 172~173cm로 여겨지며, 본인 또한 그렇게 말한다.[8] # 한화 약 930억 원.[9] 1967년생 뮤지션이 1994년에 데뷔했으니 20대 후반에 성공했고, 자연스럽게 20대 초반까지는 여느 노동 계급 젊은이들과 다름없는 삶을 보내며 틈틈이 작곡을 했다.[10] 왼쪽부터[11] 폴과 노엘이 침대에서 함께 자고 있으면 깨우겠다고 침대를 엎어 버리고, 울면 운다고 때리고, 말을 더듬으면 고쳐야겠다고 때렸다고 한다. 막내인 리암만은 때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폴과 노엘이 집에 없을 때 리암도 종종 때렸다고 한다.[12] 다만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고 악감정이 없다고 한 것과는 별개로, 실제로 보이는 그의 반응을 보자면 자신의 아버지를 현재까지도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오아시스 초창기에 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아버지 토마스 갤러거를 고용하여 오아시스 투어 현장에 데려왔을때 노엘이 보인 불안 증세와 그 이후로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보면 어렸을 때 많은 상처를 입은 듯. 어떻게 보면 아버지에 대해 악감정이 없는 걸 뛰어넘어서 아버지로 인정을 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2000년도 Behind the Music 인터뷰에서 비슷한 요지의 발언을 했다. 또한, 노엘보다는 아니지만 못지않게 학대를 당했던 동생 리암도 1997년 MTV 인터뷰에서 이러한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앞으로도 용서할 마음 없다고 언급하였다. 1997년 12월 25일 MTV Uncut 인터뷰[13] 비디아이의 실패 이후 리암은 노엘에게 빌다시피 오아시스 재결합을 요청하고 거절당했는데, 그 뒤로 리암은 노엘이 자신에게 빌었다는 식의 농담을 자주 하는 편이다.[14] 특히 3집까지는 밴드 내의 모든 곡을 노엘이 작곡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오아시스의 전성기였던 1집, 2집의 모든 곡을 작곡했다는 말이다.[15] 웃기게도 노엘은 시간이 꽤 흐르고 나서는 B-Side에 넣기는 아까운 곡이었다고 크게 후회하였다.[16] 절대 너바나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 Lock the box 인터뷰에서 '내가 를 좋아하고 그런만큼, 난 씨발 그런게 싫었다고. 사람들이 헤로인에 취해와서, 씨발 자기는 자신이 싫고 죽고 싶다고 하는 거, 우리는 싫다고. 존나 쓰레기거든. 그렇다고 내가 그거에 반발해서 쓴건 아니고, 그냥 그게 내 생각이였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17] 이말에 리암은 조지 해리슨을 젖꼭지 같은 인간이라고 말하며 화냈다.[18] 프로듀서 데이브 사디 (Dave Sardy). 오아시스 7집 Dig Out Your Soul의 프로듀싱 및 믹싱을 담당했다.[19] 참고로,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매우 짙은 곡이다.[20] 대표적인 예시로 노엘과 동년배인 커트 코베인은 오아시스가 Supersonic으로 데뷔하기 6일 전에 이미 자살로 세상을 등진 상태였다.[21] 코카콜라에서 소송이 걸리자 노엘은 공연에서 어쿠스틱 라이브를 하며 "우리 모두 같이 펩시를 마셔요"라고 한다.[22] 아이러니 하게도 조지해리슨의 My Sweet Lord도 표절소송에 휘말린 역사가 있다![23] 나중에 G-DRAGON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그 곡이다. 웃기게도 표절시비가 난 부분은 노엘 갤러거가 조지해리슨에게서 베껴온 바로 그 소절이다.[24] 트래비스가 스코틀랜드 로컬 밴드였던 시절부터 노엘은 트래비스를 오아시스 투어 오프닝 밴드로 세웠다.[25] 실제로 명백한 표절이나 인용으로 밝혀진 곡들인 Whatever나 Shakermaker는 크레딧에 원곡의 작곡가들 이름도 같이 올라가 있다. 사실 나머지 곡들도 따져보면 밑도 끝도 없지만 법적인 소송이 들어온 곡들은 극소수기 때문에, 일단 소송이 들어오는 곡들에 대해서는 크레딧을 올려주는 원만한 합의를 하는 편이다.[26] 라스 울리히와는 티격태격하면서 친한 사이인 듯 하지만, 정확히는 라스가 오아시스의 광팬으로 치근덕거리는 형식이고 노엘은 츤데레처럼 반응하는 관계에 가깝다. 리암이나 나머지 멤버들은 라스 울리히나 메탈리카에 이렇다 저렇다 언급은 없는 편. 메탈리카 쪽에서도 라스와 커크만 오아시스를 좋아하는 거지 제임스 헷필드는 비틀즈 배끼기만 급급한 놈들이라고 오아시스 음악을 싫어한다. 데이브 그롤은 리암과 친한 편이며 오아시스 자체를 좋아하지만 노엘과 친분이 깊지는 않은 편으로 알려졌고, 마룬 5의 프론트맨인 애덤 르빗은 오아시스 광팬이고 멤버들도 좋아해서 오아시스 곡들을 커버하거나 리허설하는 영상들이 많이 올라와 있다. 근데 정작 노엘은 오아시스 당시 마룬 5와 같은 페스티벌에 출연했을 때 무대 위에서 관중들에게 '마룬 5 나올 때 다들 화장실 갖다오세요' 라며 그들을 조롱했고, 행사장에서 실제로 마룬 5 멤버들과 만났을 때도 노엘에게 '당신들의 음악을 듣고서 음악을 시작했어요' 라고 하자 노엘이 'Rock N Roll Star를 듣고 그딴 걸 한다고?' 라며 농담 삼아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마룬 5의 한 멤버가 '그만 하시죠. 이 친구는 진심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라고 화내자 노엘이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뭘 그러나 허허' 하면서 당황해하고, 옆에서 듣던 겜이 '아 이 친구 진심은 아니에요' 라면서 수습하자 마룬 5 멤버들도 '원래 그러신 분인 거 알아요. 저희가 영광이죠.' 라면서 넘어갔다. 그러나 언론에는 이미 노엘이 마룬 5를 조롱한 걸로 나와서 노엘이 똥줄탔다는 얘기가 있었다.[27] 노엘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건 리암이 가장 좋아하는 오아시스 곡 중 하나인데, 노래하러 와서는 좀 괴로워하더라고. 믹싱 데스크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있더니 결정을 내렸지."라며 언급을 한다.[28] 리암은 어린시절 성당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29] 음색 자체는 테너이며, 오히려 리암이 바리톤이다.[30] 비틀즈가 썼을 정도면 차고 넘치는 브랜드겠지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에피폰은 1969년 이후에 깁슨의 저가 라인에 포지셔닝되었지, 비틀즈가 애용하던 60년대 중반에는 오히려 고급 라인에 속했다.[31] 이 기타는 오늘날에는 깁슨의 영광의 시절이라며 히스토릭이라는 이름으로 7~800만원을 호가하는 값에 복각품을 판매할 정도로 가치 있는 기타이다. 심지어 1960년 원년산은 억 소리가 나는 가격을 자랑한다.[32] 00년대부터 리비에라는 스몰 험버커 픽업으로 생산되고 있지만, 8-90년대 일제 리비에라는 쉐라톤2 마냥 일반 험버커 픽업으로 생산되었다. 2022년 시그니처 모델도 이를 반영하여 일반 험버커 모델로 생산되었다.[33] 노엘은 와인 레드 색을, 본헤드는 갈색 타바코 색을 샀는데 본헤드는 오아시스에서 탈퇴하고 자기 기타를 가져가지 않아서 아직도 노엘이 갖고있다고 한다(...).[34] 맨체스터 시티의 전 홈구장[35] 이는 조니 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니 마는 노엘 갤러거가 존경하는 아티스트이며 조니 마도 더 스미스 시절 체리 컬러 ES-355를 사용하였다. 스웨이드버나드 버틀러도 조니 마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로 체리 컬러 ES-355를 메인 기타로 사용하고 있다.[36] 출시한지 3시간 만에 품절되었으며 현재 프리미엄가가 어마어마하게 붙어가고 있다.[37] 하이플라잉버즈 활동 때는 오아시스 활동 때보다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는 곡이 많아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하플버 활동 때는 두 가지 색상 (빈티지 선버스트, 내추럴)을 번갈아가며 사용한다.[38] 아이팟에 음악을 넣는 것도 겜 아처가 대신 해줘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