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1:38:18

스웨이드(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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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1990년대 아티스트
3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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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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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사이먼 길버트, 리차드 오크스, 브렛 앤더슨, 맷 오스먼, 닐 코들링
<colbgcolor=#000><colcolor=#fff>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결성 1989년
영국 런던
데뷔 1992년 5월 11일
싱글 The Drowners
현재 멤버 브렛 앤더슨 (보컬)
사이먼 길버트 (드럼)
맷 오스먼 (베이스)
리차드 오크스 (기타)
닐 코들링 (키보드)
탈퇴 멤버 저스틴 프리쉬먼 (기타)
버나드 버틀러 (기타)
저스틴 웰치 (드럼)
알렉스 리 (키보드)
장르 브릿팝, 글램 록, 얼터너티브 록
레이블 BM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2.2. 버나드 버틀러 시기2.3. 3집 Coming Up 발매와 전세계적인 성공2.4. 밴드의 암흑기2.5. 밴드의 해체2.6. 재결성
3. 디스코그라피4. 여담

[clearfix]

1. 개요

1989년 결성된 영국 출신 얼터너티브 록(브릿팝) 밴드. 브렛 앤더슨(보컬), 리차드 오크스(기타), 닐 코들링(신디사이저) , 멧 오스먼(베이스), 사이먼 길버트(드럼)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아시스, 블러, 펄프와 함께 일명 브릿팝 4대 밴드 중 하나로, 네 밴드 중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지만 동시에 제일 빨리 브릿팝에서 멀어진 밴드다. 실제로 프론트맨인 브렛 앤더슨은 스웨이드가 브릿팝으로 분류되는 것은 물론이고, 브릿팝이라는 용어 자체를 싫어한다. #

스웨이드 밴드 명칭 관련해서는 브렛 앤더슨 자서전에 다음 내용이 전부이다. We had reached the stage that we were searching around for a name and I can’t honestly remember the story behind it, but I just remember turning to them both and saying, “What about Suede?” # , "...하지만 진실은 그 발음과 외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 [1]

2. 바이오그래피

2.1. 밴드의 결성


Just A Girl(feat. Justine Frischmann) (Early Demo)[2]

브렛 앤더슨은 1967년 웨스트 서섹스 주의 헤이워즈 히스의 노동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예술가였으며 택시 운전사인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헤이워즈 히스와 인접한 린드필드의 공영 주택 단지에서 자랐으며 린드필드 초등학교와 오스올 종합 중등 학교를 졸업했다. 청소년기에 그는 후에 스웨이드의 베이시스트가 된 맷 오스먼과 함께 더 피그스(The Pigs), 조프(Geoff)같은 개러지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이후 브렛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진학했지만 학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3] 1987년 즈음에 아버지와 이혼했던 어머니가 1989년 9월, 갑작스럽게 암으로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꿈꾸며 대학을 중퇴하고 어린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멧 오스먼, 여자친구이자 대학 동창생 저스틴 프리쉬먼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다. 결성 당시 멤버는 브렛 앤더슨(보컬), 저스틴 프리쉬먼(기타), 멧 오스먼(베이스). 비록 브렛은 10대 시절부터 음악인의 꿈을 꾸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업 음악인으로서의 삶에 확신을 갖게 해준 것은 당시 그와 동거중이었던 저스틴 프리쉬먼이었다고 한다. 저스틴의 말에 의하면 브렛이 그 잘생긴 외모로 자기 집에서 얌전하게 채식주의자용 피자 따위나 굽고 있는 모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4]

이들은 함께 더 큐어, 스미스, 록시 뮤직 그리고 데이빗 보위의 곡들을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브렛도 저스틴도 기타리스트가 될 만한 재목은 아니라는 판단하에 프로 뮤지션을 영입하려는 생각으로 1989년 10월 28일 NME지에 구인 광고를 냈다.
"런던에서 결성된 밴드에서 젊은 기타리스트 구함. 스미스, 로이드 콜 앤 커머션 [5], 데이빗 보위, 펫 샵 보이즈 관련. 고지식한 음악 마니아는 사절. 실력보다 더 중요하게 따지는 것도 있음. 브렛에게 연락해 주세요."

이 광고는 19살 소년 버나드 버틀러의 관심을 끌었으며 결국 버나드는 밴드의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한 오디션을 봤고 합격하여 밴드의 정식 기타리스트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밴드명을 스웨이드로 정한 후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한다.


Wonderful Sometimes (Early Demo)[6]


Be My God (Early Demo)[7]


Natural Born Servant (Early Demo)[8]

밴드의 전반적인 컨셉은 글램 록과 레이브 록을 섞은 말초적이며 퇴폐적인 컨셉이었고 사운드면에서는 더 스미스의 영향이 컸다.[9] 결성 초기에는 데이빗 보위의 아류 혹은 철지난 글램 록을 한다고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초창기에는 공연 무대도 매니저 역할을 도맡아 했던 저스틴 프리쉬먼이 부모님[10]의 인맥빨로 겨우 얻은 경우가 많았고 공연장에서 사람들이 병이나 깡통을 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차츰 스웨이드 매력에 빠진 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밴드는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밴드는 정식 드러머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1991년, 당시 스웨이드의 매니저를 맡고 있었던 리키 저베이스의 주선으로 펑크 밴드의 드러머였던 사이먼 길버트를 영입했다.[11][12]

1991년 5월 밴드의 핵심이자 동거 관계 사이였던 브렛 앤더슨과 저스틴 프리쉬먼이 결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저스틴 프리쉬먼이 블러의 리더, 데이먼 알반양다리를 걸치다가 브렛을 찬 것이다. 저스틴 프리쉬먼은 "브렛이 어머니를 여의고 난 후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 나는 그와 헤어졌죠. 데이먼 알반과 알게되고 데이먼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언젠가는 브렛과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브렛과의 마무리는 깨끗하게 정리되지 않은 트라우마틱한 이별이었어요. 사실 제가 데이먼 알반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저는 우리가 헤어질 것을 예감하고 있었어요. 우린 사랑에 빠진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이가 발전했던 거죠. 매우 가까웠고 항상 함께 있었고 그리고 그 시간이 너무나 많았어요. "라고 말했다.

저스틴과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끝나고 저스틴과 같이 살던 집에서 나온 후 완전히 맨붕한데다 돈도 별로 없었던 브렛은 값싼 아파트[13]를 구해서 은둔 생활[14]을 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저스틴과의 결별에 따른 충격과 상실감을 잊기 위해 룸메이트인 앨런의 영향을 받아 코카인을 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저스틴과 동거중이었을 때 브렛은 대마초엑스터시를 호기심에 잠깐 했었을 뿐 다른 종류의 마약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결별한 후에도 스웨이드에 계속 남아서 활동했던 저스틴은 결국 1991년 10월, 밴드를 나가버렸다. 저스틴은 밴드가 보다 더 "펑크스러운 사운드와 에티튜드"를 지닌 밴드가 되기를 원했지만 브렛은 반대로 저스틴에게 버려진 후 느낀 자신의 "Sexual Jelousy"와 중산층인 저스틴, 데이먼과 노동계급인 자신의 계급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을 노래하였고 버나드도 브렛이 작사한 가사와 맞는 비극적인 정서가 담긴 멜로디컬한 노래들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브렛이 노래하는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했고 브렛은 이에 "그 가사들은 내가 이 밴드에서 말하고자 싶은 것들을 완벽히 반영한 것이다. 만약 네가 그 가사들을 싫어하면 너는 너와 성향이 맞지않는 밴드에서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직후 저스틴은 그녀의 리켄배커 기타를 들고 밴드를 나가버렸다고 한다.[15][16]

버나드는 저스틴이 밴드에서 해고당했을 때를 "저스틴은 리허설에 늦게 나타나서는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을 내뱉었어요 ― 지금까지 블러가 비디오 찍는 곳에 가 있었어 ― 라니 . 그 때가 정말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을 때라고 할 수 있을거에요. 아마도 저스틴이 그렇게 말한 바로 다음날 브렛이 나한테 전화해서 '저스틴을 내쫓았다.' 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라고 회상했다.

스웨이드에서 해고된 저스틴은 데이먼 알반의 도움을 받아서[17] 1992년 6월 부터 드러머[18]를 제외하고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그룹 엘라스티카를 결성하여 펑크 록소닉 유스를 위시한 미국의 노이즈 록에 영향을 받은 음악을 하기 시작한다.

저스틴과 브렛은 나중에 서로 화해했지만 아직까지도 브렛과 데이먼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2.2. 버나드 버틀러 시기

파일:Suede-resize-1a.jpg
맷 오스먼, 브렛 앤더슨, 사이먼 길버트, 버나드 버틀러


The Drowners (Suede)


Animal Nitrate (Suede)

한편, 브렛과 저스틴이 헤어진 후 밴드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난생 처음 프로 뮤지션으로서 가입한 밴드에다 상승세로 향하고있던 스웨이드가 이대로 해체해버리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 버나드 버틀러는 매일같이 브렛의 집에 찾아가 코카인에 빠져있는 브렛을 격려하면서 많은 곡을 새로 작곡하기 시작한다.[19] 밴드 멤버들은 이런 버나드의 열정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절치부심하여 리허설에 돌입했으며[20] 그 결과 1992년 2월 인디 레이블 Nude 레코드사와 계약에 성공하여[21] 같은 해 5월, 첫 싱글 The Drowners로 데뷔한다.

브렛은 이 때를 회상하며 "참 이상한 시기였어요. 더 이상 저스틴과 내가 연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버나드와 나는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있었죠. 저스틴과의 결별은 많은 것들과 관련이 있었어요. 그것은 스웨이드가 직접 곡을 쓰고 연주하는 진정한 밴드로 변모하는데 촉매제가 되었죠. 저스틴과 헤어졌기 때문에 다스려야 할 크나큰 감정의 동요는 순전히 개인적인 고뇌였어요. 그 괴로움은 페이지 위로 뛰쳐나왔고 거기에는 박차고 일어나 이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싶은 욕망이 담겨 있었죠."라는 코맨트를 남겼다.[22]

메이저 데뷔 직후 연달아 발매된 싱글들이 차트 상위권에 들고 "남자 경험이 없는 양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밴드의 프론트맨 브렛 앤더슨의 여러 도발적인 발언으로 단숨에 유명해진 스웨이드는 브릿팝씬의 문을 열어젖힌 첫 밴드로 평가받는다. 1993년 3월 29일 발매된 1집 Suede는 영국에서 발매 이틀 만에 10만 장인 골든 레코드 인증을 받아 당시에 ''영국에서 가장 빨리 골든 레코드를 받은 데뷔 앨범'으로 불리기도 했으며[23] 밴드는 제 2회 머큐리 시상식에서 대상까지 받았다. 노골적인 동성애 컨셉을 과감히 선보이며 데뷔한 스웨이드는 리치 제임스의 4 Real 자해 사건 등으로 주목을 받은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와 함께 당시 영국의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24]

1집이 영국에서 크게 성공한 후 밴드는 북미 진출을 위해 미국 투어를 돌기 시작하고 1994년 발렌타인 데이에는 새 싱글 <Stay Together>를 발매한다.


Stay Together (Stay Together - Single) [25]

그러나 이 때부터 밴드는 다시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일단, 북미 투어 초반인 1993년 가을에 버나드 버틀러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 급히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동안 원래 북미 투어의 오프닝 밴드로서 참여했던 아일랜드 출신의 밴드 크랜베리스 [26]가 오히려 스웨이드 보다 인기를 얻으면서 복귀 후에는 공연 순서가 뒤바뀌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27] 이 밖에도 밴드의 장비를 도둑맞는가 하면 동명의 가수에게 태클이 걸리는 바람에 강제로 미국 한정 The London Suede로 밴드의 이름을 개명당해야 했다.[28]

밴드 멤버들은 미국 진출이 생각했던 것보다 부진한 와중에 갑자기 영국으로 돌아온 것도 불만스러운데, 대신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던 크랜베리스가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연 준비를 위해 버나드보다 먼저 미국으로 돌아갔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밴드 활동에만 신경을 쓰느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심적으로 괴로워하던 버나드는 밴드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낀다. 이렇게 팀워크가 무너진 상태에서 밴드는 남아있는 북미 투어 스케줄을 마쳤고[29] 새 싱글 <Stay Together>를 녹음했다. 이후 1994년 3월 22일부터는 본격적으로 2집 Dog Man Star의 녹음을 시작했다.


We Are the Pigs (Dog Man Star)[30]



The Wild Ones (Dog Man Star)[31]


The Asphalt World (Dog Man Star) [32][33]

당시 스웨이드의 곡은 버나드 버틀러(작곡) 브렛 앤더슨(작사)의 콤비 체제로 씌어지고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완전히 멀어져 버렸으니 작업은 당연히 잘 되지 않았다. 나중에 발매된 Dog Man Star 디럭스 에디션에 나온 둘의 인터뷰를 보면 앨범 전곡의 데모 버전은 버나드가 집에서 기타로 곡의 기본 멜로디를 작곡하고 스튜디오로 가서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와 함께 곡에 맞는 드럼 비트를 녹음한 뒤[34] 그 결과물을 브렛의 집에 보내면 브렛이 그 중 마음에 드는 곡을 선곡해서 가사와 보컬 멜로디를 오버더빙하여 다시 버나드에게 보내는 과정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브렛 앤더슨은 메이저 데뷔 후 만나기 시작한 17살 소녀 Anick과의 위태로운 애정 관계를 이어나가는 자신의 불안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스케줄이 없을 때면 혼자 틀여박혀서 각종 마약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생활상을 신분상승을 위해 상류층 남성과 결혼했지만 남편이 직장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애써 모른척하며 홀로 고독하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정주부 여성에게 투영시킨 내용의 곡들을 작사했다.

2집 작업을 시작했을 당시 브렛은 미국 투어가 실패로 끝난데다가 여자친구 Anick[35]과도 헤어지자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임대해서 저택에 틀여박힌채로 헤로인[36]을 하면서 보내고 있었으며 브렛과 버나드의 사이도 서로 매니저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굉장히 안좋았기 때문에 밴드는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된 리허설을 진행하지 못했다.

이런 그와 반대로 밴드 활동에 모든 애너지를 쏟고있던 워커홀릭이자 밴드에 가입하기 전 부터 사귄 여자친구 Elisa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버나드 버틀러는 각종 마약과 그루피들과의 관계애 빠진 채로 쾌락적인 자극에 탐닉하고 있는 브렛 앤더슨의 모습을 고깝게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당시 버나드는 밴드 활동에만 신경을 쓰느라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에게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버나드는 밴드의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 또한 이미 1집을 녹음했을 때 부터 "자신의 곡을 망치고 있다."면서 탐탁지 않아 했다.[37]

그래서 2집 녹음이 시작되자 버나드 버틀러는 레코드사에 에드 불러를 해고하고 섹스 피스톨즈의 음반을 프로듀스한 크리스 토마스를 새 프로듀서로 기용하거나 아예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을 하겠다고 건의했으나 크리스 토마스는 비용상의 문제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38] 버나드의 셀프 프로듀싱은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이 거절했다. 결국, 버나드는 밴드에게 에드를 계속 기용할 거라면 자신은 밴드에서 빠지겠다고 통보하기에 이르렀고 밴드와 레코드사가 에드를 계속 기용하기로 결정하자[39] 버나드 버틀러는 녹음이 한칭 진행중이던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버나드는 매니저의 끈질긴 설득끝에 혼자 다른 스튜디오를 임대하여 나머지 녹음을 마치고 1994년 7월 8일 밴드를 탈퇴했다. 버나드는 스웨이드를 탈퇴한 직후, 밴드에 가입하기 전부터 사귄 여자친구 Elisa와 결혼했다.

버나드 버틀러가 탈퇴하자 밴드는 프로듀서 에드 불러와 함께 약 1달간 녹음실에 틀여박혀 앨범 작업을 마무리했고 이후 오디션을 개최하여 버나드 버틀러, 스웨이드의 라이벌 밴드 블러에게 팬레터를 보내던[40] 웨일즈 출신의 18살 소년 리차드 오크스를 기타 포지션으로 영입한 뒤[41], 1994년 10월 10일에 2집 Dog Man Star를 발매한다. 2집 Dog Man Star는 버나드 버틀러 시절 스웨이드 특유의 퇴폐미와 비장미가 강하게 드러나는 앨범으로 전작보다도 더 어둡고 축축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선보였고 전작과 달리 클래시컬한 챔버 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2집 앨범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이 1집 <Suede>를 통해서 열어젖힌 브릿팝 열풍에 가려서 활동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지만 훗날 재평가되어 지금까지도 <Coming Up>과 함께 스웨이드를 대표하는 앨범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3. 3집 Coming Up 발매와 전세계적인 성공


Trash (Coming Up)


Beautiful Ones (Coming Up)


Saturday Night (Coming Up) .

밴드에 새로 가입한 기타리스트 리차드 오크스는 2집 투어를 도는 중 틈틈이 자작곡을 쓰기 시작했다. 리차드 오크스의 첫 자작곡 Together와 Bentswood Boys는 2집 활동 초기에 브렛 앤더슨이 리차드에게 "완전한 형태의 곡을 나에게 들려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뒷풀이 파티에 못 오게 할거야"라고 엄포를 놓은 뒤 리차드를 혼자 숙소에 감금시켜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한다. 리차드는 브렛의 미션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브렛은 투어 후의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리차드의 열정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며 리차드의 곡에 심혈을 기울여 가사를 써서 Together와 Bentswood Boys라는 2개의 곡을 완성하였다. 밴드는 바로 스튜디오에 들어가 곡들을 녹음했으며 브렛은 레코드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리차드가 작곡한 Together를 2집의 마지막 싱글로 내정된 New Generation과 함께 더블 A사이드로 발매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결과 Together는 단순한 B사이드 곡이 아니라 New Generation과 더블 A사이드 싱글로 발매되었으며 밴드는 Together를 2집 활동 말미에 라이브 레퍼토리로 삼았다.

1995년 12월, 밴드는 본격적으로 3집 녹음을 시작했다. 프로듀서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에드 불러였다. 2집이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설레발의 제왕인 NME를 대표하여 영국의 언론들이 버나드 버틀러의 탈퇴를 대서특필하면서 스웨이드가 곧 해체할 것이라는 전망을 담은 기사를 쏟아내자 브렛 앤더슨은 "밴드가 다시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작과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가진 앨범, 즉, 일반 대중들이 즐길만한 팝적인 사운드로 가득찬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채로 앨범 작업에 임했고 본격적으로 작곡에도 관여하기 시작해서 2곡의 자작곡(Lazy, By the Sea)을 3집 앨범에 수록했다. 한편, 3집 녹음을 시작한지 1달이 된 시점인 1996년 1월에 밴드는 사운드를 보강하기 위해 연습실에 들락나락거리던 사이먼의 사촌이자 키보디스트인 닐 코들링[42]을 정규 멤버로 영입하였다. 베이시스트 맷 오스먼은 "2집 녹음 후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와 밴드 멤버들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3집의 방향성이 정해지자 에드 불러와 우리들은 무척 즐겁게 앨범을 작업했다 "라고 회상했다.

그 결과 1996년 9월 2일, 스웨이드는 전작의 음울하며 클래시컬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화려한 기타팝 사운드[43]로 채워진 3집 앨범 Coming Up을 발매한다. Coming Up은 브렛의 비음이 제일 강한 음반이기도 하다.

실패한 사랑을 노래한 전작들과는 정반대로 3집의 가사들은 달달한 러브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브렛 앤더슨이 개인적인 행복을 찾은 것과 관련이 있다. 브렛 앤더슨은 이 시기 Samantha Cunningham라는 인도 태생의 모델과 약혼까지 하는 진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3집 B-side 중에 Samantha의 애칭인 Sam이라는 곡도 있다.) 둘은 1998년까지 연인사이였다.

3집 Coming Up은 발매 직후 150만장이 넘게 팔리고 앨범의 수록곡들 중 절반의 곡이 싱글커트 되는 등 전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했고 앨범 발매 후 스웨이드는 1년간 월드 투어를 돌았다. 밴드는 인도, 태국, 필리핀, 중국 등 동양의 여러나라를 방문했으며 근데 한국은 안 왔다 브릿팝 밴드 사상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물론 서양인의 입장에서) 처음 접한 동양의 신비로운 정서는 이후 밴드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44]

다만, 이 때를 기점으로 버나드 버틀러가 있던 시기까지의 음악을 좋아하던 기존 팬들이 등을 돌리게 되면서 스웨이드의 팬층은 갈리게 된다. 디스크1에는 버나드 버틀러 시절의 B Side 곡을, 디스크2에는 버나드 탈퇴 후 발매된 싱글들의 B Side 곡을 실은 B-Side모음집인 Sci-fi-lullabies (1997)을 통해 밴드의 음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2.4. 밴드의 암흑기


She's in Fashion (Head Music)


Can't Get Enough (Head Music)

브렛 앤더슨은 1997년까지 행해진 Comimg Up 월드투어를 하면서 30대가 되었고 이제 자신이 더 이상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젊은 청년"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으며 1998년에는 약혼녀 Samantha Cunningham과 파혼했다. 한편, 밴드는 3집이 엄청나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후 4집 앨범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브렛 앤더슨은 당시 젊은층을 중심으로 새로 떠오르고 있던 일렉트로니카 장르에 매우 큰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 결과 밴드 멤버들은 4집 앨범을 프린스신스팝의 영향을 받은 일렉트로닉한 사운드의 앨범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밴드는 앨범의 프로듀서를 기존의 에드 불러에서 뉴 오더의 앨범들을 프로듀싱한 것으로 유명한 스티브 오스본으로 교체했다.

1999년 5월 3일 발매된 4집 Head Music은 전작의 주요 작곡자였던 리차드 오크스보다 브렛 앤더슨과 닐 코들링의 비중이 두드러진 앨범으로 스웨이드의 곡 중 유일하게 브렛이 작사에 참여하지 않은 곡(닐 코들링이 작사,작곡한 Elephant Man)이 들어있다.

스웨이드가 처음 해체했을 때 브렛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밝힌바에 의하면 "4집 앨범에서 공식적으로 리차드가 작곡에 참여한 곡은 Electricity, Everything Will Flow, Down 3곡인데 그마저도 Down이란 곡은 실질적으로 자신이 작곡했으나 '리차드 오크스가 3곡이상 작곡에 참여해야 한다.'는 레코드사와의 계약조건 때문에 리차드의 이름이 들어간 곡"이라고 한다.

4집 녹음을 시작했을 때 브렛과 닐의 상태는 최악이었는데 브렛은 Samantha와의 관계가 파탄난 후 스튜디오에 그의 마약친구들을 불러 크랙헤로인에 탐닉하고 있었고 닐은 투어 중 얻은 만성피로증후군으로 앓고 있었다. 브렛과 닐이 신시사이저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실험하고 있을 때 달리 할일이 없던 다른 멤버들은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가곤 했다고하며 4집 작업 당시 자신의 역할이 현저하게 적어진 리차드는 리허설 때 자신이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곡들의 연주를 거부했다가 밴드에서 해고될 뻔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5집에 참여하게 된 알렉스 리가 거론되었다고 한다.[45]

4집 Head Music은 스웨이드가 발표한 앨범들 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사운드를 선보인 앨범이었으며 음악 평론가들은 대체적으로 "사운드 과잉"이라며 앨범을 비판했고 비록, 전작의 후광을 등에업고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하긴 했지만 상업적인 성과도 기대했던 것보다 못 미친 수준이었다.

브렛은 훗날 인터뷰에서 3집과 4집의 시기를 "버나드 없이도 밴드가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약에 빠진채로 몸부림치던 시기"라고 회고했다.


Positivity (A New Morning)


Obsessions (A New Morning)

이후 닐 코들링이 결국 만성피로증후군으로 탈퇴하고 브렛은 약물중독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면서 밴드는 긴 공백기를 가지다가 2002년, 새로운 키보디스트로 알렉스 리를, 프로듀서로 더 스미스, 블러, 크랜베리스 등의 히트 앨범을 프로듀스한 스티븐 스트릿을 영입하여 새 앨범 A New Morning을 발매한다.

A New Morning은 전작들과는 정반대로 긍정적인 곡조의 곡들이 앨범을 가득 채웠으며 브렛 앤더슨 특유의 비음이 완전히 없어지고[46] 작곡측인 측면에서 한 멤버가 주가 되어 작곡을 하지 않고 여러 멤버들의 곡을 배분하여 앨범에 싣는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앨범이었지만 이는 스웨이드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진 평범한 팝 앨범이 돼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한다.

브렛 앤더슨은 A New Morning 앨범에 대해 "밴드가 발매한 앨범들 중 가장 많은 비용이 사용된 앨범으로 내가 최초로 마약에 의지하지 않고 만들어낸 앨범이지만 동시에 만들지 말았어야 했던 앨범 "이라는 평을 내렸다. 실제로 스웨이드는 재결성한 이후 5집 앨범의 수록곡들은 라이브로 부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2.5. 밴드의 해체

2003년 역대 스웨이드의 싱글들을 모은 앨범 <Singles>와 밴드 공식 전기인 <Love and Poison>이 발매되었고 이와 동시에 브렛 앤더슨은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스웨이드의 해체를 선언한다. 막판에 런던 현대미술연구소(ICA)에서 5일밤동안 한 공연이 꽤 인구에 회자되었다. 첫날밤은 1집 컨셉으로 1집 곡 전부, 둘쨋날은 2집 컨셉으로 2집 곡 전부, 셋째날은 3집. 이런식으로 전 앨범을 불렀으니 괜찮은 마무리였달까.

스웨이드 해체 후, 리차드 오크스는 Sean McGhee와 Artmagic이라는 프로젝트를 결성해서 EP 한장을 발매했다.

사이먼 길버트는 태국에서 성소수자로만 구성된 그룹 Futon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닐 코들링과 멧 오스먼은 주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했으며 브렛 앤더슨의 솔로시절 라이브 투어를 같이 돌기도 하였다.

스웨이드 해체 후 브렛 앤더슨은 탈퇴한 전멤버 버나드 버틀러와 The Tears라는 그룹을 결성하였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앨범 한 장만을 내고 해체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연세대 대강당에서 내한공연을 가졌는데 브렛은 관객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47] 솔로 활동 시기 다시 한번 내한하여 공연을 가졌고 2010년 스웨이드를 재결성 후 2번의 내한공연을 펼쳤다.[48]

The Tears는 2006년 브렛의 솔로 활동과 버나드의 프로듀서로의 완전한 전업을 이유로 해체된다.[49] 이 밖에 활동이 중지된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투어 중 갑자기 브렛 앤더슨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브렛이 더 이상 투어를 돌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의 공연들에서 브렛 앤더슨은 선글라스를 끼고 공연했다.

참고로 버나드 버틀러는 한국에서 솔로로 깜짝 내한 공연을 펼친적이 있었다. 후지 록 페스티벌 행차로 일본에 가다가 비자 문제로 서울에서 하루 묵다가 스팽글이라는 클럽에 들르게 되었다. 거기서 스팽글 죽돌이 죽순이들과 카드게임 "shit head"를 했었는데, 버나드 버틀러가 카드게임에서 지면 다음날 공연하는 것으로 내기가 되었었다. 버나드 버틀러는 졌고, 그날 밤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지에 버나드 버틀러 공연 긴급 공지가 올라왔고, 그 다음날 스팽글에서 깜짝 공연을 하였다. PC 통신망을 타고 소문이 퍼져 약 200명이 모여 관람. 100명은 공연을 못보고 돌아가야만했다. 공연 전날 사람들 앞에서 닉 드레이크의 Nothern Sky를 연주했다고 한다. 공연 멤버 중 키보디스트는 전 Denim 의 멤버였다. 출처는 크르르르 위키

The Tears의 해체 후 브렛 앤더슨은 4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Leo Abrahams와 함께 작업한 3집과 4집은 메인 스타덤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평균 리뷰점수로 7점을 받는 등 나름 성공했다. 브렛의 솔로 활동시 스웨이드의 멤버였던 맷 오스먼과 닐 코들링이 각각 베이스와 키보드 세션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2.6. 재결성

결국, 2010년, 브렛 앤더슨은 버나드 버틀러를 제외한 3집 시절의 멤버들로 스웨이드를 재결성하여 투어를 시작했다. 새로운 베스트 앨범과 이전에 발매한 앨범의 디럭스 에디션 등도 새로 나왔다.

스웨이드 재결성 관련 인터뷰 기사 : 런던은 우리가 접수한다 : Interview

2011년 한국에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로 첫 내한을 했다. 마지막날 엄청난 폭우속에서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 11년 지산락페의 최고 공연으로 꼽히고 있다. 브렛 앤더슨은 공연 시간내내 사방팔방 뛰어다녔고 'Beautiful Ones'에서는 귀여운 표정까지 지었다. 특히 'Saturday Night'에선 무대 밑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소통했다. 팬들은 이 때가 스웨이드 최고의 내한이라고 꼽고 있다.

2012년 신보작업을 하고 있다고 공식 발표했고 러시아에서 열린 공연에서 처음으로 신곡들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앨범에 실린 곡은 Sabotage 한 곡이었다.) 브렛은 신작 앨범에 대해 "3집 Coming Up 앨범까지 프로듀스를 맡은 에드 불러가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앨범의 분위기는 예술가가 마약을 하고 만든 느낌의 앨범이고 2집과 3집의 중간적인 사운드" 라고 밝혔다. 또한 10년만에 컴백하여 앨범을 내는 밴드의 앨범이 아닌 데뷔 앨범을 내는 신인밴드의 자세로 앨범을 제작했기에 지금까지 만든 앨범 중 가장 힘들게 작업한 앨범이라고 한다.

It Starts and End With You (Bloodsports)


Hit Me (Bloodsports)


For The Strangers (Bloodsports)

2013년 2월 첫 싱글 <It Starts and End With You>을 발표하며 다시 활동을 재개한 스웨이드는 3월 18일 6집 <Bloodsports>를 발표했다.[50] 6집의 평가는 메타크리틱 82점으로 높은 편이다. 새로운 무엇은 없지만 기존 스웨이드가 선보였던 음악들을 맛깔나게 절충했다는 평이 대체적이다.


2015년 9월 24일 싱글 공개된 곡, Outsiders


Like Kids (Night Thoughts)

2016년, 7집 <Night Thoughts>를 발표하여 팬들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스웨이드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했던 <Bloodsports>의 기세를 이어갔다는 반응. 오는 2016년 8월 12일. 펜타포트 록페스티벌 내한을 확정했다

2016년 8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첫번째 날 헤드라이너로 등판하여, 화려한 무대매너와 훌륭한 공연으로 관객들을 열광하게 했다. 특히 공연 중 브렛은 전성기 시절의 마이크 돌리기를 선보이는 동시에 젖다 못해 찢어진 셔츠로 뇌쇄미를 폭발시키며 수 많은 관객들을 입덕시켰다.


2018년 6월 4일 새 앨범 The Blue Hour의 첫 싱글 The Invisibles가 공개되었다.


Suede - Life Is Golden (Official Video) (가사 번역)

2018년 9월 21일 8집 <The Blue Hour>를 발매하였다. 프로듀서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스매싱 펌킨스, 나인 인치 네일스 등과의 작업으로 유명한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2022년 5월 22일, 밴드는 9집의 선행 싱글 'She Still Leads Me On'을 발매했다. 9집은 Autofiction라는 제목으로 2022년 9월 16일에 발매되며 브렛에 의하면 "더 폴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펑크 사운드를 시도한 앨범으로 스웨이드 멤버들 5명과 프로듀서 에드 불러가 스튜디오 안에서 오로지 스스로의 역량에 기대서 만들었다. 또한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담은 앨범으로 멤버들의 사소한 연주 실수도 여과없이 앨범에 수록되었다."라고 한다. 프로듀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에드 불러.


9집 Autofciton 앨범을 위한 단편영화도 만들어 공개했다.

2024년 8월 23일 금요일, 단독 내한공연을 확정하였다. 장소는 서울 KBS아레나. 비록 같은 날 열린 칸예 웨스트의 리스닝 파티 때문에 대한민국 대중들의 관심은 못 끌었지만 덕분에 관객들이 스웨이드의 찐팬들로 채워져서 세트리스트 중 대다수 곡들의 후렴구를 때창하는 놀라운 모습를 보여주었다.

브렛 앤더슨은 이런 열정적인 한국 관객들의 반응에 흥이 나서 자주 관객석에 난입하는가 하면 공연 중반부 즈음에 멘트를 하다 "이러다가 심장마비가 걸릴 것 같다. 잠시만 쉬겠다."고 말한 후 잠시 선풍기 앞에서 쉴 정도로 열정적으로 노래를 불렀고 공연 말미에 "꼭 다시 오겠다. 기대하고 있어라 한국!"이라고 소리쳤다. 밴드 멤버들은 팬들이 공연이 끝난 후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자신들의 퇴근길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싸인을 해주었다.

이후 베이시스트 맷 오스먼이 트위터에다 "올해 돈 투어 중에서 제일 끝내주는 공연이었다. 다시 한번 한국에 공연하러 오겠다."고 적었으며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는 내한공연 전체를 찍은 팬의 유튜브 영상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하였다.

3. 디스코그라피

Suede Discography
Suede Dog Man Star Coming Up Head Music A New Morning Bloodsprots Night Thoughts The Blue Hour Autofiction

4. 여담

  • 보컬리스트 브렛 앤더슨은 비음을 쓰는 특유의 창법으로 유명하다. 같은 영국의 밴드 플라시보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인 브라이언 몰코의 창법이 브렛 앤더슨과 비슷한 편이다.
  • 데뷔 초 자신을 "남자 경험이 없는 양성애자"라고 말하면서 중성적인 이미지로 유명해진 브렛은 2013년 인터뷰에서 자연주의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디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했으며 현재 애가 둘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뮤지션들의 사생활에 대하여 대중들이 관심을 갖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는 커밍아웃게이이며 그가 동성애자로 살아가면서 겪었던 일화들은 브렛의 가사에 영감을 주었다.
  •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와 1996년 영입된 키보디스트 닐 코들링은 서로 친척 관계이다. (정확히는 사촌지간이다.)
  • 2019년 현재 기준 SNS를 하는 멤버는 맷 오스먼과 닐 코들링 뿐이다. 플랫폼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51] 브렛 앤더슨도 트위터 계정이 있기는 하나, 개인이 아닌 소속사에서 주로 운영 중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reallybanderson 라는 트위터 계정은 브렛 앤더슨의 계정이 아닌 사칭 패러디 계정이다. 관련 기사

[1] 브렛 앤더슨 자서전 『칠흑 같은 아침 』 135페이지[2] 브렛 앤더슨이 10대 시절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 Emily에 대해 쓴 최초의 자작곡. 당시 연인이던 저스틴 프리쉬먼과 공동 작업한 곡이다.(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3] 브렛과 저스틴은 연인이 된 후 대학교 수업을 출석하지 않고 데이트를 하는 등 자유로운 캠퍼스 라이프를 누리고 있었고 덕분에 성적이 워낙 좋지 않아서 한 학기만 더 낙제하면 대학교에서 제적당할 위기였다고 한다.[4] 대학생 시절부터 브렛 앤더슨은 중성적인 스타일의 꽃미남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저스틴 프리쉬먼이 그를 봤을 때 첫인상도 "저 사람의 성별이 남성이라면 꽤 귀엽겠는걸."였다고. 브렛은 저스틴과의 첫만남을 회상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에게 처음 말을 건낸 그녀를 보고 "말을 더듬는 언어장애를 갖고있나"라고 생각했다 한다. 이후 브렛은 저스틴과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했고 그녀에게 푹 빠져서 자신의 대학 전공을 도시계획과에서 그녀와 같은 건축과로 바꾸고 저스틴 부모님이 그녀를 위해 마련해준 집에서 그녀와 함께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5] 1980년대 초반 데뷔한 소피스틱 팝 밴드. 스미스랑 성향이 유사하며 브릿팝과 챔버팝에 큰 영향을 미쳤다.[6] 스웨이드가 최초로 녹음한 곡으로 1990년에 열린 인디 밴드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곡이다.[7] 1990년에 발매된 스웨이드의 데뷔 싱글이었지만 밴드 멤버들이 곡의 완성도에 불만을 품어서 초판 500장 대부분을 수거해서 파기했다고 한다.[8] 훗날 브렛 앤더슨은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스웨이드의 무명 시절까지를 다룬 자서전 『칠흑 같은 아침』에서 이 곡을 마치 성관계를 해보지도 않은 찐따가 쓴 곡 같다며 혹평했다.[9] 버나드 버틀러는 지금도 스미스가 세계 최고의 밴드이고 조니 마가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며 작사력으로도 밥 딜런보다 모리세이가 한 수 위라고 주장한다(...).[10] 저스틴의 아버지는 2차세계전쟁 도중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 모든 가족을 잃어버리고 난민아동들을 위한 기숙학교로 보내졌던 유대계 헝가리인이었다. 그는 후에 부유한 건축가가 되어서 earth-quake-proof이라는 재단을 설립했고 또 런던에 있는 가장 유명한 명소들 중 하나인 Centrepoint 와 Canary Wharf의 설계에 참여했다.(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11] 사이먼 길버트는 1990년 6월부터 스웨이드와 같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1년에 정식으로 스웨이드의 멤버가 되었다.[12] 그 전까지 밴드는 드럼 머신을 사용하거나 세션 드러머들을 영입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무려 더 스미스의 드러머였던 마이크 조이스가 이들의 드러머 구인 광고를 보고 연락하여 잠시 스웨이드의 드러머로서 활동하기도 했다.[13] Animal Nitrate 뮤비 초반에 나온 아파트가 바로 브렛이 살던 아파트이다. 저스틴은 브렛이 거주할 아파트를 알아봐주고 아파트를 구입할 돈도 일부 보태줬다고 한다.[14] 당시 브렛은 담배를 구입하러 잠시 밖으로 나갔을 때를 제외하면 하루종일 집에 틀여박혀서 앨런과 코카인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며 믹 재거가 출연한 영화 <퍼포먼스> 등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15] 브렛 앤더슨 자서전 『칠흑 같은 아침』[16] 다른 인터뷰에서 브렛은 "만약 저스틴이 밴드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 거야. 저스틴이 나간 건 개인적인 동기 부여도 됐고 꼬였던 연애사가 정리되기도 했으니까."라고 회상하였다.[17] 데이먼 알반은 엘라스티카 데뷔 앨범 'Elastica'에서 키보디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18] 엘라스티카의 청일점 드러머이자 저스틴 프리쉬먼과 함께 엘라스티카를 만든 저스틴 웰치는 6주간 스웨이드의 드러머로서 활동했으며 이를 계기로 저스틴 프리쉬먼과 친해지게 되었다. 웰치는 스웨이드가 재결성해서 Bloodsports를 발표하고 2013년 투어를 돌때 사이먼 길버트가 폐렴으로 투어를 잠시 하차하자 그를 대신해서 드럼을 맡기도 했다.[19] <Pantomime Horse>와 <Moving>은 같은날에 완성한 곡이라고 한다!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20] 다만, 위에 서술된 것 처럼 아직 밴드에 남아있던 저스틴 프리쉬먼은 달라진 밴드의 성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밴드에서 나가버렸다.[21] 1992년 1월에 있었던 NME 쇼에서 스웨이드의 공연을 본 후 Nude 레코드사의 사장 사울 갤펀이 큰 인상을 받고 밴드를 찾아와 자신의 레이블과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다.[22]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23] 이 기록은 1년 뒤인 1994년 오아시스의 데뷔 앨범이 갱신했고 2006년 악틱 몽키즈의 데뷔 앨범이 다시 갱신했다.[24] 그래서그런지 두 밴드는 상당히 친하다. 스웨이드의 데뷔 싱글 The Drowners는 매닉스 1집 활동 당시 그들의 라이브 레퍼토리 중 하나였으며 2023년부터는 아예 두 밴드가 함께 월드 투어를 돌고 있다.[25] Stay Together는 7분짜리 대곡으로 작곡자인 버나드는 이 곡을 당시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곡이라며 자신이 작곡한 스웨이드의 곡들 중 특히 좋아하는 곡이라고 호평했지만 반대로 곡을 작사한 브렛은 Stay Together를 가장 싫어하는 스웨이드의 곡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곡을 싫어하는 이유는 곡을 녹음할 즈음에 버나드와 자신이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당시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 Anick과도 갑자기 헤어지게 되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각종 마약에 취한채 시간을 보내던 당시 자신의 괴로웠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와 베이시스트 멧 오스먼은 이 곡을 녹음할 당시 밴드의 살벌한 분위기에 진절머리가 나서 녹음 중 여러번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26] Dreams, Ode my Family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락밴드.[27]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크랜베리스는 1집이 영국에서 별 반응을 못받자 실망하고 밴드를 해체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웨이드의 오프닝 공연을 맡으면서 미국에서 인기를 얻게되고 이를 발판삼아 전세계적으로 성공한다. 2집은 아예 미국에서 녹음하기까지 했다.[28] 이 이름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아니, 그녀가 허가하지 않는 이상 유지될 수 밖에 없다.[29] 버나드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밴드에 복귀했으나 밴드 멤버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해서 공연 대기시간에 크랜베리스의 투어 버스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심지어는 혼자 택시를 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간적도 있다고 한다.[30] 2집 앨범의 첫 싱글. Nude 레코드사에서는 New Generation을 첫 싱글로 내놓자고 말했지만 브렛 앤더슨은 We are The Pigs야말로 앨범의 사운드를 대표하는 곡이라며 해당 곡을 첫 싱글로 발표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31] 브렛 앤더슨이 가장 좋아하는 스웨이드의 곡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곡은 Dog Man Star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빠짐없이 밴드의 라이브 공연에서 연주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해당 곡의 작곡자인 버나드 버틀러는 오케스트레이션이 들어간 앨범 버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Dog Man Star 20주년 박스셋이 나오면서 원 버전이 공개되었다.[32] 우연히 인연이 닿은 상대방과 잠자리를 가진 후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남성 화자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상대방이 자신은 레즈비언이며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자 이성애자인 남성 화자는 그녀의 성정체성을 힐난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포기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슬퍼한다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은 10분짜리 대곡. 원래 버나드는 이 곡을 25분 이상의 대곡으로 작곡하였고 앨범에 적어도 10분은 넘게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프로듀서 에드 불러는 앨범에 이 한 곡만 너무 돋보이게 만들 수는 없다며 길이를 반으로 짜르자고 했다고 한다.[33] 이 곡을 녹음할 당시 버나드 버틀러는 Vox Magazine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브렛 앤더슨을 "락스타의 쾌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는 게으른 정키(마약중독자)일 뿐 뮤지션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놈이다."라며 비난했는데 하필이면 잡지의 발행일이 이 곡의 보컬 녹음을 하는 날과 겹쳐서 녹음날 아침 그 기사를 브렛이 보고 말았다. 그간 버나드의 독단적인 행동에 쌓인 것이 많았던 브렛은 폭발하여 버나드에게 화를 내며 따졌고 버나드는 자신의 말이 심했다며 브렛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이후 보컬 녹음이 시작되었고 브렛은 버나드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는 심정으로 보컬을 녹음하였다고. Dog Man Star 20주년 박스셋이 나오면서 원 버전이 공개되었다.[34] 버나드는 원래 그냥 편하게 드럼 머신을 사용하려 했으나 자신이 너무 독단적인 것 같아서 일부러 사이먼에게 비트를 녹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다만 버나드는 자신이 구상했던 것 처럼 드럼 비트가 연주될 때 까지 사이먼에게 계속 연주를 다시 해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참다 못한 사이먼이 New Generaion의 데모를 녹음하던 중 화를 내며 드럼스틱을 버나드에게 던졌다고 한다.[35] <Stay Together>, <Black or Blue>, <The Wild Ones> 등의 곡들은 그녀와의 관계에서 나온 산물이다.[36] 브렛은 1집 활동 도중 헤로인을 접하게 되고 이내 헤로인에 중독되었다.[37] 버나드 버틀러는 밴드 탈퇴 후 인터뷰에서 스웨이드의 1집 앨범을 레코딩 할 때 프로듀서 에드 불러로부터 "No, you can't do that"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스웨이드 1집의 최종 마스터 버전을 다 들은 후 앨범을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지고 싶었다고 밝혔다.[38] 같은 시기 크리스 토마스는 펄프에 고용되어 명작 Different Class 를 만들게 된다. 재밌는 이야기는 펄프의 초기 메이저 프로듀서가 스웨이드의 프로듀서 에드 불러 였다는 것. 크리스 토마스로 프로듀서가 교체된 이유 또한 "에드가 스웨이드만 신경쓰고 우리 밴드는 신경쓰지 않는데 차라리 비싼 프로듀서를 고용하면 프로듀서가 더 밴드의 음악에 신경쓰지 않을까?" 였다.그래서 나온 결과물이 Different Class.[39] 버나드와 반대로 브렛과 멧은 "프로듀서가 밴드의 음악을 더 듣기 좋게 만들었다."며 에드 블러의 손을 들어주었다.[40]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는 만약 리차드 오크스가 스웨이드라는 밴드의 광팬이었다면 2집 활동을 끝마치자마자 밴드를 탈퇴했을 거라고 회고했다.[41] 당시 리차드는 버나드의 탈퇴 소식을 접한 뒤 스웨이드에게 자신의 데모를 보내면서 "내가 잘할 수 있다는걸 알고, 스웨이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결과 리차드 오크스는 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밴드의 새 기타리스트로 뽑힌다.[42] 닐과 브렛은 둘다 채식주의자에다 좋아하는 음악들이 비슷하고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등 서로 통하는 면이 많았기에 만난지 얼마 안 돼서 서로 절친한 친구가 됐다고 한다.[43] 3집의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는 "모든 데모 트랙들은 어쿠스틱 기타, 봉고, 탬버린, 브렛의 목소리 등으로 구성되었고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행한 작업은 마크 볼란이 특유의 사운드를 만든 방법론과 동일했다."고 밝힌바 있다.[44] 4집 앨범에는 동양 풍의 곡조가 많이 삽입 되어있으며 불교의 교리들과 명상은 브렛 앤더슨이 마약을 끊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커밍아웃한 게이인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는 밴드 해체 후 동성애에 관대한 태국으로 이주하기까지 한다. 그는 태국에서 열린 성소수자 가수 오디션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45] Strangelove의 키보디스트이자 기타리스트. Coming Up 활동시에 브렛이 Strangelove의 앨범에 코러스 세션으로 참여하여 알게되었다.[46] 당시 브렛 앤더슨의 주치의가 브렛에게 계속 기존의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다면 목소리를 영원히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47] 당시 브렛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서 선글라스를 쓰고 투어를 돌았는데 유일하게 공연 중간에 선글라스를 벗은 공연이 바로 대한민국에서의 공연이었다. 실재로 The Tears 내한공연의 분위기는 규모는 작았지만 열광 그 자체였고 공연이 끝난 후 시작된 브렛과 버나드의 팬미팅에서도 브렛의 팬들 중 한명이 그 당시 브렛이 자주입고 다녔던 스타일과 비슷한 양복 한 벌을 맞춰서 선물하고 버나드의 팬들 중 한명은 버나드의 솔로 앨범에 싸인을 받으러 앨범을 갖고 왔지만 주최측에 의해 압수되었다가 (The Tears는 스웨이드의 재결성이 아닌 새로운 밴드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팬미팅 때 기존 스웨이드의 물품을 반입금지 시켰다.) 버나드가 그 앨범이 자신의 솔로 앨범임을 알아차려서 무사히 사인을 받는 등 많은 해프닝이 있었다.[48] 2011년 지산 락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서, 2016년 8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첫번째 날 헤드라이너로서 공연하였다.[49] 2000년대부터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보다 프로듀서 활동의 비중이 높아졌던 버나드 버틀러는 2008년 이후 프로듀서로의 완전 전업을 선언했다. Duffy의 대박 데뷰앨범 Rockferry역시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다. 2002, 2003년 동안 리버틴즈의 싱글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피트 도허티가 영 상태가 안 좋던(...) 때라 버나드와 팀워크가 맞지 않아 도로 그만둔다. 이 때를 두고 버나드 버틀러는 후에 말하길, "나와 브렛 앤더슨 사이의 불화는 리버틴즈 내의 불화와 그 막장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였다. 애초에 완벽주의자 버나드와 즉흥 연주파 피트 도허티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50] BDSM 행위에서 폭력적인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51] 참고로 이전 멤버인 버나드 버틀러도 인스타그램 및 트위터 계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