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군인에 대한 내용은 박기서(북한)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박기서 朴琦緖 | |
이름 | 박기서 (朴琦緖) |
본관 | 반남 박씨[1] |
출생 | 1948년 12월 9일[2] ([age(1948-12-09)]세) |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 (現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 |
거주지 |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
직업 | 택시 기사[3] |
차량 | 기아 K8[4] |
가족 | 부인 원미자, 슬하 1남 2녀[5] |
신체 | 160cm, 63kg |
종교 | 천주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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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운전 기사. 백범 김구의 암살범 안두희의 집을 찾아가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그를 자신이 수제로 제작한 둔기인 일명 '정의봉'으로 살해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안두희를 살해했을 당시의 직업은 버스 기사.이후 1998년 3월 1일 대사면 때 대상자에 포함되어 동년 3월 13일에 수감된 지 1년 5개월만에 출소했으며, 이후 버스 기사로 일하다가 현재는 택시 기사로 일하고 있다.
2. 안두희 살해
자세한 내용은 안두희 피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2.1. 출소 이후
출소 후에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으로 일자리, 집[6] 등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사건 전 일하던 소신여객에서는 박기서가 출소하자 바로 복직시켜주었고 70-2번 노선으로 4년간 근무하다가, 퇴사 후 운전경력을 인정받아 2002년 개인택시 면허를 취득하여 2021년 6월 기준으로 부천에서 택시기사로 근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관련 인터뷰2004년 각종 친일반민족성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던 김완섭을 구타하면서 불구속 입건된 적이 있다. 김완섭은 꿍꿍이가 있었는지 박기서에 처벌 불원서를 내어 풀어주었고 이때 구타당한 김완섭은 "박기서는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가 아니라, 나 김완섭 구타범 박기서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나, 당연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
2011년 김삼웅 前 독립기념관장과 사진을 찍었다. 안두희 주살 15주년 기념 인터뷰
2013년 8월 4일 장준하 관련 최고 의혹 용의자 김용환을 찾아가 따귀를 때리고 추궁하기도 했다. 이후 김용환이 박기서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별다른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한동안 정의봉나누기라는 단체를 통해 정의봉을 보급하기도 했다. 박기서 본인이 직접 대나무를 불로 구워 만든 수공예품이라고 하는데 용도는 안마봉이다. 이 정의봉은 특허를 냈다고 한다. 다만 작은 후원만을 통해 보급한다고 한다.
2019년 연합뉴스 TV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김구 70주기 연합뉴스 영상
2023년 8월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서 서울의소리 유튜브와 인터뷰를 했다. 윤석열 정권이 역적 짓을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
3. 정의봉(正義棒)
정의봉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이름이 비슷한 북한의 언덕에 대한 내용은 정일봉 문서 참고하십시오.박기서가 안두희를 격살할 때 사용한 도구이다. 이 도구는 사건 이후 경찰이 증거물로 압수하였으나 재판 후에 돌려주었다. 범행 도구는 형 선고 때 선고내용으로 함께 몰수하여 폐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물며 여간한 범죄도 아니고 살인에 사용한 둔기를 범인에게 돌려줬다는 점에서 판결을 내린 판사도 이 사건을 일반적인 살인과는 매우 다르게 취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
정의봉 옆에 쓰인 글자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논어 현문편 13장에 나오는 구절로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주어라."라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갇혔을 때 쓴 글로도 유명하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 사건 이후로 '정의봉'이라고 써놓은 몽둥이가 시위나 집회 때 흔히 사용되곤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2016년 11월 12일 민중총궐기에서 정의봉을 들고 있는 어떤 할아버지가 다큐 3일에서 인터뷰한 장면이 꽤나 화제가 되었다.
박기서가 사용했던 정의봉은 쭉 한지로 감싼 채 박기서의 집에 잘 보관되어 있다가 2018년 10월 안두희 살해에 사용한 밧줄과 장난감 권총과 함께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역사의 한 자료로 보존되었다.
4. 평가
4.1. 긍정적
안두희는 김구를 죽이고 나서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1953년 소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군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리고 제대 후 강원도 양구로 건너가 군납업자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렇듯 김구를 암살했음에도 잘 살고 있던 그를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 좋게 보지 않았다.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박기서에게 살해당한 것은 지은 죗값을 뒤늦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따라 박기서에게 정의구현이라는 호의적인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사고가 일어난 당시인 1996년은 대한민국이 1987년에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군사독재에서 벗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던 해다 보니 민족주의 열풍이 뜨겁던 때였고, 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에 비해 낮은 편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8] 상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루머 또한 당시 박기서의 행동에 통쾌해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박기서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를 칭찬하는 댓글들이 많이 올라오며 '반도의 퍼니박, 기서나이트, 박시탈, 기서노트'라고 긍정적 희화화를 하는 표현도 있다.
당시 안두희에 대한 여론이 얼마나 나빴는지는 사망 후 장례식의 풍경에서도 볼 수 있다. 안두희의 빈소에는 조문객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가족은 이미 외국으로 보내서 어쩔 수 없다 치지만 친척조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영정사진도 없이 안 두 희 라는 이름만 걸려 있었을 정도였다. 유일하게 옆 빈소에서 장례 일을 하던 장의사가 대신 촛불을 켜고 정리를 해 주는 선에서 그쳤다.당시 기사
사적제재가 금지되어 있는 근본 원인인 주관성과 인간의 비합리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별의별 다양한 사고방식이 존재하는 대중에게 주관에 따른 제재를 허용한다면 온갖 비합리적인 가해와 보복이 판을 칠 것이고 사회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적제재가 금지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기서의 사적제재는 법이 금하고자 하는 "비합리적인 제재"에는 해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대중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제재였기 때문에 평가가 나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사법체계에 의해 안두희에게 여론이 용납할 수 있는 정도의 정당한 단죄가 이루어졌다면 박기서의 사적제재가 정당성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6.25 전쟁으로 인해 법적 제제가 마비되고 죄에 대한 처벌의 집행이 유고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법적 제제가 붕괴되었을 때, 처벌은 누가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법적 체계가 마비된 혼란한 시기에 민의에 일치하는 사적제제였기에 국민정서적으로 정당화된 부분이다. 그렇다고 사적제제라는 점이 완전히 정당화 되지는 않는다.
출소 이후에도 큰 도덕적 악행이나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았고 몇몇 사건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그 상대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거나 역시 역사적 인물의 죽음에 관한 의혹을 받고 있는 용의자일 뿐이라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점도 긍정적인 인식의 이유로 들 수 있다. 그가 출소 후 무고한 사람에 대해 살인이나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면 안두희 살인은 명분일 뿐이고 원래 사람 자체가 못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음으로서 행동은 잘못되었을지언정 정의감 자체는 진짜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라 볼 수 있다.[9]
오프라인에서도 김구와 관련한 전시회나 시민단체들의 민족주의 고취 행사에 심심찮게 이 사람이 정의봉을 들고 있는 사진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적지 않은 한국인들로부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시대의 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4.2. 부정적
박기서는 엄연히 법의 테두리 밖에서 독단적으로 사적제재를 저질렀기 때문에 법리적으로 비판감이 된다. 21세기 이후 법치주의적인 성향이 한국 사회 전반에 확산되면서 살인이라는 사적제재를 저지른 그가 사회적으로 마치 의사처럼 떠받들어지는 데 대한 불편함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떠나서 사적제재는 현대사회에서 당연한 범죄이며 박기서는 살인범이다.안두희 살인 외에도 김완섭에 대한 폭행이나, 확실하지 않은 의혹만 믿고 죄의 유무도 불확실한데도 김용환[10]을 찾아가 그의 뺨을 치는 등 그 외 폭행을 저질렀던 것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5. 관련 문서
[1] 판관공(병균)파 25세손 ○서(○緖) 항렬이다.[2] 음력 11월 9일.[3] 안두희 암살로 구속 전에는 버스 기사였고, 택시 기사는 출소 이후부터 하는 중. 한때 퇴직하였다고 알려졌으나, 2020년 8월 기준으로 어느 교통 마이너 갤러리 유저의 글을 통해 여전히 일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부천시 면허의 개인택시이다.[4] 2021년 11월 당시 택시차량이다. 이전 차량은 NF 쏘나타, 기아 K5 2세대.[5] 이 중 둘째 딸은 30세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6] 현재 박기서는 사건 당시 거주지에 그대로 거주하고 있다. 제공된 집은 처분한 것으로 추정된다.[7] 설령 돌려주지 않고 몰수한다고 해도 국민 정서상 범행에 사용한 도구가 역사의 한 자료가 되어 박물관행이 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만약 돌려주지 않고 몰수했으면 독립기념관 등 국/공립 박물관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8] 거기다 바로 전 해에 해방 50주년 기념 분위기를 성대히 치르면서 반일과 민족주의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고조된 면도 있다. 7, 80년대보다 반일 민족주의 감정이 도리어 훨씬 심했던 시기였던 것. 당장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기도 90년대 중반이었다.[9] 반대의 사례로 조세형을 들 수 있는데, 처음 체포되었을 때는 부유층만을 터는 의적이라는 인식도 있었고 출소 후 종교에 귀의하면서 개과천선한 인물로 이미지가 좋았지만 얼마 안 가 상습적인 절도를 저지르다 체포되면서 그냥 원래 사람 자체가 질 나쁜 도둑이었다는 식으로 평가가 바닥으로 추락했다.[10] 장준하의 사망과 관련해 타살 의혹이 있는데, 장준하가 실족사했다는 목격 증언을 김용환이 하여 단순 실족사로 처리됐다. # # 자세한 내용은 장준하 문서 참고.[11] 박기서 이전에 안두희에게 사적 제재를 가한 인물. 안두희 처벌 탄원운동을 하던 권중희는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안두희를 쫓아다니면서 폭행을 통해 안두희의 증언을 유도해 냈다고 한다. 참고로 권중희의 저서를 읽고 박기서가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둘은 구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