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김해 허씨 |
출생 | 1909년 5월 9일[1] |
경상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2] | |
사망 | 1997년 5월 19일[3] (향년 88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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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2. 생애
1909년 5월 9일 경상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허발(許坺)과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태순(李泰舜)의 딸 사이의 4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자신이 태어난 임은동에 대해 "멀리로는 낙동강이 흘러가고 갯벌에는 갈대숲이 무성했다. 바람이 부는 날엔 온통 은빛 갈대가 꼭 춤추는 것 같은 그림 같은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동네에서 사금파리를 주워 소꿉장난을 하던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글재주로 칭찬받은 사촌이 부러워 숙부의 글쓰기를 도우면서 틈틈이 공부하기도 했지만, 이웃집 앵두를 따 먹다 그 집 어른에게 들키자 혼날 까 무서워 해 질 녘까지 숨어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8살 무렵, 허은은 가족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했다. 그곳의 삶은 매우 험난했다. 허은 일가는 처음에 통화현 다황거우에 거주했지만 곧 진두허로 이동했는데, 이는 소작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다시 만리거우를 거쳐 유하현의 우두거우로 이동했다. 그러나 역시 수확이 신통치 않아 논농사 지을 곳과 한인이 많은 곳을 찾아서 유하현의 고사자와 삼원보로 이동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만주를 강타하는 바람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허은 역시 병에 걸렸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20년 간도 참변이 벌어지자 영안현으로 이주한 그녀는 산비탈 토굴 같은 집에서 방 두 칸을 겨우 의지해서 산전을 개간하며 화전민으로 살았다. 허은의 회고록에는 고생하면서 이상한 음식 먹은 이야기, 소금이 귀한 만주에서 간장, 고추장, 된장을 구하느라 애를 먹은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또한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애가 서는 입이라 어른들 상에 올린 생선 남은 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 ‘한 번은 그 대가리를 구워 강냉이밥하고 실컷 먹었다. 이런 얘기까지 다 하려니 창피스럽다’는 등 배고픔에 관한 절절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었다. 또한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부엌 바닥에 물이 폭포같이 솟구쳐올랐고, 이리 저리 비가 새서 방안이 풀밭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1922년 경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李炳華)와 결혼한 허은은 농사일을 하면서 가계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독립운동을 하느라 부재중인 남자들 대신 가정을 돌보는 나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사랑어른들은 다 외지로 활동하러 나가고 안 계셨다. 남자들은 전부 독립활동을 하느라고 바깥일에만 전념하니까 나무 하나 해다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른들은 농사일을 모르고 남편은 없으니 어떻게든 혼자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는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는 것도 모르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르고 지냈다고 하며, 어디 가서 죽었으려니 생각하고 있던 남편이 감옥에 있다는 연락을 받아도 가볼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혼자서 농사를 꽤나 많이 해 동네 사람들의 놀라움을 사기도 했고, 유림이 집에 머물렀을 때는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피복공장에서 단춧구멍 만드는 일감을 가져다가 음식을 장만하기도 했다고 한다.
허은은 이러한 어려운 살림에서도 이시영, 이상룡, 김창환(金昌煥)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 아래 결성한 서로군정서의 살림을 맡았으며, 기본적인 생계 활동 외에도 회의 등 공식적인 행사를 준비하는 데 힘을 보태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군정서 대원들이 입을 군복을 만들고 배급하여 무장투쟁 활동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녀가 1932년 조선에 귀국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32년 이상룡이 병사한 뒤 그의 시신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3년상을 치르는 내내 일제 경찰의 감시와 박해에 시달렸다. 경찰은 일경은 집안 조상들 산소 비문에 단기로 연호를 적어놓은 것까지 트집 잡았고, 증조부 3년상 제문까지 검열했다. 일경의 괴롭힘에 조부는 사람을 시켜 단기 연호를 쪼아 없앴다.
그 후에도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남자들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맡던 그녀는 8.15 광복 후 조용히 지내다 1993년 아흔을 넘긴 후 회고 작업을 시작했고 1995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출간했다. 이후 1997년 5월 19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허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