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3:44:15

능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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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참봉()

1. 개요2. 권력3. 능참봉의 고생과 그에 얽힌 민담4. 참봉을 역임한 인물들5. 현대의 능참봉6. 관련 기사

1. 개요

조선 왕조의 벼슬자리 가운데 하나.

능참봉이라는 관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종9품 최하위 문반직 '참봉' 중에서 선왕과 선후의 왕릉을 관리하는 참봉을 따로 능참봉이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에 능참봉을 제외한 다른 참봉직이 대부분 혁파되면서 능참봉이 곧 참봉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1] 능보다 격이 낮은 원(園)에는 역시 종9품인 수봉관(守奉官)이 지킨다.

조선왕조에서는 고려, 삼국, 가야 등 전왕조의 주요 왕릉에도 관리인을 붙여준 기록이 등장하지만 그 실태에 관한 기록은 부족하다.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주로 조선시대에 조선의 선왕들의 무덤을 관리하는 능참봉을 다루고 있다.

능은 임금의 조상의 무덤인만큼, 엄격하게 관리해야 했다. 이를 위해 능에 소속된 수복이나 수호군[2]이 있었는데, 능참봉은 주로 이런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 외에도 능에서 제사를 지낼 때 그 준비[3]를 하고, 왕이 능행을 오면 마중도 나가고, 왕릉 수리 공사를 할 때 관리 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인근 주민들이 능 주변에서 벌목이나 사냥 같은 딴 짓을 하는 것을 막기도 했다. 큰 나무 한 그루를 손상시키면 3년간 유배, 두 그루를 손상시키면 천 리 밖으로 귀양 간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

녹봉은 매달 열 말에 닷 말. 그리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빚을 지기도 했다. 그래서 개중에 사비로 충당이 가능한 재력이 있는 토호나 유지 등이 우선시되었다. 비록 미관말직이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사람보다는 지역의 명사와 같은 연륜이 있는 사람이 임명되었고, 장래 경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능참봉은 음서제로 많이 이용되었다.

2. 권력

향촌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한성 6조 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부 이상의 도성에서야 종9품 참봉이 그냥 짬찌 미관말직이지만, 군/현으로 내려가면 서열이 원님 바로 다음이다. 안그래도 1차 시험만 붙어 학력만 인증된 진사·생원이라도 엄연히 양반 지배층 행세를 하던 향촌이니 실제로 벼슬이 있는 사람은 권위가 다르다.

또한 왕릉을 관리한다는 특성상 지역 사회라는 카르텔 속에선 웬만한 지역 유지 이상의 권위를 가졌다. 일단 선왕을 모신 왕릉은 함부로 범하여서는 안되는 특별한 성역으로 간주되었으므로 고관대작이라도 사냥이나 벌목 같은 짓을 하다가 걸리면 그 자리에서 그냥 치도곤(!!!)을 때릴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선왕전하를 모신 능에서 뭐 하는 짓거리냐! (내가 다음에 임금님 왔을 때 일러바쳐 줄까?)"라고 버럭! 하면 어지간한 인간은 오금이 저려서 벌벌 떨고 '소인이 잘못했습니다!'라 빌 것이다.

그리고 왕릉 쯤 되면 도굴이나 파묘를 당하지 않도록 파수꾼을 세워서 경계근무도 시켜야하고, 벌초 등 관리도 해야하고, 혹여 왕이 친히 행차라도 하면 각종 의전준비도 해야되니 당연히 고을에서 필요한 인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었다. 아무리 더 품계가 높은 원님이라도 선왕의 능을 관리하는 인력 차출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면 왕으로부터 인사평가를 좋게 받을리가 없고 특히 왕이 친히 행차했는데 제사 절차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원님이고 뭐고 따라오는 대간에게 탄핵당하기 딱 좋은 거리라 죽은 목숨이다보니 예식의 현지 수석 책임자인 능참봉이 인력차출해가겠다고 해도 원님이 막을 방법이 없고, 사정이 있어 동원에서 빼주느냐도 능참봉이 결정하니까 능참봉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다.

그리고 왕릉 쯤 되면 갖가지 연례행사로 짭짤한 재미도 볼 수 있었다. 왕릉에는 효행사찰이라 하여 왕릉에 묻힌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비는 이 딸려 있으며, 절에서 제사에 소요되는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 토지도 딸려 있다. 이런 땅은 문전 옥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감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야 하고, 이 관리를 담당하는 추수관을 임명할 권한은 당연히 능참봉에게 있다. 소작인들이 이 추수관이 되면 다른 소작인에게서 대접받기도 하고 은근슬쩍 떼어먹을 수도 있다 보니 능참봉에게 아부하는 소작인이 많았고, 추수관이 떼어먹은 것 중 일부는 또 다시 능참봉에게 돌아오게 된다.

위에서 말한 이유들과 연배와 명망 있는 인물이 맡는 직책이라는 점 등이 어울려, 고을 수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지역 유지였다. 아무리 가장 낮은 9품에 불과하다지만 지방에 품계 받아본 인물이 흔할 리도 없거니와,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고 족보에 기재되며, 최고 권력인 왕실과 바로 직통 라인이 연결되어 있는데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찌보면 옛날 시골 순경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시골 순경 또한 파출소에 혼자 근무하는 한직 중의 한직이지만, 마을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공권력이다 보니 마을 내에선 어깨 주름 좀 잡고 다닐 수 있었다.[4]

물론 좋은 일만 있다면 다음과 같은 민담들이 나올 리가 없다.

3. 능참봉의 고생과 그에 얽힌 민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마냥 편하게 지방에서 권력만을 누릴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특히 왕이 효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고생하는 벼슬이었다. 이를 빗댄 말로, "(모처럼 / 여든에 / 칠십에) 능참봉을 하니까 거둥이 한 달에 (열아홉 / 스물아홉) 번이라"는 속담이 있다. 늙은 나이에 드디어 과거에 급제해 미관말직이나마 벼슬자리에 올랐는데, 왕이 한 달에 스무 번도 넘게 능행을 하면 얼마나 고생이 심하겠는가? 이처럼 실속 없이 고생만 하는 일을 빗댄 말이다. 이 말은 정조사도세자의 무덤을 자주 찾아 수원 지역에 나돌게 된 말이라고 한다. 정조는 "수원 능참봉은 한 끼에 닭 한 마리"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으니, 이런 아들을 둔 사도세자는 죽어서나마 호강했지만 그만큼 담당 수봉관[5]은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관련 페이지

그래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돌보던 수봉관과 관련해 생긴 민담도 여럿 있다.

그중 하나는 이러하다. 왕씨 성을 가진 능참봉이 지나가던 점쟁이에게 관상을 보았는데 며칠 뒤에 죽을 상이라 하였고, 이어서 대책이랍시고 알려준 게 밤중에 묘를 껴안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혹은 밤중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서 알려줬다고도 한다. 하여튼 이 말대로 하였다. 그런데 궁궐에 있던 정조는 비가 오는 것을 보고 문득 "내 아버지는 비 오는데 추운 무덤 안에 누워 계시는데, 능참봉이라는 놈은 따뜻한 방 안에 편히 누워 있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선전관을 보내 "능참봉이 방 안에 가만히 누워 있으면 불문곡직하고 죽여버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선전관이 와서 보니 능참봉이 기특하게도 비를 맞아 가며 무덤을 지키고 있었고, 선전관은 능참봉의 비에 젖은 옷을 청하여 정조에게 가져갔다. 돌아와서 젖은 옷을 올리며 보고하니 정조는 무척 기뻐하며 상을 내렸다는 것이다.

다른 전승은 이렇다. 박경인이라는 능참봉은 낮에 묘역을 시찰하다가 한 거렁뱅이 사내를 만났는데, '참봉 나리는 오늘 안에 목이 날아갈 상이니 단단히 주의하라'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돌아와 일찍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선친이 나타나 '지금 이렇게 배 깔고 잘 시간이 없다. 얼른 일어나라.'라고 타일렀고, 이에 잠에서 깨보니 밖에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능참봉이 사도세자 능으로 가보니 억수 비에 뗏장이 벗겨져 흙이 패여나가는 중이었다. 왕릉이니만큼 규모가 커서 혼자서 삽 들고 와 복구할 수도 없던지라 능참봉은 사람을 모을 틈도 없이 미친놈처럼 밤새도록 능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비를 맞아가며 왕릉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마침 폭우에 아버지 무덤이 망가지지 않았을까 걱정된 정조가 선전관을 보냈다. 능으로 온 선전관은 폭우 속에서 무너지려 하는 왕릉을 끌어안고 있는 박 참봉을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보고는 일을 수습한 뒤 빗물과 흙 범벅이 된 박참봉의 의관을 증거로 들고 가 보고했고, 이에 감동한 정조가 수원 능참봉만 특례로 종6품으로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민담인만큼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고, 만약 진짜 있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후자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은 상당한 법치국가였기 때문에 제아무리 신분제 사회여도 군주가 신하를 함부로 죽이진 못했기 때문이다. 설령 근무태만의 죄를 묻더라도 '폭우로 능이 망가지는 걸 방치한 것'을 벌하면 벌했지 '시체는 비맞고 있는데 따뜻한 방에서 자는 것'을 벌하진 않았으며, 정조가 그런 짓을 할 정도의 폭군인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다른 능참봉에 대한 일화도 있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을[6] 능으로 승격시키고자 했지만, 아버지 숙종이 후궁을 왕비로 추증하는 것을 절대 하지 못하도록 유명을 내렸기 때문에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야사가 있다. 영조가 백성들과 대면해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나무꾼을 만났다. 나무를 어디서 베었냐고 하자, "소령"릉"이 있는 곳 근처에서 베어 왔습니다요."라고 말하였다. 나무꾼이 일자무식해서 원과 릉을 구분하지 못했고,[7] 임금의 어머니 묘이니 능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자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존대해줬다고 크게 기뻐하며 그 나무꾼에게 상금과 소령원 수봉관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

다른 판본에선 약간 더 극적인 내용을 추가한다. 평복 차림으로 암행을 나간 영조가 저 대화를 나눈 뒤[8], "그 나무를 모두 사줄 테니 나를 따라 내 집으로 오게."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무꾼이 영조를 따라가다 보니 한양 한복판으로 향하니 그 집이 바로 창덕궁이었고, 그제서야 영조의 정체를 안 나무꾼이 반쯤 정신이 나가 냉큼 엎드린다는 내용.

여기서 살이 좀 더 붙은 이야기에서는, 영조가 자기 어머니 무덤을 능이라 불러줬다고 속으로 좋아했지만 그 티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소령이라 하는데 어째서 소령이라 하는 것이오?"라고 하자, 나무꾼이 "아니 나라님 어머니 묘소면 능이지 어째서 원이라는 거요? 나같은 무식쟁이도 아는 걸 신수도 멀쩡해 보이는 양반이 그걸 모릅니까?"라며 외려 영조를 무식쟁이 취급했다나(...) 여기에 영조는 얼씨구나 하고 신하들에게 "일개 나무꾼도 (왕 어머니 무덤은 능이란 것을) 아는데 니들은 왜 모르니?"라고 갈궜다는 내용도 있다.[9]

이런 민담은 다른 임금에게도 있다. 정조 버전으로는 초야에 묻혀 사는 한 가난한 선비가 미행 나온 정조 앞에서 "여기(융릉)는 현 주상전하의 아버님이신 뒤주대왕의 능이다" 라고 밝히며 비명에 돌아간 아버지를 대왕 대우를 해주자 정조가 감격한다. 정조는 이 일을 주제 삼아 과거 시험 문제를 냈고, 이 선비는 보란 듯이 합격해 정조를 뵙고 그대로 데꿀멍한다는 얘기다. 선조와 그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추숭을 하지 못한 자식 왕들의 바람은 비슷할 거라고 인식한 후세인들의 생각이 여러 왕들의 이야기에 섞인 듯.

4. 참봉을 역임한 인물들

세조때부터 창설된 이래 소과(사마시)를 합격한 생원, 진사 혹은 식년문과 병과(丙科), 별시 병과에 합격해 관직을 시작하는 초년들이 많이 거쳐갔으며 그 중에는 거물로 성장한 인물도 있다. 또한 2품이상 자제 음서로 관직을 시작하는 이들도 참봉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5. 현대의 능참봉

현대에는 능참봉이라는 관직은 당연히 없어지고 남아있는 왕릉들은 문화재청 예하의 왕릉관리소가 관리하고 있다.

조선 왕릉 이외에도 백제, 신라, 가야, 고려 등 역대 왕가들의 왕릉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문중에서 능참봉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탈해왕릉처럼 대종회에서 선정하는 곳도 있다. 과거의 벼슬은 공직, 즉 현대의 공무원에 해당하므로 사실 업무와 지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차이점은 옛날 능참봉은 왕의 행차가 문제였다면, 현대의 능참봉은 일반인들의 민원이 문제라는 점이다.

태릉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모아 명예 능참봉으로 임명하여 문화재를 관리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관련기사

윤종신이 버라이어티 야행성에서 발라드 계의 능참봉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관련기사

검사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고향을 관할하는 검사를 능참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상 묘소의 벌초를 담당하는 장남이나 장손을 보고 집안어른들이 농담삼아 능참봉이라고 하기도 한다.

현실은 아니지만, 워해머 40K에 등장하는 아뎁투스 쿠스토데스(커스토디안 가드) 팩션을 두고 농담 조로 국내에서는 '능참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시체나 다름없는 황제(Warhammer 40,000)가 위치한 황금옥좌를 지키며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능참봉의 이미지와 오묘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후 8판이 나오면서, 워낙 비밀리에 신속하게 활동하는 터라 활동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황제의 명령만 수행하는 조직 특성에 따라 하이로드 및 로부테 길리먼 정도 되는 인물이 요청해야 임무에 투입되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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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능묘를 관리하는 참봉 외에도 궁중에 쓰던 음식 재료와 식기를 담당하던 사옹원(司饔院), 왕실의 병원 내의원, 궁중 내 연회나 대신들 식사를 주관하던 예빈시(禮賓寺), 병기를 연구, 개발하던 군기시(軍器寺), 군수품을 책임지던 군자감(軍資監), 초제를 지내던 소격서 참봉이 있었다.[2] 능 주변 마을에서 차출하며 수십에서 수백 명이 있다.[3] 대략 한 달 전에 한양에 올라가서 축향(祝香)을 받아와야 했다.[4] 다만 순경과 차이점이라면 순경은 중앙에 연이 없지만 능참봉은 직책 그 자체로 연줄이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능참봉 쪽이 위상과 보이지 않는 파워가 다르다. 물론 순경보다는 그 범위가 작긴 하지만…[5] 사도세자왕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 무덤도 능이 아니라 묘, 또는 원으로 불렸다. 따라서 관리도 능참봉이 아니라 수봉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 백성이 능인지 묘인지 구분할 리가 없으니 그냥 능참봉이라고 불렀던 모양.[6] 보통 후궁의 무덤은 '묘'지만 특별히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이다. 예외적으로 장희빈의 무덤은 묘지만...[7] 애초에 소령릉이라는 이름은 있을 수 없다. 능은 외자 이름이기에 능묘아면 소릉이나 영릉이라 했겠지 소령릉이라 하진 않는다. 거기다가 앞서 보았듯 능원은 벌채 같은게 금지되어 있어서 진짜로 능이었다면 능참봉에게 걸려서 호되게 당했을 것이다.[8] 여기선 영조가 백성들과 대면해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어머니 무덤에 장식할 나무를 사러 암행을 나갔다고 서술한다. 사실 이쪽이 좀 더 그럴싸하긴 하다.[9] 어차피 야사/민담일 가능성이 짙다. 선조와 그의 생부 덕흥대원군과 관련해서도 '덕릉'과 나무꾼 일화가 전승 되고 있다.[10] 대표작은 한국통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