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8:56:54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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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文正公)
허목
許穆
<nopad> 파일:HeoMok.jpg
출생 1596년 1월 10일
(음력 1595년, 선조 28년 12월 11일)
사망 1682년 6월 2일 (향년 86세)
(음력 숙종 8년 4월 27일)
시호 문정(文正)
본관 양천 허씨
문보(文甫), 화보(和甫)
미수(眉叟)
부모 부친 - 허교(許喬, 1567년 ~ 1632)
모친 - 나주 임씨(1575 ~ ?) 임제의 딸
부인 전주 이씨(1597 ~ 1653)[1]
자녀 장남 - 허훤(許翧, 1615 ~ ?)
차남 - 허우(許咸+羽)
3남 - 허도(許翿)
장녀 - 윤승리의 처
차녀 - 정기윤(鄭岐胤)의 처

1. 개요2. 생애
2.1. 사승 관계2.2. 관직 생활2.3. 예송 논쟁
3. 사상
3.1. 제도 개혁에 대한 반대3.2. 진리를 공자만이 아느냐
4. 송시열과의 관계5. 여담
5.1. 야사
6. 자료 사진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관료로 남인의 영수. 송시열, 윤선도, 윤휴와 함께 조선 시대의 대표적 논객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50대가 될 때까지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다가 과거 시험도 보지 않고 능참봉으로 발탁되어 이조판서우의정까지 역임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송시열, 윤휴, 윤선도만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조선 후기 '문제적 인물'의 한 사람이다.[2]

동료이자 생각의 차이로 아웅다웅하면서도 친하게 지냈던 윤휴와 함께 사이좋게 사문난적 1호와 2호로 낙인찍히고 만다.[3]

허목은 한국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다양한 방면에서 재능과 재주를 보였다. 성리학자이자 역사가이며 시인이었고 화가로도 일가견이 있어 난초 등 다양한 그림과 붓글씨 등을 남겼다.

2. 생애

2.1. 사승 관계

허준, 허균으로 유명한 양천 허씨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허교(許喬)는 화담 서경덕의 제자인 박지화의 제자였는데, 주로 외방직을 전전하고 최종관직도 양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종3품)인 등, 적당히 지방관으로는 유능하다곤 하지만 이렇다할 족적은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이산해의 문하에도 출입했고 남인의 거두이며 인조반정이괄의 난으로 피폐해진 조정을 구원했던 오리 정승 이원익의 손녀사위였다. 윤휴는 이원익의 서녀를 으로 맞이했으므로 이원익과도 인척 관계가 된다.

정언눌, 문위의 제자가 되었다가 문위의 소개로 퇴계 이황, 남명 조식에게 동시에 수학한 제자들[4] 중 한 사람인 한강 정구의 문하로 들어간다. 이후 정구의 제자이자 조카사위이며 정구와 함께 한려학파의 시조라 불리는 장현광의 문하에서도 수학한다.

인조가 자신의 생부 정원군을 억지로 왕으로 추존하려고 할 때 반발하였으며 유학자 중 인조의 생부 추숭을 정당화한 학자 박지계를 어용 문인이라며 깠다가[5] 인조의 열등감과 분노를 자극해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 뒤 인조도 자신의 분노가 지나쳤음을 알고 허목에게 다시 과거 시험을 보게 해주지만 허목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시골에서 학문을 연구한다.

2.2. 관직 생활

50세가 되어서야 서인 정승인 민정중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간다.[6] 뒤에 예송 논쟁이라는 희대의 정치적 논쟁을 계기로 민정중 등과는 원수가 된다는게 아이러니.

이후 사헌부 장령 등 사헌부사간원의 말단 벼슬로 있으면서 당시 1품 재상이던 송시열의 예론[7]에 이의를 제기하며 반박하였고 이는 예송 논쟁의 발단이 된다.

2.3. 예송 논쟁

1차 예송 논쟁은 효종이 죽었을 때 자의대비의 상복을 입는 것을 두고 벌어졌다.

그냥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기년복(1년복)이나 입자고 유야무야되던 조정에서 맨 처음 이의를 제기한 것은 윤휴였다. 반면 송시열은 왕실에도 사대부와 같은 예법을 적용하여 장남이 죽고 차남이 계승했다면 차남이 계승을 했더라도 종통(장남으로서의 권위나 권리)은 이미 죽은 장남과 그 자손에게 있다고 보고 1년상을 주장했다.[8] 영상 정태화이시백 등은 윤휴의 논리를 두고 송시열과 논의한 결과, "윤휴의 말이 일리가 있긴 하나 효종 대왕은 굳이 따지자면 체이부정에 해당하는 분이므로 기년복이 맞다. 하지만 소현의 아들이 살아 있는 이 시점에 그런 결론은 위험하니 그냥 전례를 따른다."는 명목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윤휴는 이에 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때 치고 들어온 것이 허목이다. 허목은 즉각 상소를 올려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적통인데 기년복으로 정한 것은 갑작스러운 대행대왕의 승하에 조정이 놀라서 그만 실수를 한 것이 아니냐는 이의를 제기했다.

송준길이 이미 소현을 위해 삼년복을 입었는데 또 입으면 너무 번거롭다고 다소 엉성한 논리로 반박했으나, 재차 허목은 "차남이든 다른 아들로든 아버지를 계승하면 그가 곧 장남이라며 3년복"[9].이라며 반박했다. 이런 허목의 주장에 산당마저도 당황하기 시작했으며 원두표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이 자신이 불학무식했다며 3년복 지지로 선회하는 등 3년복이 강력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분위기를 기년복으로 확정시킨 것이 바로 송시열의 상소였다. 허목에게 직접 설을 세울 것이 아니라면, 논란이 되는 것은 놔두고 확실한 것만 따르자고 정리한 것이다. 허목 역시 이에 반박하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송시열에게 논리적으로 압도당한 허목이 다시 상소를 올리기 전에 상소를 올린 양반이 바로 윤선도. 그의 상소 내용은 송시열이 효종을 정통으로 안 보고 비정통으로 보며, 소현세자를 정통으로 본다는 내용으로 조정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윤선도는 왜 허목에게 입증 책임을 묻냐며 송시열에게 입증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윤선도의 발언 이후 서인은 윤선도나 남인에서 송시열을 죽이려는 정치 공세를 한다고 분노하여 맹공격을 가했고, 남인은 남인대로 정치 보복이라고 서인에 대항하는 막장 치킨런 게임이 일어났고, 당연히 이 과정에서 허목 역시 서인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윤선도의 사형은 다소 심하다고 상소한 권시나 윤선도를 옹호한 용주, 조경 등이 집단 난타급 심한 탄핵을 받고 쫓겨나고, 윤선도에 대한 서인의 공격이 극에 달하자 분노한 허목은 송시열의 사형을 상소하였다. 결국 현종의 언급 중단으로 1차 예송논쟁은 잠재적 휴전에 들어갔다.

훗날 2차 예송논쟁이 벌어졌을 때 허목은 80이 넘은 고령이었기에 별다른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으나, 훗날 숙종 대에 들어서 갑인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누구보다도 송시열을 죽일 것을 왕에게 청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놓고 목을 치라고 한 것은 아니고 송시열의 극악한 죄를 종묘에 고하라, 즉 '고묘'하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종묘에 고해야 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진짜로 죽일 놈이란 소리고 즉 죽이자는 소리다. 당시 허적 등은 고묘를 하면 송시열이 어찌 살아날 수 있겠냐고 처음엔 반대하다가 남인 정권 말기에는 아예 대신들을 이끌고 왕에게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결과는 경신대출척으로 환국. 그리고 환국 후 2년 뒤에 허목은 사망했다.

아무래도 예송 때의 앙금이 크긴 컸는지 허목 사후 서인들은 송시열 배향 서원과 함께 허목 배향 서원의 사액을 철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3. 사상

3.1. 제도 개혁에 대한 반대

당시 윤휴는 호패를 차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많자 그는 종이 호패(지패)를 만들어서 반드시 지니고 다니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오군영 위에 도체찰사부를 설치하여 병력 지휘 체계를 하나로 통합, 북벌에 용이하게 대비할 수 있는 군사 체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윤휴의 체찰사부 설치 주장에 대해서는 '북벌 대비' 와 '병권 장악'이라는 두 측면의 목표를 모두 내포한 것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그는 북방에 성곽을 쌓아 청나라를 칠 때를 대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윤휴의 이런 정책을 강하게 반대한 이는 예상 외로 서인 계열의 송시열이나 김석주가 아니라 같은 남인(청남) 계열의 영수 허목이었다. 허목은 또한 윤휴나 송시열, 유계 등이 적극 주장했던 양반호포제 즉, 간단히 말해 양반 - 상민의 신분 구별 없이 가호 단위로 포를 거두어 군사 비용에 충당하자는 주장의 실시에도 반대하는 면모를 보였고, 송시열에 의해 제기된 일련의 사회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북송왕안석의 신법에 비유하기까지 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퇴행적인 면모를 보였다.[10]

허목은 윤휴와는 정반대로 호포제를 반대하면서도 대동법에 대해서는 그 실시를 적극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일견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던 바 있다. 물론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김육이나 김육 사후의 송시열처럼 당시의 대동법 논의를 이끌었던 정도는 아니고, 대동법 실시에 힘쓴 이원익 같은 남인계 인사들 의 묘갈명 등을 써주면서 거기에 자신의 그러한 입장을 적은 것 정도이지만, 어쨌든 호포론을 반대한 허목이 대동법 실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는 것은 묘하게 여겨진다.

3.2. 진리를 공자만이 아느냐

송시열, 송준길, 김수항 등과의 아가리 배틀에서 그는 어떻게 세상 사물의 진리를 공자만이 아느냐 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건 그가 이이의 여러가지를 배운 다음에 길을 정한다는 주장을 불교의 돈오법이라고 비난하고, 길을 정하고 학문을 배운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다.

그는 진리를 어떻게 공자만이 아느냐며 도교와 노장 사상도 진리일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서경덕이산해[11]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교만이 진리는 아니라는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사문난적 제2호로 몰리게 된다.[12]

4. 송시열과의 관계

송시열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사람들이 많고, 대중적으로도 '노론이라는 수구꼴통의 수장' 정도로 알고 그냥 까야 제맛인 인물 정도로 아는 사람도 꽤 많지만 허목은 그렇게 비난받는 여론이 적다. 하지만 그는 송시열 만큼이나 극단적인 정치 성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이 대목은 예송논쟁에 대한 의견차에서 드러난다

송시열은 왕실에도 사대부의 예법을 적용하여 적장자 이외에는 서자라는 규정을 적용하고 왕위는 효종이 계승했지만 정통성은 소현세자에게 있다고 보았다. 송시열의 이 '왕족 역시 사대부의 예법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는 관점은 '천하동례(天下同禮)'라고 해서 조선 후기까지 노론의 이념으로 남게 된다.

반면 허목과 윤휴는 왕실의 법도는 특별한 법도이며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일단 적장자라고 본 것이다. 이 관점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왕가의 예법은 사대부나 백성들의 예법과 달리 특수성을 두어야 한다)'라고 한다.

일단 예송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허목과 윤휴의 주장을 이견으로 접수는 했다. 그러나 윤선도가 자신을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으로 규탄한 뒤, 윤휴가 이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허목은 아예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을 조성하면서 자신도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여러 번 올리게 되면서 송시열의 태도와 행동은 경직되고 만다. 이후 송시열은 윤선도와, 윤선도보다도 윤휴와 허목을 이상하리만큼 노골적으로 증오감을 드러냈고, 허목, 윤휴를 악마와 동급으로 취급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 허목은 독물(毒物), 독극물, 연인(漣人), 또는 연한(漣漢), 지비공(紙鼻公) 또는 지비옹(紙鼻翁)이라 불렀다. 지비공이나 지비옹이라는 표현은 송시열이나 그 제자들이 허목을 부를 때 쓰는 호칭 중에서는 그나마 비교적 온건한 표현이었는데, 이는 허목이 평소에 축농증이나 비염 증세가 있어 코에 종이나 휴지를 붙였던 것을 두고 비꼰 것이다.

윤승운 화백의 작품 등에는 입춘마다 붙이는 대표적인 글귀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을 허목이 만들었다는 애기가 있다. 한편 또다른 글귀인 건양다경(建陽多慶)은 라이벌인 송시열이 지었다는데 세간에는 허목의 글귀를 더 높게 친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하여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라고 둘이 같이 붙여쓰는 경우도 있는 걸로 보아 말그대로 '설.'

그와는 별도로 허목은 서화에 능했다. 전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전을 자기 특유의 글씨체로 발전시켰다. 그림도 잘 그려서 그의 제자들 중엔 성리학을 배우러 오는 제자들 외에도 그림을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있었다고. 그림 재주가 얼마나 탁월한지 그림 그릴 때 사람이나 사물을 묘사하는 방법, 그림을 읽고 그림 속의 뜻을 해석하는 그림 해석방법을 적은 책들을 여러 권 출간하기도 했다. 다만 순조 대의 홍길주라는 학자는 '고귀하다 하나 어리석으며 기괴한 것을 좋아하니 광혹하다.'고 비판했다.

5. 여담

평생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구전되어오는 설화가 많다. 설화 속에서 허목은 완전히 신선 그 자체. 가령 삼척 부사 시절 삼척 고을은 밀려드는 조수 때문에 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는데 허목이 부임해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란 비석을 세웠더니 이후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척주(陟州)'란 삼척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덧붙여진 이야기에 따르면 훗날 서인들이 이 비석을 부숴 버렸다. 그러자마자 파도가 동헌 앞까지 밀려들어왔고 과거에 이를 예견한 허목이 관아 대청마루 밑에 똑같은 비석을 하나 더 숨겨놓아 이를 세우자 더 이상 조수로 인한 피해는 없어졌다고 한다. [13]덧붙이면서 허목이 그 비석을 세우면서 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는 파도가 밀려들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다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척주동해비의 탁본이나 모사한 글씨가 물과 관련된 재난을 막아준다 하며 부적처럼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한 세대 후인 채제공관악산 기행문 <유관악산기>에서도 채제공이 예순 즈음 관악산을 힘겹게 등반하면서 옛말에 허목이 나이 구순을 바라보면서도 관악산을 아무 힘듦없이 올라가서 사람들이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다는 소문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이런 설화에 대해 허목의 외조부인 임제를 비롯한 가풍의 영향이 있다는 설도 있다. 임제는 문장과 풍류를 좋아해서 평안 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그녀를 추모하는 글을 썼다가 기생 무덤이나 찾아다닌다는 탄핵을 받았다. 또한 허목의 아버지 허교는 서경덕의 재전 제자[14]로 노장 사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5.1. 야사

그렇게 치고받고 싸웠지만 의외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송시열이 평소 요료법에 따라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가 어느 날 오히려 건강이 악화되었다. 온 집안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때 송시열은 아들에게 허목에게 가서 처방전을 받아오라고 부탁한다. 아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허목에게 찾아가 아버지의 질병에 대해 말하자 허목이 처방전을 써주는데, 확인을 해보니 비소같은 극약들만 줄줄이 적혀있었다. 놀란 아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처방전에 의한 치료를 만류하였지만 송시열은 그 처방전 그대로 치료를 받고 다 나았다고 한다. 후에 그 아들이 사죄하러 가면서 독약을 먹고 아버지의 병이 나은 까닭을 묻자 허목이 대답하길, 송시열의 병은 체내에 독이 쌓여있어 생긴 것이니 독은 독으로 중화해야하는데 중화하고 남은 독을 다시 독으로 중화하느라 독약만 적어주게 된 것이라 답하였다.

상기된 일화는 이렇게 전해지기도 한다. 어느 날 송시열이 중병이 들어 아들을 허목에게 보내 약을 지어오게 했는데, 그 약 중에 비상(독약)이 있었다. 이를 본 송시열의 아들은 비상을 버렸는데, 그 때문에 송시열의 병이 더 중해졌다. 송시열의 아들은 허목에게 가 새로 약을 받아 왔고, 송시열은 병이 나았다. 나중에 이 일을 안 송시열은 아들을 꾸짖고는 허목에게 사과하러 갔다. 정치적 / 학문적으로는 갈등관계에 있었을지라도 의외로 사적인 감정은 크지 않았던 듯.[15][16]

최래옥 교수가 수집하여 정리한 민담집 ≪되는 집안은 가지나무에 수박 열린다≫에 보면 허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어느 양반이 허목을 방문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차 한 잔 걸친 다음에 돌아갔다. 허목이 그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양반이 먼 길로 사라질무렵 하인에게 분부하더란다. 저 양반의 뒤를 잘 따라가다가 혹여 시신이 되어 있으면 수습하여 염하여 주라고. 하인이 반신반의하며 따라갔는데 과연 그 양반이 시체가 되어 있는지라, 너무 놀라 주인의 분부대로 수습한 다음 돌아와서 고하고 그 연유를 물으니 허목이 말하기를 "그자의 걸음걸이를 보는데 흡사 인형이 걷는 것과 같았고, 그림자에 죽음의 기운이 서려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위에서 전해지는 송시열과의 일화가 좀 더 와전되어 발전한 형태가 아닐까 추측하기도.

여담으로 이 사람의 호인 미수가 붙은 물고기도 있다. 두우쟁이라고 하는 민물고기인데, 허목이 임진강 지역에서 자주 낚시하고 맛있게 먹었다 하여 미수감미어라는 별명이 있다. 미수개미라고도 불린다.

6.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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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眉叟)'라는 호는 '눈썹(眉) 늙은이(叟)'라는 뜻인데, 과연 호처럼 눈썹이 비범하다.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로, 수염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는지 수염을 옆으로 약간 휘날리는 모습으로 그려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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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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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하사한 은거당집 옛터

7. 관련 문서


[1] 완선군(完善君) 이의전(李義傳)의 딸로, 익녕군의 5대손이며 이원익의 손녀가 된다.[2] 윤선도나 윤휴 등의 뒤에서 움직이며 송시열 공격을 지휘한 인물이 허목이다.[3] 3호는 송시열을 비판한 윤증, 4호는 이경석비석에 송시열을 불상인이라고 묘사했던 박세당.[4] 이황은 사설 학원격인 경북 안동 도산서원을 차리고 수십 명의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조식 역시 고향인 경남 합천에 집을 세우고 정인홍, 곽재우 등 여러 제자를 길러냈다. 둘 사이가 가깝다고 하긴 어려웠지만 서로 거리가 가깝다보니 양쪽 모두를 사사(師事)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5] 당시 허목은 성균관 학생회장이었는데 박지계 또한 성균관 교수였다. 이때 허목은 동맹 휴학을 주도하고 박지계를 성균관 학적에서 삭제해버렸는데 '이 인간은 우리 학교 졸업생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허목은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지방으로 쫓겨났지만 계속된 동맹 휴학에 공자묘까지 비워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결국 인조가 공식적으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사과하는 식으로 끝났다.[6] 민정중, 민유중 형제 고모할머니의 아들이 허적으로 허목은 허적의 친척이었다. 그러나 같은 당파이고 친족이래도 허적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송시열과 원수같은 사이에다가 송시열과 서인을 두둔해준 같은 남인인 허적이 고까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남인이 집권했을 때 허적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숙종에게 질책받았고 윤휴가 변호해줘서 무마해줬지만 결국 남인의 내분은 스스로 자멸하는 꼴이 되었다.[7]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계모인 자의대비상복을 입는 것.[8] 원래는 자식의 상 때도 부모가 상복을 입는 것이 가례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자식의 상에 상복입는 사람들은 줄어들었고, 부모의 상 때도 상복을 입지 않는 사람들도 늘어난다.[9] 성인이 된 장남이 죽으면 다른 자녀들의 상사 때 1년 상복과 달리 가통을 계승한다 하여 부모나 조부모와 같이 보고 3년복을 입게 했다[10] 재미있는 것은 그처럼 왕안석과 닮았다는 비판을 받은 송시열이 실제로 본래 송대 이래로 유가에서는 주욱 부정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던 왕안석에 대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 -재주도 좋았고 능력도 있었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소인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 자신 또한 그렇게 되어 일을 망쳤다- 를 내리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주자 성리학으로부터의 사상적 자유로움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인물의 퇴행성과 진보성을 판단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송시열과 그 이후의 서인 노론 계열이 사상적 편협함 / 완고함을 고수한 것을 마냥 긍정적으로 평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당시 학자들이 내세웠던 일련의 사상적 - 경세론적 입장들이 진보 - 보수의 단선화된 도식으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다는 데 있다.[11] 조식의 제자로 북인이다.[12] 윤휴가 진리를 어떻게 주자만이 아느냐고 주장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렸는데, 그는 유교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으니 어떻게 되었을지는..... 물론 허목은 유교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그 자신도 유학자였다. 허목은 성리학실학이서우, 이하진, 유형원에게 가르치고 이게 성호 이익까지 이어진다.[13] 임제의 <송천필담>에서는 이 일화를 소개하며, 백성들이 허목의 집안에 있는 해당 비의 탁본을 구해 다시 각을 하고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14] 서경덕의 제자인 박지화에게서 배웠다.[15] 훗날 이 일화는 앙숙사이였던 두 대감네의 이야기로 와전되어 민담의 한 요소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대강의 내용은 비슷하지만 효심이 지극히 앞섰던 아들이 그 처방전을 독살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채 약을 임의조제해서(비상 석 냥 치가 처방전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두 냥을 덜어냈다.) 약효가 듣다 만 아버지는 결국 죽는다는 결말로 이야기가 바뀐다. 물론 그 대감의 도움으로 음택을 정할 때는 절대 말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명당으로 잡아서 결과론적으로는 해피엔딩.[16] 이는 사문난적으로 규정된 윤휴도 비슷한데 그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인 윤휴를 다른곳도 아닌 세자 시강원에 천거한게 송시열이었다. 물론 서로 사이가 좋은건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