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07:32:13

나주 임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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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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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전라남도 나주시
시조 임비(林庇)
집성촌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경기도 화성시성남시
충청남도 청양군서천군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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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천시경주시포항시
인구 289,558명(2015년)
링크 나주임씨대종중
1. 개요2. 상세3. 기원
3.1. 임팔급 시조설3.2. 추정 : 임팔급 이전에 형성
3.2.1. 《신찬성씨록》의 관련 기록
4. 분파5.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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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주 임씨(羅州 林氏)는 고려 왕조의 대장군임비(林庇)를 시조로 하는 대한민국의 성씨이다.

2. 상세

임씨들 중에 평택 임씨[1], 장흥 임씨[2]와 더불어 가장 큰 임씨 가문이다.

나주 임씨는 항렬자를 비교적 잘 지키는 가문인데, 이름이 임◯택(澤)이나[3] 임채(采)◯[4]인 사람은 높은 확률로 나주 임씨로 볼 수 있다.

3. 기원

나주 임씨는 임비를 원조로 삼는데, 선세에 유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임비 위로도 또 여러 대(代)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 있었다고 하나 세대가 아주 멀고, 문적을 증거할 수 없어 지금 상고해 밝힐 수가 없다고 한다.

임비의 9세손 임탁(林卓)이 해남 감무, 해주 감목, 이름을 알 수 없는 관청의 소윤 등을 역임하던 중 조선 왕조가 개국했다. 이후 회진(會津)[5]으로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본관을 회진으로 했다. 회진현(會津縣)이 나주(羅州)에 속하게 됨에 따라 후손들이 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3.1. 임팔급 시조설

BC 1,000년경 중국의 상나라 왕자 비간(比干)이 당대의 폭군이었던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주왕의 폭정을 만류하니 주왕이 "예로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9개가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염통에 구멍이 9개가 있겠다."라고 하면서 숙부인 비간을 죽였다. 비간공(比干公)이 상나라 말기에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정부인 진씨(正夫人 陳氏)가 임신 중에 장림산(長林山)으로 피신하여 살다가 아들을 낳으니 천(泉)이라 했다.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周)나라가 건국(建國)되자 무왕(武王)이 비간공의 아들 천(泉)을 찾아 임씨(林氏)의 성과 견(堅)이라는 이름을 사(賜)한데서 임씨(林氏) 성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로[6] 나주 임씨와는 관련이 없으나[7] 한국의 적지 않은 가문들이 중국에 그 성씨의 기원을 두었지만 실제로는 조상대에서 중국과는 아무련 관련이 없던 가문들이 후세에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창작했던 사례들이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3.2. 추정 : 임팔급 이전에 형성

인구의 번성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 그러나 임씨는 지방의 자원을 집중시킬 수 있는 한반도 고대 국가 왕족이었던 적은 없으니 그에 따라 대체로 큰 틀에서 일반적인 인구수의 증가 추세를 따라갔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평택 임씨에 비하여 유의미하게 더 많은 나주 임씨의 인구수는 이 둘 사이의 기원에 어느 정도 시간차가 있었던 것이 그 원인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주 임씨의 기원은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의 한반도 이주보다도 조금 더 앞에 있었을 것이다. 나주 임씨를 제외한 나머지 절대 다수의 임씨가[8] 평택 임씨와 그 분가들이기에 그 이전에 임씨에 관한 기록이 있다면 소거법을 사용할 수 있다.

시조인 고려시대 대장군 임비 이전에도 존재해왔던 점, 나주의 지리적 위치, 그리고 종가에서 발굴되는 유물유적으로 짐작해보아 나주 임씨가 마한 침미다례 권역의 토착세력, 혹은 백제대성팔족 중 목(木)씨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백제의 남방 정복 이후 현지의 유력 세력으로 정착하게 된 것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여진다.[9]

3.2.1. 《신찬성씨록》의 관련 기록

일본의 고대 씨족을 정리한 서적인 《신찬성씨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左京諸蕃百濟林連百濟國人木貴公之後也
하야시노무라지(林連)씨[10]는 백제 국인[11] 목귀(木貴) 공의 후손이다.

이외에도 목귀의 후손으로 하야시(林)씨, 오호이시노하야시(大石林)씨[12], 하야시노후히토(林史)씨가 언급된다. 2개의 성씨는 카바네를 받았지만 나머지 2개는 카바네를 받지 못했는데 세력이 떨어지는 가문이었던 걸로 보여진다.

백제의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木)씨는 백제의 극초기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부여씨 왕가와 함께 북방에서 이주해내려온 가문이라기보단 현지 마한 토착세력 중에서 백제의 지배층으로 편입된 것으로 여겨진다.[13] 또한 발음의 유사성 및 고대에는 국명 혹은 지명 등을 성씨로 삼았던 점을 미루어 볼 때, 목씨가 한때 마한의 영수국이었던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층에서 유래됐다는 가설이 있다.[14][15] 즉 나주 임씨는 백제 말기 ~ 멸망 즈음에 어떠한 형태로든 목씨로부터 분가했고, 그 중 일부는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는 대신 남는 걸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신찬성씨록》이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나온 책이라는 점을 봤을 때, 백제가 멸망한 이후 목씨들이 신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성씨를 바꾸라는 압박을 받아 통일신라가 들어설 시점에 목씨들이 임씨로 성씨를 바꾼 걸로 보인다. 개성(改姓) 및 분가 시점이 멸망 즈음이라면 전해 내려오는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모호한 점도 그 때문일 것으로, 삼국통일 이후 백제계는 고구려계보다도 낮은 신분으로 흡수되면서 성씨를 대외적으로 쓰는 것이 제약되는 상황이었다. 나무 목(木)을 두 개 붙이면 그게 바로 수풀 림(林)이다. 한자를 살짝 바꾸어 성을 바꾸는 방식은 한자를 사용한 동양권 전반에서 흔한 방식이었고, 조선 초기에 왕(王)씨들에 대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전씨(全氏), 옥씨(玉氏) 등 한자가 비슷한 성씨로 바꾸었던 야사가 전해진다.

즉 다시 말해서 분가 시점이 백제의 멸망 즈음이라면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목씨에서 임씨로 성씨를 바꾸었을 것이라 예상해 볼 수 있다. 자연스레 고려시대 이전의 근본적인 가문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망실되거나 잊혀지면서 숨겨지게 된 것이고, 이런 추론에 따르면 나주 임씨의 형성은 평택 임씨의 시조인 임팔급의 한반도 정착에 비해 최소 210년 정도 더 앞선다. 또한 백제국 거수는 고이왕 이전까진 마한 연맹에 소속된 거수로서 마한왕을 겸하는 목지국 거수에게 충성했고, 서라벌로 망명하기 전 김씨 족단의 직계 선조였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충주 금릉동 마한 거수국 거수 또한 천안 목지국 마한왕을 위해 백제와 격렬하게 투쟁했었다. 또한 진한왕인 경주 사로국 거수는 백제국이나 충주 금릉동 마한 거수와는 달리 마한왕의 명목상 신하까진 아니었으나, 엄연히 마한왕보다 서열은 아래인 관계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런 나머지 벌어진 긴장과 갈등이 삼국사기에도 실려 있을 정도였다. 신라가 훗날 박혁거세의 건국 기년을 고구려보다 앞당겼을 망정, 마한 건국 기년(기원전 194년 준왕 남하)보다 앞당길 수 없었던 것은 신라가 마한 건마국보다 늦게 건국되었고 서열도 일단은 아래였다는 자체 전승까지는 도무지 건드릴 수가 없었던 게 원인이었다.[16] 이렇게 보면 임씨는 백제 왕성인 부여씨, 신라 왕성이자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씨를 한때나마 모두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집안이 된다. 비록 목씨 가문 자체는 어쩌는 수 없이 부여씨 휘하에 있는 귀족 가문으로 전락한 신세를 받아들여야 했지만....[17]

4. 분파

나주 임씨는 조선 초기부터 분파되기 시작하는데, 임탁의 손자인 임유소(林有巢)를 파조(派祖)로 도정공파(都正公派)가 분리되었고, 임유소의 형 임시소의 손자 대에서 큰손자인 임귀연(林貴椽) 후손이 장수공파(長水公派)·정자공파(正字公派)·절도공파(節度公派)·첨지공파(僉知公派)·생원공파(生員公派)·첨추공파(僉樞公派)로, 둘째손자인 임귀량(林貴樑)의 후손(後孫)이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이 외에도 집성촌 목록을 보면 금수공파(錦繡公派), 가의공파(嘉儀公派), 동지공파(同知公派) 등 여러 공파가 현존한다. 북한에 속하는 황해도 장연, 해주 등지에도 많은 집성촌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공파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파악되지 않았다.

5. 인물

  • 임붕(林鵬) :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3사를 두루 지내고, 벼슬은 승지·병사에서 그쳤다.
  • 임복(林復) : 임붕의 아들이자 박진(朴晉)의 첫째 사위.[18]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의 탄생으로 특사령이 내려져 고향에 돌아갔다가 선조 초기에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무고를 받아 취임하지 못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강항(姜沆)의 저서인 수은집(睡隱集)의 풍암임공행장(楓岩林公行狀)에 따르면 거북선으로 추정되는 배의 설계에 관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9][20]
  • 임진(林晉) : 임붕의 셋째 아들이며, 임복의 아우. 1546년(명종 1)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을 거쳐 전라수사(全羅水使)‧제주목사(濟州牧使)‧회령부사(會寧府使)‧장흥부사(長興府使)‧오도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제주목사 시절에 청백리(淸白吏)로서 청정비가 세워졌으며, 1568년(선조 1)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로 있을 때는 흑산도(黑山島)에 나타난 수적(水賊)을 토벌하여 이듬해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다.
  • 임제(林悌) : 조선의 3대 천재시인으로 불리었으며, 임진의 맏아들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관서 도사(關西都事)·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 임서(林㥠) : 임복의 아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에 뽑히고, 1601년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가 성균관전적에 승진하고, 이어 공조·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안핵사·무장현감 등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병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였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자 그는 수성찰방(輸城察訪)으로 좌천되고, 이어 덕원군수로 나갔다가 파직되었다. 1612년 봉산군수가 되고 이어 승지 등을 역임하다가,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1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안동부사가 되고, 이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쌓였던 폐단을 일소하고 농업의 권장과 군사의 조련 등에 힘썼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적을 토벌하는 한편, 군량을 보급하는 등 열성을 다하여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되고 임기가 만료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 저서로 《석촌유고》가 있다.
  • 임담(林潭) : 1616년(광해군 8) 생원이 되고,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병자호란사헌부지평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총융사의 종사관이 되어 남격대(南格臺)를 수비했고, 화의가 성립된 뒤 진휼어사(賑恤御史)로 호남지방에 내려갔다. 1639년 좌승지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1644년 경상도관찰사로 서원이 사당화하는 폐습을 상소했다. 1646년 충청도관찰사로 유탁(柳濯)의 모반사건을 처결한 후, 그 공으로 품계가 오르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그 뒤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참판과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1650년(효종 1) 다시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1652년 청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로 다녀오다가 가산에서 죽었다.
  • 임기수(林基洙) : 1846년(헌종 12) 중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1853년(철종 4)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 임긍수(林肯洙) : 1837년(헌종 3년)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공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 임병직(林炳稷) :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가, 외교관.
  • 임석규(林奭奎) : 제헌 국회의원.
  • 임종기(林鍾基) : 제8·10·11·12대 국회의원.
  • 임덕규(林德圭) : 언론인, 정치인, 국회의원
  • 임동원(林東源) : 제25·27대 통일부 장관. 제 24대 국가정보원장.
  • 임권택(林權澤) : 영화감독, 석좌교수.
  • 임부택(林富澤) : 대한민국 육군 소장. 제1 군단장 역임. 6.25 때 장성으로 1962년 예편. 태극무공훈장.
  • 임성규(林聲奎, 1939년 ~ 2012년) : 제33·34·35대 충청남도 논산시장.
  • 임인택(林寅澤) : 제35대 국토교통부 장관
  • 임재정(林在正) : 제11대 국회의원
  • 임채정(林采正) : 제14~17대 국회의원 및 국회의장.
  • 임채진(林采珍) : 제36대 검찰총장.
  • 임채민(1958)(林采民) : 제3대 국무총리실장, 제4대 보건복지부 장관.
  • 윤택(林潤澤) : SBS 코미디언. 나는 자연인이다 고정 출연.
  • 임상훈(林相勳) : '무상훈'이라는 필명으로 울산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재능기부 블로거(인스타 인플루언서)
  • 임여진(林汝眞) : 걸그룹 멤버,전 이달의 소녀, 현 루셈블의 여진

[1] 국내에 있는 수풀 림()씨의 다수는 평택 임씨로부터 분파한 가문들이다. 다만 이것을 모든 임(林)씨들의 근본이라고 하기엔 평택 임씨로부터 분가한 가문들의 경우, 본가에 비해 인구수가 적은 형태를 보여주며 분파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전해 내려오는 것에 반해 나주 임씨의 인구수는 평택 임씨에 비해 60,000명 정도 더 많은 편이며(임씨 전체를 통틀어서는 가장 많다.) 분파한 기록이 없다.[2] 이쪽은 ()씨로, 林이 아니다.[3] 30세 ◯택(澤) 항렬.[4] 31세 채(采)◯ 항렬.[5] 현재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6] 임팔급은 당나라에서 건너온 사람이다.[7] 평택 임씨로부터 분가한 임씨들은 그 인구수가 본가에 비해 적으며, 분가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게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나주 임씨의 인구수는 2015년 센서스 기준, 평택 임씨 대비 1.3배 정도이다. 또한 분가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8] 물론 林씨를 말하는 것이다.[9] 목씨는 백제의 남방 정복과정에서 활약하며 세력을 키운 가문이었다.[10] 하야시(林)가 성씨에 해당하는 우지(氏), 무라지(連)는 등급을 나타내는 카바네(姓)이다.[11] 귀족을 가리키는 말.[12] 현대어로는 오오이시노하야시.[13] 다만 근초고왕 시대의 기록에도 이미 등장하므로 적어도 백제의 본격적인 남방정벌 이전에는 이미 지배층으로 편입된 가문이다. 백제가 수도를 웅진성으로 옮긴 뒤에 지배층에 편입된 백씨, 연씨, 사씨 등의 금강 유역을 연고로 하는 가문들보다 훨씬 더 빨리 지배층에 편입되었으므로 기원 자체는 이들보다 북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목씨가 천안 일대를 기반으로 삼았던 목지국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의 신뢰성을 보완해준다.[14] 백제의 정복활동에 따라 목지국이 천안에서 익산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나주로 후퇴했다는 <목지국이동설>이 제기된 바 있었으나 고고학적으로 근거가 없어서 현재는 사실상 폐기된 가설이다. 목지국은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 일대가 중심지였던 것으로 거의 확증되어 있으며, 익산은 고조선 준왕 집단의 후예로 보이는 건마국, 나주 일대는 신미국을 중심으로 뭉친 연맹체인 침미다례의 세력권이었다. 그런데 목씨 자체는 그 행적으로 봐서 백제의 남방정벌에서 유력한 역할을 하며 세력을 키웠던 가문으로 추정되며 그래서 가야 관련 기록에 유독 많이 등장한다. 또한 남방의 마한 잔여세력 정복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정복자로서 감독을 위해 남방에 영지를 가지고 정착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5] 목지국 일대는 백제시대에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고, 고려시대에는 목주(木州)로 불렸으며, 조선시대부터는 목천(木川)이 되어 오늘날에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목지국에서 유래한 게 맞다면 현대까지도 끈질기게 목지국의 흔적이 살아남은 셈이다.[16] 백제도 마찬가지로 내내 본인들은 고구려 아닌 부여의 후계라고 억지 주장을 하였으나, 주몽이 근초고왕계 왕가의 직접적인 부계 선조라는 전승은 도무지 건드리지 못하였다. 이것만은 너무나도 확고한 자체 전승이라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사족을 말하자면 건마국은 서한의 철 수출 제한 및 무역 제한 등의 갑질에서 도무지 어떤 역할을 하지 못했고 준왕 직계 계보가 단절되었던 탓에 목지국에게 마한왕 및 삼한 수장 자리를 빼앗겼기에 목지국도 사실 후발 주자였던 건 맞다. 그러나 목지국 또한 고고학적 건국 연도로만 보면 박씨 족단 남하 시점보다 적어도 반세기는 앞서 있다.[17] 살아남은 이 목씨 가문 및 그 후예인 현대 임씨 구성원 대부분은 천안 청당동 목지국 세력의 분가인 용원리 세력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청당동 세력은 계속 저항을 멈추지 않아 비류왕 재위기 말기 혹은 근초고왕 즉위 초기 시점에서 처참할 정도로 공중분해당하고 마는데, 역사서에는 실리지 않았고 백제측 기록도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나, 대단히 좋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것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18] 그러나 박진의 딸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19] <변사10여조>(邊事十餘條)를 올려 상소(上疏)했는데 임금께서 칭찬하고 장려하면서 비답(批答)을 내렸다. 그 중에서 창이 달린 배의 제도(戈船之制)는 비변사(備邊司)에서 각도(各道) 수사(水使)에게 영을 내려 그 모양에 따라 만들어 갑작스런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십 몇년이 되어 과연 임진변란(壬辰變亂)때 통제사 이순신 등이 이 제도로 많이 승리했다.[20] 上疏獻邊事十餘條下批嘉奬其中戈舡之制備邊司令各道水使依樣裝造以備倉卒數十餘年而果有壬辰之變統制使李舜臣等多以此制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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