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1:31:26

임선규

林仙圭
1912년[1] 2월 5일 ~ 1970년[2]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2.2. 공산당 활동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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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북한의 극작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종북주의자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홍도야 우지마라)'의 제작자이자 문예봉의 남편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본명은 임승복(林勝福). 창씨명은 하야시 나카로(林中郞, 임중랑).[3]

당대 신파극 극작가의 대표자로 일제강점기에 많은 흥행을 한 연극의 작가이기에 문학인이라면 임선규를 모를 리가 없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큰 인기를 끈 작가였다, 그러나 친일, 종북 행위로 후대에 평가가 좋지 못하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1912년 2월 5일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관동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빈곤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서당에 다니다가 논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으며, 1927년 강경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1931년 학비 조달이 어려워 중퇴했다.

1932년 극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고등학교 중퇴 학력이지만 많은 습작으로 실력을 쌓아왔던터라 얼마 안가 중요 극작가로 올라서게 된다. 이듬해에 배우 문예봉과 결혼하였다.

1936년에 집필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크게 흥행하자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올라서게 된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아내 문예봉과 함께 연극분야에서 전쟁 수행에 협력하였으며, 이 시기의 내놓은 작품들이 일본 제국을 미화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2.2. 공산당 활동

광복 이후 식민지 체제에 협력한 많은 연극 인사들이 그랬던 것 처럼 부인과 같이 좌익 계열로 활동 하였으며, 남조선로동당 소속으로 활동 하였으나 별다른 활동 없이 부인을 따라 1948년 월북을 하게 된다.

월북 이후 두드러진 활동은 없다가 1970년 경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만 있다. 하지만, 월북직후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 등 기록이 정확히 남아있지 않다. 아내인 문예봉이 숙청되었던 70~80년대 상황을 봤었을 때 같이 숙청되어 있을 수도 있다.

3. 기타

동양극장에서는 권해효가 맡았으며, 문예봉의 비중이 있는편이라 그 역시 주요인물은 아니지만 조연으로써 역할을 하였다.

야인시대에도 등장하였으나 단역보다도 비중이 떨어지는 보조출연자 수준이다. 담당 배우는 불명. 담당 배우부터가 불명이고, 심지어 같은 단역인 아내 문예봉, 동료 황철과 달리 대사가 전혀 없는 탓에 외부소스를 쓰는 것도 잘 되질 않다보니 야인시대/합성물에서도 지나가는 배경 단역으로 쓰는 정도로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의사양반 옆의 간호사와 동급이라 할 수 있다. 워낙 비중이 없는 탓이 아내인 무뇌봉이 심영이나 황철 애인으로 뺏기는 상황도 자주 나온다.

이후 심영물이 별의별 인물들이 굴려지는 와중에도 임선규는 대사가 없어 활용도가 한정되어 있다. 이 점이 오히려 특징이 되어 마피아로 몰려 사형되는 와중에도 말을 못해 그대로 퇴장한다든지, 표정으로 심영을 욕하는 정도. 대부분 눈으로 대답한다는 설정(...)으로 어떻게든 이어나간다. 그나마 다른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빼앗는 합성물도 나오긴 한다. 이 합성물 이후로 '노대사' 라는 별명이 있다.

원로 배우 고설봉의 예명을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1] 일부에서는 1910년생 또는 1914년생을 주장하기도 하고 기록 자체도 얼마 없어서 정확한 생년이 아닐 수 있다.[2] 19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주측 기록이 있다.[3] 이름만 바꾼 거지 성은 그대로 놔뒀다. 林씨는 일본에도 있어서 저 성을 가진 조선인들이 한자는 유지해도 읽는 법을 하야시로 바꾸면 넘어가줬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