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6:02:21

여(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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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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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음률 려) - 함양3. (나 여) - 의령4. (너 여) - 안산5. (검을 려)6. 실존 인물7. 가상 인물

1. 개요

한국중국의 성씨이다. 한자로는 , , 이다.

여자 자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성 뒤에 직업만 붙으면 다 여자로 보이게 된다. 반대말로는 씨가 있다.

2. (음률 려) - 함양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ece5b6>
함양 여씨(咸陽 呂氏)
성주 여씨(星州 呂氏)
}}}
관향 경상남도 함양군
경상북도 성주군
시조 여어매(呂禦梅)
웹사이트 재경 성산여씨 대종회
[clearfix]
중국의 려(呂)씨는 전설에 따르면 염제 신농씨 강석년(姜石年)에서 갈라진 씨족으로서 중국 하동(河東, 지금의 산서성 태원부) 계통이다. 대표적인 후손인 제(齊) 태공(太公) 강상(姜尙·呂尙)은 주나라 재상이자 개국원훈공신(開國元勳功臣)이며 전설적인 현인(賢人)이다. 조상인 강백이(姜伯夷)가 우임금 때 치수의 공을 세우고 여국(呂國) 땅에 봉해졌기에 자손들이 여씨(呂氏)를 씨로 삼았다. 후손으로는 여불위(呂不韋) 등이 있다.

한국의 려(呂) 또는 여(呂)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0,541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63위이다.

본관은 함양, 성산(성주)의 2본으로, 모두 같은 조상을 가진 혈족이다. 시조 여어매(呂禦梅)는 877년(헌강왕 3년)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에 귀화하여 경북 성주군 벽진면에 정착하고 고려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그의 9대손인 여칭(呂稱) 이후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다.

여어매는 여임청(呂林淸)과 여광유(呂光有) 형제를 두었는데, 여임청의 후손인 여자장(呂子章), 여존혁(呂存赫) 형제와 여광유의 후손들이 함양(咸陽)을 본관으로 옮겨 세계를 이어왔다. 여임청의 후손 중 여양유(呂良裕)와 여자열(呂子列)은 성주에 남아 본관을 성주(星州)로 두었다.

남한에서는 두음법칙에 따라 려가 아닌 여로 읽히지만 呂의 본음이 '려'이기 때문에 두음법칙을 안쓰는 북한에서는 본음 그대로 려씨로 읽는다. 밑의 余씨와 汝씨는 본음이 '여'이다.

3. (나 여) - 의령

백제국성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60><tablebordercolor=#ece5b6>
宜寧 余氏
의령 여씨
}}}
<colcolor=#fbe673><colbgcolor=#008080> 관향 경상남도 의령군
시조 부여풍(扶餘豊)
여선재(余善才)
인구 20,134명(2015년)
웹사이트 의령 여씨 대종회
[clearfix]
본관은 의령 단본. 시조는 송나라에서 고려로 환국한 간관 여선재(余善才)로,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자 백제부흥운동기 왕이었던 부여풍[1]의 후손이다. 그는 의령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그곳에 관적하였다고 한다.

呂씨에 비하면 인구 수가 적은 편이다.

계파는 사직공파, 예조판서공파, 삭주공파, 숙천공파 등이 있다.

과거급제자(조선 시대)
여상규(余尙珪, 1595 乙未生) : 문과(文科) 인조5년(1627) 식년시 병과(丙科)
여후(余○, 1677 丁巳生) : 문과(文科) 숙종31년(1705) 식년시 병과(丙科)
여효온(余孝溫, 1677 丁巳生) : 문과(文科) 세종16년(1434) 알성시 을과(乙科)
여광필(余匡弼, 1677 丁巳生) : 사마시(司馬試) 연산군7년(1501) 식년시 삼등(三等)
여하진(余夏鎭, 1786 丙午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28년(1828) 식년시 삼등(三等)
여동삼(余東三, 1871 辛未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31년(1894) 식년시 삼등(三等)
여진(余○, 1664 甲辰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36년(1710) 증광시 삼등(三等)
여계복(余繼福, 1664 甲辰生) : 사마시(司馬試) 중종8년(1513) 식년시 삼등(三等)
여극(余極, 1685 乙丑生) : 사마시(司馬試) 숙종34년(1708) 식년시 삼등(三等)
* 모두 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3명, 사마시 6명)

4. (너 여) - 안산

본관은 안산 단본.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당시 경성부 병목정(현 서울특별시 중구(서울) 쌍림동)에 살던 여은성(汝銀成), 경상북도 김천에 살던 여정술(汝正述), 강원도 회양군에 살던 여봉선(汝奉善) 등 모두 3가구가 나타났다. 《조선씨족통보》에서는 汝씨는 중국 후베이성 남부의 강릉(江陵)이라는 지방에서 계출된 성씨라며 중국 귀화 성씨로 보았으나, 당시 회양군에 살던 여봉선씨에 의하면 다른 글자를 汝로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한다.

5. (검을 려)

중국에서 쓰이는 여씨. 한국식 발음은 려가 되나 성씨이기 때문에 두음법칙이 적용되어 여씨로 읽는다.

유명인으로는 여명(홍콩)이 있다.

이 성씨는 베트남에도 있으며 두 차례 를 세웠다.

6. 실존 인물

6.1.

6.2.

6.3.

7. 가상 인물


[1] 원래 '부여(扶餘)'씨였으나, 부여풍의 후손들이 여씨(余氏)를 쓰고,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의 후손들은 서씨(徐氏)를 사용하면서 둘로 나뉘어졌다.[2] 함양 여씨 25세손 '東'자 항렬[A] 함양 여씨 29세손 '運'자 항렬[A] [A] [A] [A] [8] 함양 여씨 30세손 '九'자 항렬[9] 본명은 여린아. 함양 여(呂)씨로 삼국지의 여포와 같은 글자를 쓴다. 22-1화에서 본명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