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강 일대에 존재했던 한민족의 고대국가에 대한 내용은 부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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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
扶餘氏백제의 국성.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부여 왕가에서 나온 데서 따서 지은 것이 성씨의 유래이다. 온조의 아버지는 부여의 왕족 우태 혹은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추모라고 했는데, 전자라면 부여 왕실의 직계 후손이고, 후자라 해도 고구려 건국 설화에 따르면 동명성왕 추모가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백제 왕실은 부여 계승 의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경쟁자인 고구려보다 더 정통성 있는 부여의 적통임을 주장한 것이었고, 사비시대 성왕이 '남부여'로 국호를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2글자 복성이지만 줄여서 여(餘)씨로 축약 표기하는 관습이 당시 백제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런 축약 표기는 중국이나 일본 기록에서 많이 확인된다. 예를 들면 위덕왕 부여창은 여창(餘昌)으로 기록되는 등. 백제에서는 부여씨뿐 아니라 다른 성씨도 사씨(沙氏)는 본래 사택씨(沙宅氏)로, 목씨(木氏)는 본래 목리씨(木刕氏)로 여겨지는 등 복성을 단성으로 줄여 부르는 사례가 많았다.
2.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부여씨는 온조왕 시기부터 사용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 측 기록과 교차되는 최초의 부여씨는 4세기에 재위한 근초고왕(? ~ 375년)이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로 등장하는데, 이는 부여씨를 여씨로 축약한 것이다. 이후로도 중국 측 기록에서는 축약해서 '여(餘)'로 칭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정작 진짜 부여는 근초고왕이 즉위하는 346년에 모용선비에게 멸망당한다는 것이 아이러니.백제멸망전과 백제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백제 부여씨들은 상당수가 당나라로 끌려가거나[1] 일본으로 망명했다.[2] 신라가 통일한 한반도에 잔류한 부여씨들은 정황상 서씨(徐氏)와 여씨(余氏) 등으로 성씨를 바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야 '부여씨'라는 성씨를 그대로 쓰는 사람은 더 이상 한중일 3국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3] 대한민국에서는 부여 서씨[4], 이천 서씨[5], 의령 여씨[6]가 부여씨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는데, 보다시피 부여씨에서 서씨, 여씨로 글자를 바꾸었다고 족보에 전하고 있다. 복성인 '부여'를 한 글자로 줄여 칭하는 관습은 백제 당대의 중국 측 기록에도 종종 나오는데 이런 관습을 공식화한 것이다.
3.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귀실복신과 그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그런데 이 경우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였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부여씨의 분파로 여겨진 것인데 진짜 무왕의 조카였던 부여신복(信福)과 헷갈린 것이라는 설이 강하다. 이외에는 귀실씨와 부여씨의 관계에 대해 따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 일본 조정에서 귀실씨에게 내린 성씨에 '쿠다라(百濟)'가 들어가기 때문에 귀실복신이 무왕의 조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귀실씨가 그냥 원래 왕족 분파 가문이 아니었나 하고도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이름에 백제의 국호가 들어간 경우는 왕족들인 경우로 여겨지기 때문. 그런데 또 신찬성씨록에서는 왕족 출신인 경우 그들이 시조로 여긴 왕족의 출자를 꼬박꼬박 기록해놨는데 정작 아래의 쿠다라노키미씨에서는 별다른 기록을 해놓지 않았다.
-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여민선(餘民善)의 딸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7]
-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8]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9]
-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10]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 오우치씨(大内氏)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을 자칭했으며,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다.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오우치보다 상위 씨족으로 타타라씨가 있는데 현 오우치는 타타라우지로 취급되고 있다. 다만 타타라가 가야계라는 설도 있기 때문에 부여씨와 연관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 우키타씨(宇喜多氏) - 센고쿠 시대에 활약한 다이묘 가문. 출신 인물로는 우키타 나오이에와 그의 아들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인 우키타 히데이에가 유명하다. 오카야마 지역의 한 절에는 우키타 나오이에의 조부인 우키다 요시이에(宇喜多能家)의 초상화와 그를 기리는 문구가 남아있는데, 문구에 따르면 우키타의 조상이 원래 백제왕족이었다고 한다.출처 심지어 우키타 가문의 문양은 백제에서 넘어와 정착한 직후 사용했다는 설도 있을 정도. 하지만 그 글귀를 남긴 승려도 1524년도의 인물인지라 근거의 타당성에 대한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없다. 더군다나 오우치 가문 만큼이나 적극적으로 백제 왕족의 후예를 자처한 것도 아니다보니[11] 승려가 그저 우키타 가문에 좋은 말 해준답시고 백제왕족설 글귀를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우키타 가문이 다스리던 오카야마는 키노죠(귀신성)이라 불리는 백제식 산성이 세워졌을 정도로 백제 유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던 지역이라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특히 오카야마의 키노죠(귀신성)는 모모타로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도 유명한데, 해당 설화의 빌런인 우라(오니)도 백제 왕자 혹은 왕족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우키타 가문의 조상들이 오카야마에 새로이 터전을 잡은 고대 백제인과 그 후손들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인물 계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정작 대동지지에서는 계백이 왕성인 부여씨에 이름이 승(㐼)이라 기록되었을 뿐이고, 또한 차라리 성씨와 이름을 각각 축약한 뒤 합쳐서 지칭했을지언정 성씨만으로는 지칭한 사례가 없다는 점, 백중숙계는 보통 자에 쓰였다는 점에서 계백은 그냥 또 다른 이름으로도 쓰인 자가 아니었나라고도 추정되고 있다.
정말 의외의 가문이 부여씨 분파일 가능성도 있다.
- 후지와라(藤原) - 후지와라의 시조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진지하게 부여풍 설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설이 사실이라면 후지와라 또한 부여씨의 일파가 된다. 하지만 후지와라씨를 처음 사용한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카마타리의 친자가 아니라 일본 황족이 양자가 되었다는 가설도 있기 때문에 이 가설대로라면 상관없기는 하다.
3.1.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12]
-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13]
-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며, 동예 계열로 삼척 실직국에 멸망한 울진 파단국 유민들이라는 가설도 있다. 진손왕과 진이왕은 각각 왕진이의 족보조작과 후대 기록(오우치씨 족보)에만 나오는 인물이라 당대 인물이라 가능성이 낮다.
-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14]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신라의 법흥왕도 성씨가 '모'(募)인 것으로 중국에서 기록되기도 했으나 이는 그냥 사신이 성씨 없이 이름만 전한 것을 중국에서 이름 앞 글자를 성씨라 잘못 추측하고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당대 한반도에서는 성씨의 사용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
4. 부여 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餘)씨'로 표기되어 있는데 백제의 왕성 부여씨처럼 국호였던 부여에서 따온 성씨일 가능성이 크다.[15]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16] 다만 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은 명백하고,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이긴 한데, 이들이 모두 부여의 주민들을 대거 쓸어갔었던 모용계 국가에서만 활동했다는 점에서 대체로 부여의 유민이었을 것으로 유력하게 여겨지고는 있다.[17]- 여현
- 여울
-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18] 자치통감에서 여암, 진서에는 서암(徐巖)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부여의 다른 표기 중 부서(夫徐)도 있는 까닭인듯 하다. 현재 한반도에 남은 백제 왕성 부여씨 후손이 서씨인 것과 여암의 다른 표기가 서암인 것이 서로 부합하는 것이다.
-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19]
5. 백제 부여씨의 인물
백제의 군주들에 대해서는 백제/왕조 참조.진손왕, 태아랑왕, 해양군의 경우 왕진이의 후손들이 만든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해당 문서 참조.
- 부여질: 8대 고이왕의 숙부.
- 우복
-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
-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
-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 부여신제 - 17대 아신왕의 공주.
- 부여기 - 백제의 좌현왕. 개로왕의 친족을로 추정된다.
-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
- 부여고(夫餘古)
- 부여력 - 백제의 매로왕.
- 부여고 - 백제의 아착왕
-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 부여적계 - 백제의 왕족.
- 부여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
-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 사아군 - 순타태자와 동일인물?
- 임성태자 - 아좌태자와 동일인물?
-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 아좌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
-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연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 부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 부여새상 - 의자왕의 아들 혹은 동생.
- 부여규해 - 부여풍과 동일인?
- 부여충승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 부여충지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 부여선광 - 부여용과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 부여덕장(扶餘德璋)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 일문낭장[20]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
- 백제대방군왕 - 이름 미상. 725년 당나라 봉선제에 참여했다.
-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 부여창성 - 부여선광의 아들.
- 부여양유 - 부여선광의 2남.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윤충, 의직, 충상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21]
5.1. 전설상의 인물
- 부여사: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22]
-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 백제의 셋째 왕자(百濟第三王子):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만 나오는 인물. 엔닌을 태운 배가 고의도(오늘날 전남 하의도)에 배를 정박했을 때, 흑산도에 백제의 셋째 왕자가 도망해서 들어가 피난을 갔다는 전승을 기록했다.[23]
6. 기타
5세기 말 남제로 파견된 고구려의 인물 여노(餘奴, 생몰년도 미상)가 있으나 백제 부여씨나 부여 여씨인지는 불명이다.[1] 의자왕, 부여융, 부여효, 부여태 등의 백제 왕족들.[2]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에 속한 부여선광, 부여자신, 억례복류 등의 백제 왕족들.[3] 서씨와 여씨는 물론 대성팔족의 후예로 추정되는 구씨(具氏), 백씨(白氏), 임씨(林氏)가 그러했듯 신라에도 상당수가 잔류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백제 왕족으로 추정되는 충상,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부여충지와 부여충승은 문무왕에게 항복하여 신라로 넘어갔다.[4]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시조로 삼는다.[5] 부여 서씨를 비롯한 달성, 대구 등 여타 본관들의 대종(大宗)으로, 부여 서씨에서 중시조로 삼는 서존(徐存)이 다름 아닌 서희의 현손자다. 다만 부여 서씨와는 달리 백제 왕실의 후손을 자처하지는 않는다.[6]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시조로 삼는다.[7] 원문은 속일본기의 《天平宝字五年(七六一)三月庚子【十五】》○庚子。百済人余民善女等四人賜姓百済公。라는 구문. 귀실씨가 새로운 성씨를 하사받은 기록과는 달리 여기서는 원래 귀실씨였다는 기록이 따로 없는 걸로 보아 출자가 다른 사람들인데 귀실씨가 받은 것과 같은 성씨를 준 것으로 추정된다. 余民善女의 경우 단독 이름이 아닌 여민선(余民善)의 딸(女)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8] 다만 실제 근초고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낮은데, 해당 단락에서 등장하는 '근속왕'(近速王)이라는 인물은 왕이 아닌 국인, 즉 신하로 나와 있고 시기적으로 많이 차이가 나서 할아버지-손자 관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9] 《신찬성씨록》에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가문도 기록되어 있다. 준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한왕의 직위를 박탈당했지만 그의 후예는 남아서 계속 제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후한서》, 《삼국지》 등을 통해서 나오는데 해당 가문으로 추정된다.[10] 출처는 노중국 교수의 《백제의 성씨와 귀족가문의 출자》, <<대구사학>> 89, 2007.[11] 정확하게는, 오우치 가문이 다른 가문들에 비해 백제 왕조혈통에 유달리 집착(?)했다고 봄이 옳다. 백제왕조 후손 주장이 조선으로부터 팔만대장경과 영지, 무역독점권을 얻기 위한 쇼였다는 평과는 별개로, 이전부터 오우치 가문은 다른 가문들에 비해 자신들이 백제 왕조의 혈통임을 뚜렷히 그리고 공공연하게 주장해왔다. 이 때문에 동시기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조차도 '오우치 가문 사람은 고려인이다.'라는 인식을 가졌을 정도.[12]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 - 《삼국유사》 권2 <기이>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조- 여담으로 일본서기 기록에 위덕왕이 고구려장수에게 일기토를 걸었을때 고구려왕실과 성이 같다 언급하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해성을 가지고 있고 촌수가 멀어지면서 부여씨와 고씨로 나뉘어졌다 추정이 가능하다.[13] 문안식, <백제의 시조 전승에 반영된 왕실 교대와 성장과정 추론> , 《동국사학》4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2004.[14] 《일본서기》는 《삼국사기》와 달리 22대 문주왕을 21대 개로왕의 왕모제(王母弟), 즉 동복아우로 표현하고 있다. 모씨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왕모제를 동복아우가 아닌 왕의 어머니 형제인 외삼촌으로 해석하고, 남조 측 사서에서 문주왕과 동성왕을 여씨 + 이름의 축약형이 아닌 모도, 모대로 표현하고 있어 모씨 설을 주장했었다. 다만 왕모제는 주로 동복아우를 뜻하는 말인데다가 동성왕 역시 출자가 문주왕이 아닌 부여곤지로 기록되어 있어서 설득력을 잃었다.[15] 다만 여기서는 백제처럼 부여씨의 축약형으로서의 여씨가 아닌 그냥 여씨였을 것으로 여겨진다.[16] 출처는 여호규, 《백제의 요서진출설 재검토: 4세기 후반 부여계 인물의 동향에 관련하여》(2001), 강종훈, 《4세기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과 그 배경》.[17] 사마염이 중국으로 팔려온 부여인 노예들을 속환시켜준 기록을 비롯해, 285년과 346년으로 모용선비족 침공으로 끌려간 부여인만 6만여명에 달했다.[18] 모용농은 여암의 난을 진압한 뒤 요동과 현도를 장악한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재탈환하게 된다. 단,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일부를 점거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19] 출처: 《위진남북조시기 중국의 코리안 디아스포라-고조선・고구려・부여계 이주민 집단 연구》.[20] 인명이 아니라 당나라의 관직명이다.[21] 성충과 윤충의 부여씨설은 조선상고사를 지은 신채호가 주장했고, 의직의 부여씨설은 이도학 교수가 주장했다.[22]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족들은 쿠다라노코니키시씨, 쿠다라노아손씨, 타카노노미야츠코씨 등으로 사성받았다.[23] 의자왕의 3남인 부여효는 멸망 당시 다른 왕족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 점으로 볼 때 부여효일 가능성은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