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6:49:27

주군

1. 主君2. 主軍3.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周羣4. 백제왕족

1. 主君[1]

나라의 우두머리를 호칭할 때 사용되었던 말로, 사극에서 주로 사용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극 등의 매체에서 쓰일 적엔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 있는 군웅에게 수하들이 쓰는 경우가 더 많다. 건국을 마치고 즉위한 군주에게는 폐하, 전하, 황상, 주상 등의 공식적인 호칭을 더 쓰곤 한다. 물론 해당 군주와 아주 가까운 가신, 측근, 중신들은 (당연히 어전회의 같은 완전히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약간 사석인 곳에서는 여전히 주군으로 지칭하거나 심지어는 군주에게 공적인 자리에서도 직접 부르기도 했다.

군주국이 아닌 상태인 현대 한국에서는 별로 안 쓰일 것 같지만, 정계에서 간간이 쓰인다. 거물 정치가[2] 혹은 재계 거물의 가신이나 측근들이 자신이 모셔온 해당 정치가나 회장을 가리켜 '주군'이라고 하는 식이다.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라든가 "주군을 뵐 낯이 없다"는 식으로 사극의 용법과 똑같다. 그래도 너무 제왕적인 표현이라 본인이 직접 사용하기보다는 언론에서 상황을 묘사하는데 사용한다.

2. 主軍

주력이 되는 부대를 뜻한다.

3.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周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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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제왕족

酒君(사케노키미)

백제왕족. 한국 측 기록이 없고 일본 측 기록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름 또한 본명이 아니라 당시 왜국에서 불렀던 칭호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353년 일본으로 도왜했다고 한다. 《일본서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점, 기년이 이주갑인상 혹은 그와 맞지 않는 후대 일로 보이는 점 때문에 주군이 정확히 언제 활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주갑인상(+120년)을 적용해 353년 → 473년에 도왜했으며 개로왕 대의 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 문제는 이주갑인상을 해도 시기상 온전히 들어맞지 않는 데다가 개로왕 대의 인물로 보는 가설은 주군보다는 백제의 지방행정 정비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동시대에 존재한 카츠라기노 소츠히코의 활동 시점을 근거로[3] 1갑자만 인하한 413년경 도왜한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413년 도왜했을 경우 전지왕(505~420) 후기에 도왜한 것이 되며, 473년 도왜했을 경우 개로왕(455~475) 후기에 도왜한 것이 된다.

정상적인 파견이 아니라 일본 사신한테 무례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쇠사슬에 묶인 채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건 《일본서기》 특성상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신왕의 아들 전지왕,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 등이 일본에 체류했던 점을 생각하면 태자 또는 그에 버금가는 지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지왕 대에 도왜했다면 관례상 구이신왕, 비유왕을 대신해 도왜했을 것이고 개로왕 대에 도왜했다면 후술할 문주왕과의 관계 때문에 친척 아저씨로서 도왜했을 것이다. 대체로 왕의 아들이나 동생(부여곤지)을 왜에 보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지왕 대가 더 현실적으로 보이나, 이 경우 사케노키미가 문주와 엮일 여지가 적고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를 침공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북위가 씹고 고구려에게 걸려(...) 475년 82세의 장수왕이 직접 전장에 나가 한성백제를 멸망시킨 걸 고려하면 다급해진 개로왕이 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동생인 문주의 대타로서 사케노키미를 보냈을 수도 있다. 둘째 동생인 부여곤지는 461년에 이미 파견했고, 아들은 이유가 불명이나 안 보내려 했던 것 같으며(그 때문에 장수왕에게 같이 죽지만) 문주는 당시 개로왕이 의지하던 동생이라 보내고 싶지 않아 문주와 관련이 있는 사케노키미가 대신 파견되었을 수도 있다.

도착한 후에 탈출해 '이시카와노니시고리노오비토 코로시(石川錦織首 許呂斯)'라는 왜인집에 숨어있다가 천황의 사면을 받고 왜국에 체류했다. 이후 355년 기록에서 매사냥을 전파했다는 것으로 나온 후 행적은 불명이다.[4] 일본 매사냥 협회에서는 주군을 일본 매 사냥의 원조로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신찬성씨록》에서 몇몇 백제계 성씨의 시조로 기록된 주왕(酒王)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은 것이, 《신찬성씨록》에 등장하는 인물 중 실제 왕이 아니었던 사람에게도 왕(王)의 호칭이 붙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자는 다르지만 둘 다 훈독으로는 사케노키미로 읽을 수 있다. 어쨌든 이 가문은 문주왕과 주왕(酒王)을 동시에 모셨기 때문에, 주군이 문주왕의 조상 중 한 명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문제는 일본서기에서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라 기록되어 있고 학계에서도 개로왕의 동생이 정설이라는 것이다. 이상한 점은 개로왕과 문주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에게서도 나타나는데, 문주는 '맏'이, 곤지는 '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며 부여곤지는 유독 비유왕의 후손임이 신찬성씨록에서 강조된다.

상식적으로 문주가 친동생이 아니라 사케노키미의 아들이라면 개로왕이 곤지보다 문주를 더 우대하다가 후계자로 지정할 이유가 없다.[5] 물론 동생인 곤지가 문주보다 높은 대우를 받다가 개로왕이 곤지를 경계해 왜로 쫓아냈고 개로왕 사망 당시 곤지는 왜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데려올 여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렇다면 문주가 곤지와 그 아들들을 왜에서 웅진백제로 주저없이 불러들일 리가 없다.[6] 따라서 신찬성씨록의 기록대로 문주왕의 후손들이 사케노키미를 문주왕의 조상으로서 제사를 같이 올렸다면 문주는 사케노키미의 친아들보다는 양자 내지는 봉사손일 가능성이 더 높다.

또 개로왕의 아버지인 비유왕은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구이신왕의 아들보다 이복동생이 더 유력시되며, 비유왕이 암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하여 21년간 시신도 제대로 못 거두었고 백제삼서를 참고해 기록한 일본서기에서는 비유왕의 재위기간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 따라서 개로왕이 비유왕의 시신을 수습할 때까지 큰아버지인 구이신왕의 봉사손을 내걸고, 문주가 사케노키미의 봉사손이 되면서 자연히 곤지가 비유왕의 봉사손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

전지왕 또는 개로왕 대에 도왜한 걸로 추정된다는 점과 일본에서 문주왕의 선대(先代)로 인식된 걸 고려하면 사케노키미는 평범한 왕족이 아니라 전지왕의 아들이자 구이신왕, 비유왕의 형제였을 가능성도 있다. 개로왕과 문주왕이 다른 사람의 봉사손이 되어 이들의 동생인 곤지가 비유왕의 봉사손이 된 게 맞다면 사케노키미가 비유왕보다 연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구이신왕과 비유왕은 이복형제이며 구이신왕의 어머니인 팔수부인이 당시 백제 권력을 쥔 진씨, 해씨 출신이 아니라서 목지국 왕가[8] 후예로 추정되는 목만치와 손잡았다 비유왕을 내세운 진씨, 해씨 세력에게 밀려난 걸로 보기 때문에 사케노키미가 구이신왕과 동복이라면 사케노키미도 비유왕에게 밀려났을 것이다.

하지만 비유왕조차 진씨, 해씨를 배제하려다 역으로 당해 21년 동안 시신도 제대로 못 거둔 걸 고려하면 사케노키미가 비유왕의 치세를 부정당한 개로왕의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도왔고, 그 과정에서 문주왕이 사케노키미와 양자 비슷한 관계를 맺어 협력을 다졌을 수도 있다. 개로왕은 귀족을 믿지 못해 동생인 문주, 곤지를 중심으로 한 친족 정치를 펼쳤고 사케노키미가 태자에 준하는 입지로서 왜에 파견된 것을 고려하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게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기 위해 이복 백부인 효장세자의 사후양자로 들어간 것처럼 개로왕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사케노키미와 연이 있던 문주가 개로왕 다음 왕이 되었고 왜로 이주한 문주왕의 후손도 사케노키미의 후손을 자처한 걸 고려하면 사케노키미도 간접적으로나마 백제 왕계에 이름을 남긴 것이 된다. 일본 기록에만 나올 정도로 한반도 기록에서 실전된 인물임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1] 드라마, 애니메이션 주군의 태양에 이 한자가 들어간다.[2] 보통은 대통령급[3] 419년 또는 425년 사망한 박제상과 대면했다.[4] 355년을 이주갑인상하면 475년으로 한성백제가 멸망한 바로 그 해이기 때문에 재수 없으면 백제로 돌아갔다 장수왕에게 개로왕과 같이 죽었을 수도 있다. 한성 함락 때 죽은 게 아니라면 백제나 왜에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5] 한성백제 멸망 당시 개로왕은 아들이 있었으나 한성백제 멸망에 책임을 지기 위해 한성에서 죽음을 선택한 만큼 자신의 직계를 배제하고 동생인 문주를 생전 후계자로 지정한 것으로 보인다.[6] 당시 백제는 수세대에 걸쳐 친동생, 숙질, 이복형제끼리 왕위를 두고 서로를 죽이는 일이 쉼없이 반복되었으며 이복 백부인 구이신왕과 아버지 비유왕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문주가 개로왕의 사촌동생이면 귀족보다 곤지에게 먼저 죽는 걸 걱정해야 하는데, 곤지는 형인 문주에게 순순히 협조하다 같이 귀족들에게 죽었다.[7] 문제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인 팔수부인과 비유왕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며, 팔수부인은 당대 백제 권력을 쥔 진씨, 해씨가 아니라서 진씨, 해씨가 내세운 구이신왕을 밀어내고 비유왕을 즉위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유왕도 진씨, 해씨와 대립하며 마한계를 밀어주다 진씨, 해씨에게 살해당한 걸로 추정되는 걸 고려하면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8] 정확히는 목지국 본가로서 백제와 끝까지 맞서다 멸문당한 천안 동남구 청당동 세력이 아닌 백제에 협력해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분가인 천안 성남면 용원리 세력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