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5 23:54:37

부여사아


백제의 왕자
[[틀:백제의 왕자/아신왕 ~ 의자왕|{{{#!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006666;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AB2D, #4CCB3B 20%, #4CCB3B 80%, #3DAB2D);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국왕 · 태자
왕자 : 온조왕 ~ 진사왕 · 아신왕 ~ 의자왕
? 아들인지 논란이 있는 경우
※ 확실하게 부자관계가 아님이 증명됨
}}}}}}}}}

백제의 왕자
부여사아 | 扶餘斯我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연도 미상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사망
(음력)
513년 10월 13일[A][2] (향년 불명)
왜국
(現 일본)
성씨 부여(扶餘)
사아(斯我) / 순타(純陀)(?)[A]
부모 부왕 무령왕
모후 미상
형제자매 순타태자(?)
동생 성왕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4]

1. 개요2. 생애3. 순타태자와의 관련성
3.1. 반론

[clearfix]

1. 개요

백제의 왕족이자 도래인. 순타태자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2. 생애

(七年) 夏四月 百濟王遣斯我君進調 別表曰 前進調使麻那者 非百濟國主之骨族也 故謹遣斯我 奉事於朝 遂有子 曰法師君 是倭君之先也
(7년, 505) 여름 4월 백제왕이 사아군(斯我君)[5]을 보내어 조(調)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전에 조(調)를 바친 사신 마나(麻那)는 백제국주(百濟國主)의 골족(骨族)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삼가 사아(斯我)를 보내어 조정을 섬깁니다”라 하였다. 드디어 아들이 있어 법사군(法師君)이라 하였는데 곧 야마토노 키미(왜군, 倭君)의 선조이다.
일본서기》 권16 부레쓰 덴노#

《일본서기》에 의하면 504년 음력 10월 백제가 에 파견한 마나군(麻那君)[6]이 억류당하자, 505년 음력 4월 무령왕에 의해 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왜로 파견된 부여사아는 왜에 체류해서 그대로 눌러앉았고 야마토노 키미(倭君)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의 후손은 일본에 뿌리내렸고, 후에 고닌 덴노의 후궁인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배출했다. 그러나 한반도측에 부여사아에 대한 기록이 없다 보니 교차검증이 어려워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집안과 백제 무령왕과의 혈연 관계는 미궁이긴 하다. 물론 간무 덴노가 직접 말할 정도면 모친인 타카노노 니이가사가 이미 고닌 덴노 후궁 시절부터 당시 주변인들도 아는 백제계 도래인 집안 출신이었던건 맞아보이나, 자세한 계보 등은 전하지 않다보니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미 멸망해서 확인도 어려운) 백제계 왕족 혈통과 엮은거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신찬성씨록》에도 나오듯 당시 백제계 도래인들은 왕족 후손임을 주장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물론 진짜 왕족인 경우도 있긴 하니 모든 건 추정일 뿐이다.

3. 순타태자와의 관련성

513년에 사망한 순타태자와 동일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사아는 《일본서기》에서, 순타태자는 《속일본기》에서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조상으로 나온다. 야마토노 키미(왜군, 倭君)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왜국(야마토)의 국왕, 즉 후의 천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키미'는 반드시 군주의 의미로만 쓰인 건 아니고 존칭으로도 쓰였다. 예를 들어 《겐지모노가타리》의 겐지노 키미(원씨군, 源氏君)라는 칭호가 나오며, 사아군(斯我君)의 경우도 왕족인 부여사아를 존칭으로 부른 것이다. 법사군(法師君)의 경우는 출가를 해서 법사라 불린 건지 불교 지식에 해박해서 존칭으로 법사라 불린 건지 아니면 아예 본명이 불교식에서 따와 법사였던 건지 알 수 없다. 현대 한국어로는 '법사님' 정도의 존칭이 된다.

게다가 천황의 경우는 그냥 키미가 아니라 아예 '오오키미(대왕, 大王/대군, 大君)'라는 고유 호칭으로 불렸다. 즉 야마토노 키미(倭君)는 야마토씨를 존칭으로 부른 건데 여기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인 타카노노 니이가사를 가리킨다. 니이가사의 이전 성씨가 '야마토(화, 和)씨'였기 때문이다. 한자 표기인 '倭(왜)'와 '和(화)'가 다른 것은 아직 정형화된 표기가 정착하기 전인 고대에는 훈독이 같으면 대충 혼용되어 쓰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3.1. 반론

부여사아가 513년 사망한 순타태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으나 최근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부여사아가 곧 순타태자라면 처음부터 태자라고 표기할 일이지 굳이 골족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아와 순타라는 이름 사이에는 유사점이 전혀 없다. 야마토노키미(倭君)가 야마토노후히토(和史)와 같은 성씨라는 것 역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고대 일본에서 키미(君)와 후히토(史)는 격이 매우 다른 가바네였다. 키미는 매우 높은 등급으로 황족 다음 가는 위상이었다면 후히토는 하급 관인층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A] 순타태자와 동일인일 경우.[2] 율리우스력 10월 11일, 음력 8월 26일[A] [4] 《일본서기》[5] 훈은 '시가 키시'. '키시'는 건길지와 관련있는 단어다.[6] 방계 왕족이라는 설과 목례마나(木刕麻那)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