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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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墨家 / Mohism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 한 학파로, 묵자(墨子)를 시조로 한다.
2. 상세
법가가 법, 유가가 인(사랑•동정)과 의(정의)라면 묵가는 바로 애(愛), 즉 사랑을 기본 모티브로 하여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세상에 고통이 없지 않겠냐는 주의다. 유가의 仁도 사랑[1] 이지만, 묵가의 사랑은 겸애(兼愛)로서 차별없이 평등한 사랑을 말한다.기독교의 아가페적 사랑과 비슷한 부분[2]이며 맹자가 '무부'라 칭하여 지 부모도 못 알아 본다며 주구장창 까댄 부분이기도 하다.[3] 실제로 아비 부는 당시 아버지란 한정된 뜻보다 가족이나 가정을 비유하던 표현이라 '가족도 없는 사상'이라는 모욕인데, 고아나 장애인들이 넘쳐나던 춘추전국 시절 차별 좀 없애고 인간성 회복하자는거 가지고 넌 부모자식도 없냐고 디스하는 격이니 오버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4] 이는 묵자가 이상적으로 꿈꿨었던 가족상 탓인데, 궁극적으로 묵가의 '겸애'가 가리키는 인간세상에 대한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정과 아예 다른 개념이다. 그는 자기 부모를 성실히 모시는 '효'에 대해 자기 부모와 남의 부모를 가리는 '별애'라고 비판하곤 했다. 묵자는 전국시대 당시 끊임없는 전쟁 상황 속 살육으로 인해 고아가 넘치고 인신매매가 판을 치는 사회를 보고, 공동가정제를 꿈꿨었다. 즉 네다섯쌍의 부부가 하나의 가정을 차리고 자식을 공유하여[5] 아주 큰 형태의 가족을 일구는 형태를 원하였다. 즉 가족조차 이상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사회체계를 말한다.
그리하면 부모 한두명이 죽거나 잘못된다고 편부모가정이나 고아가 발생하지도 않고, 형제도 많아지니 외부에서 가정에 미치는 악영향을 막기도 쉬워진다. 또한 자녀들이 성장하여 혼인하게 되어[6] 대가 거듭될 수록 사돈이 많아져 가족이라는 조직의 규모가 커져 사회에서 가족보다 더 큰 공조직이나 사조직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생각해보면 혈연보다 중요한건 결국 사람간 소통과 신뢰 관계라는 걸 꽤나 먼저 깨닫고 주창한 사상.
단, 이를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낳은 자식을 다른 부모가 낳은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고, 이를 겸애[7]라 한다.
묵가는 '10개의 나라가 나눠져 100개의 나라가 되고, 100개의 나라가 1000개로 나눠지고, 그것이 1만 개로 나눠지면 결국 각 나라 사이의 힘의 차이가 매우 작아지니, 그중 제일 강한 나라가 제일 약한 나라를 침공하려 해봤자 힘의 차이가 적어, 다른 나라가 조금만 도와도 충분히 막을 수 있게 되고 나아가 그 최강국이 망할 수도 있게 되어 그럴 뜻을 품을 상황이 없어지니 집단간 힘의 균형이 완벽하게 유지되어 평화가 온다'며 이를 궁극적으로 추구함을 통해 세상의 혼란없는 평화는 물론, 사실상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질 수 있고 더 나아가 행정적인 개념상의 가정도 없어질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야말로 극초분할화된 세상, 석기시대급의 원시 공산사회[8]를 꿈꿨다.
또한 소염론을 주장해 인간의 본성은 없고 물감을 푼 물에 젖어가는 백지같이 물들어 간다라고 했다. 고자와는 비슷하지만 구별된다. 오히려 로크 등의 타불라 라사와 비슷하다.
또한 '교상리(交相利)'라는 덕목으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재화를 나누어가질 것을 주장했다. 재화를 나누어가질 때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재물을 가지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소비한 뒤에 남게 되는 물건들은 다시 거두어서 또 나누어주는 것으로 잉여생산물의 축적을 통한 부의 불균형을 막기 위한 방책이다.[9]
이렇게 보면 공산주의와도 흡사한 부분이 있으나 오히려 현 중국공산당에서는 이것 이외의 다른 사상 부분에서의 충돌 문제[10] 때문인지 묵가 사상도 지들 입맛에 맞게 골라 쓰고 있다. 학교에서 묵가에 대하여 가르칠 때도 나라가 쪼개져야 한다는 이념에 관련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뭐 사상이란 걸 자기들 입맛대로 사용하는 게 꼭 중국만의 문제라고 볼 순 없지만 말이다.
묵자는 유가에 비해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대표적으로 제사나 삼년상을 거부했는데, 돈 낭비, 시간 낭비라는 것이 이유였다. 3년이란 기간 동안 제사하느라 생업에 종사하는 일에 크게 악영향을 주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피해가 심하고 이런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밥벌이로 이용하는 유학자들 이른바 '속유'라 불리는 자들의 배만 채워준다고 비판했다. 절장 편에서 주장하길 유가가 주장하는 후장구상은 불합리한 것으로, 후장을 하면 많은 재산을 탕진해서 가난한 백성들은 가진 재물을 다 써야 하는 문제가 있고, 구상을 하면 몸이 피로해지고 건강을 해쳐서 높은 관료부터 백성까지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 묵가의 주장이었다.
재밌는 점은 묵가들은 뛰어난 수성술을 익혔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묵적지수란 고사성어도 있다. 이들은 그러나 침략전쟁은 자국에게 이익이 있더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이 벌어질 경우 방어하는 진영에 참전하여 그들의 뛰어난 수성술로써 돕고 그 뒤 다시 길을 떠나는 식으로 살았다.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만 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를 비공(非攻)이라 했다. 즉 모두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게 만들어 전쟁을 막고자 한 것으로써 의외로 스케일이 크다.[11]
그래서 사실 제자백가 중 전국시대 최고 스타는 묵가였다. 약자 편을 드는 이미지가 강해서 수많은 백성들이 좋아했고 묵가의 사상을 배우려 들었다고. 위에서 맹자가 무부라고 비판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맹자는 공자가 이미 답을 제시하였으나 세상이 이단학파 때문에 그 답을 가려져 혼란이 생긴다는 주장을 하였다. 여기서 두 학파를 딱집어 비판한 것이었다. 그정도로 묵가는 당시 중국에서 인기있는 학파였다 할 수 있다. 다른 한 학파는 무군으로 비판당한 도가이다.[12]
묵자를 비롯한 묵가의 일원들은 당대 최고의 수성전문가였다고 한다. 다만 묵가의 창시자인 묵자는 바퀴제작의 전문가였는데 이는 수레를 이용한 전차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수성 외에도 전쟁에 관련된 경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당시의 군주 및 지배층들이 아나키즘적 색채도 제법 진한 묵가를 싫어했기에[13] 탄압당했으며, 사실 매력을 느껴도 통치자 입장에서는 실행하기 까다로웠다. 거의 완벽한 무차별을 주장한 겸애 정신이 성인군자만 있는게 아닌 현실에선 실제로 실천하기 꽤 어려웠기 때문. 물론 이론적 이상과 별개로 현실에선 엔통과 신뢰의 범위를 넓히는 방향 등으로 실천 범위를 조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나둘씩 현실과 타협하다보면 이런저런 말썽도 일어나는 법.
종국엔 묵가 역시 초심을 잃어 묵가의 영수인 거자는 절대권력을 누렸다고 한다.[14] 실제 묵가는 세월이 지나며 소도시/소국 방어가 아닌 국력의 증강을 도모하는 대국의 요청에 응하게 되면서 본래 묵자의 '비공' 사상으로부터 조건부 비전론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전제지배를 추인하는 '상동(尙同)' 사상까지 제창되기에 이르렀는데,[15] 현실과의 타협이 심화될수록 묵가 내부도 분열되면서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서원에서 나온 『아시아 역사와 문화 1권』 중국사-고대 편 참고.)
진시황이 나라를 설립하는 데 묵가의 도움을 꽤 받았으나 제국 건설 이후 상술된 묵가의 사상[16]과 공존할 수 없는 특성 때문에 가장 심한 탄압을 받았고, 전한 한무제가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독존유술을 발표하며 유가 사상을 유일한 나라의 정치 이념으로 삼게 되면서, 앞에서 말한 유가나 민간 신앙 속에 섞여들어간 도가와는 달리 진 이후의 중국에서는 그 존재가 소멸하게 된다. 오직 묵적이 신선으로서 도가에 받아들여지고, 경전도 도가 경전의 틈새에 끼어서 살아남았을 뿐.[17]
이후 묵가의 사상이 적힌 묵자는 노승, 악일, 한유 등 소수의 사상가들이 연구한 것을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청나라 대에 가서야 필원[18]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고, 양계초, 후스 등이 각주를 달면서 오늘날의 묵가 사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총 71편 중 20여 편이 소실되면서 현재는 53편이 남아있으며, 5부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아남은 묵가들은 기존의 묵가적 질서를 유지하는 특징을 가지는 세력과 형이상학적인 학문 쪽으로 더 집중하는 세력으로 갈린다. 실용주의를 중시하는 묵학의 후예들은 주로 의술에 종사하였고, 음지에서 정교한 기계장치 등을 만드는 비법등을 남긴다. 일각에서는 제갈량의 수전이나 연노, 목우유마 등은 묵학의 흔적이라고도 한다.
전술한대로 묵가는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대의를 중시하는 협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무력집단이기 때문에 훗날 중국 민중들의 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무림 문파의 효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하의 대의를 우선으로 하고, 엄격한 규율을 통해 조직을 통제하고, 무술과 같은 전문적인 기예를 익힌다는 점, 심지어는 종교단체 성향도 강하다는 점에서 무협에서 그려지는 무림 문파의 면모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3. 사상가
- 묵자(묵적)
- 고획(苦獲)
- 굴장자(屈將子)
- 당고과(唐姑果)[19]
- 등능(鄧陵)
- 맹승(孟勝)
- 복돈(腹䵍)
- 사자(謝子)
- 상리근(相里勤)
- 색로삼(索盧蔘)
- 아자(我子)
- 이지(夷之)
- 자이치(子巳齒)
- 전계(田繫)
- 전양자(田襄子)[20]
- 전자(纏子)
- 허범(許犯)
- 호비자(胡非子)
4. 대중문화 속의 묵가
위의 묵자가 바퀴제작에 능했다는 사실, 모형 병기를 만들어서 공수반과 모의전을 했다는 사실이 확대되어서 묵가의 인물들은 대개 기묘한 기계장치의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묵가집단이 연발쇠뇌를 잘 만들었다는 기록을 따라 주력무장 중에 연노가 있는 경우도 많다.2001년 홍콩드라마 심진기에서 조나라로 타임슬립한 고천락은 기연으로 묵가검법을 배워서 진나라 대장군이 된다.
아케미 켄이치가 쓴 <묵공>이란 소설이 특히 유명하며, 원작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모리 히데키의 만화판을 비롯하여, 유덕화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다.
대만의 유명 게임소프트 헌원검 시리즈에서 자동기계장치인 기관술과 관련하여 묵가가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외전인 풍지무는 아예 묵자교단의 제자 보자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2020년에 나온 최신작 7편 염묵의 업화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시리즈 중 외전 포함 무려 3편이 묵가와 관련한 인물이 나온다.[21]
5. 관련 문서
[1] 정확히 말하면 '공감하고 소통하려는' 의지라서 그걸 사랑으로 볼 수도 있기는 하지만, 'sentimental', 'sensitive' 즉 타인의 감정에 감성적으로, 혹은 민감하게 공감하는 능력을 말한다. 공자는 인에 대해 '(상대의 감정을) 말하지 아니하여도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2] 약간은 다른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아가페적 사랑은 초월자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서 이루는 무조건적 헌신이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반면 묵가에서 말하는 겸애는 물질적인 면에서 실리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사랑보다는 이익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즉 '만민에게 이익이 되게 하자'의 뉘앙스를 가진다.[3] 사실 맹자는 다른 사상도 이런 식의 디스를 즐겼는데, 그런걸 보면 맹자도 그 속에 담긴 속뜻은 헤아리지 않거나 혹은 알아도 모른체 하고 단편적인 말 꼬투리 잡아 은근히 자기 말만 맞다고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4] 유가의 '인'은 존비친소의 차이를 둬, 남을 공경하고 사랑하되 그 사랑은 공평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을 더 사랑하고 귀한 사람을 더 공경하라는 다소 현실주의적인 의미다. 맹자만이 아니라 동서고금 박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는 가장 먼저 나오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5] 배우자를 공유하지는 않으니 오해말자. 플라톤이 아쉬워합니다.[6] 혈연과 무관하게 같은 가정 내 자식끼리는 혼인할 수 없다. 묵가의 이론상 그들은 친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7] 단, 여기서 다른 부모가 낳은 자식이라는 것은 그 공동 가정 내에서의 다른 부부가 낳은 자식만을 말하는 것이지, 세상 모든 자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가정 내에서의 자식을 다 자신의 친자식으로 한다는 것일 뿐, 다른 공동가정은 고려하지 않는다.[8] 물론 기술이나 학문적 성과를 없애고 모든 수준을 석기시대급으로 하자는 뜻은 절대 아니다. 발전된 기술로 인한 혜택은 가지되, 이를 어떤 차별도 없이(이것이 겸애) 모두가 완벽하게 공유하자는 것이며 이를 위해 세상을 잘게 쪼개 힘의 균형을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9] 사실 이게 고고학에서 분석한 석기시대급 원시 공산사회에서 하던 방식이다. 아마 당시가 신석기시대로부터 먼 시대는 아니었으므로 당시의 문화에 대한 시대적 지식 전달이 대중적으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10] 하나의 중국 정책이나 공산당 독재는 이런 점을 우려한 묵가랑 정반대의 노선이다. 소련은 그래도 공화국 연방으로 지방분권적 성향이 있었지만 중국은 그런거 없다. 잉여생산물에 관해서도 소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후 잉여생산물이 생기면 재산이 생기고, 이로인해 자본이 생겨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냥 잉여생산물을 없앴다(...) 우리가 공산주의 하면 떠올리는 모든 생산부문에 있어 계획경제가 바로 이 때문이다.[11] 상술된 대로 묵가는 나라가 점점 더 나눠지는 것을 추구했으므로, 당연히 약자인 나라편을 들어 나라수가 줄어들고 강한 나라가 더 강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묵가의 사상은 겸애지만 그를 위한 방법론은 '온 세상의 균형 추구'였다.[12] 일본 학자 와타나베 다카시는 유가는 사대부의 사상, 도가는 몰락 귀족의 사상, 법가는 신흥지주의 사상, 묵가는 가난한 하층민의 사상이라고 평가했고 묵가사상이 고대시대에 너무나 일찍 근대를 지향했기에 소멸되었고 주장했다.[13] 실제 묵가 사상은 결국 지 권력 유지를 위해 전쟁 일으키고 백성 힘들게 하는 지배자가 문제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가는 사상이었기에, 전쟁이 난무하던 춘추전국시대에 민초들에겐 환영을 받았지만 반대로 지배층은 꺼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차별없이 평등한 사랑이라는 주제는 신분제가 공고했던 시대상황과 왕으로서 백성을 이용하는데 적절한 명분을 제시하지 않았기에 기득권에게는 널리 가르치기엔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사상이었다.[14] 맹자 교양 강의(푸페이룽 지음) pg149.[15] 시라카와 시즈카는 "공자젼"에서 타락한 후기 묵가를 왕공들의 용병 노릇을 하는 기계화군단이라고 형용한다.[16] 묵가는 수천수만개의 나라가 생겨야 한다고 했는데, 진시황은 아예 통일을 해버려서 한 나라를 만들었으니 정반대다.[17] 묵가의 명맥이 언제 끊어졌는지는 학계의 논쟁거리지만 보편적으로는 진시황 시기에 소멸했다고 추정한다.[18] 청 대의 학자(1730~1797).[19] 유향(劉向)이 편찬한 설원(說苑)에 의하면 진나라에서 대부를 지낸 사람으로서, 여씨춘추전에선 당고과로, 회남자에서는 당고량(唐姑梁)으로 표기하고 있다.[20] 참고로 제나라 전씨 9대 종주이자 제선공시기의 재상인 전양자(田襄子)와는 동명이인이다.[21] 1편 외전에서는 묵자와 귀곡자, 공수반이 중요인물로 등장하고, 4편에서는 묵자 계파 집단의 제자들이 등장하고, 7편은 쇠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내분이 일어나고, 여기서 살아남은 몇몇 생존자들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