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6:09:57

한비자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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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한비자
韓非子 | Han Fei Zi
파일:한비자.jpg
본명 한비
韓非
출생 기원전 281년?
한나라[1]
사망 기원전 233년 (향년 48세?)
진나라
직업 철학자
사상 법가

1. 개요2. 생애
2.1. 사상2.2. 사후2.3. 죽음의 원인
3. 한비와 그 후학이 쓴 법가 서적
3.1. 개요3.2. 내용3.3. 평가3.4. 기타3.5. 관련 고사성어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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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시대철학자로 본명은 한비(韓非)이다. 전국시대 말기 (韓)나라 왕족 출신이다. 법치주의를 주장했으며 법가를 집대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보통이라면 본명의 '한'을 따서 '한자(韓子)'라고 해야겠지만, 후에 의 유가 사상가 한유를 한자라 부르게 되면서, 법가 사상가인 한비의 우선순위가 낮기 때문에 한비 쪽을 이름 전체를 넣어서 한비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2. 생애

젊어서 (秦)의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의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언변이 뛰어난 이사와 대조적으로 한비자는 말더듬이었다고 한다. 허나 학문에 있어서는 이사가 한비자에 미치지 못했다. 이때 한비자는 법가뿐만 아니라 도가, 유가, 묵가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법에 의한 부국강병의 논리를 정립했다. 한비는 철학자 중에서도 형명가(刑名家)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형명학을 주장하는 사람이란 뜻이며 형명학은 명실론(名實論)[2]을 법의 적용에 응용하려던 일종의 법률학이다.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문화가 떨어지고 당시에는 세가 기우는 형국이어서 한비자는 이를 걱정하여 여러 계책을 한왕에게 간하였으나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매우 존경했던 인물로도 유명한데, 사마천사기에 의하면 한비자가 쓴 저서인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본 진시황이 크게 감명을 받아 "이 사람과 교유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한비를 얻고 싶다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한비가 사신으로 올 것이고 그때 회유하면 된다"라고 진시황에게 간한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어차피 공격을 했겠지만.

어쨌든 대륙 통일의 신호탄으로 한나라를 공격했을 때 한나라에서는 예상대로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어 침공을 막으려고 하였고, 한비자는 진시황에게 가서 한나라를 공격하지 말고 조나라를 공격해야 하는 이유를 진시황에게 설명했는데
  • 첫째. 한나라는 이미 진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어 한나라를 공격하면 아무도 진나라를 믿지 않게 될 거다.
  • 둘째. 한나라가 멸망하면 조나라가 즉각적으로 위나라와 동맹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기 힘들어진다.
  • 마지막 이유. 조나라를 먼저 공격해 위나라와 제나라를 정벌하면 한나라는 편지 한 통으로 항복하게 되니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다.

이상 3가지 이유를 들었다.

한비자는 원래 말더듬이라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논리정연한 글솜씨에 진시황은 넘어가 버리고 게다가 한비자는 진나라 같은 대국이 요가를 이용하여 뇌물로 타국의 관리를 매수하는 건 법가 사상을 기초로 하는 진나라에겐 맞지 않다고 요가를 욕하였다.

이를 알게 된 이사요가는 진시황에게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 출신이라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도 없고 한비자가 이야기한 계책은 전부 한나라를 위한 계책[3]이라고 설득하여 한비자를 감옥에 가두고 독살시켜 버렸다. 또는 감옥에 갇힌 한비자가 신세를 비관하여 음독 자살했고, 진시황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는 설도 있다.

2.1. 사상

옛날과 지금은 관습이 다르며, 시대에 따라서 방책도 달라야 되는 것이다. 만일 관대하고 여유 있는 정치로 절박한 시대의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면, 그것은 채찍을 쓰지 않고 억센 말을 다루려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유가나 묵가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선왕(先王)들은 천하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백성 대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느냐고 반문하면 그들은 말한다.
「사법관이 형을 집행하면 그로 인해 군주는 즐기던 음악을 멈추고, 사형의 통지를 받게 되면 그 때문에 군주는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그들이 극찬하는 현명한 왕인 것이다. 군신 관계를 부자 관계처럼 하면, 세상은 반드시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데, 그들의 말대로라면 화목하지 않은 부자는 전혀 없어야 한다. 사람에게 부모의 애정보다 더한 것은 없고, 부모면 누구나 자식을 사랑하지만 자식을 반드시 잘 다스리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군주가 아무리 신하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어찌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선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비길 수 없으며, 더욱이 자식이 반드시 반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하물며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다시 또 법률에 의해서 법을 집행하고, 군주가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는 인의를 나타내고 있지만 정치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형을 집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형을 중지시킬 수 없는 것은 법 때문인 것이며, 선왕이 그 법을 없애지 않고 눈물을 별로 문제시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더라도 인(仁)만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비자』 <오두편>
지금 정치를 모르는 자는 반드시 ‘민심을 얻으라’라고 말한다. 민심을 얻는 것으로 치세가 될 수 있다면, 이윤이나 관중은 쓸모가 없는 것이며, 다만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백성의 지혜는 쓸 수 없으니, 마치 갓난애기와 같다. 대저 어린애는 뼈를 발라주지 않으면 복통을 일으키며, 고름을 짜 주지 않으면 점점 (병세가) 더해진다. (생선의) 머리를 발라주고 고름을 짜는 일은, 반드시 한 사람의 품에서 자애로운 어머니가 할 일이나, 오히려 아기가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것은, 갓난애기가 그 작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중에) 커다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윗사람이 밭을 갈고 풀을 뽑으라고 재촉하는 것은 백성들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을 가혹하다고 여기고, 윗사람이 형벌을 엄중하게 고치는 것은 사악을 금지시키기 위해서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을 지독하다고 여기며, 세금과 곡식을 거두어서 창고를 채우는 것은 또한 기근을 구하고 군대를 준비하려는 것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이 탐욕스럽다고 여기고, 경내에는 반드시 본분을 알아 사사로움이 없음을 설명하고 아울러 신속한 싸움에 힘쓰는 것은 종들을 관리하기 위해서이지만, 백성들은 윗사람이 포악하다고 여긴다. 이 네 가지는, 나라를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인데도, 백성들은 기뻐할 줄 모른다.
대저 성인(聖人)에 통하는 선비를 구하더라도, 백성들의 지혜를 참고하는 것은 기준으로 쓰기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다.
옛날에 우(禹)임금은 장강의 물을 틔어서 황하로 통하게 하였으나 백성의 무리들은 기와나 돌을 던졌으며, 자산(子産)은 밭을 개간하여 뽕나무를 심었는데도 정나라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우는 천하를 이롭게 했으며, 자산은 정나라 사람을 보살폈는데도, 모두 백성들에게 비방을 받은 것이다. 대저 백성의 지혜는 쓰기에 부족하다는 것이 또한 명백하다. 그러므로 선비를 천거하여 어질고 지혜로운 자를 구해놓고선, 정치를 할 때 백성들에게 맞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모두 난리의 실마리가 되니, 그와는 함께 정치할 수 없다.
『한비자』 <현학편>
술수를 아는 선비(智術之士)는 반드시 멀리 보고 밝게 살피니, 밝게 살피지 않으면 사사로운 것을 간파할 수 없다. 법에 능한 선비(能法之士)는 반드시 강인함을 꾀하며 굳세고 곧으니, 굳세고 곧지 않으면 간사함을 바로잡을 수 없다.
그 신하가 명령에 미적거리면서 일을 좇으며 법을 어루만져서 관리를 다스린다고 하여 중인(重人:권세가)이라 말하지 않는다. 중인이라는 자는 명령 없이 멋대로 하고, 법을 이지러지게 하여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축내어 내 집을 편하게 하는데, 그 힘이 그의 군주에게 까지 이를 수 있으면, 이를 중인(重人)이라 말하는 것이다.
술수를 아는 선비는 밝게 살피니 받아들여서 쓰게 된다면, 또한 중인들의 숨은 뜻(情)을 간파할 것이다. 법에 능숙한 선비는 굳세고 곧으니 받아들여서 쓰게 된다면, 중인들의 간사한 행실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므로 술수를 아는 선비와 법에 능한 선비를 쓰게 된다면, 귀하고 중한 신하들은 반드시 줄 밖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술수를 알며 법에 능숙한 선비는, 더럽히는 것이 마땅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있을 수 없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더럽히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 중요한 일을 멋대로 하면, 나라 안팎이 그를 위하여 사용될 것이다.
  • 이로써 제후가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일에 반응하지 않으므로, 적국까지도 그를 위해서 칭찬하게 된다.
  • 모든 관료가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업무가 진행되지 않으므로 군신이 그를 위하여 사용된다.
  • 낭중(郎中:벼슬 이름)이 그를 의지하지 않으면, 군주를 가까이 할 수가 없으므로 좌우가 그를 위해 숨겨준다.
  • 학자가 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녹봉이 박해지고 대우가 낮아지므로 학자는 그를 위한 말을 하게 된다.
이 네 가지 도움은 사악한 신하들의 스스로를 꾸미는 수단이 된다. 중인은 '군주에게 충실하여 그 원수(술수는 아는 선비와 법에 능한 선비)가 다가오게 하는 것'을 할 수 없으며, 그 군주는 '(간신들의) 네가지 도움을 뛰어 넘어 그 신하를 살피고 간파하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군주가 더욱더 가려질수록, 대신은 더욱더 (권력이) 무거워진다.
『한비자』 <고분편>
※오두편, 현학편, 고분편은 한비자의 실제 저술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내용을 기술하였으니, 이를 읽으면 한비자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비자의 법치 국가 철학은 "1.'인의'가 아니라 '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함. 2.백성의 생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함. 3. 지혜롭고 강직한 사람을 등용해서, 능력 없는 권세가를 쫓아내야 함"으로 정리된다.

2.2. 사후

진시황이 한비자를 죽인 이사와 요가를 원망해 진상을 밝히고 이사와 요가를 처벌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계획의 실용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리하지 않았다. 대신 한비자가 죽은 이후 한비자를 사면하여 그의 정책과 사상을 이용하고 알릴 수 있게 하였다.

2.3. 죽음의 원인

이사가 같이 한 스승을 모신 동문 사이였던 한비자를 죽이도록 사주한 것은 질투가 아닌 현실적인 이유였다는 의견이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이사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견해가 달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한비자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으며 설사 한비자와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해도 한비자가 한나라를 정벌[4]하는 데 방해가 되어 결국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반면 이사가 질투와 함께 재능이 뛰어난 한비자를 꺼려 죽였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우선 이사는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조고의 감언을 따라 진나라의 후계 계승 문제를 꼬아버렸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이며, 이사는 자신의 보신 의식이 아주 강해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결을 꺼린 인물[5]임을 이유로 들어 결국 개인적인 감정을 국가적인 이유로 포장, 능력이 뛰어난 한비자가 진시황의 마음에 들게 된다면 자신이 입장이 흔들리는 위험성 즉 본인에게 큰 위협이 되는 한비자를 죽였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3. 한비와 그 후학이 쓴 법가 서적

3.1. 개요

전한시대에 정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비자와 그 후학들이 쓴 논저이다. 55편 20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한비자가 직접 쓴 것으로 추정되는 저서는 오두(五蠹), 현학(顯學), 고분(孤憤)이다.

3.2. 내용

성인은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니 평범한 사람들로도 굴러가는 제도 구축에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 역설하였다. 성인의 현능함을 이용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역설한 것은 법가의 공통된 견해이다. 또한 한비자는 다른 학자들이 옛 성인들을 언급하는 것을 비판했다. 한비자 본인도 옛사람들이나 그들의 시대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허나 시대가 바뀐 까닭에 옛날과 같이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옛날에는 사람의 숫자가 적었으므로 재화가 넉넉하였다는 것이다.[6] 허나 오늘날을 돌이켜 보면 백성들은 아들 다섯을 부양하기에 많다고 여기지 않으나, 이 다섯 아들이 제각기 다섯 아들을 낳으면 할아버지는 스물다섯의 손자가 생기니 자연히 차지할 수 있는 재화가 줄어들어 다툼이 생긴다. 그러므로 새 시대에 맞는 새 정책이 필요하며, 한비자는 이를 옛 성인의 시대라 할지라도 제각기 다른 시대의 성인의 계책을 실행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다시금 수주대토에도 빗대어 설명하였다.

법(法)과 술(術)과 세(勢)를 통합했다. 이는 한비자가 최후의 법가이자 동시에 법가를 집대성한 법가의 거두로 불리는 이유이다. 한비자 이전의 법가에는 크게 3가지의 계통이 있었다. 첫째로 신도의 계통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세를 중시했다. 둘째로 신불해의 계통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술을 중시했다. 셋째는 상앙의 계통인데 이들은 법을 중시했다. 한비자는 어느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다고 여겼다.

한비자에 따르면 세는 군주에게 있어서 밑천이다. 일찍이 신도가 두 신하와 한 군주가 세력의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를 언급했다. 임금은 두 신하 중 하나를 쳐서 세력의 절대 우위를 점하라는 충신의 간언을 무시하였다가 한 명의 신하가 다른 신하를 쳐서 세력을 흡수하자 열세에 놓여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세는 군주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밑천이다. 술은 군주가 신하를 부리는 술수이다. 군주는 적절한 신하를 뽑아 임용해야 하며 신하의 실적에 따라 상벌을 명확히 해야 한다. 군주가 신하를 제대로 부리지 못하면 국정은 온전히 운영될 수 없다. 법은 신하가 백성을 다스리는 규칙이다. 법이 엄정하지 못하면 나라가 어지럽다. 세, 술, 법을 적절히 병용하는 것이 치국의 요체이다. 법과 술은 군주의 수단이며 세가 없으면 수단을 부릴 힘이 없다. 한비자의 많은 부분은 술에 할애되어 있다.[7]

고분편에서 한비자는 술과 법을 다루는 선비에 대해 논한다. 지술지사, 술을 아는 선비는 식견과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신하들이 꾸미는 음모를 밝힐 수 있다. 능법지사는 법을 아는 선비인데 굳세고 곧아야 한다. 굳세고 곧지 못하면 간교함을 바로잡을 수 없기에, 이를 등용해 사리사욕을 꾸미는 간신과 귀족을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세를 따르지 못할 경우 법술지사는 누명이 씌워져 죽거나, 자객의 손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법술지사는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저러한 운명에 취할 것이다.[8]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므로 순자의 영향을 받았다. 순자는 유가 중에서도 상당히 논리적인 부분을 중시했는데 이는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명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명가의 영향도 받았다. 명가의 주된 노력 중 하나는 이름과 실질을 알맞게 부합시키려는 것이었다. 유가에서는 이것이 부모가 부모답고 자녀가 자녀다운 윤리론으로서 나타난다. 한비자에서는 이름과 실질의 부합이 관직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긴다. 재무부 장관이라는 이름이면 재무부 장관다운 실적이 있어야 하며, 임명한 이후에는 명과 실이 잘 부합되는가 심사하여 상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법가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형명(形名)이다.

다시 말하자면 재무부 장관은 관명이다. 재무부 장관이 해야 할 일은 이름의 내용이자, 직(職)이다. 재무부 장관, 곧 재무부 장관직을 맡은 사람이 바로 실이며, 다른 말로는 형이다. 형명상합, 명실상합등은 명과 실, 직과 형이이 조화로운 상태를 이른다. 순명핵실(循名核實), 종합명실(綜合名實)은 이를 잘 판단해 상과 벌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술에 속하는 것이다. 한비자는 상벌은 군주의 두 가지 권병, 도구라 말한다.

그러기에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기 때문에 더욱 상벌을 중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디 호오의 감정을 지닌 존재이다. 이익을 좇고 해를 꺼린다. 그러므로 이해로써 사람을 부릴 수 있다. 인간이 선하지 않음은 모든 법가가 주장하는 바이지만 한비자는 더욱 강하게 주장한다. 한비자 육반편에는 부모 자식의 관계에 멋지게 빗대어 설명한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아들은 기뻐하나 딸은 꺼린다. 같은 몸에서 나왔으나 아들과 딸 사이에 구별이 생기는 것은 부모가 훗날의 장기적인 이익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에도 계산하는 마음이 있는데 부모 자식도 아닌 관계는 어떠하겠는가?

외저설좌상편도 비슷하다.

품꾼을 샀을 때 주인이 돈을 주고 밥을 맛있게 해주는 것은 품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품꾼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다. 품꾼이 열심히 일하는 까닭은 주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반찬이 맛있고 품삯도 쉽게 받기 때문이다. 주고 받음이란 이러하다. 마음의 모든 작용은 한결같이 자신을 위하는 마음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익이 걸리면 적이라도 화해하나 손해가 생기면 부모 자식 간에도 원망한다.

앞서 옛날에는 사람이 적었고 재물이 많았으며, 오늘날에는 사람이 많아 재물이 적어졌다고 한비자는 말한다. 봄에는 형제끼리도 양식을 양보하지 않지만 가을에는 나그네에게도 밥을 준다. 사람의 인성이 옛날에는 관대했고 오늘날 야비하지 않다. 다만 환경의 차이이다.[9] 형벌과 정치는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강하고 약하고 차등이 필요하다. 현학편에서 한비자는 공맹의 덕치와 예치는 무시한다. 흉포를 막는 것은 위세일 뿐이지, 덕후(德厚) 따위로는 혼란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남이 내게 선행할 것을 의지치 않고, 남이 내게 감히 나쁜 짓을 못 하도록 하겠다. 남이 내게 선행할 것을 의지하면 한 나라 안에 열댓 명도 의지할 수 없겠지만, 감히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면 한 나라를 숙정할 수 있다. 통치자는 다수에게 통할 방법을 택해야 하므로 덕은 버리고 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은 필연이지만, 선행은 우연인 것이다.

한비자의 사상은 도가 사상과도 통한다.[10] 한비자와 명가도 그렇듯 당대의 제자백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법가의 통치술과 도가의 통치술은 본래부터가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개중에서도 대단한 지혜를 가진 성인이 쓸데없다고 주장하는 거나 무위의 통치술 등은 도가와 법가가 특히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바이다. 도가의 통치술은 많은 부분이 무위의 통치술로 화를 피해 은거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는 앞서 논한 신도가 세를 중시함과 통한다. 군주는 현명함으로 세에 거스르는 일을 꾸밀 필요가 없이 세에 따라서 행동하라는 것이다. 앞서 두 명의 신하와 한 명의 군주의 이야기를 했는데 군주가 세에 따라 두 명의 신하 중 한 명을 쳐서 세를 흡수했거나, 한 명의 신하가 승리한 후에는 늦더라도 왕위를 내려놓고 은거했다면 화를 피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도는 때로는 법가로 분류되고 때로는 도가로 분류된다.

본래 무위의 술은 공자가 먼저 주창한 것이다. 공자의 주장에 따르면 순이 바로 무위의 술을 활용하였다. 순은 그저 조정에 장중하고 단정하게 앉아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유가에서 말하는 덕치라고 할 수 있다. 덕으로 사람을 교화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반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는 작위가 없어 몸이 안전한 은자의 경우를 이른다. 한비자는 이를 결합시킨 것이다. 무위는 무위이되 그 꾸밈이 없음은 유가도 아니고 도가도 아니다. 세에 있어서 무위는 두 신하와 한 명의 군주의 경우처럼 세를 따라가는 무위를, 술에 있어서 무위는 군주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신하를 세워서 상벌을 다루는 것을, 법에 있어서 무위는 역시 군주가 직접 일을 하지 않고 신하가 법을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보면 신도는 법가와 도가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때로 법가로 분류되고 때로 도가로 분류되는 것이 각자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양권편은 자못 명가와 도가의 흥취가 섞여 있다. 군주는 중앙에서 세를 쥐고 있으면서 신하들을 열심히 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군주는 신하의 일처리를 관찰하며 형과 명의 기준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이치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각 사물과 재료는 그에 적합한 일과 용도가 있다. 모든 것이 적합한 곳에 처하면 군신 상하는 무위의 도로 다스릴 수 있다. 닭은 새벽을 알리고,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 신하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군주는 닭과 고양이를 기르면 그만이지 결코 쥐를 잡을 재능, 새벽을 알릴 재능이나 근면함을 갖출 필요가 없다. 만약 군주가 어떤 능력을 특별히 더 귀중하게 여긴다면 신하는 그 능력을 이용해 군주를 기만할 것이다. 논변과 총명함을 군주가 사랑한다면 신하가 그 능력을 이용할 것이니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11] 명가와 도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군주는 이처럼 신하에게 일을 맡긴 채, 명과 실의 조화를 살펴 상벌이라는 두 권병을 이용해 그들의 공효를 평가한다. 이전 버전의 한비자 문서에서는 한비자가 도가와 통하지만 노자에 국한되지 장자와는 별 관련이 없다고 말했으나, 장자 천도편에도 비슷한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12][13]

도덕경을 인용하는 해노, 유노 편 등은 비록 사마천은 한비자의 저작으로 여겼지만, 사실 후세의 편집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이들이 도가와 통하기는 한다. 말하자면 장자는 그냥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잘 살지 않겠냐고 했다.[14] 노자는 덜 욕심내고 무지한 상태에 머물면 순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도가의 일파는 사물이란 영위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영위하지 않을 수 없고, 일은 은닉되어 있지만 도모하지 않을 수 없고, 법은 조잡하지만 실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다. 이들은 분수, 형명, 인임, 원성, 시비, 상벌 등을 논하긴 하였으나 역시 하늘, 도덕, 인의 등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도가와 통하되, 또 다르다.

현학편에서는 자유주의 경제학 비슷한 이야기도 한다. 곧 유가에 대한 비판인데, 유가는 빈궁한 자에게 토지를 나눠주자고 하지만 똑같은 조건하에서 빈궁한 자와 부유한 자는 그 노력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유가의 주장은 공리공담에 불과하며, 오히려 그냥 내버려 두면 모두 열심히 일할 것이기 때문에 생산이 증가될 것이라는 얘기도 한다.

훗날 이른바 신도가, 곧 현학의 무리들도 이 통치술과 연결되는 바가 있다. 하지만 대차게 망하고 말았다.

3.3. 평가

현실 정치를 강조하고 정치에서 '인의' 또는 '도덕'에 큰 무게를 두지 않기에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비교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마키아벨리는 정치적인 면을, 한비자는 법에 의한 복종을 강조하기 때문에 다르다. 대표적으로 '신용'에 대한 둘의 관점은 목적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지만, 마키아벨리는 할 거짓말 다 하면서 어떻게든 '신용'이 있는 척만 하면 되는 데 반해서 한비자는 끝까지 신용이 있는 척 가장할 수는 없기에 실제로 '신용'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또 작은 틈이 어렵게 쌓아놓은 '신용'을 무너뜨릴 수 있기에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더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흔한 대중의 오해와는 달리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비정한 권모술수주의자가 전혀 아니고, 윤리적 원칙의 중요함을 부정한 인물도 아니다. 다만, 현실주의자로서 윤리적 원칙, 즉 '정의'가 덕이나 인의만 내세운다고[15]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강제력도 섞어서 지켜지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 것뿐이며, 이러한 현실주의가 오독되어 마치 세상에는 덕도 인의도, 윤리도 필요 없고 그저 실질적인 강제력이 세상의 규범 전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한 그리스-로마 철학 이래 수천 년간 축적되어 온 '서양 철학의 기반 위에 세워진'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제자백가 이래 수천 년간 축적되어 온 '동양 철학의 기반이 된' 한비자의 주장을 같은 선에 놓고 비교하기는 대단히 곤란하다. 누가 더 낫고 더 못하다는 차원이 아니라, (법가와 한비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한비자는 '법'과 '술'과 '세'를 모두 자신이 제시해야 하는 입장었지만 수천 년간의 사유를 통해 '법'의 개념이 상당히 명확해진 시대에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기존에 형성된 '법'에 대한 공감대 위에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세'와 '술'을 섬세하게 설명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한비자는 법가 철학을 집대성한 이이고, 마키아벨리는 근현대 정치학의 시초인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 윤리와 도덕이라는 숭고한 목적을 실천하는 도구 및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정치적 행위는 도덕과 윤리와는 엄격하게 분리시켜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점은 비슷하다.

인간 사회는 변화한다고 여겼다. 이에 대해 당대의 학자들은 변화를 거부하고 전설 속의 제왕들의 시대를 재현하는 것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그런 회귀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거부하고, 시대에 대응하는 변화가 해결책이라는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전근대라는 시대적 한계로, 상업을 '생산하는 것도 없고 중간에 수고 없이 이익을 가로채는 이'로 보았고, 공업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도구보다는 사치품 제작으로 보았기에, 상공업을 이해하지 못한 한계를 보였다.

한비자의 정치 개혁이 지나치게 법과 세를 중시하여 비현실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일례로 땅도 작고 머릿수도 적으며 사방이 강대국인 약소국에게 '외교로 살아남으려 하기보다는, 법치로 강대국이 되어 이 위기를 벗어나면 된다.'라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같은 주장도 보인다. 한비자의 주요 글들이 쓰인 전국 시대 후기의 상황을 보면, 이미 진나라가 나머지 6국을 합친 것만큼 강대해진 상황에서 6국이 귀족들의 반대가 없더라도 수년이 걸릴 정치 개혁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이 촉박했다. 이러한 점은 통치에 대한 일반 이론에 대한 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당시 한나라 임금에게 국정 개혁에 대해 바쳤을 편들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이는 적어도 대등하거나 강대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기에 통일 제국통치자를 염두에 두고 쓴 글도 아니다. 후대의 역사 뿐 아니라 당대의 역사만 보더라도, 신흥 강대국이 외교적 고립으로 결국 몰락하거나 성장 동력을 잃고 고만고만한 나라가 된 것을 볼 수 있었음에도 외교적 노력을 상당히 저평가하고 있다. 다만 당대에 외교를 통한 나라 간의 균형에 기대어 호의호식한 세객들에 대한 반발의 연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이와 같은 비판은 이론서와 실정에 대한 구분을 잘하지 못하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비자의 저술이 당대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는 있겠으나 통치에 대한 장구한 이론서를 쓰고자 할 때 그와 같은 것은 시간과 노력과 페이지가 남았을 때 하는 두 번째 고려 사항이지 첫 번째 고려 사항이 될 수 없다.

3.4. 기타

당시의 다른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세상이 진보하고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상당히 혁신적인 사상이다.[16] 당시의 사상가들은 주로 옛 성인들에게 가탁해 주장을 수립하기를 즐겼기 때문이다.[17] 한비자는 중국 고대 사상가 중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니 새 시대가 찾아올 때마다 새로운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선언한 사상가이다. 다만 사회 변화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오두' 등지에서 상공업에 대한 인식은 당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나쁘게 보았다. 다만 시대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고대 중국은 어디까지나 농업 중심의 사회였으며, 상공업은 당연히 농업보다 급수가 떨어지고 저울눈을 속이는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고대 국가 입장에서 통제를 하기 위한 품이 많이 들었다. 상업은 물자의 이동이라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분보다도, 실제로 생산하는 것이 없음에도 중간에 자기 이윤만 챙기는 모습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또한 한비자가 살던 시대의 공업은 좀 더 나은 농기구나 병장기 같은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물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주로 사치품 제작을 의미했다.

위에 말한 '신용'을 당장의 결과보다 우선하였기에 일종의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누군가 어떤 사업을 함에 있어, 그 사업의 결과가 사업 전에 그가 예상한 것보다 나쁘게 나오면 사업 실패를 이유로 처벌해야 하지만, 그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어도 속임을 이유로 처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과에 따라 사전의 예상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원칙에 따라 틀릴 때가 있는 점이나 신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이용하기 부적합하다고 하였다. 이는 수천 년 후의 칼 포퍼의 '반증'과도 유사점을 보인다.

한비자와 법가에게 있어 '신용'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진나라의 법가 정치인인 상앙이 어느날, 남문에 3장 길이의 대나무를 꽂아두고는, 이 대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면 금 10냥, 은으로 치면 200백냥에 해당하는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들 무시하고는 제갈길을 가자 금 50냥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어느 한 사람이 속는셈치고는 대나무를 옮기자 진짜 금 50냥을 받았다. 고작 대나무하나 옮기고 금 수십냥을 준다니 다들 믿지 않았지만, 상앙은 약속을 지킨셈이다.

인터넷상에서는 한비자의 나라가 망하는 10가지 징조라는 글로 유명하다. 출처1출처2

자세히 읽어보면 일부 문장은 한비자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그와 그가 남긴 사상이 꽤 인기가 있었는지 한비자의 뛰어난 주석집인 '한비자익취(韓非子翼毳)'가 오오타 젠사이(太田全斎)에 의해 1808년 일본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3.5. 관련 고사성어


4. 미디어 믹스

4.1.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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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삼국지 12에서는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한나라 소속으로 등장. 같은 동창인 이사보다 통솔, 지력은 높고(각각 33, 90) 무력은 이사가 더 높고, 정치는 이사와 같다. 전법은 문무저하.

삼국지 13에서도 등장. 능력치는 33/17/90/98로 중신 특성은 상업 중시. 전법은 수비 명령. 전형적인 문관이므로. 후방 내정용으로나 쓰자. 특기는 상업3 / 문화4 / 순찰7. 특기 사항으로 말더듬이인 것을 반영해서 지력이 높음에도 언변 레벨이 0이다.

참고로 동일한 이름의 명품(아래의 책)을 교역소에서 구매할 수 있다. 명품 가치는 50, 가격은 4800금. 명품 효과는 정치 +10, 순찰 특기 +1이다. 또한 삼국지 10에서도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 등 정치계 보물 중에서는 최상급.

4.2. 대진부

주요 조연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안왕이 아니라 환혜왕의 아들로 나온다. 아마 시기상 앞부분에서 얼굴을 보여야 하고 한나라를 주도하는 중간보스급의 느낌을 주기 위해 조정한 듯.[18] 역사대로 이사 등과 함께 순자 문하의 직하학궁 유생으로 나오며, 그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묘사된다.[19] 재현 오류로 한비는 말더듬이가 아니라 언변이 매우 뛰어난 달변가로 나온다. 그리고 이사가 진나라에 가서 출사한 이후에는 본인도 한나라로 돌아가는데 아버지인 환혜왕에게 지속적으로 한나라가 살아남으려면 변법(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하나 환혜왕은 변법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직하학궁에 유학 보내놨더니 그딴 쓸모없는 것만 배워 왔냐고 면박만 준다.

그리고 현실에서 처럼 환혜왕은 정국을 진나라에 간첩으로 보내 관중의 수로를 건설케 해서 진의 힘을 빼는 계책을 채택하는데, 진나라 수뇌부에서는 수로 건설 제안이 한나라의 꼼수라는 것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 지방이 개간되면 국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해 그대로 추진했다.[20]

이후 쭉 등장이 없다가 노애의 난이 진압되고 진왕 정이 친정을 시작한 중후반부부터 본격적으로 진나라에 겐세이를 놓기 시작하는데 과거의 우정과는 별개로 이미 진나라의 고위 관료가 된 이사와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직감했는지 이사가 한나라와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그를 피해 다니며 만나주지 않는다. 또한 공족의 신분을 십분 활용해 육국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제나라를 제외하고는 원수지간이던 연나라와 조나라를 묶어놓는 등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이며 이사의 아치 에너미로써 진나라를 고립시키는 전국 포위망 형성에 주력한다.

또한 진나라 측의 제나라 소금과 철, 구리 매입의 속셈을 육국 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간파하고 연태자 단과 함께 조나라에 철과 구리 등 군수 물자 공급에 주력한다. 하지만 조나라 내 동, 철 전매로 재미를 보던 곽개의 트롤링으로 진나라 측이 흉노를 통해 조나라에 철을 운송한다는 사실을 알아채 계획이 엎어지고, 한나라와 위나라가 농사를 제쳐놓고 백성들에게 철을 생산하게 하는 바람에 삼진은 더더욱 막장의 수렁으로 빠져든다.[21][22] 농사를 내팽개쳤으니 양국의 식량 상황도 개판이 되었고 안 그래도 가난한 농민들은 마침 정국거 개통으로 광활한 관중 지방 전체가 개간된 진나라로 대거 유입되어 삼진의 국력이 빠지는 만큼 진나라의 국력은 신장되는 환장할 진퇴양난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진나라는 역사대로 한나라가 육국에 붙었다 진에 붙었다 한다면서 한비를 초청하기 위해 신정을 치는 척하고, 한비도 마지못해 함양으로 향하게 된다. 한비자와 대단한 진왕 정은 그의 법가 사상에 감탄해서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환심을 사려고 노력해 보지만 한비는 넘어가지 않는다. 이후 실제 역사처럼 진나라가 한나라를 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역설하며 진나라 각료들의 첩자 혐의 의심을 받게 되고, 남양 태수 영등[23]이 진군에 호응해 남양군을 통째로 넘기려 한다는 정보를 한나라에 넘기려다가 발각, 진나라 법대로 간첩에 대한 형벌인 거열형을 선고받는다.

그의 친우인 이사는 차마 한비가 끔찍한 거열형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옥에 갇힌 그를 찾아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며 평생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저서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듣는다. 그리고 한비는 이사에게 받은 독주를 마시고 사망한다. 하지만 얄궂게도 진왕 정은 이미 한비를 사면해 왕명이 옥으로 가고 있던 상황이었고, 타이밍이 안 좋게 한비가 사망한 직후에서야 조고가 왕명을 들고 황급히 도착한다. 이사는 한비를 사면한다는 왕명을 듣고 각혈하며 그만 기절하고 만다. 당대의 공족이며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한비자에게는 매우 허망하고 안타까운 최후였다.

4.3. 킹덤(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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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2] 이름과 실상이 부합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논법.[3] 참고로 이사는 이사 본인이 초나라 출신이며 한비는 기본적으로 '한나라는 편지 한 통만 보내면 항복할 것'이라는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사직의 보존에 큰 관심이 없기에 한비의 처형 이유가 '한나라 공자니 한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다'는 주장은 표면적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4] 사실 한비자의 의견은 '타국들의 국력 약화를 위해 각 나라의 간신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는 행위에 대한 비판'인지라 이미 뇌물을 대규모로 지출하고 있었고 조나라 곽개나 제나라 후승 등의 사례로 알 수 있듯 이미 현행 외교정책에서 실효를 누리고 있던 진나라의 관료들 입장에서는 이런 행태를 비판하는 유명인사의 등용은 그간 조나라와 제나라에게 시행하던 '실제 효과가 있던 외교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공식적인 조치로 체감할 수 밖에 없다. 한비의 의견이 수용될 경우 한나라 정벌이 아니라 한나라 이외의 타국들을 정복하는 기초적인 정책의 정당성에 대한 위협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실제 조나라 통합 때 진나라에 가장 위협적이던 조나라의 마지막 명장인 이목은 이 외교정책이 아니면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다.[5] 조고의 모함으로 호해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고 줄곧 고문을 받았음에도 끝끝내 자진하지 않았는데 이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크게 공을 세운 자신을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생각을 했다고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사는 결국 함양의 저잣거리에서 허리가 잘려 죽었고 친척 일가는 전부 몰살되었다.[6] 관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한다. 요순 시절의 일화를 보면 천자도 육체 노동을 하는데 살림이 풍성치 않았다. 그러므로 천자를 쉽게 사양했다. 하지만 한비자 당대는 현령 자리를 해도 자손에게 넉넉한 재물을 남긴다.[7] 군주가 무엇인가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감정 표현조차도 거기에 남들이 영합하여 나라를 그르칠 결정을 하게 할 수도 있으니 숨겨야 하며, 극단적으로는 잠꼬대로 국가 중대사나 그에 대한 군주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도 있으니 잠자리도 혼자 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군주는 인간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인 동시에, 고위 공직자의 엄정한 공정성을 요구하는 주장.[8] 문전편에서 당계공과 한비자의 대화가 언급되는데, 당계공은 화를 피하고 몸을 보존하는 도가의 은일의 원리를 따르지 못한다고 한비자를 걱정한다. 한비자는 이를 수긍하나, 한편으로는 백성의 이익과 서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 법가의 정신이므로 일신의 안녕만을 도모하지는 않겠다고 한다.[9] 순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10] 특히 한비자에 실려있는 '해로'와 '유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도덕경 해설서로 지금 전해져 오는 도덕경의 글과는 조금 다른 글자를 쓰기도 하기에 도덕경 원전에 대한 연구에 의미를 갖는다. 다만 그 해석의 내용은 단장취의의 한계를 보인다.[11] 외저설(外儲說)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장(吳章)이 한나라 선혜왕에게 고하길, "군주는 거짓으로라도 사람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면 안 된다." 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면 아첨하길 좋아하는 소인배가 이를 빌미로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참언을 하게 되어 수습하기 힘들게 되니 군주는 자신의 진심을 남에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2] 장자 천도편에서도 신도의 사상과 비슷한 구절이 있다. 무위하면 천하를 부리기에 여유가 있지만 유위하면 천하로부터 부림 당해 부족하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군주와 신하가 동시에 무위하거나 유위하면 군주와 신하가 어울리는 것이니 그르다. 군주는 무위함으로 천하를 부려야 하고, 신하는 유위해서 부림 당해야 한다. 옛날 왕들은 지혜로워도 몸소 생각하지 않았고, 달변이어도 몸소 말하지 않았고, 능력이 뛰어나도 먼저 도모하지 않았다. 하늘과 대지가 꾸미지 않아도 만물이 변화하고 생육되며 제왕이 무위해도 천하의 공적으 이룩되는데 이러한 무위의 덕이 천지, 만물, 인간을 다스리는 도이다. 그러므로 옛날 대도를 밝힌 사람은 하늘, 도덕, 인의, 분수(인의의 질서로 나누어진 몫을 지킴), 형명, 인임(재능에 따라 직책을 맡김), 원성(심사, 판별), 시비, 상벌을 밝힌다. 상벌이 밝혀지면 귀천과 지우에 따라 직위와 자리가 바루어져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했다. 비록 형명이나 상벌을 낮은 위계에 위치시켰으나 이는 한비자와 통하는 구절이다.[13] 법가에 대한 도가의 비판은 똑같은 맥락을 따라가는데 형명과 상벌이 낮은 위계의 것이므로 이것만을 논하는 자는 부리는 자가 아니라 부림 당하는 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형명과 상벌을 논하나 사적인 정에 이끌리지 않는 사람의 수는 극히 적다. 이것이 법가의 약점이라는 주장이다.[14] 순자는 이를 자연과 인간사를 혼동한다고 깠다.[15] 유가나 기독교에서 교리, 교육이나 계몽 등의 형이상학적인 수단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한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16] 한비자를 처음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은, 상앙의 상군서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17] 옛날부터 내려오는 경험을 중시하며,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면서 얻는 경험을 바탕으로 생활하며 농업 사회의 특성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단, 인류 역사를 '황금 시대로부터 은의 시대와 청동 시대를 거쳐 철의 시대에 도달한' 것으로 본 플라톤과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는 변화한다.'라는 명제는 받아들였지만, 그 방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쁘게'라고 생각했기에 사회 변화를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철학이 딱히 변화를 좋게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면, 왜 옛 사람들이 진작에 그것을 만들지 않았는가?' 라는 사고방식이 주류였다.[18] 실제로 작중 환혜왕 사후에는 한나라 승상을 빼면 한비가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 안왕도 한비의 말을 경청한다.[19] 후일 시황제가 한비는 어떤 인물이냐고 이사에게 묻자 이사는 그가 자신보다 수십 배는 뛰어나다고 고평가한다.[20] 이로 인해 나중에 가서 간축객서의 발단이 된, 수로 설계자 정국이 한나라 간첩이었음이 발각되어 영성 종실에 의해 이사를 포함한 객경들이 일시적으로 축출되는 사건이 터진다.[21] 한비는 이것을 예견하고 한, 위 양국의 민간 철 생산을 극렬하게 반대했으나 한나라 측 조정에서 이미 상승한 철값의 경제적 이득을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나라 조정을 주도하는 춘평군도 밀어붙혔다. 여기서 그의 고충이 잘 드러나는데 분명 한비는 백성을 사랑하고 매우 유능한 인물이지만 주변 상황이 너무나도 안 따라줄뿐더러 그 반대로 진나라는 이사 말마따나 수백 년간 국력을 키우며 온갖 버프를 다 달고 나온 상황이라 한비가 누구보다 열심히 해도 중과부적을 면하기가 어렵다.[22] 작중 한비는 진나라로 향하는 자국 유민들을 사재를 털어서 구호하며 자기 전 재산이 다 동나더라도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국가의 근본이 있다는 모범적인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준다.[23] 원래 한비의 부하였던 사람인데 진나라에 귀순하였다. 나름의 줏대는 있는 인물이라 처음에는 고국을 위해 일했고 요고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진 않았다. 그러다가, 요고가 그를 정국과 소개시켜주고 한나라 사람인 정국이 진나라에서 재능을 인정받고 큰 업적을 세우며, 그가 만든 수로에 정국거란 이름이 붙은 걸 알려주면서 우리들은 언젠가는 세상을 뜨겠지만 정국의 업적은 정국거란 이름과 함께 영원히 역사에 남을 거라며 영등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진나라에서 정국처럼 능력을 펼쳐보지 않겠냐고 제안받자 명예욕 때문에 넘어갔다. 진시황도 그가 나름대로 줏대와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 그의 귀순을 환영했다. 실제로도 정국거란 이름은 1930년대에 군벌 중 한명이었던 풍옥상 장군이 그 이름을 본떠 새 수로의 이름을 만들 정도로 계속 거론되었고 지금은 정국의 동상도 세워져 있으니 진짜로 후세에까지 그 명예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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