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6:45:58

화씨지벽

고사성어
화할 화 성씨 씨 어조사 지 구슬 벽
1. 뜻2. 유래
2.1. 두 발과 바꾼 천하의 보물2.2. 흠 없는 옥, 완벽(完璧)2.3. 전국옥새로 탈바꿈하다
3. 같이 보기

1.

화씨가 발견한 구슬로 천하의 보물을 뜻하는 고사성어. 줄여서 화씨벽이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화씨지벽은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진귀한 보물-무가지보(無價之寶)의 대명사처럼 쓴다.

전설에 따르면 화씨지벽에는 벌레가 앉지 않았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고 한다.

2. 유래

출전은 <한비자> 화씨(和氏)편.

2.1. 두 발과 바꾼 천하의 보물

초나라 사람 변 마을에 사는 화씨, 일명 변화(卞和, ? ~ ?)[1] 가 초나라 산중[2]에서 옥(玉)의 원석을 구해 초여왕(楚厲王)에게 바쳤다. 그런데 원래 옥은 다듬기 전에는 보통 돌과 비슷해 보석으로서 가치 있는지 감정하기 어려운 물건이라, 옥 세공인은 변화가 바친 것이 쓸모없는 돌이라고 판정을 내렸다. 여왕은 분노해서 변화에게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이란 형벌을 가했다. 일설에는 무릎 아래 다리를 그냥 잘라내 버렸다고도 한다.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다시 한번 돌을 바쳤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재차 돌을 바치려 했지만, 양발 뒤꿈치가 잘려 걸을 수 없기에 변화는 돌을 안고 사흘 밤낮을 울다가 마침내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기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문왕은 변화를 불러 '천하에 월형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왜 그리 슬퍼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변화는 '발을 잘려서 우는 게 아니다. 보옥이 돌이 되고, 정직한 사람이 거짓말쟁이 취급 받는 것이 슬퍼서 운다.' 하고 고했다. 문왕이 장인에게 돌을 다듬으라 명했더니 과연 눈부신 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변화의 정성에 감동하여 문왕은 그에게 대부에 준하는 봉록을 내려 여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해줬다.[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de_disk.jpg
전한 초왕(楚王)의 무덤에서 발굴된 옥벽(璧).[4] 화씨지벽도 이런 형태로 다듬어졌을 것이다.

2.2. 흠 없는 옥, 완벽(完璧)

이후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지벽을 손에 넣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과 바꾸자면서 협상을 빙자한 협박을 했다. 혜문왕은 이 위기를 넘길 인재를 찾았고 이에 인상여가 나서게 된다. 인상여는 진나라로 떠나기 전에 말하길, '신이 옥을 보전하여 돌아오겠나이다'(臣請完璧歸趙) 라고 장담하였고 실제로 옥을 보전해 왔다. 그리하여 현대에도 쓰이는 '완벽' 이라는 단어가 2300년 전의 바로 이 고사에서 유래했다.[5]

또한 옥에 티를 뜻하는 하자(瑕疵)라는 단어어도 이때 나온 말이다. 소양왕이 옥을 전달받아 이리저리 둘러보게 되는데 정작 15개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자, 소양왕이 화씨지벽만 먹고 튈려고 한다는 것을 간파한 인상여가 "사실 화씨지벽에도 작은 흠집(瑕)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이를 들은 소양왕이 "어디 한번 보여줘 봐."라고 하자 인상여는 다시 돌려받은 화씨지벽을 가지고 15개 성을 주지 않으면 깨트리겠다고 협박을 한다. 여기서 흠집 하(瑕), 흠집 자(疵)라는 단어의 결합어인 하자가 나온 것이다.

2.3. 전국옥새로 탈바꿈하다

이후 진나라가 조나라를 비롯한 나머지 6국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한 뒤, 마침내 그 화씨지벽을 손에 넣은 진시황은 화씨지벽을 깎아 그 유명한 전국옥새(傳國玉璽)를 새겼다고 한다. 이 전국옥새는 대대로 황제의 위엄을 상징하게 되었다. 후한 시절에 관련한 사건으로 삼국지 동탁 토벌전에 관련한 사건이 있다. 이 전국옥새--삼국---남북조--까지 이어지며 거의 천 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오래도록 전해져 오다가 당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전국옥새가 화씨벽이 아니라 남전옥으로 만들어졌다는 전승을 취하였는지 전국옥새가 있음에도 화씨지벽이 별도로 존재한다. 특기가 있거나, 장식용 아이템으로 나온다. 삼국지 12고대무장 인상여가 들고 있는 물건이 화씨벽이다.

다만 위의 이미지에 나온 화씨지벽와 같은 옥벽의 형태로 볼 때 신빙성이 없는 내용으로 인정받는 추세다.

3. 같이 보기


[1] 이 시기 민간에 전해지는 사람들을 기록에 적을 때는 마을의 이름과 사람의 씨를 같이 적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변씨의 구슬이 아닌 '화씨의 구슬'이라고 불리는 것이다.[2] 초산(楚山) 혹은 형산(荊山).[3] 만약 이 일화가 실화라면 변화가 문왕에게 인정받았을 때의 나이는 최소 70대 이상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게 무왕의 재위 기간이 51년이다. 거기다 여왕의 재위 기간은 17년... 반세기 넘게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 보면 변화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인이었다.[4] 옥을 동그란 도넛 모양으로 다듬은 것을 '옥벽'이라고 부른다. '벽(璧)' 자는 요즘은 구슬이라는 뜻으로 새기지만 춘추 전국 시대의 실제 유물을 보면 구슬이 아니라 이렇게 납작한 도넛 형상이다. 도넛 모양은 오래된 옥의 가공 형태로, 본래 옥을 봉처럼 가공하고 안에 원형으로 구멍을 내서 파이프 같은 모양이 되면 채썰기하듯이 잘라서 만든 보석이다. 이러한 디자인은 현대에는 단순하지만, 원래 옥은 경도가 6.5∼7에 이를 정도로 단단한 데다 기원전 시대의 기술로는 깔끔하게 만들기가 엄청난 공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옥벽은 아주 귀한 보석이었다.[5] 빌린 물건을 정중히 돌려보낸다는 의미의 '완벽귀조'라는 고사성어도 있는데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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