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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문순공(文純公) 권상하 權尙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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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1년(인조 19) |
한성부 | |
사망 | 1721년 10월 19일 (음력 경종 1년 8월 29일) |
충청도 청주목 | |
시호 | 문순(文純) |
본관 | 안동 권씨 시중공파 성원(聖源)계 27세 |
자 | 치도(致道) |
호 | 수암(遂菴), 한수재(寒水齋) |
붕당 | 붕당 노론 / 학파 호론 |
부모 | 부친 - 권격(權格, 1620 ~ 1671) 모친 - 함평 이씨 이초로(李楚老)의 차녀(1622 ~ ?)[1] |
형제자매 | 3남 2녀 중 첫째[2] 여동생 - 권계강(權季姜, 1647 ~ ?) 남동생 - 권상명(勸尙明, 1652 ~ 1684) 남동생 - 권상유(權尙游, 1656 ~ 1724) 여동생 - 권차강(權次姜, 1663 ~ ?) |
부인 | 전주 이씨 - 이중휘(李重輝)의 딸 |
자녀 | 아들 - 권욱(權煜, 1658 ~ 1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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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시열의 수제자 중 한 명이자 산당의 2세대이고, 예송논쟁 때 활약했다.2. 생애
권격(權格)의 장남이자 숙정옹주의 외5대손으로 한성부 출신이다. 어린 나이에 시남(市南) 유계(兪棨), 송시열, 송준길을 스승으로 모셨고, 유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행하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하에도 동시에 출입하여 배웠다.[3]예송논쟁 때 송시열이 유배를 가자, 권상하 역시 관직의 뜻을 연연하지 않고 내려갔으나, 1년만인 1675년에 다시 돌아왔다.
2.1. 송시열 사후와 갑술환국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다 결국 사사될 때, 수많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송시열의 임종을 지켰다. 송시열은 그를 아꼈는지, 의복과 책을 자신의 마지막 선물로 주었다. 이때, 송시열은 ‘곧을 직(直)’ 자의 뜻과 효종의 대의를 이어받아야 한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아무래도 수제자였던 만큼, 권상하는 송시열의 3년상을 지냈다. 이후 만동묘를 세워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숙종의 명을 받아 대보단 역시 세워 임진왜란 때 파병된 명나라 병사들을 기념했다.
물러나서 초야에 머무르며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에 힘썼다. 또한, 서경덕,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등이 제기한 성리학 기본에 대하여 연구를 행했다. 한편으로는 허목, 윤증 등 송시열의 적이나 남인과 소론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갔고, 순룽 참봉(順陵參奉),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공조 정랑(工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 시강원 진선(侍講院進善)과 종부시정(宗簿寺正)를 맡았다. 송시열과 김수항의 사후 유지를 받들려고 단종, 사육신, 생육신 등의 복권을 주장했다.
2.2. 계속되는 낙향
갑술환국 때 관직을 사퇴했다 1698년에 호조 참의로 복직, 그리고 이조 참의로 승진해 세자시강원찬선(贊善)과 성균관 좨주를 겸했다. 다만 1701년 장희빈이 주도한 저주 사건으로 남인이 없어질 때 낙향한 것을 보면 이번에도 관직에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1703년 세자시강원 찬선, 1704년 특명으로 호조참판으로 승진,이조참판, 찬선을 거쳐 또 1705년 사퇴했는데, 대사헌에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퇴한 것이다. 1716년까지 해마다 대사헌으로 제수되지만 계속 거부했다.7년만인 1712년, 한성부판윤과 이조판서를 역임했고 5년 뒤엔 좌찬성으로의 승진 뒤 우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에도 임명되었지만 거부하고 물러났다.
1716년에는 권상하의 스승 중 한 명인 유계와 윤선거가 같이 저술한 <가례원류>와 관련되어 논란이 일었다. 시간이 흐르고, 유계의 손자인 유상기는 자신의 스승이자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에게 책을 내고 싶다며 원고를 요구했으나, 매우 불괘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유상기는 아무런 설명 없이 이이명에게 부탁해 어명을 받았고, 윤증은 어쩔 수 없이 원고를 내줬다. 뒤에 모든 사정을 알게된 윤증과 유상기 사이에 편지가 오갔고, 윤증이 죽자 노론계인 그와 정호에게 발문과 서문을 부탁했다. 숙종은 소론, 윤증 편을 들었으나, 병신처분 후, 권상하의 서문 역시 올려졌다.
5년 뒤인 1717년, 갑자기 우의정에 임명되어서 다시 은거하며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은 직접 비답(批答)을 써 내리고 사관에게 같이 오라고 명했다. 계속된 사양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결국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들어와 볼수 있다'라고 예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왕의 노력에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로 숙종을 알현했다. 또 얼마 안 되어 관직을 사양한 뒤 낙향했고, 좌의정으로 승진까지 되었으나 이번을 끝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올 일은 없었다.
2.3. 사망과 학통
사망 직전 명예직인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음에도 나아가지 않았고, 얼마가지 않은 동년 8월 29일 사망한다.학통은 외암 이간(巍巖 李柬),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 홍계희, 도암 이재, 임성주 등으로 이어졌다. 인물성편재문제(人物性偏在問題)로 논쟁이 일어나자, 그는 사망 전 한원진을 지지하며 송시열을 이어받은 기호학파는 호론과 낙론으로 양분되었다.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손동리에 안장되었다. 사후엔 노론의 영수로 꼽히며 삭탈관직이 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복권되고 시호까지 받았다.
3. 여담
권상하가 조카들과 20여년간 주고받은 개인적은 편지들을 모은 책인 강상찰과 한수재집이 현재 남아 있다.4. 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660년 - 1680년 | 입문 |
| 1680년 - 1721년 | 정치적 |
| 18세기 초반 - 1721년 | 학문적 |
5. 가족 관계
- 조부 : 권성원(權聖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