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8 07:54:40

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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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 ~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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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 ~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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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벽파의 주요 인물
3.1. 영, 정조 시기3.2. 순조 초(~병인갱화)3.3. 순조 중기 이후(효명세자 대리 ~)

1. 개요

僻波

조선 후기,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僻)은 '편벽되다'라는 뜻이다.

2. 역사

벽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인 김귀주(경주 김씨) 및 정조의 사부였던 김종수, 심환지 등을 중심으로 한 노론 청명당의 일원이 중심을 이루었다. 주로 영조 재위기의 척신이었던 홍인한홍봉한풍산 홍씨 가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정조가 즉위한 후 김귀주는 또다른 척신을 우려한 정조에 의해 숙청당했지만 노론 청명당은 그대로 정조에게 등용받았다.[1]

대중적으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서고 정조의 즉위에도 반대한 적폐 무리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벽파라는 이름의 명칭은 사도세자와는 관련이 없다. 정조 초기 정국을 주도하던 홍국영이 탄핵되어 나간 이후 소론서명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는 노론 세력이 자신들의 궁벽한 처지를 빗대 벽파를 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벽파는 소론의 서명선이 주도하던 체제 내에서는 할 일이 없었지만 1788년 정조의 반 시파 정책에 따라 영의정에 김종수의 당숙 김치인이 오르게 되면서 정권에 재등장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소론과 남인이 시파였긴 하지만 남인과 소론내에서도 벽파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서명응, 서명선 형제는 소론이면서도 벽파로 활동했고 순조 시기에 목만중, 이기경등은 남인 벽파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의 추숭을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고, 왕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세력을 이루어 시파가 되자 벽파는 자연스레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다.[2]

그랬음에도 정조는 준론탕평의 자기 원칙에 힘입어 그들을 비교적 잘 대우했고 말년엔 벽파 심환지를 기용, 어찰을 주고 받으면서 "우리 벽패는..."이라는 식으로[3] 당시 야당 컨셉이던 벽파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이에 심환지 등이 호응하여 정조의 사도세자 추숭에 동의를 표하고 남인이 아닌 자신들이 추숭을 주도하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벽파가 시종일관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 이를 통해 벽파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었고, 남인의 사도세자 무함론이 갖는 위험성을 얼마나 부담스럽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켜 남인을 제거하고, 시파를 조정에서 내쫓으면서 벽파가 원내 제 1당이 되었으나, 1805년 정순왕후 사후 1806년 다시 시파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미 영수 심환지가 순조 3년에 사망했고, 정순왕후가 순조 4년에 물러났으며 이듬해 사망했다.

대혼 저지 기도 사건으로 인해서 권유, 이안묵, 정재민 등 명망있는 인사들이 제거되고, 우의정 김달순의 발언[4]으로 인해 김달순, 김관주 등 벽파 지도부가 사라졌으며 8자 흉언 사건으로 아예 벽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심환지, 김귀주가 역적으로 낙인찍혀 버렸다. 여기에 벽파의 원조(?)인 김종수까지 일망타진되었다. 이후로는 사실상 계보가 끊겼다고 봐도 무방하다.[5]

3. 벽파의 주요 인물

3.1. 영, 정조 시기

  • 김귀주
  • 김치인
  • 김종수
  • 심환지
  • 윤시동: 영조 시기 김종수와 함께 재야 청명당의 핵심 일원 출신으로, 정조 대에도 김종수와 함께 벽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여러번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으나 지속적으로 등용되어 끝내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 유언호: 마찬가지로 영조 시기 재야 청명당의 일원으로, 정조 시기에도 신임을 받아 벽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정조의 탕평책이 의리에 어긋난다며 자주 직언하다 여러번 유배를 갔으나 지속적으로 등용되었고, 끝내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 서명선, 서명응: 소론이지만 벽파와 함께 행동하였다. 서명선의 경우 실학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실제로 실학자인 서유구의 종조부이다.
  • 위백규: 서유구, 김정희와 함께 대표적인 벽파 출신의 실학자로, 과격한 전론[6]을 주장했으며 지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 (재야영수)김한록: 한원기의 제자이자 김관주의 아버지. 호론의 도통을 이었으며 정조 시기 벽파의 막후에서 산림으로서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지대하게 발휘했다. 병인갱화 이후 역적으로 추탈당했다

3.2. 순조 초(~병인갱화)

1. 노론 벽파
병인갱화 이전
  • 심환지
  • 김관주: 정순왕후의 친척으로, 심환지 사후 사실상 벽파의 영수.
  • 정일환: 심환지와 함께 소위 양환으로 불렸으며, 신유박해에 적극 동조했지만 정약용을 죽이는 것을 반대해 정약용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정순왕후의 재수렴을 반대한 죄로 김관주가 일시적으로 나가리되자 그 자리를 차지했으나 병인갱화가 일어나면서 삭탈관직된다. 역적의 수괴로 지목되어 시파에 의해 연일 토죄가 청해졌으나 순조가 끝내 무시했다. 고종 1년인 1864년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 권유: 순조의 대혼을 방해하려는 목적의 소를 올렸다가 병인갱화의 원인을 제공했다.
  • 이안묵: 권유와 같이 상소를 논의했다는 죄로 정법당한다.
  • 김일주: 벽파의 재야 영수이다[7]. 김관주의 동생으로 형이 역적으로 몰릴 때 같이 역적의 수괴로 몰려 정법 위기에 몰렸으나 순조가 끝내 물리쳐 살아남았다. 유배중에도 몇 번이나 벽파는 억울하다고 상언했는데, 묘하게도 순조는 김일주의 상언을 받아들여 주지도 않았지만 김일주에게 추가로 죄를 주지도 않았다.
  • 김달순: 벽파의 중진이지만 병인갱화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벽파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 이노춘: 정조시절 채제공을 탄핵했다가 유배를 간 전적이 있으며, 순조 즉위 후 정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나 병인갱화 당시 김달순의 배후로 지목되어 거제로 정배되었다.
  • 이익모: 정조실록에 참여했고 대사헌에 임명되었지만 임명되자마자 김달순과 친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정배되었다.
  • 민명혁: 민유중의 큰형 민시중의 고손자로, 순조 즉위 이후 간관으로서 홍낙임, 심노숭, 김희, 박종악, 체제공 등 시파의 핵심인물들을 연이어 탄핵했고 그 공으로 대사간까지 올랐다. 그러나 병인갱화 당시에도 무사해 오히려 1807년 이조 참의로 승진했고, 최종적으로 정2품 지중추부사까지 올라 편하게 살다 죽었다. 다만 벽파라 그런진 몰라도 그의 자손들은 순조조 내내 등용되지 못하다가 안동김씨 견제를 천명한 헌종조에 이르러서야 중용되었다. 증손자인 민명혁은 고종조에 명성왕후의 척족으로서 고종의 정치에 적극 참여하다 갑신정변때 살해당한다.
  • 이인채(李寅采): 사헌부 간관 출신으로 순조 초기 시파 인사들을 연이어 탄핵해 그 공으로 관직이 높아져 사간원의 종3품 관직 사간에 이르렀으나 병인갱화 당시 김달순의 상소를 적극 옹호했다가 그 죄로 정배당했다. 순조 12년에 석방되기는 했다.
  • 황기천, 김처암: 순조 초 간관이었지만 김달순 탄핵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정배되었다.
  • (재야영수)송환기: 송시열의 현손으로 관직에 진출해 좌찬성을 지냈지만 재야 영수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 노론 호론의 도통을 이었다. 여담으로 순조를 황제폐하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 서용보: 가문 자체는 시파이지만 본인의 행보는 시파와 벽파를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였으며 특히 정순왕후 수렴기에는 매우 강경하게 벽파의 입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병인갱화 이후에도 멀쩡히 살아남아 관직생활까지 한 것으로 보아 시파라고 분류된 듯하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양반을 시파라고 봐야 하는지 벽파라고 봐야 하는지 의견이 갈린다.
  • 윤제홍: 지두화라는 화풍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한 화가이지만 관직에 나아간지 얼마되지 않아 김관주와 함께 엮여 탄핵당해 유배를 갔다. 이후 암행어사, 지방 군수 직을 지내며 복귀했지만 다시 탄핵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사간에까지 이르렀다.
  • 김기서: 역시 화가로 단발령도라는 작품이 유명하다. 병인갱화 당시 권유의 상소에 같이 참여했다는 참소를 받아 정배되었다. 이후 청도군수로 복귀했으나 이번에도 탄핵을 당해 삭직되었다.

2. 남인 벽파: 주로 천주교 문제로 벽파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공서와 인원이 겹친다.
  • 목만중:남인 벽파로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이 다수 인 남인 시파를 탄압하였다.
  • 채홍리: 남인으로 채제공과 같은 집안이지만 벽파로서 채제공을 공격했으며, 순조 대에도 목만중 등과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 병인갱화가 일어나 벽파 숙청의 막이 오르자 자진해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얼마 안가 사망했다.
  • 이기경: 남인 벽파로 정약용과 친우였다가 천주학의 견해 차이로 같은 남인이면서도 서로 정적이 되었다. 병인갱화 이후에도 시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아 여러번 탄핵되었다. 정약용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유배간 원흉으로 언급하는 인물 중 하나.
  • 강준흠: 역시 남인 벽파이자 공서파로, 병인갱화 당시에는 청나라에 사정관으로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기에 험한 꼴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1817년 관직에서 물러나 10여년 동안 재야에 머물다가 대리청정을 개시한 효명세자가 벽파계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자 관직에 다시 나아갔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사망하자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 박장설(朴長卨): 대표적인 남인 벽파로 정조조에 주로 활동했으며, 순조 조에도 신유박해 당시 남인 중 가장 먼저 나서 천주교도 탄압을 주장해 그 공으로 참판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바로 사망하여 나쁜 꼴은 안보고 죽었다.
  • 윤필병: 순조 시기 고위 무관인 호군으로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이가환과 정약용 등에 대해 지나치게 강경한 대책을 주장[8]해 때문에 파직당했다.
  • (재야영수)황덕길: 안정복의 제자로 성호학파를 이었으며, 공서파로서 스승의 견해를 이어받아 성리학적 도통론과 천주교 문제에 대해 강경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남인 산림들 중 거의 유일한 벽파였다.

3. 소론 벽파
  • 이시수: 공식적으로 벽파에 소속되었다고 볼수는 없지만, 정조 말 이래 거의 벽파에 동조하다시피하는 행보를 보였다.(황유나, 2025) 그러나 정순왕후의 재수렴을 반대하는 등 결정적인 순간에 주류 벽파에 반대되는 행보를 보였으므로 취소선 처리한다.
  • 서형수: 서명응의 아들로 소론 벽파. 벽파 중에서는 거의 유일한 소론 벽파 대신이었던 관계로 병인갱화 때 같이 엮여 유배를 가 무려 18년 동안 그곳에서 살다 죽었다.
  • 서유순, 서기수: 서형수의 5촌 조카로 서형수가 정배될 때 간관이었는데 서형수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탄핵당해 정배되었다. 서기수는 6년 뒤에 풀려나 이조참의 대사성에까지 관직이 이르렀다.
  • 서유구: 임원경제지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한 그사람이다. 병인갱화 당시 친척인 서형수가 탄핵당해 정배되자 자진해서 관직을 때려치고 낙향했다.

3.3. 순조 중기 이후(효명세자 대리 ~)

  • 김노경: 추사 김정희의 친아버지. 정순왕후와 같은 경주 김씨 일문이며, 화순옹주의 손자이기도 하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홍기섭, 김로[9] 등과 함께 매우 강한 위세를 누렸으나 효명세자가 사망하자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탄핵을 받고 유배를 갔다. 죽이라는 요구가 빗발쳤지만 순조가 끝내 막아냈고 3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 권돈인: 송시열의 적전제자 권상하의 직계 후손이며 역시 효명세자 대리청정 당시 관직이 크게 올랐다. 효명세자 사망 이후로 잠시 위세가 꺾였으나 헌종이 즉위하자 다시 등용되어 대표적인 반 안동김씨 세력에 속했다. 그러나 철종 초 예송논쟁에서 안동김씨 측에 패배하여 파직, 정배당했다.
  • 홍기섭: 조엄의 외손자로 순조 중반에 두차례 대사성과 대사간을 역임했다가 다시 좌천되었으나 효명세자 대리청정 이후 한성부 판윤을 거쳐 판서에까지 이르르며 김노경, 김로와 함께 가장 위세가 컸다. 그러나 세자가 사망하자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극렬한 탄핵을 받았다.
  • 조인영: 효명세자의 장인 조만영의 동생으로 홍기섭과는 외가로 6촌 사이다. 세도정치로 유명하지만 그의 가문은 벽파였으며 자기 가문 세력 불리기에만 급급했던 조만영과 달리 조인영은 김정희 등 벽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효명세자 대리 치하에서 강경한 반척신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본인이 외척이면서 반척신을 외치는 모순으로 인해 이상과 달리 실제로 할 수 있는건 그리 많지 않았다. 제2차 윤상도 사건때 사건을 빨리 덮으려는 헌종의 뜻에 부응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왕대비의 개입으로 인해 이지연-이기연 형제와 김정희가 윤상도의 배후로 지목되어 토죄될 때 살아남기 위해 '죄상이 이정도에 이를 줄은 몰랐다'며 이지연 탄핵에 참여했다.
  • 김정희: 김노경의 아들로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 맞다. 효명세자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맡기도 했으나 효명세자 사망 이후 부친이 탄핵당하며 안동김씨와의 대결 정국이 열리자 같이 정쟁에 참가했으나 결국 유배를 갔다. 헌종 즉위 이후 조인영에 의해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성까지 올랐으나 얼마 안가 다시 유배되고 거기서 심한 고초를 겪었다.
  • 이지연: 효명세자 대리기에 위세가 강했던 인물들 중 한명이다. 효명세자 사망 이후 안동김씨 세력으로부터 극렬한 탄핵을 받고 사직했으나 순조 말 관직에 복귀했고 헌종 즉위 직후 우의정으로 임명되었고, 우의정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제2차 윤상도 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 또 기해박해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제2차 윤상도 사건 때 안동김씨 세력에서 김정희와 함께 본인을 배후로 지목하여 탄핵하였을 때 헌종이 여러번 물리쳐 살아남나 싶었지만, 대비가 개입하는 바람에 결국 정배되었다.
  • 김교근: 김조순의 7촌 조카이지만 정치적으로 김조순과 대립하였다. 그래서인지 이미 효명세자 생전부터 강한 탄핵을 받았으며 효명세자 사후 소위 '김노경 흉언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으나 순조 말 풀려났다.
  • 이인부: 순조 29년 대놓고 사류를 진흥하고 청류를 등용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안동 김씨의 역린을 건드려 신의학과 함께 탄핵당했고 효명세자는 이인부, 신의학과 그들을 탄핵한 이들 모두를 벌주는 것으로 응답한다. 효명세자 사후 김로, 홍기섭, 이지연 등 벽파 수뇌부의 조종을 받아 '시파를 척결'하여 의리를 뒤집으려 했다는 어마무시(...)한 죄목으로 논핵당했으나 순조가 무시해 버렸다. 이후 윤상도가 상소를 올려 벽파와 동맹을 맺은 소론 세력까지 함께 탄핵하자(제1차 윤상도 사건) 고향으로 강제 낙향해야 했다. 순조 말에 용서받았다.
  • 신의학: 이인부 이후 대놓고 '이서구와 심환지의 공적을 기려야 한다'는 폭탄발언을 했다가 이인부와 엮여 옥사를 열리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1] 일단 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는 김귀주와 친한 사이였지만 본디 그는 척신 정치 청산을 외친 사람이었고, 정조의 사부였으며, 정조 즉위에 큰 공을 세운 동덕회의 일원이었다.[2] 벽파가 직접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서지 않은 것은 그것이 채제공의 남인이 내세우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즉 남인은 '사도세자의 죽음은 본인의 과실이 아니라 모함이었고 그것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조정 세력이다' 라는 논리를 폈고, 그렇게 되면 당시의 집권당인 노론연산군 때의 갑자사화처럼 쓸려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사실 시파는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였다.[3] 정조가 자신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한거 아니냐는 식의 드립도 있지만, 사실 저 표현만으론 정체성까지 따지기엔 너무 근거가 빈약하긴 하다. 벽파 수장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라 정치적 목적의 립서비스도 있었을테니 더 그렇다.[4] 핵심 요지는 벽파의 주장을 옳다고 못박자는 얘기다.[5] 일단 이후 세도정치를 펼치는 풍양 조씨가 벽파 계열이긴 하지만 벽파로서의 정체성은 거의 없었다. 어차피 이 점은 시파 출신 안동 김씨도 마찬가지지만. 오히려 풍양조씨 일족인 조득영은 김달순을 공격해 벽파를 멸문시키는데 가담하였다. 순조가 풍양조씨인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은 것도 벽파를 몰락시킨 조득영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6] 토지개혁론[7] 정조가 생전에 높게 평가했다는 이유로 정순왕후가 꾸준히 조정에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8] 특히 정약용을 죽이고 가족을 노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 저 둘과 달리 이사람은 영의정 김재찬의 조카, 즉 시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