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匡師 (1705년 ~ 1777년)
1. 개요
조선 후기의 서예가. 특히 초서체에 능했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2. 생애
이광사는 소론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이경직은 백헌 이경석의 형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버지 이진검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러나 큰아버지인 이진유가 신임옥사 당시 김일경과 손을 잡고 노론을 탄핵했는데, 이 일로 인해 노론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경종임금이 승하하고 영조 임금이 즉위하자 이진유는 중앙에서 아주 먼 외딴 지역에 안치되었다가 중앙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던 중 옥사하였다. 아버지 이진검 역시 형과 함께 노론을 공격했고, 이후 노론이 정권을 잡자 연좌제로 인해 강진으로 귀양을 가 죽은 후 가문이 몰락했다.이에 이광사는 스승 정제두가 있는 강화로 은둔했다. 그러던 중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나주 괘서 사건에 연좌되어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1] 그곳에서 청년들에게 서예와 학문을 가르치던 중 그가 글과 글씨를 가르쳐 세상을 비방하고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유배되었다.[2] 1년 후에는 진도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신지도(薪智島)(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금곡리)로 이배(58세)되었으며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고, 함경도 부령에 머물던 시절의 제자들이 내려와 스승의 유해를 서울까지 옮겼다. 향년 73세.
3. 업적 및 일화
전(前) 공조판서 백하 윤순(白下 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眞書),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했고, 산수와 인물화에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원교체는 원만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것이 특징인데, 조선말기까지 크게 유행했다.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은 이광사가 글씨를 썼다. 이 현판에는 사연이 있는데, 1839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던 중 해남 대흥사에 들러 친구인 초의선사를 만났다. 귀양가는 처지인데도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조선의 글씨를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가 있는가? 당장 떼어내리게, 내가 써 주겠네."[3]
결국 초의선사는 극성에 못이겨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내리고 김정희의 글씨를 받았다고 한다. 이때 덤으로 무량수각(无量壽閣)이란 현판도 하나 써주었다. 그리고 9년 후 추사는 귀양지에서 풀려났는데,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와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달아달라는 부탁을 한다.[4] 그래서 오늘날 대흥사에 추사의 글씨(무량수각)와 원교의 글씨(대웅보전)가 함께 남아있다. 추사 김정희는 이광사의 글씨에 대해 시종 비판적이었는데 관련 글을 참고해보자.기사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 역시 벼슬길을 단념하고 빈곤 속에 살았는데, 그는 우리나라의 야사를 모두 모은 연려실기술을 집필했다. 연려실(燃藜室)은 아버지 이광사가 손수 휘호해준 아들의 서재 이름에서 가져왔는데, 한(漢)나라 유항이 글을 정리할 때 신선이 나타나 명아주 지팡이를 태워 빛을 밝혀준 고사에서 유래한다.
[1] 이 때 이광사의 부인은 남편이 사사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2] 당시 부령부사는 이광사의 제자들에게 곤장 20대씩을 때렸다고 한다. 자신에게 학문을 배웠단 이유만으로 곤장을 맞는 제자들을 보는 스승의 심정은 어땠을지...[3] 김정희가 노론 명문가인 경주김씨인 것도 있지만, 젊은 시절 청나라 사절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앞선 문물을 접했으며, 스승 박제가를 통해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김정희는 중국 한나라 때의 비문글씨체가 진짜 글씨라는 주장을 했다. 그런 그에게 이광사의 글씨는 가당치 않았을 것이다.[4] 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인생관이 바뀐 김정희는 이광사 특유의 글씨체가 갖는 수려함을 알고 다시 편액을 걸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