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이긍익(李肯翊) |
본관 | 전주 이씨 |
출생 | 1736년 조선 한성부 |
사망 | 1806년 |
국적 | 조선 |
자 | 장경(長卿) |
호 | 완산(完山), 연려실(燃藜室) |
가족관계 | 아버지 이광사 |
종교 | 유교 |
1. 개요
조선의 실학자로 영조, 정조 재위기에 활동하였다. 자는 장경. 호는 연려실, 완산이며, 본관은 전주로 정종의 아들 덕천군의 후손(11대손)이다. 5대조가 인조대의 명신 이경직[1]이다.2. 생애
그의 아버지인 이광사(李匡師, 1705년 ~ 1777년)[2]는 당대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그의 가문이 소론에 속해있던 까닭에[3] 이긍익의 나이 20세때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부령도에 유배되었고, 신지도로 유배지를 옮긴 뒤 그곳에서 죽었다. 그 외에도 그의 조부나 종조부 등이 비슷한 이유로 계속 화를 입었는데, 이러한 가정적 환경에서 자란 이긍익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처음부터 단념하고 일생을 야인으로 살면서 학문에 힘썼고, 야사의 총 집합체라 불리는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불운한 환경을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극복한 것이다. 이긍익의 집안은 이광사가 양명학자인 정제두에게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강화도로 이사를 갔고, 이광사는 정제두의 손녀를 며느리로 삼기까지 했다. 이긍익의 후손이기도 한 이건창은 조선시대 당쟁사를 정리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저술하여, 연려실기술과 함께 조선 시대 정치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를 한 집안에서 배출하는 인연을 만들었다.알려진 것은 이 정도 뿐이며, 자세한 연보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3. 학문과 사상
서인 계열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특히 가학으로써 양명학이 전승되어 그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외에도 실학 사상의 영향 또한 어느 정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기존의 낡고 꽉 막히고 교조화된 성리학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기존의 편협한 역사 인식 대신 진보적인 역사 인식을 성립했다. 이 진보된 의식은 그가 연려실기술을 저술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4. 연려실기술의 저자
연려실기술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그는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힘썼는데, 이 과정에서 연려실기술이 탄생했다. 그는 기존의 역사서가 너무 내용이 빈약하고 체계적이지 않은 데 불만을 품고 자신이 직접 책을 쓰기로 했다. 이후 그는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수집했는데, 범위도 범위일뿐더러 종류만 해도 400종이 넘어간다. 또한 이 자료들을 시간대와 주제에 맞춰 적절히 배열하고, 미처 못 넣은 내용들을 위해 빈 칸을 두었다.
자료를 얻는 대로 분류 • 기록하여 다음에 보태 넣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내가 자료를 얻어 보지 못하여 미처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은 후일에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 연려실기술 의례
- 연려실기술 의례
그가 완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쉽게도 연려실기술의 '진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당파 싸움을 싫어해서 그런지 내용의 치우침이 상당히 적으며 최대한 객관식으로 내용을 서술하였다.
아래는 그가 왜 이 책을 썼는지에 대한 계기. 연려실기술의 초입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동방의 야사는 큰 질로 엮어진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대동야승 • 소대수언 같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지은 책을 모으기만 했기 때문에 설부(說郛)와 같아서, 산만하여 계통이 없고 또 중복된 것이 많아 열람 • 상고하기가 어렵고, 춘파일월록 • 조야첨재 같은 것은 편년체를 썼는데 자료 수집을 다 하지 않고 빨리 책을 만들어 내었으므로 상세한 데는 지나치게 상세하고, 부실한 데는 너무 부실하여 조리가 서지 않았으며 청야만집은 사실은 상세하지 않고 다른 문집에 있는 역사 인물에 대한 논평을 많이 실었기 때문에 그 논평만 추켜들고 사실을 빠뜨린 것이 많았다.
- 연려실기술 의례
- 연려실기술 의례
현재는 정사가 아닌 야사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 내용과 수준이 상당한지라 조선왕조실록이 완전히 국역되기 전에는 이 책이 조선 시대의 역사 컨텐츠를 책임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4]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상황에서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었단 점에서 볼 때 그의 정신 세계는 상상 이상으로 견고한 듯 하다. 해방 후에도 조선왕조 실록이 완역되기 전까지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물은 주로 이 연려실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엄청난 자료 수집과 치우치지 않은 사관으로 후대 역사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은 이경석이 그의 동생이다.[2] 신윤복의 아버지 도화서원 신한평이 그린 영정이 지금도 남아있다.[3] 정확히 이긍익의 종조부, 즉 이광사의 큰아버지 이진유가 준소의 수장 김일경의 수족으로 박필몽, 이명의와 결탁해 노론 4대신을 축출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이긍익의 조부이자 이광사의 부친 이진검도 형과 함께 노론을 공박했다. 당연히 영조가 즉위하자 이진유는 제거 대상으로 찍혀 문초를 받다가 옥사했고, 이진검은 강진으로 유배 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4] 소현세자가 인조가 던진 벼루에 맞았다는 일화는 거의 정사 취급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