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1 12:40:43

정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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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제두(鄭齊斗 )
시호 문성(文成)
사앙(士仰)
하곡(霞谷), 추곡(楸谷)
본관 연일 정씨
출생 1649년(효종 1년) 조선 한양부 반석방
사망 1736년(영조 12년) 조선 경기도 강화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종교 유교
부모 부친 - 정상징(鄭尙徵)
모친 - 한산 이씨(韓山李氏) 이기조(李基祚)의 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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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유학자. 조선 양명학의 체계를 완성하여 강화학파를 세운 인물. 호는 하곡(霞谷).

2. 생애

효종 1년(1649년) 한성부 반석방(盤石坊)에서 진사 정상징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로 포은 정몽주의 11대손. 5세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의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 정유성은 이조판서, 우의정을 역임한 당대 서인의 명문가로, 정제두도 부족함 없이 유명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소론의 대표인물인 박세채윤증에게 당시 조선의 주류 학문인 성리학을 배웠다.

현종 9년(1668년)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부인과 어린 아들의 요절, 본인의 병환 등으로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시절. 이후에도 일생동안 천거와 왕명으로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41세에 잠시 평택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학문 연구를 위해 사퇴하여 경기도 안산(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으로 이사한다.

그때부터 성리학 유일사상인 조선사회에서 사문난적으로 불리던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스승인 박세채, 윤증을 비롯한 다른 유학자들과 꾸준히 토론하며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61세에는 강화도 하곡으로 이주한다. 선친의 묘소 가까이로 옮겼다는 이유도 있지만, 주류 노론의 성리학 유일사상화가 심한 한양을 피해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는 섬으로 스스로 은신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강화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심경집의, 경학집록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술은 영조의 마음에 들어 이조참판, 대사헌 등에 기용되었으나 사양하였고, 88세로 강화도에서 사망할 때 까지 궁을 드나들며 영조에게 강론하며 탕평책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은 강화학파, 하곡학파 등으로 불리며 전승되며, 현손 정문승(鄭文升)이 정제두의 학문을 정리하여 <하곡집(荷谷集)> 22권을 남겼다. 문하의 이광사, 유희, 이긍익, 이종휘 등은 이후 실학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근대의 정인보, 박은식도 강화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묘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65번지에 있으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로 등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