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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c700> 목호룡 睦虎龍 | |
본관 | 사천 목씨[1] |
이칭 | 동성군(東城君) |
관직 | 지관(地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출생 | 1684년(숙종 10년) |
사망 | 1724년(영조 즉위년) |
1. 개요
조선 호조참판 (戶曹參判) 목진공(睦進恭)의 후손이며, 남인(南人)의 서얼(庶孽)이다.지관(地官)이자 문신. 본관은 사천이며 경종 때 신임사화의 빌미를 제공하였다가 연잉군(영조)이 왕으로 즉위되면서 투옥되었다가 죽었지만 경종(조선)/독살설은 오늘날까지도 회자(膾炙) 되고 있다.
사후 목호룡은 불명예로 낙인찍혀 사천목씨 종친부의 족보에 이름이 지워져있고 가문도 제명처리되어 있다.
2. 생애
경종 때 지관으로 등용되었으며 본래 남인 서자 출신이지만 처음에는 연잉군(영조)을 옹호하였다가 경종 2년(1722년) 소론파에 가담하여 노론파 대신들과 대립하게 되었고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함께 노론 대신들이 경종의 시해를 주도하여 연잉군을 왕좌에 앉히려 한다는 밀고를 하면서 노론 대신 숙청을 주도하여 신임사화를 일으킨다.이에 대한 공로로 경종으로부터 동성군(東成君)에 봉해졌으며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24년(경종 4년) 경종이 붕어(崩御)[2]하고 연잉군이 21대 영조로 즉위하자 영조의 어명으로 신임사화가 무고로 규정되면서[3] 김일경과 함께 체포되었다.
고문을 받다 감옥에서 죽었고 숭례문 밖 당고개(현 위치 용산구 청파로 당고개 순교성지) 서소문 밖에 효수하였다.[4]
1728년(영조 4년) 3월에 영조 즉위 직후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의 계략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인좌의 난이 발생한다. [5]
1729년(영조 5년) 영조는 기유처분을 하면서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편다.
3. 대중매체에서
4. 둘러보기
[1] 족보에 이름이 지워졌으며 가문에서 제명처리 되었다.[2] 임금이 세상(世上)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3] 실상은 실체가 있는 걸 영조가 뻔뻔스레 뒤엎은 거다. 영조 자신부터가 "어느날 서덕수가 찾아와 나를 위해 일을 도모하고 있으니 알아두라고 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4] 목호룡(睦虎龍)과 김일경(金一鏡)은 영조에게 국문을 받으면서도 신이라는 호칭을 쓰지도 않고 끝까지 나리(進賜)라고 호칭하며 억울함을 항변하였다.[5] 이인좌의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황사영 백서 사건까지 겹치면서 남인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이전과 같은 정치 당파로써의 모습을 발휘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