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5:30:16

김귀주

김귀주 / 김구주
金龜柱
1740년 ~ 1786년

1. 개요2. 생애와 주요 활동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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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정치인.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이다

김구주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흔히 김귀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한자를 음독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龜이라는 한자가 거북 귀, 땅 이름 구, 터질 균이라는 3가지 음으로 읽히기 때문이며 오늘날에는 김귀주이라는 명칭이 유명하지만, 본인이 생존할 당시의 조선시대 사료에서는 공식 문서에서 주로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언문(한글) 표기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명칭이라는 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하기에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으며 당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김구주, 현대 기준을 중시한다면 김귀주로 읽으면 된다.

2. 생애와 주요 활동

민회빈 강씨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5대손이며,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아들이다. 정순왕후 김씨는 그의 누이이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좌승지에 올랐으며 문과에 급제한 뒤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영조 37년, 사도세자평양에 몰래 여행 갔을 때 당시 정승이던 정휘량과 홍봉한이 이를 말리지 않고 영조에게 알리지도 않는다는 밀봉 상소를 영조에게 직접 올리려 했다. 이후 강원도 관찰사,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외척당인 남당을 만들어서 당시 실권을 장악하던 북당의 홍봉한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세손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을 탄핵하는데 주력해 공홍(攻洪)파라고 불렸다. 이후 홍봉한을 정계에서 실각시키려 하였는데, 1770년 한유를 사주해 홍봉한을 탄핵했으며 세손영조를 수가하지 않는 틈을 타 정후겸과 함께 숙부이던 김한기가 영조에게 홍봉한이 세손을 제거하고 대신 은언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고변을 한다. 홍봉한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에 부처되었으나, 영조가 이내 며느리 혜경궁 홍씨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철회한다.

정조가 즉위한 직후 숙청당했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병들었는데도 문안을 오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흑산도에 위리안치시켰다. 사실 이 부분은 정조가 김귀주와 정순왕후 김씨를 '배신'한 형태에 가깝다. 김귀주와 정순왕후는 세손 시절의 정조를 비호하면서 그 명분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정조는 이 것이 자칫 더 위험한 권신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우려해서 토사구팽한 것.

3. 대중매체

MBC의 드라마 이산에서는 정명환이 연기했다. 주요 빌런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과격하고, 교양이라곤 없으며, 수틀리면 손부터 나가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세손파의 계책으로 인해 한번 파직되었다가 영조가 치매에 걸렸다는걸 알게된 정순왕후가 복직을 청하여 복직했고, 복직하자마자 밤중에 퇴궐하는 홍국영을 폭행하여 의식을 잃게 하는 등 정말 막나가는 미친놈이자 인간말종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정순왕후와 다른 노론 대신들과 함께 세손을 끌어내리려 했지만, 기억을 되찾은 영조가 모든 상황을 진압하였고, 결국 옥에 갇히게 되었고, 얼마 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물론 본문 설명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실제 역사와는 정반대로, 실제 정조의 즉위에 반대한 것은 홍봉한의 동생이자 김귀주의 정적인 홍인한정후겸 일파였고, 김귀주는 도리어 세손 시절의 정조를 비호한 쪽이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한 후 김귀주의 세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정조가 도리어 김귀주 역시 홍인한과 같이 유배 보내버렸고[1], 이후 사도사제의 추숭 과정에서 김귀주가 속한 벽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고, 김귀주의 여동생인 정순왕후가 후대에 악녀로 인식되면서 후대에 김귀주가 정조의 정적이었다는 오해를 사게 된다.


[1] 김귀주는 홍인한의 형이라는 이유로 홍봉한을 함께 숙청하려 했는데, 이것이 정조의 경계를 샀다. 물론 대놓고 정조의 정적이었던 홍인한은 유배 후 아예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