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4:35:02

정세권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세권
鄭世權 | Jeong Se-gwon
파일:정세권.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기농(基農)[1]
본관 진주 정씨[2]
출생 1888년 4월 10일
경상도 고성현 이운면 덕명리
(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3]#
사망 1965년 9월 14일[4] (향년 77세)
경상남도 사천군
종교 대종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1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상세3. 정세권이 생전에 지었던 한옥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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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부동산업자, 민족사업가,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디벨로퍼(developer). 본관은 진주(晉州). 종교는 대종교이다.

정세권은 20세기 한국 최초의 부동산 업자로서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큰 대지를 매입하고 분할한 후 한옥집단 지구를 건설해 일반인들에게 분양했다.

가회동, 삼청동의 북촌한옥마을, 익선동 한옥단지 개발[5]을 비롯해,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행당동, 휘경동, 서대문 및 왕십리 일대에 조선집이라 불린 근대 한옥을 대량 공급하는 등 도성 안팎으로 한옥 2천여 채를 건설했다.

이뿐 아니라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조선어학회를 후원한 민족운동가의 모습도 가지고 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상세

1888년 4월 10일 경상도 고성현 이운면 덕명리(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아버지 정필석(鄭必晳, 1852. 3. 2 ~ 1933. 7. 4)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궁지(李宮旨, 1855 ~ 1944. 2. 12)[6]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정세권은 조선 단종우의정을 지낸 정분의 15대손이었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은 이미 몰락하여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그는 5세 되던 1892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어려서 총명하여 12세 되던 1899년 진주백일장에서는 장원을 했다. 진주낙육고등사범학교(晉州樂育高等師範學校)의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 졸업 직후인 1905년 기자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910년에 하이면장이 되어 주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일제의 녹을 먹는 것에 회의를 느껴 1912년에 사임하였고, 한동안 고향에서 평범한 생활을 했다.

1920년 일제의 회사령 철폐로 일본자본이 조선으로 유입되자 미처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명동, 용산 일대 남촌 지역에서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종로 일대까지 옮겨와 상업 활동을 확장했고 조선인 경제적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부동산 개발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조선인들은 대형관급공사 참여가 불가능 했기에 소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찾고 있었다. 마침 서울이 엄청난 규모의 인구 증가를 경험하고 있었던 배경과 맞물려 조선인들은 도시형 소규모 주택 산업에 파고들었다. 정세권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1910년대 후반 주택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중에서도 정세권은 남달랐다. 그가 만든 한옥은 전통 한옥을 상당부분 변형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수도, 전기가 들어오고, 환기, 일조권에까지 신경썼다. 행랑방과 장독대,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한 퓨전(fusion) 한옥이었다.

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1929년까지만 해도 조선 25대 왕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후손들이 살았던 누동궁이 있었다. 휑했던 이곳은 불과 6년 만인 1935년에 수십 채의 한옥이 빼곡히 들어섰다.

당시 서민들은 초가집에 거주했는데 서민들도 개선된 주거환경을 누려야 한다는 글도 기고하였던만큼 개량주택에 대한 소신이 있었다. 또한 한옥 분양 후 대금을 일시불이 아닌 입주 후 월 단위 또는 년 단위로 나누어 받는 정책을 써서 주택 구입의 부담을 낮추었다. 이렇듯 그의 집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그는 한옥건설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한편, 그는 다양한 사회사업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특히 1923년 1월 조만식·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서울지회를 설립하고 회계 및 사업 전반을 관리했으며, 상업에 밝아 물산장려운동을 크게 활성화했다. 특히 1929년 말부터 대공황기를 맞아 조선물산장려회 또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였는데, 1930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서울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에 선출되고 같은 해 5월 중앙회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었을 때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또 1934년 중앙회 이사에 선출되자 회관 건립 및 이전·강연회 등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립정신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려는 장려회 이사와 실리적 산업 육성을 추구했던 정세권은 대립하게 됐고 결국 정세권은 물산장려회에서 나오게 되고 물산장려회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차츰 쇠퇴했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정세권은 조선어학회 활동도 적극 지원했는데,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 경성부 화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에 있던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기부하여 학회회관을 제공하기도 했다.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사건 당시 최현배, 이희승 등과 더불어 큰 고초를 겪었다. 뚝섬에 있던 3만 5천여 평의 토지와 재산을 빼았겼다. 이후 사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하지만 정세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집 장사'란 단어로 평가 절하되어 왔다.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박길룡[7]은 귀족 계급 소유의 뜰과 저택을 부수고, 전통 한옥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의 한옥들을 밀집하여 개발하는 것이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고 비난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인들은 일본식 주택을, 조선인 지식인들과 부유층은 소위 '문화주택'이라 불렸던 서양식 주택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정세권은 식민지 조선 서민을 위한 도시형 한옥을 건설했다. 한옥건설 기술의 맥을 정세권이 이어냈으며 그와 같은 자들이 없었다면 한옥 건설 기술의 맥이 끊겼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정세권의 이런 노력이 일본인들이 청계천 북쪽 지역인 북촌으로 확장하는 것을 막았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경성에 살던 일본인들은 용산과 후암동에 서양식 건물인 '문화주택'을 짓고 살았으나, 청계천 북쪽 지역으로 주거지를 조금씩 넓혀갔다. 정세권의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청계천 북쪽에 적산가옥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절대 과장된것이 아닌것이, 당시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은 주로 당시 조선총독부가 위치한 남산 인근이었지만 이후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이 점점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청계천 남쪽지역은 한옥과 적산가옥이 50:50정도 비율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세권은 기존의 한옥을 개량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개량한옥을 만들었고 이를 보급하여 일본인들이 정세권의 한옥 주거지역에 한국의 전통건축과 한옥대신 적산가옥을 지어가기 어렵도록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일가가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에 거주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그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9.28 서울 수복 당시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이듬해 1.4 후퇴에도 다른 가족들만 부산 또는 제주도로 피난시키고 정세권 자신은 그대로 머물러 왕십리에 거주했다.

그 뒤 1950년대 말 홀로 고향으로 내려가 자투리땅 단칸방 농가에 거주하다가 1965년 9월 14일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별세했다.

사후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안장되었다가, 2016년 4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3. 정세권이 생전에 지었던 한옥

파일:북아현동 금화시민아파트 앞 한옥들 전경(1969년 3월26일 촬영).jpg
1969년 3월26일 촬영당시 아현동 금화시민아파트 앞 한옥들 전경

4. 기타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1919년 상경한 뒤 건설회사 ‘건양사’를 만들어 1920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20년 가까운 세월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 경기가 좋았던 1919년, 한 칸에 400원까지 했던 집값은 1921년 한 칸에 180원으로 폭락했다. 하지만 정세권은 절대 손해 보지 않았다.
“한 칸당 300~400원에 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칸당 250원가량의 밑천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를 180~190원에 팔면 손해가 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나는) 지은 집을 밑지고 판 대신에 뒤를 이어 즉시 한 칸에 170원에 집을 짓고 팔고, 10~20원쯤 남은 돈으로 은행 이자를 갚습니다.”

정세권은 1936년 5월21일치 <매일신보>에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를 통해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는데도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015년 개정 교육과정 중학교2학년 영어 YBM 송미정 교과서 8과가 정세권과 한옥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를 다룬 저서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가 쓴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가 있다.

[1] '기본농사(基本農舍)'의 줄임말이라고 한다.[2] 충장공파-광로(光露)공계 28세. 족보명은 정한운(鄭漢運).#[3]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4]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66년 2월 12일에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5] 익선동의 한옥들은 일반서민용이며, 북촌의 한옥들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을 위한 한옥들이라고 한다.[6] 이내관(李乃寬)의 딸이다.[7] 화신백화점을 설계하고 조선총독부 청사 설계에 참여한 친일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