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호 | 기농(基農)[1] | |
본관 | 진주 정씨[2] | |
출생 | 1888년 4월 10일 | |
경상도 고성현 이운면 덕명리 (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3]# | ||
사망 | 1965년 9월 14일[4] (향년 77세) | |
경상남도 사천군 | ||
종교 | 대종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12호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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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부동산업자, 민족사업가, 건축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진주(晉州).국내 최초의 근대적 부동산 개발업자(디벨로퍼/developer)로, 1920년 전후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설립하여 이후 건축왕이라 불리며 경성 일대의 한옥집단지구를 조성했다. 대표적으로 가회동, 삼청동의 북촌한옥마을, 익선동 한옥단지 개발[5]을 비롯해,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행당동, 휘경동, 서대문 및 왕십리 일대를 매입하고 이를 분할해 '조선집'이라 불린 근대 한옥을 대량 공급했다. 토지 매수부터 기획, 설계, 시공까지 주택 건설 과정을 직접 총괄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조선어학회를 적극 후원한 민족운동가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노고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행적
2.1. 경성의 건축왕
1888년 4월 10일 경상도 고성현 이운면 덕명리(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아버지 정필석(鄭必晳, 1852. 3. 2 ~ 1933. 7. 4)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궁지(李宮旨, 1855 ~ 1944. 2. 12)[6]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정세권은 조선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분의 15대손이었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은 이미 몰락하여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그는 5세 되던 1892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어려서 총명하여 12세 되던 1899년 진주백일장에서는 장원을 했다. 진주낙육고등사범학교(晉州樂育高等師範學校)의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 졸업 직후인 1905년 기자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910년에 하이면장이 되어 주위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일제의 녹을 먹는 것에 회의를 느껴 1912년에 사임하였고, 한동안 고향에서 평범한 생활을 했다.
1920년 일제의 회사령 철폐로 일본자본이 조선으로 유입되자 미처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명동, 용산 일대 남촌 지역에서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종로 일대까지 옮겨와 상업 활동을 확장했고 조선인의 경제적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부동산 개발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조선인들은 대형관급공사 참여가 불가능 했기에 소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찾고 있었다. 마침 경성이 인구가 증가하고 있던 배경과 맞물려 조선인들은 도시형 소규모 주택 산업에 파고들었다. 정세권도 그중 한 명이었다.
정세권은 당시 일본인들이 짓던 일본식 가옥이나 편리성으로 선호되던 서구식 문화주택 대신 이른바 조선집이라 불린 한옥을 선호했는데[7], 정세권이 구상한 한옥은 과거 왕족과 사대부가가 쓰던 대규모 한옥과는 다른 전통을 이으면서도 생활에 편리하고 서민들도 살 수 있을만한 집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때 만든 한옥은 규모는 줄었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수도, 전기가 들어오고, 환기, 일조권까지 나름 신경쓴 최초의 근대식 개량 한옥이었다.
정세권은 행랑방과 장독대, 창고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으로 된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가미했다. 6인 가족이 살 수 있는 크기, 마루 개념의 거실을 중심으로 방이 둘러싸고, 내부 공간은 남향으로 하며, 위생적 화장실을 주택 내부로 들여놓는 새로운 형태의 한옥은 이후에도 북촌을 포함해 대규모 한옥 단지의 표준 모델이 된다.
당시 정세권은 서민들도 개선된 주거환경을 누려야 한다는 글을 기고하였을만큼 개량주택에 대한 소신이 있었다. 허나 대출도 힘든 서민들이 집 살 돈이 부족하자 당시엔 파격적이게도 한옥 분양 후 대금을 일시불이 아닌 입주 후 월 단위 또는 년 단위로 나누어 받는 정책을 써서 서민들의 주택 구입 부담을 낮췄다.
정세권이 1920년대 후반 대지를 사들인 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1929년까지만 해도 조선 25대 왕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의 후손들이 살았던 누동궁이 있었다. 휑했던 이곳은 불과 6년 만인 1935년 수십 채의 한옥이 빼곡히 들어서게 된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도시재생 사업이 이뤄진 것이다.
김경민 교수는 이 당시 정세권의 건축 개발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포디즘에 기초한 미국의 대규모 개발과 궤를 같이할 정도로 도시개발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또 “한옥집단지구의 주택은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전통 한옥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로 지어졌다. 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 오스만 시장의 ‘파리 개조 사업’ 이후 서민 거주 지역이 완전히 파괴된 것과 비교해 매우 가치있는 업적”이라고 말했다.#
정세권의 이런 노력이 한옥 건설 기술의 맥을 이어가게 했다는 의견도 있으며, 당시 남촌에 주로 있던 일본인들의 적산가옥이 북촌에 확장되는 것을 어느정도 저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는 과장이 아닌 것이, 당시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은 주로 조선총독부가 위치한 남촌의 남산 인근이었지만[8] 이후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이 점점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청계천 남쪽(남촌) 지역은 한옥과 적산가옥이 50:50 정도 비율로 이뤄지게 되었는데, 북촌은 정세권이 개량한옥을 깔아버리면서 적산가옥이 쉬이 들어오기 어렵게 하였다. 이는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고 밝힌 정세권이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세권이 건축한 집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그는 한옥건설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하게 된다. 덕분에 건축왕 정세권은 유통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과 함께 1930년대 ‘경성 3대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되어있듯 정세권의 길은 친일파 박흥식·최창학과는 사뭇 달랐다.
2.2. 독립운동 후원
그는 다양한 사회사업을 지원했는데, 특히 1923년 1월 조만식·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서울지회를 설립하고 회계 및 사업 전반을 관리, 상업에 밝아 물산장려운동을 크게 활성화했다. 특히 1929년 말부터 대공황기를 맞아 조선물산장려회 또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였는데, 1930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서울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에 선출되고 같은 해 5월 중앙회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출되었을 때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9], 1934년 중앙회 이사에 선출되자 회관 건립 및 이전·강연회 등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자립정신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려는 장려회 이사와 실리적 산업 육성을 추구했던 정세권이 대립, 결국 정세권은 물산장려회에서 나오게 되는데 이후 물산장려회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차츰 쇠퇴해간다.한편, 만주동포구제회를 만들어 김좌진 장군 유족을 비롯해 만주에서 순국한 조선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양사원이라는 인재 양성 학교에도 큰돈을 후원했고, 1939년 고향 덕명리에는 덕명간이학교를 세웠다.[10]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 활동도 적극 지원했는데,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 경성부 화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에 있던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기부하여 학회회관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물주 역할이 빌미가 되었는지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사건 당시엔 체포되어 최현배, 이희승 등과 더불어 큰 고초를 겪었다. 이후로도 시련은 계속되어 1943년엔 뚝섬에 있던 3만 5천여 평의 토지와 재산을 일제에 빼앗겼고, 건양사의 건설 면허도 취소되면서 이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게 된다.
2.3.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일가가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에 거주했다. 1949년 6월 12일엔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모임인 '십일회'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엔 그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9.28 서울 수복 당시 폭격으로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이듬해 1.4 후퇴에도 다른 가족들만 부산 또는 제주도로 피난시키고 정세권 자신은 그대로 머물러 왕십리에 거주했다.전쟁이 끝난 뒤엔 1950년대 말 홀로 고향으로 내려갔고, 자투리땅 단칸방 농가에 거주하다가 1965년 9월 14일 경상남도 사천군에서 별세했다. 유품은 놋주발 한 벌과 '조선말 큰 사전'책과 쌀을 퍼 담는 쌀되 정도일 뿐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사후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안장되었다가, 2016년 4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3. 정세권이 생전에 지었던 한옥
1969년 3월 26일 촬영 당시 아현동 금화시민아파트 앞 한옥들 전경 |
당연히 이 외에도 많은 한옥들을 지었다. 정세권의 건양사는 한 해 평균 300채의 한옥을 공급했는데, 1920년대 경성의 연간 주택공급량은 1700채 정도였다고 하니, 정세권은 그중 거의 18%를 홀로 담당한 셈이었다. 가히 경성의 건축왕이라 부를만하다.
4. 기타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1919년 상경한 뒤 건설회사 ‘건양사’를 만들어 1920년부터 1940년까지 약 20여년간 집을 지었다. 이기간 그는 사업가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정세권은 1936년 5월 21일자 <매일신보> ‘나는 어떻게 성공하였나’를 통해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는데도[11]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한 칸당 300~400원에 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칸당 250원가량의 밑천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를 180~190원에 팔면 손해가 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나는) 지은 집을 밑지고 판 대신에 뒤를 이어 즉시 한 칸에 170원에 집을 짓고 팔고, 10~20원쯤 남은 돈으로 은행 이자를 갚았습니다.” |
둘째 딸이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정정식(1921∼2015) 피아니스트고, 셋째 아들의 딸인 손녀가 정희선 덕성여대 명예교수이다. 은퇴 후 사진작가가 된 정희선은 북촌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그녀는 며느리에게 고맙다는 손편지를 쓸 정도로 자상한 조부였다고 기억했다.
일각에선 정세권의 건축 사업을 결국 '집 장수'로 돈 벌기 위해 한거 아니냐고 폄훼하기도 하는데[12], 개발 사업이 경제적 이윤 추구에서 시작되었다한들 그것 자체가 나쁜건 아닐 뿐더러, 당시 경복궁까지 헐며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 이를 따라 일본 가옥이 대거 들어설지도 몰랐던 북촌 일대에 오늘날 북촌한옥마을, 익선동 한옥단지같은 터전을 남긴건 결코 폄하될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는 그렇게 번 돈을 민족운동에 사용하다 결국 일제에 걸려 몸도 다치고 재산도 강탈당한 독립유공자였다. 애초에 건축 사업하는 사람이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정부와 등진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이윤 추구만 하던 사람과는 자세부터가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다룬 저서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가 2017년 발간한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가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도시계획·부동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서울의 도시개발사를 연구하면서 지금은 관광명소가 된 한옥집단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궁금해 2012~2013년 무렵 익선동 한옥 지역을 조사하다가, 자료마다 정세권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 그에게 흥미를 느껴 아예 연구 방향을 정세권으로 틀었고, 국회도서관 등을 뒤지다 보니 잊혀진 애국 사업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15년 개정 교육과정 중학교2학년 영어 YBM 송미정 교과서 8과가 정세권과 한옥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2021년, 북촌 한옥 역사를 조명하면서 한편으론 정세권도 기리는 북촌 한옥역사관이 개관했다.#
2022년, 벌거벗은 한국사 북촌편에서 정세권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상1, 영상2.
[1] '기본농사(基本農舍)'의 줄임말이라고 한다.[2] 충장공파-광로(光露)공계 28세. 족보명은 정한운(鄭漢運).#[3]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4]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66년 2월 12일에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5] 익선동의 한옥들은 일반서민용이며, 북촌의 한옥들은 중산층 상의 가정을 위한 한옥들이라고 한다.[6] 이내관(李乃寬)의 딸이다.[7] 훗날 딸은 "(아버지는) 조선 집이어야 조선 사람이 살기 편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당신도 늘 한복을 입고 새벽에는 시조를 읊곤 하셨다."고 회상했다.[8] 이후 조선총독부는 1926년 완공된 북촌의 경복궁 근처로 이전한다.[9] 1929~1930년 물산장려회 총예산은 1,866원 53전이었는데, 이 가운데 정세권이 지출한 사비(私費)가 무려 65.4%인 1,220원이었다고 한다.[10] 이 학교는 국민학교로 이어지다 1993년 폐교된다.[11] 경기가 좋았던 1919년, 한 칸에 400원까지 했던 집값이 1921년 한 칸에 180원으로 폭락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12] 당대 조선총독부 청사 설계에 참여하고 화신백화점을 설계해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박길룡도 귀족 계급 소유의 뜰과 저택을 부수고, (서민을 대상으로 해) 전통 한옥에 비해 매우 작은 규모의 한옥들을 밀집하여 개발하는 것이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 경성으로 몰려들던 인구 성장세를 감안하면, 면적은 한정되어있는데 큰 규모의 한옥만 지으라는 것은 일부 상류층이나 살라는 소리랑 별다를거 없긴 했다. 게다가 그렇게 다닥다닥 붙여 지은 덕분에 오늘날 한옥집단지구 특유의 전경도 나오는 것이니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