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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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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특징4. 근대건축물 개념(1876년~1910년)5. 적산가옥 개념(1910년~1945년)
5.1. 문화주택 개념
5.1.1. 이후의 영향5.1.2. 전쟁현대화로 인한 대규모 멸실
6. 분포
6.1. 예시6.2. 적산가옥 소재지6.3. 목록
7. 해외의 유사 사례8. 사건사고9. 적산가옥이 나오는 매체들10. 관련문서11.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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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산가옥()에서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 혹은 '적들이 만든'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적들이 만든 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근대 및 일제강점기일본인이 지은 건축물 중 일본식 주택(화옥)[1]을 뜻한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이 수복한 38선 이북 지역에 있는 북한의 건축물(김일성 별장 등)도 적산가옥에 해당하나, 그 수가 매우 적고 한정적인지라 보통은 일제강점기의 건물들을 의미하게 되었다.

과거에 일본인 촌을 이루었던 지역엔 아직까지 꽤 많은 수가 남아 있고, 사람이 사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거기다가 기와와 지붕만 일본식으로 바꾼 개량한옥을 찾아보면 어머어마하게 많다. 일제강점기 전에 만든 양옥들과 적산가옥을 합쳐 근대건축물이라고도 하며, 국가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 관리하기도 한다.

2. 역사

1910년에 한일병합의 체결 이래 일본제국은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정하고 조선의 물자와 농수산물 등을 일본으로 반출 및 착취했다. 1920년대 들어서 일본 현지에서 일부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 각지에 일인촌을 형성하여 일옥(日屋)을 지으며 살았는데, 이들은 조선도 일본땅의 일부라는 인식을 가지며 조선을 자기들의 장으로 만들려 했다.

1930년대 들어서 일옥들은 증가하게 되어서 조선 방방곡곡 일부에 일옥이 지어지게 되었으며, 일본인들은 조선을 자신의 영토인 양 여기며 생활을 즐기거나 벚꽃 등을 심으며 놀이를 즐기는 등, 조선을 자신들의 주색장으로 전락시키기에 이른다. 일옥 곳곳에는 게다 소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점차 일본화되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게 되고 조선에 광복이 오자, 일본인들은 새벽이나 밤에 조선인들 몰래 집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미군정에 의해 추방되었다. 일옥들은 빈 집으로 남게되어서 일부 조선인들에 의해서 불타거나 부서졌다. 1945년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 이후 남한에 있는 일옥들은 미군정청령에 따라 미군정이 특별관리를 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령에 따라 남한에 소재한 일옥들 대부분을 국유지로 지정하고 적산가옥으로 지정했다.

일본인들은 별 수 없이 돌아갔던 것일 뿐이지 소유권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한일수교 얘기가 나오게 되었을 때 말 그대로 기를 쓰고 찾으려고 했다. 한일수교 이전에는 일본 정부 안에서 종종 '한국 정부가 몰수한 일본인 자산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2]도 나왔는데, 이럴 때마다 한국 여론이 분노했음은 물론이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위반이라 논란이 있었다.[3] 결국 한일기본조약을 맺으면서 일본 정부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남긴 이른바 '적산'에 대한 청구권을 완전히 포기함을 명시해 이 문제는 끝났다.[4]

극소수지만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이나 한일혼혈 등 귀화하여 한국인이 된 일본계 한국인들의 경우 재산을 침해받지 않았다.

적산가옥은 대다수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 헐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과거사 청산을 이유로 헐리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기도 있었으며, 이러한 건물을 보존해야 된다는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철거되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의 경우 그 자체가 박물관이 되거나 깔끔하게 리모델링해 커피숍이나 상점 같은 상업 시설로 쓰는 사례가 있다. 이러한 양상은 주로 인천이나 목포 등 적산가옥이 많이 남은 지역에서 자주 나타난다.

3. 특징

건축양식이 다른 만큼 외양에서 일반적인 주택과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데, 대표적인 특징을 들자면 겉으로 튀어나와있는 목재 구조, 2층이 1층보다 약간 튀어나와 있는 모습, 일본식 기와가 얹힌 지붕, 밖으로 돌출된 비대칭 형태의 창문 구조 등이 있다.

내부구조 역시 한옥과 다른 특징을 여럿 보여준다. 가장 큰 특징으로는 미로를 연상케 할만큼 복도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에도 한국식 주거 평면과 일본식 주거 평면의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

4. 근대건축물 개념(1876년~1910년)

1876년 맺은 강화도 조약 후, 한국에서 서양 문물이 유입되던 시기에 지어진 서양식 양옥들을 말한다. 즉 일제 자본에 의해 지어졌느냐, 한일합방이전 서양을 비롯한 서양 자본에 지어졌느냐 차이다. 대표적인 건물이 일본과 관련 없는 서울 정동길, 명동성당, 약현성당, 인천 개항장 등 남아 있는 서양식 가옥들과 주택들이다. 주고 외국 공사관, 무역회사, 조선에 거주하는 주재원들이 지은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두 국가의 행정체계가 통합되면서 일본을 제외한 해외 공사관 인력, 가족들이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근대건축물 자산들은 일제에 자연스럽게 통합된다.

5. 적산가옥 개념(1910년~1945년)

1910년 경술국치이후 일제 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지어진 일본식 가옥과 건축물들을 말한다. 당연히 조선을 식민통치 하기 위한 관공서, 군인, 경찰과 그 가족들이 거주하기 위함이다. 즉 근대건축물과 적산가옥은 지어진 목적이 다르다.

5.1. 문화주택 개념

일제강점기에는 당연히 적산가옥이라 부르지 않았다. 적산이란 '적의 재산'이란 뜻으로 1945년 광복한국인 입장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주택 양식을 '문화주택'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그 의미는 서양의 건축 양식 및 구조 방식을 일식 양식에 버무려 설계한 집[5]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문화 주택들은 대부분 콘크리트 혹은 벽돌, 철근콘크리트 등의 서양식 재료를 활용하여 만들어졌으나 목조건축 위주로 발달했던 일본 전통 양식도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지붕 부분에 목재로 만들어진 부분이 존재하는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완전한 양옥, 일본/서양식 혼용 형태[6] 뿐만 아니라 일부 완전 목재 다다미집 형태도 존재했다.

문화주택(文化住宅)은 일본의 주택 중 하나로, 응접실이나 현관에 도어를 단,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주택으로, 1920년대에 유행하였다. 간사이 지방에서는 목조 2층의 아파트를 말한다. 한반도에는 일제강점기 때 문화주택이 들어왔다. 또, 1970년대까지 문화 주택이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오래 유행하였다. 그러나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의 주택들이 재개발로 사라졌기에, 오늘날에는 적산가옥을 비롯한 극소수만이 남았다. 앞서 설명한대로 다다미를 위시한 완전한 목재 일본식 가옥은 문화주택 범주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개항 이후 전통주택의 개선 필요성이 많은 지식인을 통해 제기되었다. 문명개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근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위생적인 주거공간과 도시공간의 실천이 절대적이며, 위생에 대한 관념은 ‘비위생=미개, 위생=문명’이라는 주거의식이 지식인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계몽담론 차원에서 논의되었을 뿐 주택에 대한 새로운 제안과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위생 관념이 주택에 명시적으로 반영된 것은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1922년 도쿄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출품되었던 서구식 외관과 공간구조를 갖춘 가족본위의 서양식 생활양식이 가능한 14개동 주택이 조선에도 소개되었으며, 이후 경성에서도 「문화주택도안전람회(文化住宅圖案展覽會)」와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1929년 경성에서 개최된 조선대박람회에서는 가족 중심의 공간구성, 부엌과 화장실이 개량된 3동의 주택이 출품되기도 하였다.

전통주택건축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적인 대안이 마련되기 시작한 것은 최초의 한인건축가인 박길룡, 김윤기, 박동진에 의해서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생적인 주택지와 부엌과 화장실의 개선을 중심으로 한 기능성의 확보와 위생적이고, 경제적인 주택을 한반도 주택의 나아갈 방향으로 인식했으며, 주택개량의 근간은 서양주택이었다. 한편, 개량한옥을 공급하는 건설청부업을 운영했던 건양사의 정세권은 ‘정원이 있고,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면 문화주택’이라며 자신이 공급하는 한옥은 이러한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는 문화주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건축가와 건설업자 사이에 주택형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문화주택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위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1920년대 한인 지식인과 일인주거지를 통해 간헐적으로 공급되던 문화주택이 1936년 인구급증으로 인한 주택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의 시역확장하면서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해 주거지가 대대적으로 개발되었고, 이때 상업화된 문화주택이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에 건축된 서대문밖 홍난파 주택과 후암동의 조선은행사택 그리고 장충동신당동의 무학(舞鶴)주택지와 서대문밖 충정로에 위치한 금화장 문화주택지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건축된 문화주택의 경우 건축양식은 서구식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일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탓에 문화주택보다는 일식주택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27년 12월 8일 조선을 방문했던 이토 추타(伊東忠太)는 “문화주택은 그 나라와 시대에 따라 동일하지 않은 것이므로 일정한 전형이 있을 리가 없다”고 하며, 일본에 만연해 있는 구미 각국의 양식을 모방하는 세태를 지각없는 짓이며 우스운 노릇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문화주택에 대한 선풍적인 인기는 1930년 조선일보에 실렸던 만평에서도 잘 나타난다. 결혼적령기의 여성이 “나는 문화주택만 지어주는 이면 일흔 살도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만평과 은행으로부터 무리하게 빚을 얻어 지은 ‘文化住宅’을 여름철 모기로 인한 화근에 비유한 '蚊禍住宅'이라 부른 것은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문화주택 관련 세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5.1.1. 이후의 영향

이러한 서구식 문화주택에 대한 높은 사회적 선호도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어, 전후 복구사업 중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급되었던 공공주택은 서구식 거실중심의 주택으로 지어졌고, 이들 주택은 예외 없이 문화주택이라 불렸다. 문화주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새마을운동 시기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지방의 낙후된 취락구조 개선 사업의 성공적인 사례를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에는 “우람한 철대문에 초인종이 달렸고 상수도가 부엌까지 들어오는... 알루미늄샤시로 창문을 달았고, 고급 미장합판으로 마루와 천장”을 만든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지칭하며 이러한 모습은 모두 대도시 문화주택[7] 못지않게 번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지난 세기 한국 사회에서 문화주택의 ‘문화’에는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택의 문제를 해결하고 지향해야 할 모범답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5.1.2. 전쟁현대화로 인한 대규모 멸실

이후 근대건축물들을 포함한 적산가옥들은 많은 곡절을 겪는다. 광복직후에 행정체계가 엉망일 때 원주인인 일본인들이 본토로 철수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남겨두고 갔고 남겨진 가옥들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런 빈집은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임자라는 식이었고, 정부에서도 소유권을 인정해 줄 정도였다.

그 이후 한국전쟁 때의 운명은 3가지중 하나 였다. 원 주인이 피난가서 빈집이 된 후 폭격되어 화재로 전소 되거나, 미군, 한국군 주둔지로 쓰거나, 북한군 주둔지로 썼다. 실 예로 구 인천역 등 다수가 폭격으로 전소되어 멸실하여 많은 수의 적산가옥, 근대건축물이 멸실되었다. [8]

이후 박정희 정부, 군부독재에 의한 현대화로 다수가 멸실되었고, 적산가옥은 일제의 잔재라는 인식과 함께 낡았다는 이유로 또 다수가 멸실되어 극소수 살아남은 적산가옥들이 방치되는 형태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갔다.

시간이 흘러 과거사의 잔재에 대해 철거해서 존재를 지우는 것에서 보존하여 오래도록 기억하는 방향으로 인식이 바뀌면서 적산가옥을 보존하게 되었다. 2010년대 이후로 복고풍, 빈티지 문화에 대한 유행과 개화기 서양문화에 대한 인기로 카페 등으로 개조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국가에서 매입, 복원해 박물관 등으로 개방하는 도시재생사업, 국가등록문화재 제도 마련 등 국가주도의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6. 분포

현재 남아있는 적산가옥은 과거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항구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예를 들면 인천 중구[9]부평구[10], 전남 목포, 여수, 전북 군산, 경북 포항, 부산, 경남 창원, 통영 등이 있다. 보통 그냥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개항장 역사문화의 거리구룡포 근대문화 역사거리처럼 보존의 목적으로 남겨진 곳도 있다.

서울특별시에도 의외로 많은 곳이 남아있는데, 주로 중구(정동길), 종로구의 도심 지역과 서촌 일대에 산발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일본인촌, 특히 일본 육군 주둔지[11]가 위치했던 용산구 원효로, 용문동과 신용산, 후암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또한 서울역 바로 뒤편에도 적산가옥 거리가 있었는데 신역사를 지으면서 전부 정리되었다.

군산의 이영춘 가옥은 조선 최대의 일본인 지주였던 구마모토의 별장이었는데, 양한일식이 혼재되어 있지만 기본은 적산가옥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군산시 히로쓰가옥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들도 있는데, 본래 지역명에 해방 전 소유주 이름을 붙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가, 2009년 9월 1일 문화재청 공고 제2009-157호에 의거 명칭이 '(지역명) 일본식 가옥'으로 변경되었다. 희귀한 예이긴 하지만 동국사처럼 주택이 아닌 등이 남은 예도 있다. 심지어 벌교읍에는 '보성여관'이라는 일본풍 여관(료칸)도 남아있다.

부산광역시에도 원도심을 중심으로 적산가옥이 많이 있었다. 그 이유는 원도심 일대에는 부산항이 있었고 부산항에는 일본을 오고가는 연락선이 다녀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현재는 재개발 등으로 인해 사라진 곳이 있으나 골목을 누비고 다니면 아직까지 가옥이 존재하는 곳도 많다. 현재 부산의 대표적인 적산가옥으로는 동래별장을 들 수 있는데 현재는 고급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외에 가수 아이유의 밤편지, AKMU의 사춘기 뮤직비디오 촬영지인 수정동 정란각도 적산가옥이다. 현재는 전통찻집으로 운영 중. 초량동에도 초량1941이라는 카페로 운영되는 적산가옥이 있으며 어린이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일부 적산가옥들은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대구는 상술한 항구도시들과 비교하면 그 수는 적지만, 상당수의 적산가옥과 일제강점기 시절 건설된 건물들이 남아있다. 부산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당시에 파괴된 건물들이 적기 때문에 남아있는 건물들이 꽤나 있다. 흔치않은 일옥 형식의 절인 관음사가 시내 한가운데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일옥형식은 아니지만 당시 일본인 교회였던 대한성공회 대구교회도 남아있다. 특히 북성로와 경상감영공원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거주구역이었던 터라 더욱 많다.[12] 다만 일부 건물들을 제외하면 관리상태는 매우 나쁘다. 최근에는 여러 가옥들을 복원 후 보존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부 건물들이 외관 복원 후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나 북성로 공구박물관[13], 미술관 등으로 재개장했고 개인으로도 중구의 지원을 받아 카페 등으로 개업하는 등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대구시가 북성로 일부에 재개발 승인을 쉽게 받아들여 버렸고 그만 철거되어서 거리의 원형을 잃었다. 이러한 대구시의 행정에 당황스럽게 느끼는 시민들이 대부분.

경남 지역에서는 창원시 진해구의 주요 건물들이 일본 해군에 의해 지어져 지금도 대한민국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본청 등으로 쓰이고 있는데, 진해 지역 민간 가옥들도 일부 남아 여전히 쓰이고 있다. 하동군에도 적산가옥이 있으며 현재는 매암차문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충청남도 지역 중 논산시 강경읍에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는 당시 강경읍에 포구(浦口)가 설치되어 있어 어업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이다. 천안시에도 아직도 사람이 사는 개인 거주지로 TV에 나왔다.

지방의 주요 철도역(대전역, 순천역, 영주역 등) 근처에 있는 관사촌에는 적산가옥 수십여 채가 남아있기도 하다.

영화 장화홍련에서 스토리의 배경이 된 수미와 수연의 집도 적산가옥이다.

6.1.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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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군산시 신흥동에 위치한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 가장 보존이 잘된 적산가옥이다.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의 유명한 포목상이었던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부로[14]가 건축한 2층의 전통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그 규모나 관리 수준이 꽤 남다르다.

해방 후 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 명의로 넘어가 한동안 후신인 한국제분이 지녀왔는데, 2016년 한국제분이 사조그룹으로 넘어갔음에도 팔지 않고 이용구 창업주 손녀가 갖고 있다.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다.

2006년작 영화 타짜의 평경장의 집이 바로 이곳이다. 그 밖에도 1990년작 영화 장군의 아들, 2004년작 영화 바람의 파이터 촬영지이기도 하다.

파일:HLpqL4T.png
상당히 많이 변형된 적산가옥. 아무래도 쭈욱 사람이 살아온 집이다보니 변형은 어쩔 수 없다.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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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거리에 있는 일본인 가옥 전시관, 대문 너머 가옥의 형태가 많이 망가져 있다. 위의 사진은 과거 모습으로 현재는 말끔하게 보수되었다.

파일:thehouse1932.jpg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1가에 위치한 더하우스1932 카페. 1932년에 건축되어 조선인쇄주식회사의 사장이었던 일본인 코스기 킨하치(小杉謹八)가 사택으로 사용하였고, 미군정장관을 지냈던 미합중국 육군 제24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육군 소장이 해방 직후 미군정시대에 살았던 주택. 건평 140여 평의 3층 규모의 건물로서 리모델링되어 커피숍으로 사용되고 있다.

6.2. 적산가옥 소재지

일반적인 적산가옥 및 근대건축물들은 거의 동네 외진데 위치해 있는 경우가 많다. 방치되어 있어 보여도 거의 주인이 있는 사유지 이므로 출입에 신중한 편이 좋다. 그리고 여러 군데 분산되어 있어 도보로 발품을 팔아야 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래 유명지들은 정부, 지자체에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투자해 근대건축물, 적산가옥 매입, 보존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는 곳이라 한 곳에서 여러 점의 적산가옥을 볼 수 있는 지역들을 모아놓았다. 외외로 도시의 한복판이지만 구도심, 특히 중구청 인근과 우연히도 위치가 겹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명치좌, 본정통 등 일제강점기 당시 번화가였던 곳이랑 겹치며 광복후 1970~80년대 산업화로 시내 중심지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다수 인구가 자녀교육등을 이유로 신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인구가 상당이 공백상태인 경우가 많아 지자체와 정부에서 도시재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활성화 시키고 있다. 또한 캠퍼스 역사가 오래된 대학에도 이 시기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한 예시로는 서울과학기술대대륙관.

한 드라마, 영화 세트장을 같이 포함시켜놓은 이유는 근대건축물 보존 업체들이 개화기, 일제강점기 영화 세트장 건물도 그럴듯하게 지어놓을 정도로 기술력이 좋아 간접 체험이 가능해 세트장이라고 만만히 봤다가 직접 방문해 퀄리티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 논산 션샤인 스튜디오가 그 예이며 놀랄정도로 개화기 당시 서울을 재현해 아름다운 세트장으로 손꼽히며 합천영상테마파크는 무수히 많은 영화 드라마를 촬영했으며 관광객 유치를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다만 드라마 야인시대 세트장이었던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는 2013년 경영난으로 폐관했다.

적산가옥 소재지로 유명한 곳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양관, 양옥 소재지와 일치하는 곳이 많다.

참고로 골동품에 대한 성지는 별도의 문서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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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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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해외의 유사 사례

일본과 중국의 외국인 거류지, 조계지에도 한국의 적산가옥과 유사한 개념의 건축물들이 있다. 일본, 중국의 경우 적산가옥 역할을 한 건축물들은 서양인들이 건립한 양옥, 양관들인데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에서 남기고 간 서양식 건축물들이다.

사실 일본의 양옥, 양관들은 한국의 문화재 보존 방향성과는 다소 다르다. 한국은 경술국치를 기억하자는 기억공간의 의미가 강하다고 한다면, 일본은 근대화에 대한 자부심에 대한 기억이다.

대만에도 일본 제국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적산가옥이 남아있다. 6.25와 같은 전쟁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보다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이런 집에는 대체로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몰려든 외성인들이 기거했다. 예를 들어 타이베이 외곽에서 온천으로 유명한 신베이터우역 근처를 보면 온천 박물관이나 지금도 목욕탕으로 영업하는 룽나이탕 건물 등 완전히 일본식 건물인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8. 사건사고

9. 적산가옥이 나오는 매체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매체들에 등장한다.

10. 관련문서

11. 출처

  • 일제강점기 문화주택 개념의 수용과 전개(이경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 한국건축개념사전(한국건축개념사전기획위원회, 동녘, 2013)
  • 江戶東京学事典(小木新造, 三省堂, 2003)
  • 文化-一語の辭典(柳父章, 三省堂, 1995)
  •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1] 일본 건축과 서양 건축이 혼재된 화양절충식 주택도 포함.[2] 이 발언은 당시 한국에서 종종 나오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 여론에 대한 맞대응이기도 했다.[3]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원문 '제2장 영토' 부분 참조.[4] 사실 현실적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해도, 거기서 영구적으로 생활하려면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5] 이를 이른바 화양절충(和洋折衷)이라고 한다.[6] 안방만 다다미이고 자녀들이 쓰는 방은 마루나 카페트가 깔려있는 식이다. 이 형태는 현대에도 단독주택과 고층 아파트(만숀)을 막론하고 일본 주택 인테리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7] 사실 1970년대부터 대도시의 양옥 단독주택은 '문화주택'이 아닌 '불란서 주택'으로 불렀다.[8] 인천상륙작전(영화)를 보면 멸실과정에 자세히 나온다.[9] 중구 구청 건물 또한 일제강점기 인천부청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10]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의 공장이 있었다.[11] 현재의 주한미군 육군 기지 자리에 과거 일본 육군 기지가 위치했으며, 남영이라는 지명이 여기서부터 유래되었다.[12] 삼덕동 일대도 모두 일본인 거주구역이라 일식 주택이 상당히 분포한 곳이었지만, 해방 이후 수십년의 시간이 지나며 현재는 극소수만 남았다.[13] 건물 자체는 남아있으나, 현재는 카페로 변경되었다.[14] 포목상이 아니고 미곡상이었으며 히로쓰 기치사부로가 맞다는 연구가 있다.#[15] 인천개항장 문화재 야행 행사를 매년 개최한다.[16] 군산문화재야행 행사를 매년 개최한다.[17] 담양읍 담주4길 인근으로 2022년 인근 거리를 정비하였고 예술가 입주를 모집했다.[18] 목포문화재야행 행사를 매년 개최한다.[19] 큐쿄류치·다이마루마에역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