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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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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
김창숙
金昌淑 | Kim Chang-suk
파일:external/www.newscj.com/94924_74310_5237.jpg
<colcolor=#fff><colbgcolor=#2e4e3f> 출생 1879년 7월 10일
경상도 성주목 사천방 사월곡
(現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1][2]#
사망 1962년 5월 10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3]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4[4]
부모 아버지 김호림(金頀林)[5]
어머니 인동 장씨
본관 의성 김씨
심산(心山)·직강(直岡)·벽옹(躄翁)
문좌(文佐)
종교 유교 (성리학)
약력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정치학과 특임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부의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의회 국무위원
명륜전문학교 교장
성균관대학 학장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
미군정청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6] 수훈
파일:김창숙 성균관.jpg
공식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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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독립운동2.2. 광복 후
3. 기타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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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민주운동가, 유학자, 교육인, 정치인.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을 지냈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직강(直岡)·벽옹(躄翁)이다. 1879년 경상도 성주목 사천방 사월곡(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마을)에서 태어났다.

한국 역사에서 사실상 마지막 유림 계열 지도자라 할 수 있다. 김창숙을 마지막으로 유림은 더 이상 단일하고 가시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한다.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1공, 2공, 군사정권까지 격변하는 근현대사를 살아왔으며 광복 전에는 독립운동에, 미군정기에는 유림의 후예인 성균관의 재건과 독립된 모국의 안정적인 수립에 힘썼고,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민주화 투쟁에 몸을 던진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2. 생애

2.1. 독립운동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 대표들이 한국 독립의 호소에 서명한 유림단 진정서를 휴대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 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의 파벌 다툼을 조정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쑨원을 비롯, 이문치(李文治)·임복성(林福成) 등 중국국민당의 여러 인사들과도 접촉하면서 '한국 독립 후원회', '중한 호조회'(中韓互助會)의 조직, 결성에도 기여하였다. 망명한 한국인 청소년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고,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외국어 교육을 받도록 후원하였다.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여,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창간, 신채호와 협력해 독립운동 기관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기도 했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국제연맹에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자,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을 성토하는 활동을 했다. 신채호·신성모 등은 이승만을 성토했고, 김창숙은 그들의 이승만 성토에 지지를 보냈다. 1921년 4월 19일, 이승만을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 지은 성토문에는 신채호, 김원봉, 이극로, 오성륜, 장건상 등 54명이 서명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1925년), 서로군정서의 군사 선전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1925년 8월 독립운동 기지의 개간 자금 마련을 위해 김화식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모금 활동을 펼쳤으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의 모금 운동으로 600여 명의 유림이 투옥되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이동녕, 김구 등과 협의해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 일제의 통치 기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열단나석주1926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한 사건이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됐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김창숙은 입을 열기를 거절하며 시 한 수를 지었는데, 한시를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 형사조선인에게 한시를 해석해줄 것을 부탁했고, 한시의 뜻을 해석한 형사는 머리를 조아리며 고문형을 완화시켜 주었다.# 법정 예심이 끝나자 일본인 판사는 그가 수감된 감옥에 직접 찾아와 개인적으로 면담 및 시국의 논의를 부탁했으나 거절하였다.

끌려온 지 1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가족과 면회가 허락되었고, 이때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자청하고 나섰는데 김창숙은 자신은 포로이며, 일본법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변호사를 쓸 수 없다고 거절했다. 무기징역이 구형되었고, 징역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앉은뱅이가 되었고, 이로 인해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이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40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3년에는 아들 김찬기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찬기는 곧 병으로 사망한다.

1945년에는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 발각되어 1945년 8월 왜관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던 중 광복을 맞았다.

2.2. 광복 후

8.15 광복 후, 초창기 박헌영조선공산당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으며, 민족주의 계열에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1945년 12월, 반탁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친일파 세력이 날뛴다고 봤는지 바로 비난 성명서를 내어 의원직을 거부했다.

성균관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학원으로 격하되고 그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된다. 이후 명륜전문학원으로 되었다가 1939년 명륜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민족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폐교된다.

1945년 광복 후 부활하고[7], 마침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8] 같은 해 11월 김창숙의 주도로 전국 유림 대회가 열렸고 전국에서 천여 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다.[9]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국 향교로부터 재산을 갹출 받았고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냈다.[10] 그리고 학봉 이석구가 재단 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 재산을 희사하였다. 초대 학장으로 김창숙이 취임하였다. 당시에는 성균관대학장과 성균관장이 겸임이었다.

지금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자연과학캠퍼스에는 각각 심산 김창숙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888000_STD.jpg
국제구락부 사건 - 1952년 6월 이승만의 개헌안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체포되는 심산 김창숙.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머리에 피가 심하게 났다.

6.25 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부산 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전 부통령, 김성수 전 부통령, 조병옥 전 내무부장관 등과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을 발표하였고, 1959년 국가보안법 개악 당시 망국의 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했었다. 이러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 행보로 인해, 독재 비호 세력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생기면서 회장에 선출된 것을 비롯해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회장,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직도 맡았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해방 후 생존한 독립운동가 중에선 유일하게 김창숙만 받았다. 사족으로 김창숙은 박정희쿠데타군에 대해서도 당연히 좋지 않게 여겼고, 1962년 2월 27일 경향신문 기사 "혁명 정부하선 상 받을 터"라는 기사에서도 당시 정부를 비판했지만,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해서는 그래도 일단 감사의 뜻(謝意)을 표했다.

이후 몇달 안가 병세가 깊어져 입원하였으며, 1962년 5월 5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투병 중인 김창숙의 병상을 방문하기도 했다.

파일:28361.jpg
이 사진을 가리켜 김창숙이 박정희를 외면한 모습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며, 김창숙 관련 추모 단체에서도 대체로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다만 노컷뉴스 기사에 따르면, 당시 김창숙은 사경을 해매던 상태였기에 박정희를 알아보지 못했을거라고 추정했다. 또 정신이 온전했다면 애초에 문병을 거절했을거라고 추정했다.

어찌됐든 김창숙은 해당 병문안 5일 뒤인 1962년 5월 10일, 폐질환과 동맥경화의 합병증으로 별세한다. 그가 의식이 남아있던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종의 유언은 "통일이 안 돼서...", "유림들이 잘해 나가야..."였다고 한다.

파일:25928.jpg
김창숙이 타계하고 하루 뒤인 11일, 박정희도 그의 빈소를 방문했다.

장례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어 수유동에 안장되었다. 이후 수유동에 자리한 그의 묘소는 2012년 10월 19일국가등록문화재 518호지정되었다.

3. 기타

파일:external/kdh.skku.edu/watermark_P1010213.jpg
성균관대학교 중앙학술정보관 앞에 세워진 김창숙의 동상.
단정하고 정적인 다른 유학자들의 동상과는 달리,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조각된 것이 특색.[11]
당구를 치는 듯한 포즈 때문에, 일부 학생들은 해당 동상을 맛세이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창숙 항일 독립 운동의 애국애족 정신과 유학적 선비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심산 기념 문화 센터' 가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하고 있다.[12]# 심산기념관과 기념사업회도 같은 장소에 있다.#

고향인 성주군에는 김창숙의 생가와 그를 기리기 위한 심산기념관이 있다. 다만 보통은 잠겨있는 경우가 많고 전시된 물건도 많이 적다. 생가 근처에 심산문화테마파크 조성을 추진 중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경력 때문인지, 유언 중에 성균관에서는 일본어를 가르치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성균관대학교에는 일어일문학과가 개설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연계전공 중에 일본학 전공이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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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지인 504번지에 심산 김창숙 생가가 남아 있다.[2] 의성 김씨 집성촌이다. 한강 정구도 칠봉리 출신이다.[3]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45 (을지로6가)[4] 국립4.19민주묘지 인근이다.[5] 본래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내성현 해저리(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바래미마을)의 의성 김씨 집성촌에서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의 12대손,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가 23세 되던 1864년 김창숙의 조부인 김도영(金道永)에게 입양되었다. 김도영은 개암 김우굉의 동생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후손이다.#[6] 구 건국공로훈장 중장[7] 군정법령 제6호 참조.[8] 군정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9] 출처: 자유신문 1945년 12월 10일자 "성균관대학 재단을 촉성, 1000여 대표 참가로 전국유림대회"(원본)[10] 미군정법령 제194호 6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향교 재단의 재산으로부터 생하는 수입은 좌의 목적 이외에는 사용함을 부득함. 1. 성균관급 성균관대학의 유지"[11] 반면 수원캠퍼스의 삼성학술정보관 앞에 세워진 김창숙의 동상은 지팡이를 짚고 비교적 평범하게 서 있다.[12] 세화 3개교와 반포종합운동장, 서래마을 근처에 위치해 있다.